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수 / 金南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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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칭별칭

학산 / 鶴山
· 분야 : 역사/근대사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1899(광무 3)-1945.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사회주의운동가. 호는 학산(鶴山)이다. 본적은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예안면(禮安面)이고, 독립운동 당시 주소는 경성부(京城府: 현 서울) 종로구(鍾路區) 견지동(堅志洞)이다. 양반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을 배웠다. 서울 중동학교(中東學校) 재학 시절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안동군 예안면으로 내려가서 만세운동을 펼쳤다. 1920년 9월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안동지회 편집부 간사, 1923년 서울 조선노동연맹회(朝鮮勞動聯盟會) 중앙집행위원 등을 지냈다. 1923년 6월 〈경성고무 여공동맹파업의 전말〉이라는 보도 문서를 작성해서 78곳의 노동단체에 발송했다가 체포되어 60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안동으로 내려가서 권오설(權五卨)·안상길(安相吉)·이준태(李準泰) 등과 함께 소작농 권익 보호를 위한 풍산소작인회(豊山小作人會)를 조직하여 5천 명에 달하는 농민운동원을 조직하였다.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 교섭위원, 1925년 화요회(火曜會) 상무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안동의 사상단체인 화성회(火星會)를 조직하였다. 1926년 화요회 추진으로 열리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를 위해 경상남도 지역으로 파견되었을 때, 8월 9일과 10일 이틀 동안 친일 극우파 인사들의 예천형평사(醴泉衡平社) 기습 사건이 일어나자, 조선일보 특파원으로서 매일 전말을 보도하여 전국적 지지를 이끌어 내었다. 1926년 고려공산청년회 안동야체이카를 조직한 후, 6·10만세운동으로 힘을 잃은 조선공산당 재건에 힘썼다. 제3차 조선공산당 핵심간부로 활약하면서 신간회(新幹會) 경성지회에도 참가하였다. 1928년 6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또 1939년에는 대구복심법원에서 사문서위조·공정증권부실기재행사(公正證券不實記載行使)·사기(詐欺) 등의 혐의로 10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2005년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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