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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 대회 결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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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사업]한국학분야 토대연구지원
러시아문서보관소 소장 해방후 한국사회 관련 자료의 수집 번역 및 주해 (1945~1950)
서지사항
· 표제어노동당 대회 결과 보고
· 키워드남조선노동당, 3당 합당, 신민당, 인민당, 공산당, 박헌영, 치혼
· 대표주제어남조선노동당
· 설명문남조선노동당 결성 과정 및 11월 22~24일 개최된 노동당 창당대회에 관한 보고; 지도부 성원 명단 및 지방조직.
· 발신자박헌영
· 자료문의동국대학교팀(연구책임자:박명호 교수)

기타 자료


대표표제어: Доклад об итогах съезда Трудовой партии
산출물명: ЦАМО,ф.172,оп.614631,д.25,лл.30-84.
자료구분: 필사
저작권자: 러시아연방국방부중앙문서보관소
원자료언어: Трудовая партия Южной Кореи
면수: 55



번역문


노동당 대회 결과 보고

남조선노동당은 인민대중의 투쟁 이후 결성되었다. 신생 정당에서 자신들의 정책에 반대하고 나설 힘을 본 군정은 노동당 창당을 집요하게 방해하였다. 군정은 3당 합당을 좌절시키기 위해 탄압을 강화했고, 신생 정당을 공격하는 데 우익 반동세력을 동원하였다. 노동당 준비위원회는 미국과 우익세력의 탄압과 싸우는 한편, 3당 합당의 길에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 인민의 대대적인 대중투쟁을 조직하였다. 동시에 준비위원회는 3당 내부에 존재하던, 3당 합당을 공공연히 반대하던 기회주의자 및 자본가에 대해서도 투쟁을 전개하였다. 남쪽의 3당 합당 작업은 금년 7월 말부터, 그러니까 북에서 공산당과 신민당 통합 소식이 라디오로 방송된 7월부터 시작되었다. 8월 3일 인민당 중앙위원회는 공산당과 신민당 지도부에 통합을 제안했다. 공산당은 8월 4일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인민당의 제안을 논의한 후 긍정적인 답변을 주기로 결정했다. 이와 더불어 중앙위원회 회의에서는 중앙위원회 위원 6명(강진을 두목으로 하는 종파주의자 그룹)이 다른 당과의 통합에 반대하면서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당대회 소집을 요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신민당도 인민당의 제안에 동의한다고 답하고는 8월 6일 인민당 지도부에 보내는 답신에서 이를 천명하였다. 3당 합당일인 8월 8일 군정은 인민당 당수를 소환해 3당 합당을 거절할 것을 요구하면서 이 문제에 개입했다. 군정의 개입은 통합을 반대하던 3당 내 반대파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의견이 가장 분분했던 곳은 인민당으로, 인민당은 8월 16일 회의에서 찬성 48, 반대 31로 다수결에 의해 통합을 결의했다. 통합 반대 움직임은 그 이후 다른 당에서도 확대되었다. 공산당에서 이 움직임을 주도한 것은 강진 그룹이고, 신민당에서는 백남운과 그 지지자들이 이를 지휘했다.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반대파들을 지도부에서 축출하고 그 중 한명은 출당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미국과 자기 진영의 반대파들이 [판독불가]한 온갖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준비위원회는 합법적이건 불법적이건 이를 위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작업을 끈질기게 이어나갔다. 9월 1일과 [판독불가]일 회의에서 준비위원회는 신당의 이름을 정하고(‘노동당’) 신당의 강령‧규약안을 작성했다. 그러자 군정은 9월 6일 공산당 지도자(박헌영, 이주하, 이강국)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으며, 나중에는 신문들을 폐간시키고 그 지도자들을 체포하였다. 군정이 목표로 삼은 것은 좌익 진영을 괴멸시켜 3당 합당을 좌절시키는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군정은 좌우합작을 이루고자 노력했는데, 이를 바탕으로 입법기관을 창설[판독불가]. 미국의 탄압에 대한 응답으로 공산당과 그 외 좌익 정당들은 대중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만족시켜 것을 요구하며 인민의 대대적인 대중투쟁을 조직하였다. 9월 21일 부산에서 철도원들의 파업이 발발하였고, 24일에는 전국으로 확대되어 4만 명에 이르는 노동자가 파업에 참가했다. 1주일 사이에 파업은 모든 부문의 일꾼들을 망라했다.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는 총 [판독불가]만 명이었다. 학생들이 파업에 동조하였다. 농민들도 파업을 지지하였다. 동맹파업자들에 대한 군정의 탄압은 대중의 보복 투쟁을 야기하였고, 이것은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경찰이 파업 진압용 무기를 사용하자 인민 대중은 경찰기관들에 대한 무장 습격을 조직하는 것으로 맞섰다. 농민 대중도 운동에 동참했다. 대중투쟁을 조직함과 동시에 우리 당은 지방조직에서 기회주의 분자들과 패배주의 분자들을 제거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 결과 각 지방조직에 믿을 만한 지도부가 확보되었으며, 지방조직들과의 긴밀한 연락도 확립되었다. 더불어 3당 지방조직들의 통합 사업도 확대되었다. 8개 도, 서울, 그리고 각 군과 여러 도시에 노동당 지방조직들이 만들어졌다. 9월 6일부터 불법 신분이 된 노동당 당수 박헌영은 지하에서 3당 통합과 대중운동 조직화를 지도했다. 9월 말 평성을 방문한 인민당 당수 여운형은 자신이 북의 지도자와 만나서 한 약속들을 이행하지 않고 전처럼 기회주의적이고 타협적인 노선으로 일관했다. 이 점을 고려해 여운형의 신당 당수 발탁을 거부하고 대신 허헌으로 바꾸기로 결정되었다. 이를 위해 그는 우선 신민당 당수로 나서야 했다. 박의 지령에 따라 지하의 지도부는 합법적 대회 소집이 불가능할 경우 불법 대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해 놓은 상태였고, 이 대회는 10월 10일 개최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파업이 시작된 데다 연락도 두절돼 집회에는 지방 대의원들 일부만이 왔고, 이 때문에 불법 집회는 현재의 투쟁과 조직화 사업 문제를 논의하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때부터 지도부는 지방의 대중투쟁을 통해 통합당의 지방조직들을 인수하였다. 10월 10일 불법 집회에서는 노동당 [창당] 준비위원회가 신당의 지도기관(임시 중앙위원회)으로 나설 것이 결정되었다. 임시 중앙위원회는 대중운동에 대한 지도를 도맡았다. 준비위원회는 대중운동을 조직하고 탄압에 저항하도록 궐기시키면서 노동당 대회 소집을 허가받았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군정과 교섭을 진행한 허헌이 집회 조직에 대한 허가를 얻어낸 것이다. 집회는 11월 23, 24일 서울에서 열기로 결정되었다.

