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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월 11일 칼라시니코프가 시티코프에게 보내는 북조선 주둔 소련군의 행태 및 북조선 주민의 정치‧경제상황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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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사업]한국학분야 토대연구지원사업
러시아문서보관소 소장 해방후 한국사회 관련 자료의 수집 번역 및 주해 (1945~1950)
서지사항
· 표제어1946년 1월 11일 칼라시니코프가 시티코프에게 보내는 북조선 주둔 소련군의 행태 및 북조선 주민의 정치‧경제상황 보고
· 키워드위수사령부, 위수사령관, 음주, 폭행, 약탈, 부도덕, 인민경제, 곡물조달, 소작료, 조선공산당, 김일성, 로마넨코 그룹,
· 대표주제어위수사령부
· 설명문표도로프 중좌가 작성한 보고서를 칼라시니코프가 시티코프에게 보낸 것으로, 북조선 주둔 소련군의 정치도덕적 부정행위 및 북조선 주민들의 정치‧경제상황이 담겨 있음.
· 발신자연해주군관구 정치국장 칼라시니코프
· 수신자시티코프
· 자료문의동국대학교팀(연구책임자:박명호 교수)

문서 해제



산출물명: ЦАМО,ф.172,оп.614631,д.37,лл.13-32.
자료구분: 타이핑
저작권자: 러시아연방국방부중앙문서보관소
원자료언어: Комендатура
면수: 20
발신일: 1946.01.11.


번역문


〈1946년 1월 11일 칼라시니코프가 시티코프에게 보내는 북조선 주둔 소련군의 행태 및 북조선 주민의 정치‧경제상황 보고〉

기밀.

연해주군관구 군사회의 위원, 상장 시티코프 동지에게.

각 군위수사령부의 활동과 북조선에 주둔중인 부대들의 정치도덕 상태, 그리고 북조선 주민의 경제 상황에 대해 표도로프 중좌가 작성한 보고서를 제출합니다.

첨부: 위 내용 19쪽. 수신자에게만 보냄.

연해주군관구 정치국장, 중장 (칼라시니코프)

46년 1월 11일.

연해주군관구 정치국장, 중장 칼라시니코프 동지에게.

보 고 서

북조선 농지관계 연구와 관련해 귀하가 내린 과제를 수행하면서 북조선의 정치, 경제 상황에도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조선에 체류하는 한달 반 동안 저희는 황해도와 평안남북도 3개 도에 머물면서 일련의 심각한 사실들과 맞닥뜨렸는바, 이를 보고 드립니다.

