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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인물 > 의병·독립운동가
허장완 / 許璋完 [역사/근대사]
1899-1919.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다른 이름은 허장완(許璋浣)이다. 본적은 경상남도 통영군(統營郡)이다. 1919년 3월 9일과 12일 양일간 배익조(裵益祚)·모치전(牟治田)·김형기(金炯綺)·이학이(李學伊)·양재원(梁在元)·강세제(姜世濟)·권남선(權南善)과
허중환 / 許仲煥 [역사/근대사]
미상-1920년.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다른 이름은 그레고리 한(韓)이다. 만주(滿洲)로 이주하여 생활하면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독립군(獨立軍)에 가담하였다.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국내 전국으로 확산되자 만주 일대에서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1
허형 / 許炯 [역사/근대사]
1894-1963년. 독립운동가. 평안남도 안주 출신. 1919년 3·1운동 후에 서울에서 조선독립청년단을 조직,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안국동 이도제(李道濟)의 집에서 노령(露領)지방의 이동휘(李東輝)가 경상북도 경주에 거주하는 최익선(崔益善)에게 보내는 “우리들의
현상로 / 玄相魯 [역사/근대사]
미상-1919년 3월 13일.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다른 이름은 현남로(玄南魯)이다. 1919년 3월 13일 조선독립기성총회(朝鮮獨立期成總會)가 중국 길림성(吉林省) 연길현(延吉縣) 용정촌(龍井村) 서전평야(瑞甸平野)에서 주최한 3·1독립운동축하식에 참석하였다.
현상윤 / 玄相允 [역사/근대사]
1893-?. 항일기의 독립운동가·교육가. 3·1운동의 계획과 추진에 중요한 구실을 한 인사 16인 중 한 사람으로, 3·1운동 후 복역한 뒤,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중앙집행위원을 지냈다. 광복 후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지내다가, 고려대학교로 승격되
현순 / 玄楯 [역사/근대사]
1880-1968. 독립운동가. 일명 송원상(宋元相). 서울 출신. 1919년 3·1운동 때 목사로서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뒤 중국 상해(上海)에 밀파되어 평화회의의 주도자인 미국대통령 윌슨(Wilson, T. W.)과 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어 동양평화유지에
현시화 / 玄始化 [역사/근대사]
1892-1968.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본관은 연주(延州)로 제주 표선면(表善面) 세화리(細花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보천교(普天敎)를 믿다가 무극대도교(無極大道敎)의 핵심 신도가 되어 포교 활동을 하였다. 1940년 제주도 내에 신도들이 확
현정경 / 玄正卿 [역사/근대사]
1886-1941. 독립운동가. 본명은 병근(炳瑾). 호는 하죽(河竹). 평안북도 박천 출생. 1919년의 3·1운동 후 만주 동삼성(東三省)으로 망명하여 한족회(韓族會)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에 가담하여, 항일활동을 하였다. 1920년에는 광한단(光韓團)을 조
현천묵 / 玄天默 [역사/근대사]
생몰년 미상. 독립운동가. 본관은 수원(水原). 호는 백취(白醉). 함경북도 경성 출신.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자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후 서일(徐一)을 만나 대종교에 입교하여 1911년 1월 참교(參敎), 1913년 4월 지교(知敎), 1917년 5월
호억준 / 扈億俊 [역사/근대사]
1885년(고종 22) 2월 8일∼1941년 4월 7일.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본적은 충청남도 서산(瑞山)이다. 1919년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 소식을 접하면서, 면사무소 사환 송재만(宋在萬)을 행동총책으로 하여 면장 이인정(李寅正)·면내 유지 남계원(南桂原
홍경식 / 洪景植 [역사/근대사]
1889년(고종 26)∼1961년. 독립운동가. 충청북도 진천 출신. 참판 승헌(承憲)의 아들이다. 경술국치에 분개하여 집안이 모두 봉천성 환인현(奉天省桓仁縣)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19년 3·1운동 때 그곳의 광한단(光韓團)에 가입하였다. 1921
홍경옥 / 洪景玉 [역사/근대사]
1895년(고종 32)∼미상. 일제강점기 항일운동가. 제주도 성산읍(城山邑) 오조리(吾照里)에서 출생하여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1927년 5월 16일 성산청년회가 주관한 제주 성산면 체육대회에서 씨름 대회가 열렸는데, 한국인 선원과 일본 선원, 일본인 선원에 고용
홍관후 / 洪寬厚 [역사/근대사]
