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진섭 / 吉鎭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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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예술·체육/회화
· 유형 : 인물/예술인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1907-미상. 양화가. 평양 출생.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길선주(吉善宙) 목사의 아들이다. 1932년 일본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서울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민족사회의 서화협회전람회에 참가하였고, 1934년 이종우(李鍾禹)·장발(張勃)·구본웅(具本雄)·김용준(金瑢俊) 등과 양화단체 목일회(牧日會, 1937년 牧時會로 개칭)를 조직하고 동인작품전 활동을 시도하였으나, 일제식민지정책의 조선미술전람회를 외면한 일 등으로 탄압을 받다가 1938년에 와해되었다. 1940년 서울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을 때, 윤희순(尹喜淳)은 ‘현대적인 표현감성이 돋보이는 작품들’이라고 평문에 썼다. 현존하는 그 시기의 작품인 〈정물〉·〈소녀〉·〈원주(原州) 풍경〉 등에서 그러한 특질과 세련성이 확인된다. 1946년 서울대학교가 개교될 때 미술학부 교수로 취임하였고, 미술계 움직임에도 적극 참여하여 조선조형예술동맹 부위원장, 조선미술동맹 서울지부 위원장 및 중앙위원장을 지내면서 미술계의 좌파를 이끌었다. 1948년 8월 해주에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가 열릴 때에 남한의 미술계 대표로 밀입북하여 참가하고 나서 북한에 정착하였다. 그뒤, 북한에서는 평양미y술학교(뒤에 대학으로 승격)교원,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작품활동은 정치적인 주제화들 외에 〈옹진바다 전망〉(1956)·〈종달새가 운다〉(1957)·〈농촌의 모녀상〉·〈금강산 신계사 가는 길에〉(1962)·〈바닷가 풍경〉(1966) 등 풍경화와 인물화를 많이 그린 사실이 확인되어 있다. 1970년대 이후의 행적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으나 1980년 전후에 죽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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