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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근대
조선어학회사건 / 朝鮮語學會事件 [역사/근대사]
1942년 10월부터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 및 관련 인물을 검거해 재판에 회부한 사건. 조선어학회는 1942년 4월 일부를 대동출판사에 넘겨 사전을 인쇄하였다. 그러던 중 정태진이 일제에 연행, 취조되어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단체로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억지 자백을
조선여자체육장려회 / 朝鮮女子體育奬勵會 [예술·체육/체육]
1930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체육단체. 김인순(金仁順) 등 50여 명이 발기하여 1930년 5월 20일 관훈동에 있는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초대 회장에는 조동식(趙東植)이 취임하였다.당시의 취지문을 통하여 창립 목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장
조선여지일통 / 朝鮮輿地一統 [언론·출판/출판]
사부(史部) - 지리류(地理類) 강덕오(姜德五)편, 신연활자본, 한양서원, 1931, 2권 1책. 발문은 최영년(崔永年)이 썼다. 마지막 장은 낙장이다. 제첨지가 훼손되어 있다.
조선연극문화협회 / 朝鮮演劇文化協會 [예술·체육/연극]
일제 말 예능의 일원화를 기하고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서 조선연극협회와 조선연예협회를 통합 발족시킨 단체. 1942년 7월 26일 발족한 이 단체의 회장에는 신도요, 이사에 서항석 외 몇 명, 상임평의원에 유치진 외 몇 명이 임명되었다. 1944년 4월 '연극 연예 흥행
조선연극사 / 朝鮮演劇史 [예술·체육/연극]
조선어문학회의 조선어문학총서 31집으로 1933년 5월에 총 230면으로 간행된 노정 김재철의 유저. 김태준의 서, 목차, 본문, 경론, 부록의 순으로 되어 있다. <조선연극사>는 연극학 제1세대의 결정으로서, 수백년동안 전해 내려오던 한국 연극의 윤곽을 잡아놓았고 그
조선연극사 / 朝鮮演劇舍 [예술·체육/연극]
취성좌가 해체되고 그 후신으로 1929년 12월 창단한 극단. 지두한을 중심으로 이경환, 강홍식, 천한수, 권일청 등 당시 대중연극의 스타급인 30여 명의 단원과, 밴드부 30여 명, 그리고 연구생까지 합쳐 90여 명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상업극단이었다. 1933년에 전
조선연극협회 / 朝鮮演劇協會 [예술·체육/연극]
1936년 8월 오정민, 박학, 이화삼 등 동경유학생들과 극예술연구회의 조직적 모순에 불만을 품고 극연실천부를 탈퇴한 사람들이 모여 신극운동의 보다 순수한 목표를 실현코자 만든 단체. 1936년 10월 부민관에서 몰리에르의 <수전노>를 가지고 창립공연을 가졌는데, 오정
조선열성태봉략기 / 朝鮮列聖胎封略記 [정치·법제]
<조선국가제향처략기>와 하나로 묶여 있던 문서. 조선시대 국왕의 태실 위치 및 강원도에 지정한 봉산 지명을 수록하였다. 수록 대상은 태조부터 장조까지 국왕 18인과 소혜왕후이다. 1906년 1월 30일 이후에 작성된 문서이다.
조선영화 / 朝鮮映畵 [예술·체육/영화]
북한의 영화분야 잡지. 조선영화인동맹 중앙위원회의 기관지로서 1957년 7월에 창간되었다. 크기는 B5배판, 분량은 초기에는 50면, 1970년대에는 120면 내외였으나 현재는 80면이며 문학예술종합출판사에서 발행하고 있다. 내용은 대부분 평론과 새로 제작된 영화해설
조선영화감독구락부 / 朝鮮映畵監督俱樂部 [예술·체육/영화]
일제 말기 조선영화통제회사 시대에 한국인 영화감독만이 모여서 결성한 단순한 친목단체. 1943년 말에 발족하여 광복과 더불어 해산되었다. 이병일, 최인규, 신경균, 박기채, 이필우, 이명우 등이 참여하였다. 해산 후 영화재건에 대한 업무는 대한영화협의회로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