1890년(고종 27)∼1971. 독립운동가. 일명 재범(在範). 경기도 화성 출신. 1919년 3월 26일부터 28일까지 홍면(洪) 등이 전개한 수원군 송산면 사강리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사강 장날인 28일 홍면 등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는데, 이때 일본인
홍기조 / 洪基兆 [역사/근대사]
1865∼1938. 항일기의 독립운동가. 호는 유암(游菴). 동학에 들어가 동학혁명에 가담했으며, 1919년 손병희(孫秉熙) 등 천도교 간부들과 민족대표로서 서명한 33인의 한 사람으로, 3·1운동에 참여한 뒤,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천도교의 도사·장로로
홍남후 / 洪南厚 [역사/근대사]
1871-1924. 독립운동가. 경기도 수원 출신. 1919년 3월 26일부터 28일까지 홍면(洪) 등이 계획하여 전개한 수원군 송산면 사강리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사강 장날인 28일 홍면 등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는데, 이때 일본인 순사부장 노구치(野口廣三
홍두익 / 洪斗益 [역사/근대사]
미상-1919.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본적은 경상남도 창원시(昌原市) 진전면(鎭田面: 현 마산시(馬山市))이다. 1919년 4월 3일 진동면(鎭東面) 고현리(古縣里) 장날을 이용하여 변상태(卞相泰)·권영대(權寧大)·권태용(權泰容)·구수서(具守書)·변상술(卞相述)·
홍두진 / 洪斗珍 [역사/근대사]
1893-미상. 일제강점기의 항일운동가. 제주도 성산읍(城山邑) 오조리(吾照里)에서 출생하여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1927년 5월 16일 성산청년회가 주관한 제주 성산면 체육대회에서 씨름 대회가 열렸는데, 한국인 선원과 일본 선원, 일본인 선원에 고용된 타 지역
홍명선 / 洪明善 [역사/근대사]
1900-1974. 독립운동가. 일명 명선(明先). 경기도 화성 출신. 1919년 3월 26일부터 3월 28일까지 수원군 송산면 사강리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홍면(洪) 등과 주도하였다. 3월 26일 면사무소에서 200여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
홍범도 / 洪範圖 [역사/근대사]
1868-1943. 항일기의 독립운동가. 항일전에서 수차례 적군을 격파, 경술국치 후 간도의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이 됐다. 봉오동전투와 제1연대장으로 청산리전투에 참전했다. 대한독립군단 부총재로 활약,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세웠다.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홍병기 / 洪秉箕 [역사/근대사]
1869-1949. 항일기의 독립운동가. 호는 인암(仁菴). 천도교인으로 동학농민운동에 가담 후 교세확장과 구국운동에 힘썼다.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 옥고를 치른 후 만주로 망명해 고려혁명당의 고문으로 활약하다 재복역했다.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
홍봉진 / 洪鳳珍 [역사/근대사]
1884-미상. 일제강점기 항일운동가.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제주도 성산읍(城山邑) 오조리(吾照里)에서 출생하여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1927년 5월 16일 성산청년회가 주관한 제주 성산면 체육대회에서 씨름 대회가 열렸는데, 한국인 선원과 일본 선원, 일본인
홍석운 / 洪錫雲 [역사/근대사]
1876-1926.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본적은 평안남도 중화(中和)이다. 1920년 평양에 위치한 기홀병원(紀笏病院)에서 임시 정부에서 파견한 김석황(金錫璜)과 접선한 후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고 지령에 따라 결사의용단(決死義勇團)을 조직하였다. 김
홍석정 / 洪錫禎 [역사/근대사]
미상-1919.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다른 이름은 홍석정(洪錫貞)이다. 1919년 3월 1일 이경섭(李景燮)으로부터 안봉하(安鳳河)에게 전달된 독립선언서를 김영만(金永萬)·나찬홍(羅燦洪)·이영철(李永喆)·안봉하·최용식(崔鎔植)·한청일(韓淸一) 등과 함께 각 지역에
홍석호 / 洪碩浩 [역사/근대사]
미상-1927.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다른 이름은 홍석호(洪錫浩)이다. 본적은 평안북도 삭주(朔州)이고, 독립운동 당시 주소는 중국 만주(滿洲) 집안(輯安)이다. 1919년 3월 평안북도 삭주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 직후 부친을 따라 중국 남만주
홍성익 / 洪成益 [역사/근대사]