노동당 대회

11월 22일경 지방조직들의 대의원 전원이 서울에 도착했다. 집회에 있었던 대의원은 모두 585명이다. 이 대의원들은 통합하는 3개 당원 98,302명을 대표했다. 대의원은 3개 당에 다음과 같이 배당되었다. 공산당 395명, 인민당 140명, 신민당 50명. 대의원의 공식 성원은 다음과 같았다. 노동자 220명(38%), 농민 155명(26%), 인텔리 210명(36%). 공산당 대의원 가운데서는 노동자가 압도적이었고, 인민당과 신민당 대표들 가운데서는 인텔리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지역별 대의원 배당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서울 350명, 도 235명(경기도 150명, 전라북도 15명, 경기도 강원도의 오기로 보임-역주.
20명, 경상북도 10명, 경상남도 10명, 충청북도 10명, 충청남도 10명, 전라남도 10명). 대회에 서울 대의원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이유는 지방 대의원들은 당국의 탄압으로 인해 많이 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회에 대의원을 보낸 조직은 전라북도, 경상북도, 영등포(서울 근교 공업지역)로, 전에는 종파주의자들의 영향이 강했던 곳들이다. 이 조직들의 당대중은 종파주의자 및 그들의 노선을 거부하고 노동당 대회를 지지하였다. 대회에는 서울, 인천, 영등포, 용산, 대구, 부산 등 공업지역 노동자 대의원이 많았다. 또한 대회에는 파업과 경찰구역에 대한 무장 습격을 조직한 사람들이 체포를 무릅쓰고 참가하였다. 대구, 부산, 광주의 대의원은 모두 무장 습격을 조직한 자들로, 군정이 체포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모든 장애와 위험에도 불구하고 소집된 대회는 인민 대중의 관심을 끌었고, 이 관심은 당원들에게 굉장한 열의를 불러일으켰다.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으로부터 대회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민주청년동맹 회원 300명으로 이루어진 경호가 조직되었다.
대회의 관심은 노동당의 합법성 쟁취에 모아졌다. 이로 인해 대회에서는 정치 문제들에 대한 논의가 우선 순위에 오르지 못했다. 대회는 허헌을 의장으로 하여 개회되었다. 대회 간부회에는 허헌, 이승엽(공산당), 구재수(신민당), 유영준(민주여성동맹 위원장), 이기석(인민당), 최원택(공산당), 김광수(공산당)를 포함해 14명이 선출되었다. 3당 통합 보고서를 들고 연단으로 나온 사람은 인민당 대표 이기석이었다. 보고서는 대회에서 만장일치로 승인되었다. 대회는 노동당 중앙위원회와 감찰위원회를 구성하고 적절한 시기에 이것들을 공고하는 일을 맡을 특별위원회를 선출했다. 이 위원회 성원으로 허헌, 이승엽(공산당), 구재수(신민당), 이기석(인민당), 김영재(공산당) 이렇게 총 5명이 들어갔다. 그러고 나서 대회는 노동당 강령과 규약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노동당 준비위원회에서 작성한 정세 보고서는 신민당 대표가 들고 나왔다. 사업 첫째날 마지막에 대회는 여운형과 [판독불가]대리(직접 연단으로 나옴), 민주주의민족전선, 그리고 민족혁명당(당수 김원봉이 직접 연단으로 나옴)의 축사를 청취했다. 대회 첫날은 여기서 끝났다. 임의의 사태를 피하기 위해 지방 대의원들은 대회사업 첫날이 끝나자 대회를 떠났다. 둘쨋날인 11월 24일 대회는 계속해서 남조선사회노동당에 관한 북조선노동당의 결의와 남쪽 반동에 대한 평성의 당 열성분자 대회 결의를 포함한 축사를 청취했는데, 이 축사들은 대회 대의원들에게 굉장한 인상을 주었다.
