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병림 / 千炳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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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칭별칭

한일래 / 韓一來
한위송 / 韓韋松
한영일 / 韓英日
천병일 / 千炳日
방자원 / 方子遠
위사원 / 韋思源
· 분야 : 역사/근대사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1896-미상. 독립운동가. 이명은 한일래(韓一來)·한위송(韓韋松)·한영일(韓英日)·천병일(千炳日)·방자원(方子遠)·위사원(韋思源). 충청남도 부여 출생. 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에서 활동하였다. 1932년 10월 상해(上海)에서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조선의열단 등 정당 단체의 대표 9명이 회합하여 전선통일문제를 협의할 때, 박건웅(朴建雄)과 함께 의열단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 회의를 통하여 각 단체의 전선통일을 추진하기 위한 협의기구로 동년 11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이 결성되었을 때, 9명의 집행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통일전선 운동에 관여하였다. 1932년 10월 의열단의 김원봉(金元鳳)이 난징(南京)에 설립한 조선혁명간부학교(朝鮮革命幹部學校)에서 정치조(政治組)의 교관으로 군사간부를 양성하였으며, 이 학교의 입교생들을 모집하는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1935년 7월 의열단·한국독립당 등 5개 정당·단체가 통일을 이루어 결성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에서 간부로 활약하였다. 창당시에는 중앙검사위원이었고, 이후에는 화남지부(華南支部)의 총책임을 맡고 있었다. 1938년 12월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 등이 연합하여 결성한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에서 비서로 선출되었으며, 1937년 10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창설된 뒤에는 그 활동을 지휘감독 하는 지도위원으로 활약하였다. 한편 1938년 4월 조선민족전선연맹의 기관지 《조선민족전선 朝鮮民族戰線》을 발행하면서 그 발행인으로 있었으며, 1939년 1월 조선의용대 기관지 《조선의용대통신 朝鮮義勇隊通訊》의 중국어판 주편위원(主編委員)을 맡았다. 충칭(重慶)에서 폐병으로 죽었다. 1994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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