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 / 金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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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대사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1911-1983년. 독립운동가. 전라남도 함평 출신. 전라남도 영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작은아버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철(金澈)을 따라 상해로 건너가서, 1928년 상해에 있는 영국계 중학교 퍼블릭스쿨을 졸업하고, 1930년 상해법정대학 정치과에 입학하였다. 같은해 학생신분으로 대한교민단의경대(大韓僑民團義警隊)의 간부가 되었으며, 1931년 박창세(朴昌世)·이수봉(李秀峰) 등과 함께 상해전기회사에 적을 둔 동지들을 중심으로 교포들의 치안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상해한인정위단(上海韓人正衛團)을 조직하고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와 협력하여 친일주구들을 숙청하였다. 이어 한중민족항일대동맹의 선전부장이 되었으며, 1932년 1월 서재현(徐載賢)·유상근(柳相根, 또는 兪相根) 등과 함께 상해한인독립운동자청년동맹을 개조하여 한국독립당 청년부문 별동대로서 상해한인청년당을 조직하고 이사장으로 선임되었다. 같은해 3·4월에 당원인 이덕주(李德柱, 異名 徐利均)·유진만(兪鎭萬, 異名 兪鎭軾)을 조선총독 암살을 위하여 국내로, 최흥식(崔興植)·유상근을 일본 관동군사령관과 일본에 있는 일본 육·해군대신을 암살하기 위하여 대련(大連)으로 각각 밀파하였다. 그런데 파견된 동지들이 모두 잡힘에 따라 일본경찰의 수배를 받게 되어 상해를 탈출하였으며, 같은해에 임시정부 외교부장 비서장이 되었다. 1933년 법정대학을 졸업하고, 남경에 본부를 둔 동방피압박민족연맹(東方被壓迫民族聯盟)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윤봉길(尹奉吉)의사의 상해 훙커우공원(虹口公園)투탄의거와 관련하여 같은해 11월 상해에서 일본경찰에 잡혀 국내로 압송되어 1934년 광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받고 항소하여 같은해 12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다가 법정에서 탈주하였다. 그러나 다시 잡혀 형이 가중, 1941년 11월까지 복역한 후 출옥하였으나, 1942년 2월 예비검속되어 청주형무소에 구금되었으며, 1945년 1월 병보석으로 출감한 후 계속 광주대화숙(光州大和塾)에 연금된 상태에서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전라남도 건국준비위원회 광주청년대장을 역임하였으며, 1968년 건국훈장국민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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