대회는 소‧미공동위원회 대표단에 공동위원회를 하루 속히 열 것을 요청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결의는 소련과 미국의 대표단을 향한 것이었다. 또한 대회는 북조선노동당으로 보내는 축사도 채택했다. 대회는 〈노력인민〉이라는 이름을 갖게 될 노동당 신문 발행을 결정했다. 대회는 11월 24일 12시쯤 사업을 모두 끝냈다. 폐회를 하면서 대의원들은 “박헌영 동지 만세!”, “허헌 동지 만세”라는 구호를 외쳤다. 대의원들은 해방가를 부르며 대회장을 떠났다. 폐회 후 대의원들이 흩어지기 시작했을 때 테러리스트 2명이 대의원들에게 폭탄(미국산, 2개)을 던졌다. 폭탄의 폭발로 그 순간 산회하는 대의원들을 지켜보면서 무언가를 적고 있던 특파원 2명이 부상을 입었다.
노동당 대회는 당원들에게뿐만 아니라 대중에게도 진정한 축전이었다. 대회는 사상적 수준을 높이 고양시키며 진행되었다. 대회의 합법적 소집은 인민의 대중투쟁에 의해서만 가능해졌다. 대회는 모두에게 굉장한 인상을 주었고, 3개 당원들은 대단히 고무된 상태에서 대회를 맞이했다.
각 당의 주요 지도자들은 대회 때 대회장 인근의 불법 장소에 머물면서 그곳에서 대회 사업을 지도했다. 폐회는 대회사업 둘쨋날 5시로 정해져 있었으나 대회에 대한 공격을 피하기 위해 좀 더 이른 정오에 폐회를 했는데, 이는 옳은 결정이었다. 만약 일찍 폐회를 하지 않았더라면 대의원들에게 폭탄을 던졌던 테러리스트들은 그 폭탄을 대회장 안으로 던졌을 것이다.
11월 25, 26일에는 지방조직(도 단위) 지도자들의 불법 회의가 소집되어, 박헌영이 지하에서 서한으로 진술한 지령들을 논의했다. 회의는 당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정했다. 1) 당 정치노선의 전면적 개발, 2) 당 규율 강화, 3) 당의 [판독불가] 확대, 4) 인민의 대중연설 경험 연구와 이 경험들을 통한 당원 교육. 이는 앞으로 더 큰 규모의 인민 연설이 있을 것이라는 데서 출발함.
노동당의 대대적 선동을 위해 11월 27, 28일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공개 강연이 조직될 것이다.
1) 남조선노동당 결성을 환영한다. 연사 김원봉.
2) 남조선노동당은 어떤 정당인가? 연사 구재수.
3) 3당 통합의 의미. 연사 김광수.
4) 남조선노동당과 민주주의. 연사 안기성.
5)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야수적 정책. 연사 정칠성(여).
6) 북조선의 민주주의 건설에 관하여. 연사 김영시(Ким Иен Си)(여).
7) 조선의 민주독립의 길. 연사 홍증식.
8) 노동당 규약. 연사 김계림.
9) 모스크바회의 결정의 실현을 위하여. 연사 이정진.
10) 남조선노동당과 노동자. 연사 유현식(Ю Хен Сик).
11) 노동당과 농민계급. 연사 김한주.
12) 노동당과 인텔리계층. 연사 김남천.
13) 남조선노동당의 발전을 위하여. 연사 김재을(Ким Дя Ыл).
14) 남조선노동당과 여성의 해방. 연사 유영준(여).
15) 남조선에서 인민의 대중연설이 갖는 의미. 연사 박진홍(여).
16) 소위 입법기관에 관하여. 연사 이종갑.
17) 소위 좌우합작에 관하여. 연사 강성재(Кан Сен Чя).
18) 인민의 권리 수호를 위하여. 연사 강혁성(Кан Хек Сен)

