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순흠 / 高順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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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칭별칭
자유 / 自由
죽암 / 竹巖
· 분야 : 역사/근대사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1893-1977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아나키스트·서예가.
자는 자유(自由), 호는 죽암(竹巖)이다. 본관은 제주(濟州)이며, 출신지는 제주도 조천읍(朝天邑) 조천리(朝天里)이다. 아버지는 제주도 성균관교수(成均館敎授) 고성겸(高性謙)이며, 월북한 공산주의 독립운동가 고경흠(高景欽)의 8촌 형이다.
1912년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한 뒤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비밀단체인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김규열(金圭烈: 1893∼1968), 황종화(黃鍾和: 1878∼1950) 등과 함께 여러 장의 독립운동 포고문과 격문을 받아 국내에 배포하였다. 1920년 4월에 조직된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운동단체 조선노동공제회 발기인으로서 선언문과 강령 및 헌장의 초안을 양제박(梁濟博)과 함께 담당하였으며, 이후 서무책임자를 역임하였다. 1921년 제주흥학회 주최한 강연에 연사로 참석하고, 이듬해인 1922년 체포돼 2주간 구금되었다.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무정부주의에 입각하여 조선무산자 사회연맹을 결성하였다. 또한 천왕사(天王寺) 공회당에서 ‘조선언론집회탄압대회’를 열었으며, 오사카에선 조선인 여공보호연맹을 조직하여 여공들의 처우 개선 및 분쟁 해결을 도모하였다. 1928년 운임료를 과다하게 올린 일본 기선회사의 횡포에 대항하여 제주항해조합과 기업동맹 기선부를 설립하고 제주와 오사카 간 독립항로인 순길환(順吉丸)을 취항시켰다. 이후 무정부주의가 퇴조함에 따라 신진회(新進會)를 조직하여 사상운동을 전개하고, 1937년엔 조선서도연구회를 조직하여 추사체(秋史體)와 창암체(倉嵒體)를 비롯한 우리 서체 보급에 힘썼다. 1946년 재일한국거류민단 결선준비위원장으로 피선되어, 총본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63년 영구 귀국하여 제주와 부산에서 작품전시회를 열었으며 목우(木牛) 김문준(金文準: 1894∼1936), 해강(海岡) 김운배(金沄培: 1899∼1934) 등 항일운동가들의 묘표와 비문을 썼다. 1977년 서울에서 별세하여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63년 독립유공 대통령표창을 전수하고,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