1. 군위수사령부

우리 사령부가 수천만 북조선 주민과 접촉을 유지하는 데 매개가 되고 있는 기층 조직은 도‧시‧군 군위수사령부이다. 이 중 군(郡) 위수사령부가 주된 조직인데, 왜냐하면 이들이 주민의 ⅔를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자신들에게 제시된 요구와 부합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 보통 위수사령관들은 자기 지역이나 조선 전체의 정치 경제 사정에 밝지 못하며, 자신들의 관할 하에 있는 지역 주민과도 필요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일하는 방식은 관료적 조치와 억압이다. 이 밖에 각 군(郡) 위수사령관들은 군의 중심지, 즉 위수사령부가 위치해 있는 도시들만 관리한다. 면과 읍에는 위수사령부 일꾼들이 없어 촌 행정당국과 접촉을 유지하지 못하며, 조선 농촌의 생활이나 상황에도 무관심하다. 통역하는 사람이 없는 것도―현재 52곳의 위수사령부에는 아직도 통역사가 없다― 위수사령부의 활동을 상당히 혼란스럽게 하며, 지방정권들과의 사무적 상호관계에 있어서도 그들을 완전히 고립무원으로 만든다. 그들은 오로지 표정과 몸짓으로만 생각을 밝힐 뿐이다.
각 위수사령부 정치 담당 부사령관들의 압도적인 다수는 시나 군의 정치 지도자라는 자신들의 임무에 호응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젊은 중위들로서(74명 가운데 44명) 군의 정치사업을 잘 모를뿐더러 공민들, 특히 외국 주민들에 대한 정치사업 문제에서는 전혀 구미가 동하지 않는 것이다. 언어는 말할 것도 없고―통역사의 부재는 바로 이 지점에서 가장 강력하게 이야기된다― 지역의 정치 경제 제도나 민족적 특성, 사회적 삶에 대한 완전한 무지, 그리고 필요한 정치적 감화 방법과 형식을 찾지 못하는 무능력은 위수사령부의 정치일꾼들을 위수사령부의 무기력한 부속물로 만들어 버린다. 그들은 지역 정치기관들의 출판과 선전선동, 그리고 학교와 극장 따위의 사업을 감독할 수 없다. 가장 나은 경우가 일을 저지하고 탄압하는 것뿐이다. 그러는 사이 서울로부터 나온 민족주의적이고 미국적인 선전이 도처에 스며들고 있는데도 그들은 이를 알아채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위수사령부의 많은 곳에 정치부분을 담당하는 부사령관이 대체로 없다. 정치담당 부사령관이 아직 충원되지 않은 위수사령부는 28곳이고, 이 밖에 74곳을 합쳐 102곳이 필요하다.
조선의 시‧군위수사령부는 활동의 성격으로 볼 때 일반적인 군(軍)위수사령부와 차이가 별로 없다. 그들의 거의 모든 활동은 법률을 위반한 군무원들을 구속하거나 행군하는 군부대들에게 숙소를 보장해 주는 것이다. 그들은 에너지의 상당 부분을 지역치안 업무와 사창가‧여관‧음식점‧술집 관리에 쏟고 있는데, 이는 순전히 경찰의 기능이다.
가령 공공주택‧호텔‧음식점‧술집 관리는 신천군(황해도) 위수사령관 티모페예프 대위에게서 가장 흔히 보는 일이다. 그가 위수사령부로 호출되는 조선인들과 대화하는 일반적인 방식은 허리에 찬 권총집에서 권총을 꺼내 탁자 위에 놓고 위협하는 것이다. 그는 거의 모든 업무시간을 매음굴 불시단속이나 창녀 등록, 여관과 음식점 검사에 보낸다. 다른 일은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자기 군(郡)의 정치 경제 상황에는 관심이 없다. “군(郡)의 최고 대지주는 누구이며 그의 땅은 얼마나 되는가”라는 우리의 질문에 그는 대답하기 난처해했다. 그러는 사이 최대 토지소유자는 자신이 지역 자치기관인 군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사령부의 묵인 아래 새로운 정권과 소련군사령부의 모든 조치를 노골적으로 방해하고 있다. 그가 설치한 ‘인민위원회’는 거의 전부가 지주와 부르주아 분자들 및 그 하수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령관 티모페예프는 이 모든 상황을 알아채지 못했으며 마땅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얼마 전 이 군에서 일어난 유명한 사건들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바로 그런 업무방식은 구성군(평안북도) 사령관인 칼레딘(Каледин) 대위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는 아주 젊은 사람으로 첩보원인데,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는 부사관이었고 군대에 오기 전에는 전기기사였다. 그의 정치적 시야는 매우 제한적이다. 그에게는 경찰 방식이 더 가깝고 이해도 더 잘 된다. 그래서 그에게는 지금 현재까지도 정치부분을 담당하는 부사령관이 없다.
우리 생각에 군위수사령부를 강화하려면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
1. 군(郡)의 군위수사령관들과 정치부분 부사령관들 성원을 재검토하여, 과거에 소비에트나 당 사업을 한 경험이 있는(당 구역집행위원회와 구역위원회 일꾼) 선임장교들―소좌 이상―로 교체한다.
2. 각 도 군사고문관은 위수사령관들에 대한 지휘 감독을 강화한다.
3. 위수사령부 28곳에 정치 담당 부사령관을 즉각 충원한다.
4. 위수사령부에서 쓸 부족한 조선인 통역사 52명의 파견을 서두른다.

