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용호 / 洪龍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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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종교·철학/천주교
· 유형 : 인물/종교인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1906-미상. 천주교 신부. 평안남도 평원 출생. 1920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하여 신부수업을 마친 뒤 1933년 5월 라리보(Larribeau, A. J., 元亨根) 주교에 의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평양 관후리 주교좌성당 보좌신부, 평양교구장 비서, 영유(永柔)·순천(順川)의 본당 신부를 거쳐, 1942년 평양 교구장 직무대리를 역임하다가 1943년 3월 평양교구의 주교가 되었다. 제5대 평양 교구장에 취임하였으며, 한국인으로서는 1942년 12월 서울 교구장에 취임한 노기남(盧基南)주교에 이어 두번째 주교가 되었다. 본당신부 직책 외에 주로 교회출판물 간행을 담당하였고 보좌신부 때인 1934년 평양교구 출판위원으로 임명되어 평양교구 가톨릭운동연맹 중앙부의 기관지인 《가톨릭연구강좌》를 창간하고, 같은해 이를 《가톨릭연구》로 발전시켜 편집장 겸 주필로 활약하였다. 같은해 8월 평양교구 가톨릭운동연맹 의장으로 선임되어 평신도 중심의 전교운동을 활성화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1937년 《가톨릭연구》를 《가톨릭조선》으로 개편한 뒤 이 잡지를 부스(Booth, W.) 신부에게 맡기고 자신은 교구출판업무만을 전담하였다. 1936년 《가톨릭청년》이 폐간된 뒤 한국가톨릭의 문화·학술을 유일하게 대변하고 있던 《가톨릭조선》은 재정난으로 결국 1938년 12월호로 폐간되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평양교구 관할하에 있던 미국의 메리놀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들과 함께 간첩혐의로 체포되어 일본경찰에 의하여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일제에 징발되었던 관후리 주교좌성당을 되찾기 위하여 북한공산정권과 교섭하였고, 1946년 성당을 되돌려받은 뒤 성당 신축공사에 착수하였다. 1949년 5월 덕원교구의 사우어(Sauer, B.) 주교 체포 및 덕원의 베네딕토수도원 몰수에 항의하기 위하여 북한 내무상에게 면담을 청하였으나, 면담 예정일인 5월 14일 납치되고 말았다. 그뒤 1949년 말까지 평양 교화소(敎化所) 특별정치범 감옥에 수감되었다는 것까지는 확인되었으나, 그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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