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원훈 / 高元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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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대사
· 유형 : 인물/예술인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1881-미상. 민족항일기의 정치인·체육인. 1881년 3월 경상북도 문경군 양면 신전리에서 태어났다. 1910년 7월 일본의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를 졸업하고, 1911년 8월 조선총독부의 경부(警部)로 채용되었고, 1913년 5월 보성전문학교 교수, 1922년에는 교장이 되었다. 한편, 1920년 7월 조선체육회의 초대이사장으로 선출되었고, 1921년 같은 회의 회장이 되었다. 1924년 4월 중추원참의가 되었고, 그해 12월 전라남도참여관(全羅南道參與官), 1926년 경상북도참여관, 1929년 평안남도참여관을 거쳐 경기도참여관, 1930년 4월 평안북도참여관을 지내고, 1932년 9월 전라북도지사가 되었다. 그뒤 1937년 9월 경상북도 각지를 돌아다니며 내선일체와 황도(皇道) 실천을 주장하는 강연을 하였고, 1938년 7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열린 총독부 후원의 시국대책강연회에서 ‘일본의 수호신이 되라. ’는 내용의 강연을 하였다. 또한, 1940년 10월에 결성된 국민총력조선동맹에서는 이사와 연성부(鍊成部) 연성위원 등의 직책을 맡았으며, 1941년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을 조직하여 상임위원이 되었는데, 이 단체의 결성식 때 좌장(座長)으로 선출되어 ‘출전장병의 노고를 감사한다. ’는 강연을 하였다. 같은해 8월 임전대책협의회(臨戰對策協議會)를 조직하여 위원이 되었고, 같은해 10월 평양과 춘천에서 당시 결성예정에 있던 임전보국단(臨戰報國團)의 사명을 해설하는 강연을 하였고, 이어 임전보국단을 결성하여 부단장이 되었다. 이즈음에 이른바 창씨개명을 권유하는 강연을 행하면서 자신도 성을 고원(高元), 이름을 훈(勳)으로 고쳤다. 1945년 2월 대화동맹(大和同盟)을 만들어 심의원이 되었고, 같은해 6월 대의당(大義黨)을 조직하여 위원이 되었다. 한편, 일제의 침략전쟁에 사용할 비행기를 생산하기 위하여 김연수(金埏洙) 등과 더불어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를 만들고 그 취체역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6·25 때 납북되어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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