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성 / 金鳳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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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칭별칭
김봉성 / 金鳳成
· 분야 : 역사/근대사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1901-1945.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다른 이름은 김봉성(金鳳成)이다. 본적은 평안남도 강서(江西)이고, 독립운동 당시 주소는 경성부(京城府: 현 서울) 동대문구(東大門區) 신설동(新設洞)이다. 민족대표 이승훈(李昇薰)이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을 펼칠 때, 신성학교(信聖學校) 성경교사 홍성익(洪盛益)에게 학생들도 동참시킬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홍성익은 같은 학교 교사 김지웅(金志雄)과 함께 만세운동을 추진할 것을 약속하였고, 김지웅은 신성학교 4학년생들인 고병간(高秉幹)·박찬빈(朴贊彬)·장일현(張日炫) 등에게 도쿄 유학생들이 배포한 2·8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게하고 태극기를 만들게 시켰는데, 김봉성(金鳳性)도 이 일에 참여하였다.
만세운동 약속 날짜인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학교 종소리에 맞춰, 신성학교 학생들과 동맹을 맺은 보성여학교(保聖女學校) 학생들은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 선천읍(宣川邑) 천남동(川南洞) 장터로 몰려가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눠 주었다. 당시 시위에 동참한 1천 명의 사람들이 군청·경찰서 등을 찾아다니며 만세운동을 벌이자 선천수비대와 경찰은 총으로 위협하며 군중들을 해산시켰다.
이때 주동자로 체포되어 1919년 6월 3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고등법원에 상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본으로 건너가서 1922년 쥬오대학[中央大學] 전문부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1927년 남캘리포니아대학 경제학과에서 공부하였으며, 1930년에는 흥사단에서 활동하였다.
2005년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