Ⅱ. 부대의 정치도덕 상태
우리 군과 나라의 명예와 가치를 모욕한 군무원들의 부도덕한 행동은 조선에서 실로 재앙적인 규모이다. 우리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시‧군들 도처에서는 밤마다 총소리가 울린다. 다른 도시들보다 상대적으로 치안이 양호한 평성에서조차 총소리 없이 밤이 지나간 경우는 한 번도 없다.
음주는 온갖 특이한 사건들과 부도덕한 행동들의 원천으로, 도처에서 관찰된다. 특히 음주는 신의주에서 한창인데, 심지어 낮에도 길거리에서 술취한 군무원들을 볼 수 있다. 밤만 되면 모든 여관이며 매음굴(신의주에 70군데가 넘는다)마다 술취한 바쿠스들이 나타난다. 취한 장교들은 바로 거기서 순찰중인 위수부대원들의 묵인 하에 병사들과 교대로 창녀를 갖는다. 신의주에 주둔하고 있는 비행사단의 한 대원(정치부장 추니크(Цуник) 중좌)도 이런 온갖 추태스런 품행을 보이고 있다. 소좌 데미도프(Демидов)가 지휘관으로 있는 현지 보병연대 군무원들 역시 이에 뒤지지 않는다. 데미도프는 토요일 아침부터 다음날 저녁까지 이틀 동안(12월 8~9일) 그에게 특별히 제공된 위수사령부 여관방 두 개에서 계속 창녀들과 함께 있으면서 술취한 바쿠스로 지냈다(그래서 이 방 두 개에서는 군사고문, 대좌 그라포프(Графов), 도위수사령관인 중좌 기르코(Гирко)가 지내기도 하는데, 이 일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벌어졌다). 도위수사령부 정치 담당 부사령관인 소좌 아탸소프(Атясов)는 우리의 명에 따라 술취한 데미도프에게 제재를 가하려고 했으나, 그는 거친 욕설로 응수하면서 여관방들은 ‘위수사령관 기르코가 손수’ 자신에게 제공한 것이라고 말했다.
신의주에 있는 도위수사령부의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회의 참석차 이틀 일정으로 평성으로 떠난 기르코 대신 남아 있던 부사령관 소좌 표도로프(Федоров)는 이틀 동안 원없이 술에 취하느라 사령부에 나타나지 않았다. 사령부에는 당직자인 부사관만 남아 있었고 심지어 장교조차 한 명 없었다. 고주망태가 된 표도로프와 장교들을 우리는 이틀째 되는 날 집에서 발견했으며, 위수사령부의 나머지 장교들 소재는 파악할 수 없었다. 대도시 신의주는 이틀 동안 실질적으로 위수사령부의 감시 밖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은 얼마 전 바로 이 신의주에서 있었던 조선 민족주의자들의 연설에 대한 부분적인 원인이 된다.
수많은 병사와 장교들이 매일같이 사방에서 매우 빈번하게 약탈과 폭행 등을 자행하는 것은 이들이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일례로 884 БАО(신의주) 출신의 상위 막시모프(Максимов)는 계획적으로 약탈을 하는데도 벌을 받지 않고 지나간다. 12월 6일 막시모프는 자동차 종대를 이루고 구성시를 지나다가 운전사 7명과 함께 현지의 조선인 여관에 투숙하게 되었다. 밤새 내내 일행은 여자를 요구하면서 술 마시고 소란을 피우더니 아침이 되자 숙박료도 지불하지 않고 떠나 버렸다. 12월 11일, 그러니까 닷새가 지나 돌아오는 길에 막시모프는 바로 그 자동차 종대와 함께 다시 구성에서 멈췄다. 군위수사령관은 그에게 이전 것에 대해 여관 주인과 계산을 끝낼 것을 명했다. 막시모프는 굉장히 내켜하지 않으면서 사령관의 강압으로 돈을 건넸으나,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 돈은 엔이 아니라 그곳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만주의 고비였다. 이 도시를 떠난 직후 변두리에서 막시모프는 자신의 소총병들 중 한 명과 함께 길 가던 조선인 농부에게 강도짓을 해 180엔을 빼앗았다. 우리는 막시모프의 근무지인 신의주에 이 사실들을 즉시 통보하라고 위수사령관에게 명했고, 위수사령관 칼레딘 대위는 이 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자신은 이미 사령부에 막시모프와 그 외에 사람들에 관해 보고를 했으나 아무 결실이 없으며, 그래서 막시모프는 신의주에서 평성으로 가는 길에 구성 및 다른 군의 도시들 지나면서 끊임없이 무례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와 유사한 상황을 우리는 위에 언급한 신천시에서도 관찰했는데, 그곳에 주둔하고 있는 보병연대 병사와 장교들은 연대와 군위수사령부의 묵인 아래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갖가지 추태를 저지르고 있다. 단 하루 만에 우리는 거기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우의 목격자가 되었다. 한 조선인이 고주망태로 취한 연대 중위인 한 장교를 골라 길거리를 질질 끌고다녔다. 자신의 아내를 강간하지 못하게 했다고 어떤 술취한 장교한테 연발권총 손잡이로 두들겨 맞아 피투성이가 된 조선인이 위수사령부로 탄원을 하러 찾아왔다. 이 연대와 관계된 중대의 병사들 무리가 현지의 원면처리공장을 약탈해 공작기계에 쓰일 예정이던 제재목을 훔쳐갔다. 우리한테 붙잡힌 병사들이 하는 말이, 자신들은 중대장의 명령으로 “장작을 가지러 나갔다”는 것이었다. 그 전날 밤에는 미지의 군무원들이 판독하기 어려운 영수증들을 남겨둔 채 바로 이 공장에서 면화 몇 [판독불가]를 반출해 나갔다. 이 모든 일이 위수사령부에서 500미터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해주에서는 그곳에 주둔중인 제258보병사단 하위부대들의 초급당 위원장들과 공산청년동맹 조직활동가들이 개별로 현지 주민에 대한 폭행에 적극 가담하고 있다. 제991보병연대 공산청년동맹 조직활동가인 체크마레프(Чекмарев) 소위는 조선인의 집에서 폭행을 하려던 자신을 방해했다고 경찰관을 구타한 것에 대해 사령부에서 하룻밤 자는 것과 간단한 질책으로 끝냈는데, 그는 “뭐, 레닌과 스탈린이 감옥에 앉아 있었는데 지금은 내가 앉아 있다”라고 말했다. 군사고문 스쿠츠키(Скуцкий) 중좌가 당 하급조직 지도자와 공산청년동맹 조직활동가 몇 명을 처벌하라고 사단 정치부(부장 시네오코프(Синеоков) 중좌)에 집요하게 요구하였으나 관심을 얻지 못했다.
