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순 / 金英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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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교육/교육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1895-미상.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교육자. 본적은 서울이다. 정신여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9년 오현주(吳玄洲)의 권유로 비밀결사단체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에 가입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하였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1919년 3월과 4월 사이에 오현주·오현관(吳玄觀)·이정숙(李貞淑) 등이 주도하여 조직한 혈성단 애국부인회(血誠團愛國婦人會)와 최숙자(崔淑子)·김원경(金元慶)·김희열(金熙烈)·김희옥(金熙玉)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大朝鮮獨立愛國婦人會)가 1919년 6월 대한민국청년외교단(大韓民國靑年外交團) 총무 이병철(李秉澈)의 주선으로 통합하여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기독교회·학교·병원 등을 이용하여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고, 회원들의 회비와 수예품 판매를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여 상해(上海) 임시 정부를 지원하였다. 1919년 9월 김마리아(金瑪利亞)·황애시덕(黃愛施德)을 중심으로 결사부(決死部)·적십자부(赤十字部)를 신설하고 항일독립전쟁을 대비한 체제로 조직을 전환하였는데, 이때 서기로 선출되어 애국부인회의 취지서와 본부·지부의 규칙을 복사하여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애국부인회는 본부와 지부를 통해 임시 정부의 국내 연통부(聯通府)의 역할과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 대한총지부(大韓總支部)의 활동을 대행하는 한편 독립운동자금 확보에 힘써 6천 원의 군자금을 임시 정부에 송금하였다. 1919년 11월 동지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0년 12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고 출감하였다. 1927년 4월 신간회(新幹會) 자매단체인 근우회(槿友會) 창립 준비위원회에 참가하여 회원모집 활동을 펼쳤다. 1927년 5월 28일 개최된 근우회 창립대회에서 21인의 집행위원 중 한 명으로 선출되어 교양부를 맡으면서 여성의 지위향상과 항일독립운동에 힘썼다.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1963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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