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 조선 총 10,287건의 주제어가 있습니다.
시대 : 조선
이수민 / 李壽民 [종교·철학/유학]
1651(효종 2)∼1724(영조 즉위년). 조선 후기의 무신. 지란 후손이다. 1676년(숙종 2) 무과급제하여 선전관이 되고, 훈련원 주부·도총부도사·경력, 고원군수·낙안군수·장흥부사가 되었다. 1721년(경종 1) 신임사화로 노론의 대신 김창집이 유배도중 통영을
이수봉 / 李壽鳳 [종교·철학/유학]
조선 후기의 문신(1710∼?). 후길 증손, 할아버지는 장, 아버지는 경익, 어머니는 남두수의 딸이다. 1757년 경상도의 민정을 살피기 위하여 안핵사, 같은해 역모사건이 일어난 제주도의 도민을 위무하기 위하여 제주위유어사가 되었다. 강계부사 재임 중 심폐를 지적하
이수연 / 李守淵 [종교·철학/유학]
1693(숙종 19)∼1748(영조 24). 조선 후기의 학자. 이황의 6세손, 실의 아들, 어머니는 의성김씨이다. 1723년(경종 3) 생원시에 합격하여 1727년(영조 3) 음보로 후릉참봉에 임명, 그 뒤 동몽교관을 지냈다. 1747년 익위사익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
이수인 / 李樹仁 [종교·철학/유학]
조선 후기의 학자(1739∼1822).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독서와 의리의 독행에 힘썼으며, 중년에〈자경설 〉과 잠 50여편을 지었다. 1796년 학행으로 선공감가감역에 임명되어 강연에서 시폐를 논하고 절용애민을 건의하였다. 순조 때 통정대부가 내려졌고 저서로는《
이수일 / 李秀逸 [종교·철학/유학]
조선 후기의 문신(1705∼1779). 급제 후 지평을 거쳐 14년 동안 장령과 헌납을 번갈아가며 역임하였다. 1762년 삼남지방에 흉년이 들자 장령으로서 제군문의 경비를 경감할 것 등 8조의 황정책을 진언하였다. 1771년 다시 헌납이 되고 이어 승지에 올랐다.
이수일 보령현감 해유문서 / 李秀逸 保寧縣監 解由文書 [정치·법제/법제·행정]
해유문서. 1766년(영조 42) 7월 18일 수충청도관찰사겸순찰사가 호조에 문서를 이관, 동년 12월 일에 호조에서 이조로 문서를 이관, 동년 12월 18일에 이조에서 이수일(李秀逸)에게 조흘하였다. 이수일은 산해(山海)의 7대손으로 성(宬)의 아들이다. 1764년(
이수일 황산겸임송라도찰방 해유문서 / 李秀逸 黃山兼任松羅道察訪 解由文書 [정치·법제/법제·행정]
해유문서. 1749년(영조 25) 7월 10일 후임관이 겸순찰사에게 첩정, 동년 7월 21일에 수경상도관찰사겸순찰사가 병조에 문서 이관, 동년 8월 일에 병조에서 이조로 문서 이관, 동년 8월 26일 이조에서 이수일(李秀逸)에게 조흘하였다. 이수일은 산해(山海)의 7대
이수장 / 李壽長 [종교·철학/유학]
1661(현종 2)∼1733(영조 9). 조선 후기의 서예가. 벼슬은 찰방을 지냈다. 숙종 때에 사자관이 되어 어제시 8장을 쓰고 종요·왕희지의 법첩을 임서하여 왕으로부터 절찬을 받았다. 글씨는 해서와 행서에 능했고, 중국 진대 왕희지의 필법을 익혀 이에 흡사한 글씨
이수정 / 李樹廷 [종교·철학/개신교]
조선 후기의 기독교인·성서번역자(1842∼1886).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를 보호한 공으로 일본에 시찰 가서 세례 받은 최초 한국인 개신교신자이다.《현토한한신약전서》 간행, 《신약마가젼복음셔》 등을 번역하여 한국 개신교 수용에 교량적 역할을 했다.
이수지 / 李秀墀 [종교·철학/유학]
1680-1715. 조선후기 유학자. 부친은 이중영, 모친은 이두징의 딸이다. 1680년 10월 3일 태어나 1715년 6월 3일 36세로 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