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창무 / 林昌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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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대사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1893-1944.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충청북도 괴산읍(槐山邑) 증평면(曾坪面) 증평리(曾坪里) 925에 태어났다. 독립운동 당시의 주소지는 전라북도 김제군(金堤郡) 만경면(萬頃面) 만경리(萬頃里)이다. 1919년 그는 당시 만경공립보통학교의(萬頃公立普通學校) 훈도(訓導)로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켜주기 위해 익산군(益山郡) 오산면(五山面)에 있던 애국지사 문용기(文鏞祺)와 비밀연락을 취하며 4월 4일 만경 장터에 장이 열리는 날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4월 4일 정오가 되자 그는 3∼4학년 학생들 백여 명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고 학생들 앞에 서서 거리행진을 벌이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그와 학생들을 체포해 갔다. 1919년 5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保安法) 위반 혐의로 2년형이 언도되어 1년간 옥고를 치루고 나왔다. 1944년 양력 5월 21일 생을 마감하였다. 1982년에는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0년에는 애족장을 포상하였다. 자료에 따라 2년간 옥고를 치른 것으로 되어 있기도 하나, 《동아일보(東亞日報)》 1920년 7월 14일 기사에 따르면 그는 보안법 위반으로 대구 감옥에서 1년간 고생하다 출옥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에 따라 그가 옥고를 치른 기간은 1년간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유물로 〈임창무 등 판결문〉이 있는데, 그와 만경공립보통학교 4학년 학생 6명에 대한 대구복심법원의 판결문으로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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