1883-1920년. 독립운동가. 평안북도 정주 출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으로 활동하다가 옥중에서 순국한 애국지사이다. 1902년에 평양 숭실중학교를 거쳐 1907년에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신민회(新民會)에 가입,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하였다. 1910년 데라
홍순갑 / 洪淳甲 [역사/근대사]
1896-1929. 독립운동가. 호는 우당(愚堂). 전라북도 익산 출신. 1919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재학 중 3·1 운동이 일어나자, 귀국하여 이상재(李商在) 지도 아래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1921년에 붙잡혀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며, 출옥 후 중국
홍양명 / 洪陽明 [역사/근대사]
1896-1950. 일제강점기 항일운동가·언론인. 본명은 홍순기(洪淳起)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제주도 제주시(濟州市) 삼도동(三徒洞)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정의현감(旌義縣監)을 역임했던 홍재진(洪在晋)이고, 아버지는 홍종언(洪鍾彦)이다.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홍언 / 洪焉 [역사/근대사]
1880-1951.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본명은 홍종표(洪宗杓)이다. 출신지는 서울이다. 1904년(광무 8) 중국에서 귀국한 후, 미국 하와이로 이민을 떠났다. 1906년(광무 10) 하와이 막가월리 농장에서 송건(宋建) 등과 함께 자강회(自强會)를 조직하였다.
홍영기 / 洪英基 [역사/근대사]
1918-1999.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본적은 전라북도 순창(淳昌)이다. 고창고등보통학교(高敞高等普通學校: 현 고창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1939년 3월 일본 조치대학[上智大學]에 입학하였으나 곧바로 중퇴한 후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
홍완기 / 洪完基 [역사/근대사]
1897-1944. 독립운동가. 황해도 은율 출생. 1921년 4월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가담, 활동하였다. 같은해 8월 국내공작원이 되어 군자금모집과 지하조직의 확대를 꾀하는 등 임시정부와 국내와의 연락통로를 원활히 개척하였다. 풍천읍에 사는 문용
홍완표 / 洪玩杓 [역사/근대사]
1927-1970.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본적은 전라북도 순창(淳昌)이다. 전라북도 순창 금과국민학교(金果國民學校) 시절 박내은(朴來殷) 선생님으로부터 반일과 반전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1941년 광주사범학교(光州師範學校)에 진학한 후에도 항일투쟁에 대한
홍원식 / 洪元植 [역사/근대사]
1877-1919. 항일기의 독립운동가. 한말의 군인으로 군대해산령에 반발하며 일본군과 싸우다 부상당하자 고향에 가서 구국동지회를 조직하고 활약했다. 고향의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 제암리 교회 대학살 때 죽었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홍원표 / 洪元杓 [역사/근대사]
1909-1939년. 항일학생운동가. 제주 출신. 1926년 4월 영창소년단(英昌少年團)을 조직하여 항일사상을 고취하였으며, 1929년 4월 광주학생시위운동으로 광주농업학교에서 퇴학당하였다. 1929년 6월 조선독립과 사회주의 계열 운동을 연구할 목적으로 독서회를 조
홍윤무 / 洪允武 [역사/근대사]
1872-1943. 한말의 의병. 일명 홍종렬(洪鍾烈). 전라북도 임실 출신. 1907년 이석용(李錫庸)의병대에 가담, 연락책이 되었다. 진안·용담·임실 등지에서 활약하였고, 1908년에는 진안에서 일본헌병의 밀정 김관일(金寬日)을 살해하였다. 부잣집과 면사무소 등을
홍재문 / 洪在文 [역사/근대사]
1897-1958. 독립운동가. 경상남도 밀양 출신. 1919년 3월 11일 부산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 학생들의 의거는 경상남도 지방에서도 항쟁의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또 이 고장의 자주독립의 항일의식을 더 한층 높여주었다. 당시 부산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있던 중
홍재의 / 洪在義 [역사/근대사]
1886-1961.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다른 이름은 홍기숙(洪奇淑)이다. 본적은 경기도 안성(安城)이다. 1919년 4월 1일 경기도 안성의 양성면(陽城面)과 원곡면(元谷面) 일대에서 시행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운동은 이유석(李裕奭)·최은식(崔殷植)·
홍종락 / 洪鍾洛 [역사/근대사]
1887-1939년. 독립운동가. 경상북도 군위 출신.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인 길림성군정서 부속 흥업단(興業團)의 이만준(李萬俊)이 환인현(桓仁縣) 한교공회(韓僑公會)의 김인제(金仁濟)·최성기(崔聖基)·황문익(黃文益)을 데리고 1920년 말경 국내로 잠입하여
