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제학 / 崔濟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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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칭별칭

중열 / 仲悅
습재 / 習齋
· 분야 : 역사/근대사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1882-1959. 일제강점기 유학자·독립운동가. 자는 중열(仲悅)이고, 호는 습재(習齋)이다. 본관은 탐진(耽津)이고, 전라북도 진안(鎭安) 성수(聖壽) 목동 출신이다. 독립운동 당시에는 전라북도 장수군(長水郡)에서 지냈다. 고려 인종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상주국(上柱國)의 훈호(勳號)를 받았으며 탐진백(耽津伯)에 봉해진 장경공(莊景公) 최사전(崔思全)의 후손이다. 부친은 지은(芝隱) 최성호(崔成鎬)이다. 그의 집안은 선조 때부터 지극한 효성과 깊은 우애로 이름나 있었다. 그는 6세에 모친을 잃고 형수 손에 자랐으며, 11세에 경(經)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어려서부터 강직한 성품을 지니고 있어 고을의 재상이 고관의 자식들에게 장원(壯元)을 내리는 것을 보고 항의한 일도 있었다. 1894년(고종 31)에 부친이 김개남(金開男)의 동학당 부대에 의해 피살되자, 13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장검(長劍)으로 복수를 한 뒤에 부친상을 치르겠다고 하였다. 이에 큰형이 말리면서 집안에 가둬두었으며, 얼마 후 김개남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나서야 상을 치렀다. 이기회(李起晦)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3년 상을 마친 1896년(건양 1)부터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간재(艮齋) 전우(田愚)·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등 여러 대학자의 문하에 출입하였으나, 큰형의 명으로 그 중 최익현에게 수학하게 되었다. 최익현은 그를 보고 가정 교육을 잘 받아 학문으로 성공할 싹이 보인다고 평가하였다. 1906년(광무 10) 4월 최익현이 일으킨 태인의거(泰仁義擧) 때 참모직을 맡아 의병 소집 및 군비(軍備)를 편성하여 활동하다 동지들과 함께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4개월 간 감금을 당했다가, 최익현이 대마도(對馬島)에서 순국하자 부산으로 운구(運柩)를 모셔다 정성스레 장례를 치룬 후 고향 진안으로 돌아왔다. 1910년(융희 4) 경술국치 후로는 두류산(頭流山)을 오르내리며 통한(痛恨)의 시간을 보내다 경상남도 하동군(河東郡) 청암면(靑岩面) 학동(鶴洞)으로 옮겨 은둔 생활을 하였다. 7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묘소는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방사동에 자리하고 있다. 그의 저서 《습재실기(習齋實記)》는 최용식(崔龍植)과 구연건(具然健)의 서문, 장인수(張仁洙)의 발문을 붙여 1963년 석판본 2권 1책으로 간행되었다. 호남 의병들의 항일투쟁 때 공적이 인정되어 1990년 애족장이 추서(追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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