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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
강재천 / 姜在天 [역사/근대사]
항일기의 독립운동가(?-?). 호는 송석(松石). 1907년 한국군이 강제로 해산되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웠으나 전라남도 장성에서 패전한 후 산중에 은거하였다. 만주로 망명한 후에 대종교에 입교하여 참교·지교를 역임하였으며, 북로군정서에 가입하여 항일무장투쟁에
강제하 / 康濟河 [역사/근대사]
1891-미상.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출신지는 평안북도 창성(昌城)이다. 1919년 4월 1일 평안북도 창성군에서 신용철(申容澈)·강이달(姜利達)·선우명(鮮于明)·선우황(鮮于晃)·문창수(文昌洙)·한선학(韓善學) 등과 함께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대한독립청년단
강제희 / 姜濟羲 [역사/근대사]
1891-미상. 독립운동가. 평안북도 창성 출신. 1919년 3·1운동 때 향리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잡힌 일이 있으며, 그뒤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이동녕(李東寧)·안창호(安昌浩) 등과 연결되어 연통제(聯通制)의 국내책임을 맡아 국내
강진 / 康晋 [역사/근대사]
1912-1976. 일제 강점기 광복군. 본적은 평안북도 창성(昌城)이다. 1920년 중국 만주(滿洲)로 이주하였다. 1926년 정의부중집위(正義府中執委) 김활우(金活右)의 추천으로 흥경현립중학교(興京縣立中學校)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재학 중 양세봉(梁世奉)의 첩보
강진강재일사 / 康津剛齋日史 [역사/근대사]
1891년 7월부터 1903년 4월까지 박기현이 전라남도 강진의 향촌생활을 중심으로 작성한 일기. 전라남도 강진에 살았던 박기현이 1891년(고종 28) 7월부터 1903년 4월까지의 향촌생활을 기록한 일기이다. 박기현은 본관이 밀양으로, 강진 옴천에서 출생하여 병영과
강진건 / 姜鎭乾 [역사/근대사]
1885-1962.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사회주의운동가. 본적은 함경남도이다. 1909년(융희 3) 고향에 협성학교(協成學校) 분교를 설립하였다. 1910년(융희 4) 3월 만주(滿洲)로 망명을 떠나 토지개척사업과 민족교육운동에 힘썼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
강진송정리지석묘군 / 康津松汀里支石墓群 [역사/선사시대사]
전라남도 강진군 칠량면 송정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지석묘군. 탐진강의 지류 일대에 자리잡은 송정리 계동마을 앞 새밭들에 25기의 지석묘가 밀집되어 있는데 남방식과 개석식이 혼재하고 있으며 규모가 가장 큰 것은 400×360×150㎝에 달한다. 덮개돌이 큰 남방식지석묘를
강진영복리지석묘 / 康津永福里支石墓 [역사/선사시대사]
전라남도 강진군 칠량면 영복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고인돌들은 규모가 큰 것은 길이 4m, 너비 3.5m, 두께 1m 정도의 뚜껑돌을 가지고 그 아래는 둥근 굄돌 4, 5개로 괴었다. 이것은 대표적인 남방식 고인돌의 예로서 그 하부구조의 굄돌 안쪽에 상자모양의
강진원 / 姜振遠 [역사/근대사]
1881-1921. 의병장. 본관은 진주. 일명 진원(震遠). 자는 형원(亨遠), 호는 성산(聖山). 전라남도 승주 출신. 유년시절에 손오병서(孫吳兵書) 등을 탐독하면서 한문을 수학했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봉기한 의병진에 가담하였으나 전공을 세울만
강진지석리지석묘 / 康津支石里支石墓 [역사/선사시대사]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지석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모두 10여기가 분포되어 있으나 그 중 1기만 국립박물관에 의해 1967년에 발굴되었다. 이 고인돌은 원래 일본인 후지다(藤田亮策)에 의해 북방식 고인돌로, 그리고 위치도 해남군 옥천면 소재로 잘못 알려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