우리 민정의 도움으로 힘겹게 가동을 시작한 평성의 몇몇 기업소들도 다시 멈춰서고 있다. 기업주들이 일을 거부하는 이유는 낯 모르는 군무원들이 생산품 일체를 강제로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한 예로 실크생산공장의 경우 준비해 놓은 실크를 일단의 비행장교들이 주인에게 1미터당 1엔씩 지불한 후 가져가 버렸다.
그런 사실들이 지역 주민에게 미치는 고약한 영향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영향이 우리 부대에 대한 증오를 키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밖에도 가령 해주의 도당위원회 비서가 우리에게 해 준 이야기에 따르면 그 영향은 지역 공산당의 권위에도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 부도덕한 현상들의 주요 원인은 최고위급 사령관들의 예를 보면 알 수 있다. 휘하 부대의 규모를 막론하고 많은 사령관들―부대 및 연합부대 지휘관들―은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노골적으로 불법을 저지르는데, 이런 경멸스런 행동이 대중들의 모방을 야기하는 것이다.
제258보병사단 지휘관인 드미트리예프 대좌는 도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집에서 퇴거시키라거나 아니면 자신이 점찍은 가구를 실어내라고 명령하는가 하면 자신의 행위에 “조선인들은 35년간 노예였으니 앞으로 더 그렇게 살도록 두라”는 말을 덧붙이는데, 그의 이런 독단적인 행동이 해당 사단의 장교와 병사 들에게 타락의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가 없다. 제39군단 지휘관인 모로조프(Морозов) 장군은 현지 박물관 재산을 포함해 자신이 개인적으로 탈취한 재산과 함께 약 10대의 자동차를 얼마 전 조선에서 반출했다. 당 규율을 통해 그런 사령관들을 제어하려는 군(軍) 정치국장 그로모프(Громов) 대좌의 시도는 군사령관 치스차코프 상장의 반발에 부닥치고 있다. 다음의 사실은 이 점을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군 정치국장이 치스차코프에게 부대 내 질서확립에 대해 군 정치국장에게 개인적 책임을 지우고 있는 노동자농민붉은군대 4장 훈령 제003호에 상응하는 귀하의 암호에 대해 보고하자, 치스차코프는 “군대 안에 사령관과 군사회의가 있다고 관구에 알리시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군사령관에게도 탐욕은 낯선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평성에는 지방정부가 화재 피해자인 치스차코프에게 30만엔을 지급했다는 소문이 회자되고 있다(소문을 확인하는 건 우리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주지하듯 11월 16일 사령관의 집이 그의 전 재산과 함께 불에 타버렸다. 또한 화재가 난 것도 사람들이 생각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적군의 후방공격’ 때문이 아니라, 사령관 아내의 송별회로 인해 22시간 동안 이어진 주연의 결과라는 점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얼마 전 신센에서 벌어진 사건들과 관련해 군사령관이 발표한 “조선의 반을 교수형에 처한다”는 성명은 신센 사람들에 대한 위협이 실현될 경우 그의 정치적 선견지명 부재를 증명해 줄 것이다.
노동자농민붉은군대 4장 훈령 제003호에 상응하도록 부대 내 질서를 확립하고 제25군 부대들의 정치도덕적 상태를 개선하는 일은 아주 시급하고 결정적인 조치를 요한다. 정치교육의 영향을 강화하려면 초반에 가혹한 억압 조치들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때 우선적으로 비중 있는 사령관―부대 및 연합부대 지휘관― 몇 명을 일벌백계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처벌은 명령을 거치고 군대 전체에 공개되는 것으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작금의 현실이 보여주듯 처벌은 아무 효과도 거두지 못할 것이다. 그 밖에 지역 주민을 강압하기 위해 병사와 부사관들이 총살을 벌인 몇 번의 경우도, 미국이 서울에서 하는 것처럼 군대 신문과 지역의 조선어 신문에 대대적으로 발표해야 한다. 또한, 외국에의 장기 체류로 반은 부패해 버린 분자들을 소련으로 돌려보냄으로써 군대 구성원을 부분적으로 정제하는 것도 합리적이다.

