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 / 崔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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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대사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1882-1918.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본적은 경상남도 의령군(宜寧郡) 용덕면(龍德面)이다. 1907년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경제학전문과(經濟學專門科)를 졸업하였다. 1908년(융희 2) 영남지방의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박정동(朴晶東)·이하영(李夏榮) 등 경상도 인사들이 조직한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에 참여하였다. 교남교육회는 이때 29명의 평의원(評議員)을 두었는데, 박정동·이각종(李覺鍾) 등과 함께 평의원에 선출되었다. 1910년(융희 4) 3월까지 탁지부주사(度支部主事)로 근무하던 중 러시아로 망명한 뒤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고, 한일합방 무효를 주장한 성명회(聲明會) 선언서에 서명하였다. 1911년 이갑(李甲, 1877∼1917)을 보좌하여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에서 주최한 시베리아지방총회에 참여하였으며, 미주에서 발행하던 《신한민보(新韓民報)》를 성페테르스부르크를 중심으로 한 원동(遠東) 일대에 배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13년 3월 26일 국민회가 주최한 시베리아지방총회 대의회(代議會)에서 대표원(代表員)에 선출되었는데, 이때 이강(李剛)·김탁(金鐸) 등과 함께 총회의 자치규정(自治規程)을 기초하는 등 러시아 지도급 인사로서 활동하였다.
국민회에서 유능한 젊은이로 간택되어 유학 보낼 예정이었으나 병으로 인해 고향으로 돌아가 요양하던 중 서거하였다. 1994년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