홍성익 / 洪成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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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대사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1883-1920년. 독립운동가.
평안북도 정주 출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으로 활동하다가 옥중에서 순국한 애국지사이다. 1902년에 평양 숭실중학교를 거쳐 1907년에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신민회(新民會)에 가입,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하였다. 1910년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사건인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곤욕을 치렀다. 출옥 후 선천의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교사로 재직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때에는 이승훈(李昇薰)의 지도로 동료교원 김지웅(金志雄)·양준명(梁濬明), 목사 김석창(金錫昌) 등과 선천 지역의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당시 성경 과목을 맡았던 그는 1919년 3월 1일 성경 시간에 혈서로 ‘대한독립만세’를 쓰고 독립만세를 부름으로써 만세시위의 불을 당겼다. 그뒤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의 지시 아래 오동진(吳東振)·김승만(金承萬) 등과 함께 남만주 안동현(安東縣)에서 조국독립을 목적한 안동임시의사회(安東臨時義士會)를 조직하였다. 그뒤 상해임시정부의 교통국(交通局) 안동지부 사무국장에 임명되어 이륭양행(怡隆洋行)을 거점으로 통신연락사무에 주력하였는데, 도중에 병을 얻어 병원에 입원한 사이에 밀정인 김극전(金克田)의 밀고로 1920년 1월에 일본경찰에 붙잡혀 신의주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