Ⅲ. 북조선 주민의 경제 상황
인민경제―공업과 운수―의 계속되는 붕괴는 주민들, 특히 도시 노동자와 여타 근로자들에게 부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상품 생산과 유통은 거의 없고, 기존 상품들도 시장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있으며, 식료품을 비롯한 물가도 나날이 재앙의 수준으로 오르고 있다. 인플레이션이 목전에 와 있는 것이다. 군표는 점점 더 많아지지만, 군표로는 식료품을 빼면 거의 아무것도 살 수 없다. 이 때문에 현재는 투기하는 사람들과 지주, 농민 상층부가 터무니 없이 심하게 부풀린 가격으로 농산물을 유리하게 팔아치움으로써 이익을 얻고 있다.
경‧중공업 공장과 광산들은 멈춰 선 곳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노동자들은 사회에서 낙오하고 있다. 예를 들어 황주군(황해도)과 구성군(평안북도)의 광산 노동자들은 굶주리다 사방으로 달아난다. (그런 데도 구성군 광산들에서는 우라늄과 탄탈, 베릴륨 같은 희귀하고 매우 값나가는 광석들이 채굴되었다.)
해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금속공장은 다 만들어 놓은 제품의 판로가 없어 멈춘 상태이다. 공장은 아직 일제 시대였을 때 만들어 둔 광석이며 석탄 같은 원료 재고를 확보해 놓고 있으나 가동을 할 수 없다.
일하고 있는 노동자와 사무원의 월급은 지나치게 낮다. 우리 사령부의 명령으로 월급은 이전 수준, 즉 붉은군대가 오기 전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나, 치솟는 물가 때문에 월급으로는 최저생활비가 보장되지 않는다.
농촌 주민, 특히 다수 소작인들(전체 농민의 70% 정도를 구성)의 상황을 보면 처음에는 지주에게 내는 소작료가 40% 줄고 물품 가격이 올라 처지가 개선되었으나 지금은 열악해지기 시작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실시되고 있는 곡물조달 때문이다. 우리가 선언한 곡물조달 캠페인은 끝까지 면밀하게 고민한 것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곡물 및 고기 공급계획은 현실적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틀리게 작성되고 말았다. 수많은 군(郡)에서 공급계획이 실제보다 심하게 높아 거의 총수확량과 비슷하며, 개별 작물에 따라서는 심지어 총수확량을 초과하기도 한다. 일례로 박천군(평안북도)의 경우 벼의 전체 총수확량이 142,000석(1석=약 150kg)인데, 이 군에서 조달하기로 계획된 양은 133,000석이다. 밀을 보면 여기서 2,326석 조달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수확량은 2,205석이었고, 게다가 밀 거의 전체가 뿌리는 얼어죽었다. 그런데 이 군 7만 주민의 연간 식량으로 곡물 8만 석과, 그 외에 종자용으로 3천 석이 필요해서 총 83,000석이 필요한 실정이다. 하지만 곡물조달 후 남는 건 달랑 9천 석이다. 기아가 군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군들에서도 고기 공급 계획은 실제보다 높아 가축 총 두수의 평균 10%나 된다. 그러나 계획이 지역에 따라 훨씬 더 높은 곳도 있어서, 짐 나르는 역축이 없는 조선 농촌의 경우 자체의 허용 범위에 따라 농사용 가축을 도살하기도 한다. 농민들은 농사짓는 데 부리는 가축 중 거세한 황소를 내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선 농촌에서는 소작인 중 압도적인 다수가 농사용 가축을 갖고 있지 않으며, 거세 황소는 농장 3~4개당 평균 1마리 꼴로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은 곳곳에서 농민들의 심각한 불만을 야기하는데, 농민들은 “일본이 덜 가져갔다”고 말하는 실정이다. 곡물조달 시행 방법도 그 못지않게 농민들을 격분시켰다. 군(軍) 경리부 대표들은 각 군(郡) 위수사령관들과 함께 조달을 했는데, 자주 지방정권들의 우두머리를 통해 하기도 했고, 자체적으로 관료적 조치를 취하거나 협박과 탄압을 동원해 각 농민들이 곡물을 내 주도록 강제했다. 군 경리부에서는 독특한 시합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조달자들 중에서 먼저 공급계획을 다 이행한 사람은 소련으로 휴가를 보내 준다는 것이었다. 조달자들은 제각각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다.
