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석 / 姜海錫

검색결과 / 전체   이전화면
· 분야 : 역사/근대사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1904-1973. 일제 강점기 애국계몽운동가·독립운동가. 본관은 진주(晋州)이고, 본적은 전라남도 광주(光州)이다. 부친 강호일(姜浩一)과 모친 박씨(朴氏) 사이에서 7남 4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둘째 형은 대한인국민회 지부에서 활동하며 3·1운동에 참여한 강석봉(姜錫峰)이고, 동생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확산에 큰 공을 세운 강석원(姜錫元)과 광주청년동맹의 간부로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힘쓴 강영석(姜永錫) 등이다. 부인은 1924년 광주 지역에서 여성운동으로 활약했던 김홍은(金洪恩)이다. 광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임시교원양성소에서 과정을 마친 직후 송정리보통학교에서 재직하였으며, 1920년대 중반부터 계몽운동단체·청년운동단체·노동운동단체에서 다양한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대에 확산된 전국적인 청년운동단체의 하나로 광주에서 결성된 ‘신우회’의 가입을 시작으로, 전남청년연합회 위원·광주청년동맹 집행위원·광주철공조합 집행위원·신간회 광주지회 간사·고려공산청년회원의 광주야체이카 구성원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제3차 조선공산당의 산하 기관이던 청년부에 의해 결성된 ‘성진회(醒進會)’에서 청년학생들에게 항일의식을 지도하였다. 1928년 4월에 일어난 ‘이경채(李景采) 항일격문배포’ 사건으로 21일에 체포되어 3개월간 복역하였다. 2개월 후 김재명(金在明)이 책임지고 있던 광주야체이카 소속으로 활동하던 중 다시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3년간 복역하였다. 이 밖에 다양한 건국운동을 벌였는데, 해방 직후 결성된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의 부위원장·학무부장 등을 역임하였고, 1945년 11월 20일부터 시작된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는 해남군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46년 2월 15일부터 약 2주에 걸쳐 열렸던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는 농민조합전국총동맹의 대의원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슬하에 1남 5녀를 두었다. 2005년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 관련자료 (3건)

· 관련주제어 (2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