홍종렬 / 洪鍾烈 [역사/근대사]
1872-1943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자는 윤무(允武)이고, 호는 지산(芝山)이다. 홍윤무(洪允武)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전라북도 임실(任實)에서 태어났다. 호은(湖隱) 홍연(洪演)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덕은(德隱) 홍지섭
홍주 / 洪疇 [역사/근대사]
1897-1954. 독립운동가. 평안북도 의주 출신. 1919년 의주에서 3·1운동 참가 후 아버지 제업(濟業)과 같이 만주로 망명,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하고 재무부장 전덕원(全德元)휘하에서 회계를 맡아 활약하였다. 같은해 5월 상해(上海)에서 개최된 의정원
홍주일 / 洪宙一 [역사/근대사]
1876-1927년. 독립운동가. 대구 출신. 1915년 1월 15일 달성군 수성면 안일암에서 시회(詩會)라는 명목으로 모임을 가지고 윤상태(尹相泰)·서상일(徐相日)·이시영(李始榮) 등과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朝鮮國權回復團中央總部)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어 기밀부장으로
홍준옥 / 洪㻐玉 [역사/근대사]
1888-1945. 독립운동가. 경기도 화성 출신. 1919년 3월 26일부터 3월 28일까지 그의 형 면 등이 계획하여 전개한 수원군 송산면 사강리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3월 26일 송산면사무소에서 2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만세
홍진 / 洪震 [역사/근대사]
1877-1946. 항일기의 독립운동가. 호는 만호(晩湖·晩悟). 경술국치 후 변호사로서 독립운동가를 위한 법정투쟁에 나섰다. 3·1운동 후 상해 망명, 임시정부 의정원의장·국무령 등을 지냈다. 김구와 한국독립당 조직, 한국광복진선 운영간부로 뽑혔다. 건국훈장 국민장
홍진수 / 洪鎭洙 [역사/근대사]
1885-1957.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본적은 경상북도 성주(星州)이다. 1919년 4월 2일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星州邑)에서 시행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운동은 김희규(金熙奎)·송규선(宋圭善)·송문근(宋文根)·송수근(宋壽根)·송우근(宋祐根)·송인집
홍찬섭 / 洪燦燮 [역사/근대사]
생몰년 미상. 독립운동가. 충청남도 천원 출신. 1919년 3월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칠곡리에서 이유석(李裕奭)·이근수(李根洙)·이덕순(李德順)·최은식(崔殷植)·이희룡(李熙龍)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4월 1일 오후 8시경 원곡면사무소 앞에
홍충희 / 洪忠熹 [역사/근대사]
1878-1946. 독립운동가. 서울 출생. 호는 우봉(禹峰). 1903년 대한제국 무관학교 보병과를 졸업하고 대한제국 육군부위(陸軍副尉)를 지냈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가운데의 한 사람인 권동진(權東鎭)을 도와 참여한 뒤 김규식(金奎植)·김찬수
홍학순 / 洪學淳 [역사/근대사]
1902-1934. 독립운동가. 일명 홍학원(洪學元)·홍학(洪學). 평안북도 의주 출신. 1919년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 1924년 무장 항일운동단체인 대한통의부(大韓通義府) 제5중대에 입대하여 국내에서 일본경찰과 접전하면서 군자금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192
홍효선 / 洪孝善 [역사/근대사]
1879-1932. 독립운동가. 경기도 화성 출신. 1919년 3월 26일부터 28일까지 송산면 사강리 일대에서 홍면(洪)·왕광연(王光演)·문상익(文相翊)·홍명선(洪明善)·김교창(金敎昌) 등이 주동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3월 26일 송산면사무소 앞에
황갑주 / 黃甲周 [역사/근대사]
1894-미상.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자는 해수(海水)이고, 호는 배천(配泉)이다.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승지(承旨) 황적(黃迪)의 12세손이다. 조부는 통정대부(通政大夫) 황치방(黃致坊)이다. 1919년 3·1운동(三一運動)이 일어난 후, 3월 10일 전라북도
황기환 / 黃玘煥 [역사/근대사]
미상-1923. 독립운동가. 평안남도 순천 출신.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유럽외교 및 파리강화회의의 외교활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파리에 김규식(金奎植)을 파견, 설치한 주파리위원부(駐巴里委員部)에서 서기장(書記長)으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김규식을 도와 파리강
황덕환 / 黃德煥 [역사/근대사]
