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삼 / 梁柱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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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종교·철학/개신교
· 유형 : 인물/종교인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1879-미상. 목사·사회사업가. 평안남도 용강 출신. 20세에 기독교에 입교하고 상경, 양잠전습소(養蠶專習所)에 다니던 중 미국인 선교사의 주선으로 외국유학길에 올랐다.1901년 상해(上海) 중시학원(中西學院)에 입학하여 감리교세례를 받았으며, 1905년 이 학교를 마쳤다.이듬해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하면서 한국인감리회(韓國人監理會)를 설립하여 선교사업을 하는 가운데 1908년 《대도월보 大道月報》를 창간하고 주필로 활약하였다.그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이 대한제국정부의 외교고문인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Stevens, D.)를 저격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스티븐스가 절명하기에 앞서 장인환과의 대질심문 통역을 맡았다.이 과정에서 장인환이 2등살인죄로 비교적 가벼운 선고를 받게 하는가 하면, 전명운은 무죄선고를 받도록 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1910년 테네시주 밴더빌대학 신학과에 진학하고 2년 뒤 이 대학을 졸업하면서 목사가 되었다. 다시 예일대학교로 옮겨 1914년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이듬해 감리교 실력자로 귀국하여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교수로 재직하며 1916년 《신학세계 神學世界》를 창간하였다. 1917년 윤치호(尹致昊)가 경영하는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교감에 취임하였고, 이듬해 남감리회선교백년 기념사업회(南監理會宣敎百年紀念事業會)총무에 선임되었으며, 1919년 서울 종교교회(宗橋敎會)목사로 교권확립에 주력하였다.1922년 미국남감리회총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한 뒤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신학을 연구하면서 미국남감리회 만주·시베리아 선교사업 총책을 맡기도 하였다.귀국하여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이사, 1927년 조선남감리회 합동연구위원회 위원으로 감리교회 합동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이듬해 이스라엘에서 개최된 국제선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다. 1930년 남감리회 조선 연회장(年會長)에 선출되고, 그해 11월 남북감리교회를 규합하여 기독교 조선감리회를 조직하여 그 초대 총리사(總理師)가 되었는데 이는 국내 교파합동의 효시로 주목받았다. 1931년 미국 렌돌프 메큰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34년 중국에서 열린 남감리회·북감리회 총회에 각각 한국대표로 참가하였으며, 1936년 해주구세요양원(海州救世療養院)이사, 1938년 조선기독교서회(朝鮮基督敎書會)이사에 취임하였다. 조선감리회 총리사를 사임한 1938년부터 만주 선교사업을 관장하고, 1941년 배화여자고등학교 재단이사에 취임하는데, 그 무렵 친일에 기울게 되어 신궁참배(神宮參拜)사절로 일본에 건너가는가 하면, 1942년 기독교 지도층 인사들과 미영(美英)타도 좌담회까지 여는 반민족적 작태 또한 삼가할 줄 몰랐다. 광복을 맞이하여 회개를 거듭해오다가, 정부수립 후 1949년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역임중 이듬해 6·25사변으로 납북되었다. 납북 뒤의 활동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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