현재 이 상황은 표면적으로는 바뀐 것 같다. 곡물조달은 폐지되었고, 지방자치기관을 통한 강제적인 곡물수매가 공고된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각 군‧면‧리로부터의 공급 계획이 효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은 우리 조달자들이 손수 농촌으로 내려가지 않는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이들을 대신해 그 일을 하는 것은 지방정권인 각급 인민위원회이다. 각급 인민위원회 대부분은 태업하는 지주 분자들과 그들의 하수인으로 오염되어 있다. 이들은 농민들에게 자신들의 행위를 해명하면서 예전처럼 모든 잘못을 붉은군대 탓으로 돌린다. 우리에게 적대적인 이런 민족주의자 및 미국인들의 선전이 어떤 영양가가 있을지 알기는 어렵지 않다.
곡물조달 관련 상황은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고 있으며, 그로 인한 심각한 정치적 사태가 많이 발생해 관구 사령부의 개입이 요구된다.
도인민위원회(해주, 신의주) 대표들은 붉은군대에 필요한 만큼만으로 곡물조달을 제한할 것을 제안하는데, 그것은 전체 계획의 약 30%이다. 도시들에 배급하기 위한 곡물수매 [계획]도 소비에트 사령부의 개입 없이 바로 인민위원회로 제출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 제안들은 우리에게는 가장 바람직하고 타당하다.
1946년 봄이 될 때까지 농업용 비료가 없으면 농촌에 위협적일 수 있다. 이는 내년 벼 수확량을 큰 폭으로 떨어뜨릴 수 있다. 최대 규모의 농업용 비료 공장이 함흥에 있으나, 공장은 지금까지 가동되지 않고 있다. 로마넨코 소장 일파의 노력으로 가까운 시일 내에 공장을 시동시키기로 약속되어 있으나, 완전한 출력에 대한 약속은 아니다. 즉 한 달에 수십만 톤 대신 2만 톤을 생산하겠다는 것으로, 이는 바다 속의 물 한 방울인 것이다.
일본 시민은 특히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다. 이들은 도시의 정해진 구역으로 쫓겨나왔는데, 그곳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불쾌할 정도의 높은 밀집도와 비위생, 추위, 그리고 더 중요한 배고픔이다. 일은 없다. 교수와 기술자 같은 다수의 전문가들이 쌀 한줌을 위해 닥치는 대로 일급(日給) 육체노동[판독불가]. 평성에서는 일본인용 임시 가건물에서 매일마다 몇십 구의 시신이 끌려나온다. 시신들은 수습되지도 못한 채 그 가건물에 계속 남아 있기도 한다. 추위와 배고픔에 일본인에 대한 조선민들의 조롱이 보태지고 있다. 일본 사람들은 거리나 시장에 얼굴을 내밀기를 두려워한다. 거기서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이] 식량을 위해 팔고 있는 마지막 누더기까지 처벌도 받지 않고 강제로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군사령관은 일본 주민을 위해 부패한 전리품 쌀 3만 톤을 방출하라는 로마넨코 소장과 정치고문 발라사노프 동지의 제안을 “쌀은 이미 경리부에서 계산이 끝났다”는 핑계를 대며 거부했다. 그러는 사이 이 쌀은 구더기가 먹어치워 정상적인 조건에서 식품으로는 거의 쓸모가 없게 된다.
일본 주민에 대한 고위 미사령부의 태도는 자주 이야기되는 간단한 공식인 “죽게 내버려 두라”로 표현된다.
서울 주재 소련 총영사 폴랸스키(Полянский) 동지의 말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남쪽에서 운송수단을 제공해가며 일본 주민을 고국으로 열심히 후송하고 있다고 한다. 남한에 남아 있는 일본인은 이미 많지 않다. 이렇게 해서 미국은 바로 일본정부에게 자국 신민들에 대한 보호를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 우리 점령지대에 있는 현지 일본 주민과 특히 만주에서 도망온 수많은 일본인들은 만일 우리가 조속히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이 겨울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Ⅳ. 정치 상황

