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영 / 蔡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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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칭별칭

채영 / 蔡英
· 분야 : 역사/근대사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1882-1926.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다른 이름은 채영(蔡英)이다. 본적은 경성부이고, 독립운동 당시 주소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이다. 1919년 3월 13일 중국 북간도 용정(龍井)에서 최대 규모의 만세시위인 ‘조선독립축하회(朝鮮獨立祝賀會)’가 개최된 후 조선독립기성회(朝鮮獨立期成會)를 결성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상해(上海)에서 수립되자 조선독립기성회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직할의 북간도 한인 독립운동 단체임을 선언하고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로 명칭을 바꾼 후, 북간도 한인사회 자치는 물론 독립군 편성과 군자금 모금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때 대한국민회 총본부에 배속되어 무관학교(武官學校) 설비위원(設備委員)으로 활약하였으며, 같은 해 9월에는 만주 혼춘(琿春)에서 이용(李鏞)·홍범도(洪範圖) 등과 함께 대한국민회 산하 결사대(決死隊)를 조직하고 무기 구입과 국내진입 후 일본군 공격 계획 등을 세웠다. 1920년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조직된 대한국민혈성단(大韓國民血誠團)의 사령관이 되었다. 같은 해 3월 연길현(延吉縣) 춘양향(春陽鄕) 하마탕[蛤蟆塘]에서 개최된 독립단대표자회의에 홍범도·구춘선(具春先)·황병길(黃丙吉)·이범윤(李範允) 등과 함께 참석하여 통일문제를 의논하였다. 1921년 소련의 원조를 받던 한인연합부대 고려혁명군단(高麗革命軍團)에 참여하여 고려혁명군사관학교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6월 러시아 흑룡주(黑龍州) 스보보드니에서 발생한 자유시참변 때 혈성단을 데리고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에 합류하여 참모부원으로서 러시아군대와 격전을 벌였다. 1923년 중국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석한 후, 1924년에는 국민위원회(國民委員會) 위원으로서 활약을 펼쳤다. 이후 러시아 우스리스크 연변의 이만으로 돌아가서 활약을 펼치다가 중국과 러시아 국경 뽀그라니치나야 역에서 자객으로부터 피살당해 순국하였다. 2002년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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