1895-1929. 독립운동가. 일명 건(鍵). 함경남도 원산 출신. 1913년 일본으로가서 동경(東京)의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에 입학, 수학하다가 1916년 10월 만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23년 1월 다시 만주로 건너가서 항일운동을 계속하였으며
황병길 / 黃炳吉 [역사/근대사]
1867-1920. 항일기의 독립운동가. 경술국치 후 시베리아로 망명, 이범윤의 산포대에 편입해 항일전을 펼쳤다. 한민회를 조직해 독립군양성에 힘썼다. 북로군정서와 통합해 청산리전투를 치른 후 일본군에게 피살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황병학 / 黃炳學 [역사/근대사]
1876-1931. 독립운동가.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영문(英文). 전라남도 광양 출생. 재모(在模)의 아들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국운이 기울어져감을 통분, 황사중(黃士中)·한성순(韓性純)·고견(高堅) 등과 협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였
황봉신 / 黃鳳信 [역사/근대사]
미상-1918. 황해도 평산(平山) 출신이다. 형 황봉운(黃鳳雲)과 함께 의병이 되어 이진룡(李鎭龍)의 휘하에서 싸우다가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만주 관전현(寬甸縣)으로 망명했다. 그 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키 위해 입국, 평북 운산금광(雲山金鑛)에서 외국인 금괴
황봉운 / 黃鳳雲 [역사/근대사]
미상-1918년 5월 1일. 황해도 평산(平山) 출신이다. 아우 황봉신(黃鳳信)과 함께 의병이 되어 평산 지역 의병 총사령관인 이진룡(李鎭龍)의 휘하에서 싸웠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만주 관전현(寬甸縣)으로 망명하였다. 그 후 군자금 모집을 위해 입국하여, 운
황삼룡 / 黃三龍 [역사/근대사]
1916-1976. 광복군. 황해도 신천 출신. 1940년 11월 중국 시안(西安)에 있던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에 입대하는 한편, 중국 중앙전시간부훈련 제4단 특과총대 학원대한청반(中央戰時幹部訓練第四團特科總大學院隊韓靑班)에서 군사·정치 교육을 수료하였
황상규 / 黃尙奎 [역사/근대사]
1890-1941. 독립운동가. 문옥의 외아들이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여기에서도 재정위원에 임명되어 군자금 모금에 힘써 당시 18만원이라는 거액의 자금을 모았다. 1919년 11월 9일 길림에서 김원봉·곽재기 등과 의열단을 조직, 그 일원으로 소위
황에스터 / 黃Esther [역사/근대사]
1892-1971. 독립운동가. 일명 애덕(愛德)·애시덕(愛施德). 1913년 동료교사 김경희(金敬喜)와 교회 친구 안정석(安貞錫)과 더불어 비밀결사대인 송죽회(松竹會)를 조직하고, 애국사상이 깊은 학생들을 엄선하여 정신교육을 행하고 송죽회의 자회(子會)설립을 지도하
황영 / 黃暎 [역사/근대사]
1848-1921. 일제강점기 의열(義烈). 남원시(南原市) 사매면(巳梅面) 출신이다. 1910년(융희 4)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고, 1919년(융희 13) 고종이 승하(昇遐)하자, 나라 잃은 슬픔을 참지 못하고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자결하였다. 그러나 가족들에
황웅도 / 黃熊度 [역사/근대사]
1901-1952.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사회주의운동가. 본적은 경상남도 고성(固城)이다. 1920년 12월 고성군 고성면에서 독립운동사상 고취를 위한 청년 중심의 일심회(一心會)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활동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8개월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황원후 / 黃元厚 [역사/근대사]
1897-1920. 평북 용천(龍川) 출신이다. 1915년 만주에 가서 한족회(韓族會)에 가입하고 신성학교(信成學校)교장을 지냈다. 이듬해 한족회 강남구 갑장(江南區甲長)으로 군자금조달에 힘썼으며, 1919년 3·1 운동 때는 강남(江南) 지구 시위운동을 주도했고,
황위현 / 黃渭顯 [역사/근대사]
1891-1966.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호는 난사(蘭史)이다. 본관은 장수(長水)이며, 전라남도 구례군(求禮郡) 간전면(艮田面) 만수동(萬壽洞) 구안실(苟安室: 매천 황현의 서재)에서 태어났다.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중부(仲父)의 양자로
황인수 / 黃麟秀 [역사/근대사]
1886-1945. 항일기의 독립운동가. 3·1운동 때 교하면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최창섭 등과 장날을 기하여 계속적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군자금모집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건국표창이 추서되었다.