사업과정에서 다양한 주민계층, 사회단체, 지방정권기관 대표들과 충돌하는 중에 우리는 그들의 정치적 분위기를 가까이서 접할 기회를 얻었다. 도시 부르주아, 특히 상인 부르주아의 분위기는 특히 긍정적이다. 멈추지 않는 물가 상승과 투기는 이를 위한 충분한 기반이 되고 있다. 그들은 주된 관심사는 한 가지인데, 즉 남쪽의 상품이 북으로 밀려들어 오려면 38선이 언제 제거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현재는 이 상품들이 그곳에서 밀수를 통해, 그것도 꽤 큰 규모로 들어오고 있다. 예를 들어 북쪽 지역(평안북도)에서도 미국산 담배와 메리야스가 판매되고 있다. 게다가 서울에서 발행된 조선 신문과 미국 신문들도 이곳으로 대량으로 들어와 길거리에서 공공연히 판매되고 있으며, 다른 도시들, 특히 평성에서도 그런 상황이다.
상인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개혁들로 인해 최소의 규제를 받게 된 실업가들도 자신의 자본을 생산에 보태기를 열망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종종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들에 부딪히곤 하는데, 현지에 원료와 주요 운송수단이 없다거나, 중공업과 광산업의 경우에는 더욱이 판로도 없다는 점이다. 철도와 자동차는 가장 한정된 운송수단이다. 철도는 완전히 고사상태에 있다. 석탄과 식량이 없어서 열차 종업원들이 간이역에서 뿔뿔이 흩어지는 실정이다. 자동차 운수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조선인 기업주들이 소유하던 것을 포함해 거의 전부 ‘전리품’이 되었다. 조선인 공장주에게는 기성품을 내가고 원료와 연료를 들여올 수단이 자주 없다. 경자동차는 말할 것도 없고 유일하게 있던 화물수송차도 어떤 군부대 아니면 위수사령부에 ‘전리품’으로 몰수당했다. 생산을 정상화하는 데 있어 많은 기업주들을 방해하는 것은, 위에서 지적했다시피 무기로 위협해 완제품을 빼앗아가는 개별 군무원들의 전횡이다.
보드카 양조장이나 연초 공장 혹은 다른 어떤 기업소를 시동시키려면, 운송수단부터 시작해 약탈하는 군무원들로부터 기업소를 지키기 위한 소총병에 이르기까지 소비에트 사령부의 도움과 보호가 요구된다.
지주들은 새로운 체제에 가장 상처 입은 부류이다. 이들은 소작료로 수확의 50%가 아닌 30%를 받음으로써 이미 ‘손실’을 입었다. 게다가 자신들의 소유지의 운명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조선의 농지개혁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거나 쓰지 않는데, 왜냐하면 공산당을 비롯해 그 누구도 농지개혁을 진지하게 준비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주들은 틀림없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임을 느끼고 있다. 그들 중 많은 이가 자신의 땅을 팔고자 서두르지만 땅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땅값은 폭락했다.
지주들은 조선 주민 중 가장 반동적인 부류이다. 민족주의 운동은 주로 이들에 기대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예전처럼 자신들에게 종속된, 땅 없는 소작인들을 공포 속에 붙잡아 두고 있다.
조선 농민들은 동방의 모든 곳이 그렇듯 가장 가난하고 핍박 받는, 그리고 모호한 부류이다. 이들은 땅에 관한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하기를 두려워한다. 농촌에는 공산당원이 없다. 공산당원들이 군‧면 중심지 여기저기에 만들어 놓은 ‘농민동맹’(또는 ‘위원회’)을 빼면 농민들 사이에는 사회운동이 전혀 없다. 농민동맹은 아직 그 수가 적으며, 광범위한 소작인 대중 안에서 영향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공산주의적인 사람’으로 간주되는데, 이는 농민들을 그들로부터 뒷걸음질 치게 만든다. 소작료 인하를 제외하면 새로운 사조가 아직은 농촌에까지 직접 닿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최근 상황은 농업의 상품화율을 현저히 떨어뜨렸는데, 왜냐하면 농민들이 처음으로 더 영양가 있는 음식을 비롯해 주되게는 일제 치하에서 안 먹던 쌀을 먹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반은 거지인 땅 없는 소작인은 자신의 ‘은인’인 지주의 소유지 훼손을 성물모독으로 여긴다. 소작인은 어떤 방식이든 지주를 ‘모욕한다’는 생각은 허용하지 않는다. 농민들은 “그는 우리에게 아무런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최선의 경우 이들에게는 지주를 ‘모욕하지 않는 것’, 충분한 루블을 지불하고 지주에게 땅을 사는 것, ‘더 싸면 좋겠지만’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공짜로는 땅을 받지 않는 게 정당한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땅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나는 주인이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소작인들은 말한다.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 구입할 것이며, 어디서 돈을 가져온단 말인가? 이 질문에 그들 중 누구도 대답을 할 수 없다.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지주를 모욕하면 안 된다’는 농민의 심리는 심지어 조선 공산주의자층에도 생겨났다. 게다가 이들에게는 전반적으로 토지개혁에 대한 완전한 개념이 전혀 없다. 김일성, 오기섭, 김용범 동지 등은 우리와의 대화중 농지문제 해결에 있어 단속 방식 외에 다른 방식은 제안하지 않는다. 저 사람들은 지주와 자작농을 ‘인민의 적’으로 좀 더 선전하고, 이들의 땅을 빈농에게 재분배하며, 그럼으로써 ‘농지개혁’을 완수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공산당원들은 그들의 표현대로 ‘토지를 위한 강력한 농민운동’을 고양시키기 위해 이제 막 농촌으로 갈 계획을 짜고 있다.
조선공산당의 현재 사정으로 볼 때 이 계획은 최소한 문제점이 있다. 조선공산당은 아직 자기 집 안에 질서가 잡혀 있지 않다. 조직적으로. 이것은 아직도 몹시 부서지기 쉬운 오합지졸이자, 낯선 요소들에 오염된 그래서 진지한 소제가 필요한 대중을 의미한다. 이런 대중 안에는 노동자도 없고 농민도 전무하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격렬한 당내 투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서울에서는 박헌영에 반대하는 무슨 새로운 ‘노동’당이 생겨 박헌영이 ‘미국과 내통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평성에서는 이제야 김일성이 공산당 소속임을 선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이것은 민주주의 운동 전반에 적잖은 해를 입혔다. 조만식을 당수로 하는 민주당 지도자들은, 만약 자신들이 김일성이 공산당을 이끌고 있다는 것을 일찍 알았더라면 그의 사상적 지도 하에 민주당을 결성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김일성이 공산당 소속이라는 조선의 여론을 처음부터 은폐한 것은 어리석고 무엇으로도 정당화되지 않는 행위로, 비록 그 여론이 은폐되지 않았더라도 서울에서 그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을 테지만 어쨌든 그런 은폐는 결정적인 해악을 끼친 조야한 정치적 실수였다.
