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 金餠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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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칭별칭
김빈 / 金斌
김빈 / 金彬
조국동 / 曺國棟
· 분야 : 역사/근대사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1899-1946.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다른 이름은 김빈(金斌)·김빈(金彬)·조국동(曺國棟)이다. 본적은 경상남도 부산(釜山)이고, 독립운동 당시 주소는 중국 상해(上海) 불조계(佛租界)이다. 1918년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1919년 중국 길림성(吉林省)에서 김원봉(金元鳳)과 함께 일제 관공서 폭파 및 일제 고위관리 암살 등을 목적으로하는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였으며, 1920년 9월 14일 국내로 잠입시킨 의열단원 박재혁(朴載赫)이 부산경찰서에 폭탄투척의거를 일으킨 사건에 관여하였다.
1931년 일제의 중국 침략으로 인해 반일의식이 커진 중국 국민당정부(國民黨政府)의 군사적·재정적 지원을 토대로 하는 한중연합방안 등을 모색하였으며, 1932년 김원봉이 국민당정부 장개석(蔣介石)의 원조를 받아 탕산(湯山)에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에서 1934년까지 항일투쟁 사관생도 양성 교관으로 활약하였다.
1934년 3월 1일 중국 남경(南京)에서 개최된 조선대일전선(朝鮮對日戰線) 제2차 대표자대회에 박건웅(朴健雄) 등과 함께 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 대표로 참석하였다. 또 1935년 7월부터는 독립운동단체를 총집결하여 만든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간부로 활약하였으며, 1936년 이후에는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의 비서직을 지내면서 중국 측에 보낼 문서 집필 등에 힘썼다.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총사령부(韓國光復軍總司令部)가 중경(重慶)에서 창설되자 지원활동을 펼쳤으며, 1945년 3월에는 왕영재(王英哉) 등과 함께 광복군 인도(印度) 파견공작에도 관여하였다.
1945년 8·15 광복 후 귀국한 김원봉이 1946년 8월 국내에서 민족혁명당을 조직하였을 때, 상해에 머물며 중앙집행위원직을 지내던 중 남경에서 병사하였다.
1995년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