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서 / 金光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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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칭별칭
경천 / 擎天
현충 / 顯忠
· 분야 : 역사/근대사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1883-미상. 독립군 지휘관. 본관은 시흥.
아명은 현충(顯忠), 별명은 경천(擎天). 함경북도 북청 출신. 대한제국의 포병 부령(副領)이며, 군기창장(軍器廠長)을 역임한 정우(鼎禹)의 아들이다. 1911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23기졸업생으로 기병장교로 동경 제1사단 기병제1연대에 근무하였다.
1916년 동경에 근무하는 한국인 장교들의 모임인 전의회(全誼會)회장에 선임되었다. 1919년 재일 동경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하자 즉시 병가를 얻어 귀국하였다.
이때 마침 일본군장교로 복무중이던 지석규(池錫奎)·이응준(李應俊)도 귀국중이었기 때문에 서로 밀접한 접촉을 하여, 일본군을 탈출한 뒤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에 합의하였다.
그해 6월 지석규와 같이 신의주를 경유하여 만주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에 설립되어 있던 항일독립군 장교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교관으로 취임하여 독립군 훈련에 힘썼다.
당시 신흥무관학교에는 정규 군사교육을 받은 장교 3인이 교관으로 있었는데, 이 세 사람을 삼천(三天)이라 하였다. 즉 신팔균(申八均)은 동천(東天), 김광서는 경천, 지석규는 청천(靑天)이라는 별호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1920년 김광서가 독립군을 무장시킬 무기를 구입할 목적으로 노령 연해주에 도착하였을 때, 마침 일본군에 의하여 이항사변(尼港事變)이 발생하였고, 이때 일본군이 무고한 한국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것을 보고 분격하였다.
그리하여 노령에 재류하는 한국인 청년들을 규합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였다. 이 부대는 6백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적군(赤軍)과 연합하여 일본군 및 그들의 후원하에 활동하는 백계 러시아군을 상대로 항전을 전개하였다.
1922년 일본군이 시베리아를 철수한 뒤 적군이 배신하여 한국독립군의 무장 해제를 단행하자 이에 항거하였으며, 1923년 중국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석하였으나 회의 진행경과를 보고 실망하여 다시 연해주로 돌아왔다.
그뒤 구로지코 부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사관 양성에 주력하였다.
이때 그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사용하던 교재를 번역하여 사용하였다.
1930년대 전반기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족군인구락부(韓族軍人俱樂部)를 조직하여 흩어진 항일 역량을 재규합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으며, 연해주군관구 산하의 군사전문가로 영관급 장교대우를 받으며 봉사하였다.
1933년부터 1936년까지 적군에 의하여 투옥되었으며, 1937년 석방된 후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되어, 현지 집단농장의 작업반장이라는 말단 직위로 노동생활을 하였다.
그뒤 그의 소식을 알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