현재 조선의 공산당원들이 중요하게 요구하는 것은 바로 사상적 단련이다. 이를 위해서는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가진 교원들과 서적, 특히 〈볼셰비키 공산당 약사〉가 필요하다. 이것을 모두 동원해 가능한 빨리 조선공산당을 도와야 한다. 이른바 ‘인민위원회’라고 부르는 지방자치기관들은 지방조직을 우습게 모방한 것이다. 예외 없이 모든 인민위원회에서는 하나의 동일한 모습이 관찰된다. 위원회 위원장을 선두로 한 모든 관리들이 철제 난롯가에 둘러앉아 담배를 피우며 발랄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다. 점심시간을 포함한 노동시간 전부가 그렇게 이어진다. 정해진 시각인 4시가 되면 위원회에는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방문했던 3개 도 수십 곳의 인민위원회에서 책상 앞에 앉아 무슨 일인가를 하는 활동적인 관리를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우리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이런 노골적인 무위에는 정치적 내막이 숨어 있다. 누구에 의해서도 선출되지 않은 인민위원회 경우 보통 거의 전부가 지주부르주아 분자들이 장악하고 있다. 그런 곳에는 진정한 인민 대표가 거의 전무하거나 매우 적다. 현재의 모든 사건에 대해 책임지고 싶어 하지 않는 이 위원회 위원들은 국내에 붉은군대가 있기에 안전한 곳에 들어앉아 다른 시절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도처에서 관찰되는 이 독특한 태업은 일정한 하나의 중심지, 즉 수도에서 지휘되며 방향을 제시받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민정 업무를 담당하는, ‘소장 로마넨코 그룹’이라 불리는 우리 [정치]국은 수많은 온갖 장애를 극복하며 굉장한 노력으로 맡은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근본적인 어려움 중 하나는 이 그룹의 일꾼 정원이 너무 적다는 점이다. 그 외에, 최근까지도 통역사가 없었으며 지금도 아직 부족하다. 그런데 본질적으로는 1천만 인구를 가진 나라 전체의 통치에 관한 아야기이다. 이 수치는 핀란드보다 3배가 더 많고 거의 헝가리에 필적한다. 이 그룹의 다면적, 국가적, 정치적, 경제적 활동은 당연히 국가건설과 인민경제 전 분야의 전문가 다수를 포함해 훨씬 더 많은 일꾼을 요구하고 있다. 일례로 조선은 무엇보다도 농업국가인 데 비 해 이 그룹에는 농업문제 전문가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또한 다른 많은 숙련가도 없다. 그 결과 이런 비상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예를 들어 그룹 일꾼들은 자의적으로 도를 조사한 후 농민을 ‘부농, 중농, 빈농’으로 구분하는데, 이것은 매우 무의미한 범주를 사용해 소비에트 개념을 조선 농촌의 땅 없는 소작인 대중에게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다른 경우도 있다. 그룹의 참모장은 토지조사를 행정적 조치만으로 실행할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을 하면서 전국적 토지조사 실시에 관해 위수사령관들에게 내릴 기술적으로 미숙한 명령을 준비하였다.
정치 분야에서의 그룹의 활동은 군(軍)정치국의 활동과 중복된다. 예를 들어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에 대해 그룹과 군정치국(제7과)에서 동시에 신경을 쓰고 있다. 그래서 불필요하게 중심부가 두 곳이 되어 지휘체계를 복잡하게 만드는 데다 이는 과도한 오류로 귀결된다. 일례로 군정치국 제7과 검열관인 콘드라튜크(Кондратюк) 소좌는 남쪽 상황을 알지 못해 지역의 조선어 신문에 김구의 서울 도착 보도 게재를 허용했다. 만일 출판과 검열을 포함한 모든 정치활동 방향이 전적으로 하나의 중심부, 즉 군정치국이나 아니면 그룹에서 제시되었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룹이 중심부가 될 경우 군정치국 제7과는 그룹에 소속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룹(이그나티예프 대좌)이나 제7과나 모두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출판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지역 출판의 자유에 관한 불가닌(Булганин) 동지의 지령은 형식적으로만 이행되고 있을 뿐이다. 이 문제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조심해도 된다. 형식적으로는 모든 출판물이 허가를 받지만 본질적으로는 검열이라는 난관 때문에 발행이 불가능하다. 모든 출판물에 대해 복잡하고도 엄청난 사전검열이 도입되어 있으므로 몇몇 신문에 대한 계속적인 검열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지역 출판의 솔선정신을 느슨하게 만들 것이다. 또 벌금과 그 외 검열을 통한 탄압으로 원하지 않는 선전을 미연에 완벽하게 방지할 것이다. 그러면 결국 위험이 적어질 것이다. 말하자면 조선은 소비에트 국가가 아니라 부르주아민주주의 국가이며, 그래서 오늘날 북쪽의 아무 도나 가더라도 지역신문의 출판을 기다리는 것보다 농촌 신문을 얻는 게 훨씬 더 수월하다.
특히 각 도의 신문출판 사업은 조선인들에게 아직 인쇄소가 없는 관계로 혼탁한 상황이다. 기존 인쇄소 대부분은 우리의 전리품으로 선언되었다.
우리가 볼 때 로마넨코 소장 그룹의 활동에서 주된 난점은 군사령부와의 당연한 접촉이 없다는 것이다. 국내 통치를 맡은 일단의 고위 전권위원들은 본질적으로는 실질적 권한이 전혀 없으며, 군사령관에게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 그러나 군사령관이라고 국가통치 문제에서 늘 정치적 통찰력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북조선 통치를 정상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민정이 군사령부에서 즉시 분리되어 관구 군사회의에 우선적으로 직속되어야 한다.

중좌 (표도로프)
소좌 (리프시츠(Лившиц))

1945년 12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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