황재옥 / 黃在玉 [역사/근대사]
1880-1932.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본적은 경기도 여주(驪州)이다. 1919년 4월 천도교 측의 지시를 받은 경성농업학교 재학생 원필희(元弼熙)가 경기도 여주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책임지고, 여주군의 각 면(面)을 돌며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만세시위운동
황재운 / 黃在雲 [역사/근대사]
1887-1939. 독립운동가. 평안남도 강서 출신. 본래 증산면 화선리 사람으로, 일을 보러 왔다가 1919년 3월 4일 최능현(崔能賢)·송현근(宋賢根) 등이 주동한 반석면 상사리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의 만세운동은 반석교회와 원장교회가 중심이 되어 계획하던
황종화 / 黃鍾和 [역사/근대사]
1878-1950. 독립운동가. 경상남도 진주 출신. 1919년 3·1운동 당시 경상남도 각지를 순회하면서 만세시위운동에 가담하여 독립선언문과 격문 등을 배포하여 각 지방에서의 만세운동을 선동하였다. 같은해 4월 이운형(李運衡)·이영봉(李永鳳)·김규열(金圭烈) 및 임
황진연 / 黃珍淵 [역사/근대사]
1899-미상.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운동가. 본적은 함경북도 명천(明川)이다. 1918년 1월 거주지를 만주(滿洲)로 옮긴 후 한의원을 운영하며 사회주의운동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당원이 되었다. 1930년 ‘간도 5·30봉기’ 때 길림성(吉林省) 연
황찬서 / 黃贊西 [역사/근대사]
1873-1919.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다른 이름은 황찬서(黃贊瑞)이다. 일제의 강제 병합 이후 강한 항일의지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의병 활동을 선전하는 등의 일을 하였다. 이후 남원(南原)에서 일본 상품의 불매운동, 세금불납, 토지 불매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황창섭 / 黃昌燮 [역사/근대사]
1896-1949.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운동가. 본적은 경상북도 예천(醴泉)이다. 잡화상·자전거포·철공업 등에 종사하였다. 1925년 예천청년회 검사위원·예천신흥청년회 교양부담당 상무집행위원·사회주의 사상단체 오오회(五五會) 집행위원, 1927년 예천사우회
황창오 / 黃昌五 [역사/근대사]
1896년-미상. 독립운동가. 경기도 화성 출생. 일찍이 조국광복을 위하여 헌신할 것을 각오하고 있던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 참가하여 고향인 화성군 태안면 삼정리에서 대중을 규합, 조직하여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계속 독립사상을 고취
황학봉 / 黃學奉 [역사/근대사]
1903-1929. 독립운동가. 평안북도 초산 출신. 일찍이 만주로 망명하여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에 가입, 항일투쟁하다가 동부(同府) 제4중대에서 유격대를 조직하므로 참사(參士)를 자원, 편입하였다. 대원들과 같이 봉천(奉天)일대를 근거로 군자금 모집, 일본
황학수 / 黃學秀 [역사/근대사]
1879-1953. 독립운동가. 본관은 창원(昌原). 일명 이국현(李國賢). 자는 필옥(弼玉), 호는 몽호(夢乎). 충청북도 제천 출신. 3·1운동 이후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및 군무부 비서국장으로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임시정부의
황해수 / 黃海水 [역사/근대사]
1895-1948.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출신지는 전라북도 임실군(任實郡)이다. 1919년 3월 23일 전라북도 둔남면(屯南面) 오수리(獒樹里)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기송(李起松)과 오병용(吳秉鎔) 등이 함께 하였다. 오수리 장터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