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찬 / 安秉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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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대사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1854-1921. 독립운동가. 본관은 순흥(順興). 평안북도 의주 출생.
1905년 을사조약 체결시 법부(法部) 주사로 을사오적을 죽일 것과 나라를 바로잡을 것을 국왕에게 상소하였으나 오히려 경찰에 구속되었다. 1909년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의 중심인물 이용구(李容九)와 송병준(宋秉畯) 등을 대역미수(大逆未遂) 국권괴손죄(國權壞損罪)로 경성지방재판소에 고소하였다. 같은해 10월 26일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의거가 있자 변호사자격으로 변호를 담당하기 위하여 여순(旅順) 법정으로 갔다.
그러나 일제는 관선변호인만 인정하고 그의 변호는 인정하지 않았다. 같은해 12월 22일 이재명(李在明)이 이완용(李完用)을 자상(刺傷)하고 일제에 붙잡혀 1910년 4월 13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게 되자 이면우(李冕宇)와 함께 변호를 담당하였다.
1911년 9월 이른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음모사건의 혐의로 붙잡혀 고통을 당하였다.
1915년 10월부터는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변호사업을 개업하였으며,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만주로 망명하였다. 같은 해 4월 안동현(安東縣)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고 총재에 추대되어 활동하다가, 같은해 8월 안동현에서 붙잡혀 1년6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그뒤 옥고를 치르던 중 병보석으로 가출소하게 되자 즉시 탈출하여, 1920년 남만주의 관전현(寬甸縣)에서 조직된 대한청년단연합회의 총재로 추대되었다. 같은해 4월 2일 상해임시정부로부터 평안북도 독판부(督辦府)의 독판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같은해 5월에 붙잡혔으나 관전현 지사(知事)의 호의로 석방되자 상해로 가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같은해 9월 임시정부의 법무차장과 법률기초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21년 공산주의로 전향하여 그해 봄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된 공산당 대표회의에 상해대표로 참석하였으며, 고려공산당 조직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해 여름 상해로 돌아온 그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해지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그뒤에도 계속 이르쿠츠크파를 위하여 활동하다가 같은해 모스크바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반대파인 상해파에게 암살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마적에 의하여 암살되었다고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