〈노동당 지도부 성원〉
당 의장 허헌(신민당)
당 부의장 박헌영(공산당), 이기석(인민당)
정치회의(7명)
1) 허헌(신민당)
2) 박헌영(공산당)
3) 이기석(인민당)
4) 이승엽(공산당)
5) 구재수(신민당)
6) 김용암(인민당)
7) 김삼룡(공산당)
공산당 출신 3명
인민당 출신 2명
신민당 출신 2명

당 간부회(13명)
1) 허헌(신민당)
2) 박헌영(공산당)
3) 이기석(인민당)
4) 이승엽(공산당)
5) 구재수(신민당)
6) 김용암(인민당)
7) 김삼룡(공산당)
8) 송을수(인민당)
9) 유영준(신민당)
10) 이현상(공산당)
11) 고찬보(신민당)
12) 김오성(인민당)
13) 강문석(공산당)
공산당 출신 5명
인민당 출신 4명
신민당 출신 4명

당 중앙위원회(45명)
1) 허헌(신민당)
2) 박헌영(공산당)
3) 이기석(인민당)
4) 이승엽(공산당)
5) 구재수(신민당)
6) 김용암(인민당)
7) 김삼룡(공산당)
8) 송을수(인민당)
9) 유영준(신민당)
10) 이현상(공산당)
11) 고찬보(신민당)
12) 김오성(인민당)
13) 강문석(공산당)
14) 홍남표(공산당)
15) 이정진(인민당)
16) 이태진(인민당)
17) 윤경철(인민당)
18) 심운(신민당)
19) 이재남(신민당)
20) 김시영(Ким Си Ен)(신민당)
21) 민혁조(신민당)
22) 정태련(공산당)
23) 김응빈(공산당)
24) 김상혁(공산당)
25) 이민용(공산당)
26) 김영재(공산당)
27) 김점권(공산당)
28) 장적우(공산당)
29) 이인동(공산당)
30) 이순금(공산당, 여)
31) 허성택(공산당)
32) 김광수(공산당)
33) 조희영(공산당)
34) 김계림(공산당)
35) 박광희(공산당)
36) 김태준(공산당)
37) 박문규(공산당)
38) 이주하(공산당)
39) 안기성(공산당)
40) 정노식(신민당)
41) 고경인(공산당)
42) 유축운(공산당)
43) 정지영(Чен Чи Ен)(공산당)
44) 조병로(Чё Бен Но)(공산당)
45) 남경우(공산당)
공산당 출신 29명
인민당 출신 7명
신민당 출신 9명
-------
45명

• 중앙위원회 위원들의 사회성분
노동자 8명
농민 8명
인텔리 32명
* 인텔리 32명 가운데 16명은 직업적 혁명가임.

〈감찰위원회 성원〉
위원장 최원택(공산당)
부위원장 이석구(인민당), 김형선(공산당)
위원회 위원
4) 홍덕유(공산당)
5) 이정환(신민당)
6) 홍증식(공산당)
7) 현우현(인민당)
8) 오영(공산당)
9) 이주상(공산당)
10) 한영욱(신민당)
11) 송언필(공산당)
공산당 출신 7명
인민당 출신 2명
신민당 출신 2명

〈노동당 기관지 편집인〉
이승엽
강문석

〈중앙위원회 구조〉
1) 조직부 김삼룡(공산당)
2) 선전부 강문석(공산당)
3) 간부부 구재수(신민당)
4) 노동부 이현상(공산당)
5) 농민부 송을수(인민당)
6) 부녀부 김상혁(공산당)
7) 청년부 고찬보(신민당)
8) 문화부 김태준(공산당)
9) 총무부 김광수(공산당)
10) 재정부 이정진(인민당)
11) 협조부 정노식(신민당)
12) 구호부 안기성(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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