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민 / 金思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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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대사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1898-미상.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사회주의운동가. 본적은 경성부(京城府: 현 서울) 종로구(鍾路區) 통의동(通義洞)이고, 독립운동 당시 주소는 경성부 종로구 계동(桂洞)이다. 동생으로 200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은 김사국(金思國)이 있다. 어려서 부친을 잃고 금강산(金剛山) 유점사(楡岾寺)로 들어가 한학(漢學)을 익혔다. 1910년대 중반에 만주(滿洲)로 망명을 떠나 3년 동안 반일무장부대에 입대하여, 만주 3·1운동에 참가하였다. 1920년 6월 조선노동대회 간사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8월 미국의원단(美國議員團)이 서울을 방문하자 독립을 청원하며 반일시위운동을 시도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인천(仁川) 덕적도(德積島)에 1년간 유배되어 거주제한 조치를 당하였다. 1922년 4월 조선노동대회에 참석하였으며, 8월 제3차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 결성을 주도하고 책임비서직을 맡았다. 9월에는 고려공산당과 공산청년회 간의 갈등문제로 조훈(趙勳)과 견해차이가 나자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에서 탈퇴하였다. 10월에는 신사회 건설이 목표인 노동대회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자유노동자조합 결성에 가담하고 의장에 선출되었다. 또 11월에는 기관지 《신생활(新生活)》에 자유노동조합 결성 취지와 강령 등을 실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3년 1월 경성지방법원에서 2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부당한 대우를 당하자 간수의 칼을 빼앗아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였고, 이후 가혹한 고문을 당해 정신이상자가 되었다. 1924년 7월 출감한 후 함경남도 안변(安邊) 석왕사(釋王寺)에서 모친의 병간호를 받고 회복되었다. 1925년 3월 조선노동회를 경성노동회로 개편하는 일에 조선노동회 집행위원으로서 관여하였다. 2009년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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