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화 / 林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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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칭별칭
인식 / 仁植
성아 / 星兒
김철우 / 金鐵友
쌍수대인 / 雙樹臺人
청로 / 靑爐
· 분야 : 문학/현대문학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1908-1953년. 시인. 평론가. 본명은 인식(仁植).
문필활동을 시작하였던 1926년에는 성아(星兒)라는 필명을, 1928년부터는 임화·김철우(金鐵友)·쌍수대인(雙樹臺人)·청로(靑爐) 등의 필명을 썼다. 1908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1953년 8월 북한정권의 최고재판소에서 ‘미제간첩’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하였다. 1921년에 보성중학에 입학하였다가 1925년에 중퇴하였고, 1926년부터 시와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하였으며 영화와 연극에도 뛰어들었다.
시 〈지구와 빡테리아〉·〈담(曇) -일구이칠(一九二七)〉 등이 잘 일러주고 있는 것처럼 이 무렵 그는 다다이즘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으며, 바로 이러한 전위사조(前衛思潮)에 대한 모방욕이 무산계급문학운동에의 열정과 의지를 낳은 것이라 할 수 있다. 1928년에 박영희(朴英熙)와 만났으며 윤기정(尹基鼎)과 가까이 하면서 카프(KAPF)에 가담하였고, 1929년에는 〈우리 옵바와 화로〉·〈네거리의 순이(順伊)〉 등의 시를 써냄으로써 일약 대표적인 프로 시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1930년에 일본으로 가서 이북만(李北滿) 중심의 ‘무산자’그룹에서 활동하였고, 1931년에 귀국하여 1932년에는 카프서기장이 되었다. 카프전주사건이 터진 그 이듬해인 1935년에 카프해산계를 낸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의 임화의 삶은 폐결핵, 시집 《현해탄 玄海灘》, 〈조선신문학사〉 서술, 출판사 ‘학예사’ 운영, 일제 신체제문화운동에의 협조 등으로 점철되었다. 해방 이틀 후에 ‘문학건설본부’의 간판을 내걸어 좌익문인들을 규합하였고, 1946년 2월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결성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1947년 11월에 월북하기 전까지는 박헌영(朴憲永)·이강국(李康國)노선의 민전의 기획차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월북 후에는 6·25까지 조·소문화협회 중앙위 부위원장으로 일하였다. 6·25 때는 다시 서울에 왔다가 그뒤 낙동강 전선에 종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휴전 직후 1953년 8월에 남로당 중심인물들과 함께 북한정권의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의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의 옆에는 이원조(李源朝)·설정식(薛貞植) 등의 문인도 있었다. 19세부터 시·평론을 발표하였던 임화가 남긴 시집으로는 《현해탄》(1938)·《찬가 讚歌》(1947)·《회상시집 回想詩集》(1947)·《너 어느 곳에 있느냐》(1951) 등이 있고, 평론집으로는 《문학의 논리》(1940)가 있으며, 편저로는 《현대조선시인선집》(1939)이 있다. 생전에 80편에 가까운 시와 200편이 넘는 평론을 쓴 것으로 집계되고 있으며, 한국현대시사와 비평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1920∼1930년대의 프로문학과 해방 직후의 좌익문학을 논할 때 필수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존재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진보적 문학운동사 또는 문학단체사 등으로서의 한국현대문학사에 있어서는 핵심적인 인물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