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선 / 高守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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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칭별칭
우인 / 又忍
· 분야 : 역사/근대사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1898-1989.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의사, 현대 여성운동가·사회사업가.
호는 우인(又忍)이다. 본관은 제주(濟州)이며, 출신지는 제주도 대정읍(大靜邑) 가파도(加波島)이다. 아버지는 호적에는 고석조(高錫祚)라고 하나 고영조(高永祚)로도 불리었으며 솥, 농기구 등의 판매업에 종사하였다. 어머니는 오승은(吳承摁)의 딸 오영원(吳永元)으로 고석조의 후처이다. 대정군수 김종하(金鍾河)가 1908년에 세운 한일사립학교(私立漢一學校: 1911년 대정공립보통학교로 개칭)를 졸업하였다. 1910년(융희 4) 경술국치 이듬해 신성여학교(晨星女學校)에 편입하여 1914년 졸업하였다. 1916년에는 권업 모범장 여자 잠업 강습소 1년 과정을 6기로 졸업하였으며, 같은 해 4월 경성관립여자고등보통학교(京城官立女子高等普通學校) 2학년으로 편입하였으며, 1919년 졸업 후 학교에 부설된 사범과에 들어갔다. 이 해 고종 황제가 승하하자 광장에 나아가 군중들과 함께 곡(哭)하였으며, 평소에도 항일 성향이 강했던 그는 이 일로 인하여 불온한 학생으로 학교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시기 그는 박희도(朴熙道: 1889∼1951)의 지도 아래 학교 내에서 은밀하게 3·1 독립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시위에 적극 가담하였다. 1919년 충남 논산군 논산공립초등학교 교사로 1년 남짓을 있었으며, 이때 박정식의 부탁으로 독립군 자금 370원을 모금하여 상해(上海) 임시정부로 보냈다. 이로 인해 일본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상해로 망명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장두철의 주선으로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요시오까의학전문학교에서 의학공부를 하였다. 1922년 3월 귀국 직후 고수선은 곧바로 조선인 형사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3월 5일 만세시위를 모의하였다는 혐의 아래 손가락 사이를 연필로 비트는 고문을 받았으나 모두 이겨내고 석방되었다. 같은 해 4월 15일 다시 서울로 돌아와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전입하였으며, 1926년 의사면허증을 취득하고 졸업하였다. 이후 제주도로 돌아와서 제주여자청년회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이 되었다. 1927년 제주시 삼도리에서 개업의로 있던 김태민(金泰玟)과 결혼하였는데, 당시 김태민은 3남 1녀를 둔 상처한 홀아비였다. 1943년 일본이 제주도를 보루로 하여 배수진을 치자, 그는 1944년 의원을 정리하고 가족들과 함께 충청남도 강경(江景)으로 피난을 갔다. 그는 강경에서 다시 의원을 열었으며, 1945년 발기하여 임영신(任永信)이 위원장이 된 대한여자국민당 논산지구당 위원장을 하였다. 1·4후퇴 이후 귀향을 결심하고 제주로 돌아와 건국운동, 여성운동, 사회운동에 전념하였다. 여권 신장을 기치로 걸고 도의원 ・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으며, 이후 자유당 제주지부 부위원장과 민주공화당 제주지부 부위원장, 대한(한국)부인회 제주지부장, 대한노인회 제주도연합회장 등을 지냈다. 정치 참여에서 그의 가장 큰 목표는 여성 계몽 운동 및 여성의 권익과 지위 향상이었다. 또한 사회사업의 일환으로 모자원과 홍익보육원 등을 만들었으며, 평소 예술을 높이 평가하던 남편 김태민의 뜻을 이어 인당민속무용예술단을 창립하고 국악협회 제주도지부를 다시 발족시키는 등 문화 예술 사업에도 활발하게 참여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제 1회 만덕봉사상을 받았고, 1978년 용신봉사상을 받았으며, 1980년에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