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린 / 崔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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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칭별칭
고우 / 古友
여암 / 如庵
· 분야 : 역사/근대사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1878-미상. 3·1독립만세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호는 고우(古友), 도호(道號)는 여암(如庵). 함경남도 함흥 출신.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덕언(德彦)의 아들이다. 도필두(都必斗)에게서 한학(漢學)을 배우고, 18세에 상경하여 각지를 유람하였다. 불교에 귀의하려고 금강산 장안사에 들어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1895년(고종 32) 함경남도관찰부 집사가 되었다. 1902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한국인들이 조직한 일심회(一心會)에 가입하여 정부의 개혁을 추진하다가 발각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잠시 피신하였다가 귀국, 외부주사(外部主事)가 되었다. 1904년 한국 황실 특파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동경부립 제일중학교(東京府立第一中學校)에 입학하였는데, 이때 일본유학생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다. 1906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에 입학, 1909년에 졸업하고 이듬해 귀국하였다. 33세 때 손병희(孫秉熙)의 권유로 천도교(天道敎)에 입교하였으며,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 교장에 취임하였다. 한편, 안창호(安昌浩)의 발의로 조직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배일구국운동에 투신하였다. 1918년 1월 미국대통령 윌슨(Wilson, T. W.)은 전후처리 문제해결을 위한 방안 중 식민지 문제는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해결하여야 하며 폴란드 민족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제창하였으며, 1919년 1월 중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는 등 세계의 정세가 점차 약소국에 유리한 쪽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에 손병희를 비롯하여 천도교인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과 협의, 파리강화회의가 열리는 것을 기회로 조선민족도 궐기하여 독립의 열망이 충만함을 보여주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3·1독립만세운동에 관한 세부적 계획이 추진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그 계획의 실행을 맡아보았다. 이해 2월 중앙학교(中央學校)교장 송진우(宋鎭禹), 교사 현상윤(玄相允) 및 최남선(崔南善) 등을 만나 독립만세운동에 관한 계획을 설명하고 찬동을 얻어냈다. 이들은 다시 만나 협의한 끝에 당시의 이름있는 인사들 및 기독교도 등을 설득하여 이 운동 계획에 참여시키기로 결정하였으나 이들에 관한 교섭은 결국 보람없이 끝나고 말았고, 신흥사(新興寺)의 한용운(韓龍雲)에게 그 계획을 설명하여 찬동을 얻어내었다. 또, 독립만세운동의 일원화 방침을 역설하여 마침내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합을 성취시켰다. 그리고 최남선에게 독립선언서의 골자 및 방략을 제시하여 초안을 작성하도록 하였으며, 작성된 초안은 각 대표들에게 회람, 동의를 얻은 뒤 날인을 받아 활자판으로 만들어, 잠시 집에 감추어두었다가 보성사(普成社)에 보내어 인쇄하였다. 3월 1일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대표 33인 중 28인과 함께 태화관(泰和館)에 모여 대한독립을 선언한 뒤, 일본경찰에 붙잡혀 출판법 및 위반 보안법, 치안방해 등의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천도교 교세확장에 힘써 도령(道領)·대도정(大道正)·장로(長老) 등을 지냈고, 1927년 구미 30여 개국을 유람하였다. 그러나 그뒤 변절하여 1934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가 되었고, 1937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사장에 취임하였으며, 1939년 임전보국단(臨戰報國團)단장에 취임하는 등 광복 때까지 친일활동으로 일관하였다. 1950년 6·25동란 중 납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