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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조선
유금강산기 / 遊金剛山記 [문학/한문학]
조선 중기에 이형윤(李炯胤)이 지은 금강산 기행문. 그의 문집인 『창주집 滄洲集』에 수록되어 있다. 「유금강산기」는 종실(宗室) 문인인 저자가 1615년(광해군 7) 7월 27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금강산을 유람하고 8월 26일에 돌아와 기록한 글이다. 이형윤은 서울의
유기 / 有璣 [종교·철학/불교]
1707년(숙종 33)∼1785년(정조 9). 승려. 9세 때 속리산에 들어가 독서를 하다가 16세에 출가하였다. 28세에 가야산 해인사의 의눌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낙암에게서 화엄학을 배워 화엄에 통달하였다. 31세에 학승들을 가르쳤으며, 15년 동안 해인사에서 후학들
유기창 / 兪起昌 [종교·철학/유학]
1437(세종 19)∼1514(중종 9). 조선 중기의 무신. 아버지는 해이다. 무과에 급제한 뒤 1496년(연산군 2) 만포진첨절제사가 되고 뒤에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석방되어 병조참지에 임명되었으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하여
유기환 / 兪箕煥 [정치·법제/외교]
조선 후기의 문신(?∼?). 1881년(고종 18)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을 시찰하였다. 1898년 군부대신서리로 개화세력을 탄압하였다. 1902년 7월 조선전권대신으로 한정수호통상조약 및 부속 통상장정을 조인하였다. 그 후 김옥균(金玉均)을 암살한 홍종우(洪鍾宇)를 중
유담년 / 柳聃年 [종교·철학/유학]
?∼1526(중종 21). 조선 중기의 무신. 증조가 관이다. 어릴 때부터 무예에 뛰어났으며, 약관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평안도병마절도사, 공조판서, 병조판서,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유당 / 柳戇 [종교·철학/유학]
조선 후기의 문신(1723∼1794). 1756년 지평으로, 박세채 문묘 배향을 반대하다가 삭직당하고 이후 1780년에 이명제에게 홍국영·송덕상의 일파라는 무고를 받아 파직되었다. 1788년에 특지로 동지중추부사에 복직되고 이어 형조참판·공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유대관령망친정 / 踰大關嶺望親庭 [문학/한문학]
조선 중기에 신사임당(申師任堂)이 지은 한시. 칠언절구로 『대동시선(大東詩選)』 권12 등에 수록되어 있다. 작자가 출가한 뒤에 친정인 강릉에 왔다가 다시 대관령을 넘어가며 어머니를 두고가는 심정을 그린 시이다. 1·2구에는 흰머리의 어머니를 임영(臨瀛)에 두고 자신은
유대원 / 柳大源 [종교·철학/유학]
1834년(순조 34)∼1903년. 조선 말기의 학자. 아버지는 진대, 어머니는 홍현원의 딸이다. 기정진과 임헌회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당시 위정자와 집권관료층의 무능, 부패를 비판하는 한편, 스스로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그 기틀의 초석인 유교적 전통의 수호와 확립을
유대춘 / 柳帶春 [종교·철학/유학]
1603(선조 36)∼1691(숙종 17). 조선 후기의 학자. 아버지는 언. 성혼·이이의 문인이다. 1642년(인조 20)에 문음으로 예빈시봉사에 임명되었으나 입사하지 않았다. 그는 경서에 정통하고 문장이 능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사후에 국가에서 정문을
유덕장 / 柳德章 [종교·철학/유학]
조선 후기의 묵죽화가(1675∼1756).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이정의 묵죽화풍을 이어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정·신위와 함께 조선의 3대 묵죽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유작으로〈설죽〉·〈설죽도〉·〈황강노절〉과 팔폭병풍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