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추 / 金基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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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칭별칭
백봉 / 白峯
· 분야 : 종교·철학/불교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1908-1985. 독립운동가·불교지도자.
본관은 김해. 호는 백봉(白峯). 부산 출생. 10세 때까지 제주도에서 자라다가 11세 때 부산으로 이주, 그곳에서 영도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제이상업학교에 진학하였다. 이 학교에서 조선사를 교과목에 삽입시킬 것과 일본명으로 된 학교명을 우리말로 바꿀 것을 요구하는 교명바꾸기운동을 일으켰으며, 일본군의 현역군인이 출장하여 군사교육을 시키는 것도 반대하였다. 이 운동이 교외적(校外的)인 문제로 확산되고 집단적 소요가 거세지자 퇴학처분을 당하였다.
그뒤 20세가 되기 전에 25세 이하의 청년들로서 구성된 청년동맹에 가입하여 민족적 대동단결과 조선민족의 해방에 힘을 기울였으며, 그의 열렬한 기질로 인하여 곧바로 청년동맹위원장의 직위를 맡았다.
그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행상을 하는 한편, 1927년 2월에 발족한 신간회(新幹會)조직과도 관계를 맺는 등 은밀히 활동하였다.
1928년초에는 일본의 사상범에 대한 검거선풍에 의해서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1931년 7월 만보산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부산의 중국음식점 동반루를 부수고 일본형사들에게 쫓기어 만주로 가서 박대좌라는 한국인 장교 밑에서 서생(書生)노릇을 하며 도피생활을 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간부로 가담하였다가 당시 미군정청에 의하여 구금을 당하여 2년동안의 감옥살이를 하였다. 불교에 눈을 뜨게 된 것은 감옥살이 때에 《채근담》과 《벽암록 碧巖錄》을 읽고 인생문제에 대한 회의를 느끼면서부터였다.
1963년초 대전의 심광사(心侊寺)에서 도반들과 선수행(禪修行)의 결사를 맺고 입정에 들어 7개월 만에 오도(悟道)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뒤 서울·인천·경기도일대에서 모임을 가지고 그의 뜻을 따르는 사람을 지도하였다.
1969년에는 대의(大義)의 요청으로 대전 심광사에 머물면서 《금강경》·《유마경》을 강의하였고, 1972년 부산으로 거처를 옮겨 금정사(金井寺)에서 《금강경》을 강의하는 등 재가불자의 선수행포교(禪修行布敎)에 힘을 기울였다.
같은해 부산 남천동 산중턱에 보림선원(寶林禪院)을 설립하고, 그곳에서 수행자들을 모아 매년 선수련법회를 열고 《금강경》·《유마경》·《선문염송 禪門拈頌》을 교재로 선리(禪理)를 가르치고 참선수행을 지도하였다. 총 22차에 걸친 선수련법회를 중심으로 하여 거사불교운동을 고양시켰으며, 불교계에 공관(空觀)을 통한 오도의 성취라는 새로운 선풍(禪風)을 진작시켰다.
1984년에는 지리산으로 선원을 옮기고, 1985년 여름 선수련회를 열고 철야정진을 주관하다가 8월 2일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금강경강송 金剛經講頌》·《유마경대강론 維摩經大講論》·《선문염송요론 禪門拈頌要論》·《백봉선시집 白峯禪詩集》·《절대성과 상대성》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