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붕준 / 金朋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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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칭별칭

기원 / 起元
당헌 / 棠軒
· 분야 : 역사/근대사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1888년∼1950년.독립운동가.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기원(起元), 호는 당헌(棠軒). 평안남도 용강(龍岡) 출생. 1907년 안정근(安定根)과 함께 상경하여 신민회(新民會)에 몸담고,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에 가입하여 청년운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 승동교회(勝洞敎會)에서 목사 한석진(韓錫晋) 등과 승동학교를 경영하는 한편,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3·1운동 때 민족운동에 관여하다가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였다. 이듬해인 1920년 임시정부 군무부원 및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의원과 비서장을 역임하였다. 1921년 안창호(安昌浩)와 흥사단(興士團) 원동위원부(遠東委員部)를 창설하였으며, 1924년 상해 법정대학을 마쳤다. 1928년 상해 대한인교민회 제5대단장을 거쳐 1930년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경영을 맡아 《독립운동사》 편찬에 관여하는 한편, 상해 인성학교(仁成學校) 교장에 취임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가운데 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안창호·조완구(趙琬九)·차이석(車利錫) 등과 한국독립당 간부로 활약하였다. 1933년 중국 국민혁명군 상교(上校) 참의(參議)로 한중 양국의 항일전에 참전하였다. 1935년 한국국민당 간부로 활약하면서 1938년 흥사단 원동위원장을 거쳐 이듬해 임시정부 제15대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냈다. 1940년에는 한국독립단 위원으로 조소앙(趙素昻)·지청천(池靑天)·김학규(金學奎)·엄항섭(嚴恒燮)·유동열(柳東說) 등과 활약하였으며, 1943년부터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계속 활동하다가 8·15광복으로 11월 임시정부요인들과 환국했다. 1946년에는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를 발기하였고, 같은해 12월 7일 미군정 입법기관인 남조선과도정부 입법의원의 관선의원으로 김규식(金奎植)·여운형(呂運亨)·원세훈(元世勳)·최동오(崔東旿)·안재홍(安在鴻) 등과 6인합작의원에 선출되어 헌법·선거법 기초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좌우 합작위원회 우파 대표로 민족통일운동에 기여하는 한편, 신진당(新進黨)을 이해에 창당하였다. 1948년 민족자주연맹 상임위원 및 선전국장으로 남북협상에 관여하였고, 5·10선거에 서울특별시 성동구에서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50년 5·30선거에서도 성동 을구에서 입후보하였으나 차점으로 낙선되는 비운 속에서 6·25남침을 당하여 7월 27일 납북된 뒤, 그해 9월 28일 작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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