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 : 인물 > 의병·독립운동가 총 672건의 주제어가 있습니다.
유형 : 인물 > 의병·독립운동가
최석준 / 崔錫濬 [역사/근대사]
1891-1922. 독립운동가. 일명 석준(錫俊)·석유(錫濡). 평안북도 삭주 출신. 1919년 3·1운동 당시 상경하여 평안북도 삭주군과 창성군의 거사를 종용받고 이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수배를 받자 만주로 건너가 관전현(寬甸縣)을 근거지로 삼고 동지들을
최석호 / 崔碩鎬 [역사/근대사]
1893-1970. 독립운동가. 일명 문석(文錫, 文碩)·문일(文一). 경상남도 합천 출신. 1916년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간부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서 군사훈련을 수료하였다. 1919년 3·1운동과 보조를 맞추어 간도 용정(龍井)에서 만세시위를 주도
최성모 / 崔聖模 [역사/근대사]
1873-1936. 항일기의 독립운동가. 서울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북감리교 목사가 되어 해주 남본정(南本町)교회에서 교역생활을 하였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 등 민중교화사업과 전도사업을 통하여 계속적인 독립운동을 하였다.
최세득 / 崔世得 [역사/근대사]
1921-미상. 광복군. 일명 왕세일(王世一). 평안남도 대동 출신. 1943년 중국 가이펑(開封) 지구에서 광복군 특파원 장호강(張虎崗)과 접선하여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그뒤 가이펑 지구에서 지하활동을 전개하여 초모·선전·첩보 활동을 하였으며, 광복이 되자
최세욱 / 崔世郁 [역사/근대사]
1883-1939. 독립운동가. 일명 우화(宇和). 황해도 재령 출신. 보명학교(普明學校)를 졸업하고 동창인 나석주(羅錫疇)·김덕영(金德永)·최호준(崔皓俊) 등과 함께 3·1운동에 참여하였다. 주에 본부를 둔 한족회(韓族會)에 가입하였으며, 1919년 김덕영을 상해(上
최수봉 / 崔壽鳳 [역사/근대사]
1894-1921. 독립운동가. 일명 경학(敬鶴). 경상남도 밀양 출신. 밀양의 사립 동화학교(同和學校)에 들어갔으나 일제의 강압으로 폐교되자, 1912년 동래 범어사 안에 있는 명정학원(明正學院)을 졸업하고 1913년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에서 수업하다가 중퇴하였
최순탁 / 崔淳鐸 [역사/근대사]
1892-1926. 독립운동가·사회운동가. 함경남도 함흥 출신. 1918년 함흥고등학교·함흥농업학교·영생중학교의 3·4학년 학생들로 구성된 함산학우회(咸山學友會)를 조직하였다. 이듬해 3·1운동이 일어나 함흥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자, 함산학우회 동지들과 3월 3일 함흥
최시흥 / 崔時興 [역사/근대사]
미상-1925. 독립운동가. 평안북도 의주 출신. 삭주에서 마부(馬夫)로 있다가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최주천(崔柱天)·박응백(朴應伯) 등과 함께 천마산(天摩山)을 근거로 천마산대(天摩山隊)를 조직, 500여명의 청년을 규합하여 의주·구성·삭주·창
최여봉 / 崔汝鳳 [역사/근대사]
1900-1970.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사회주의운동가. 다른 이름은 최여봉(崔如鳳)·최해봉(崔海鳳)이다. 본적은 경상남도 김해(金海)이다. 1926년 6월 김행청년회 발행의 벽신문 《청뢰(晴雷)》의 편집위원, 같은 해 12월 김해청년회 야학부위원직, 1927년 7
최영걸 / 崔英傑 [역사/근대사]
미상-1921. 독립운동가. 함경남도 온성 출신.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에 가입, 활동하였다. 1920년 9월 노령(露領)으로 옮겨 그곳 시지미에 있는 강용궁(姜龍宮)의 집에서 김학섭(金學燮)·강병관(姜秉官)·최시능(崔時能)·문창학
최일명 / 崔日明 [역사/근대사]
1888-1976. 독립운동가. 평양 출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평양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1920년에는 평양의 서성리교회에서 청년단을 조직하고 상해(上海)로부터 몰래 들어온 선우 혁(鮮于爀)과 함께 평안남도내에서 군자금을 거두어 상해로 전달하였다
최일엽 / 崔日燁 [역사/근대사]
미상-1921년.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다른 이름은 최일엽(崔日曄)이다. 출신지는 평안북도 선천이다. 1919년 만주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서 조직된 대한독립단의 집동총관(輯東總管)을 지냈다. 1919년 중국인으로부터 개척지
최자남 / 崔子南 [역사/근대사]
1876-1933. 독립운동가. 황해도 재령 출신. 노령(露領) 시베리아로 건너가 그곳에서 장사를 하였다. 1915년경부터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기 시작하였고, 특히 사이토(齋藤實)총독 저격사건을 일으킨 강우규(姜宇奎)와는 약 4개월간 같이 집에서 기거하기도 하였다.
최재석 / 崔在錫 [역사/근대사]
1897-1958.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다른 이름은 최재식(崔在植)이다. 본적은 경기도 안성(安城)이다. 1919년 4월 1일 경기도 안성 양성면(陽城面)과 원곡면(元谷面) 일대에서 시행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운동은 이유석(李裕奭)·최은식(崔殷植)·홍
최재형 / 崔在亨 [역사/근대사]
1858-1920년. 독립운동가. 일명 재형(在衡)·도헌(都憲). 러시아 이름은 뻬돌쏘오, 최뻬찌카. 함경북도 경원 출신. 9세 때 부모를 따라 시베리아 노우키에프스크(煙秋)에 이주하여 러시아에 귀화하였다. 러시아 군대의 어용상인(御用商人)으로 치부하여 관리가 되고
최정기 / 崔貞基 [역사/근대사]
1913-2000.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본적은 전라남도 광주(光州)이다. 광주농업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26년 재학 중 동학생 김남철(金南哲)·김순복(金順福)·정욱(鄭昱)·조길룡(曺吉龍) 등 20여 명과 함께 결의를 하여 항일비밀결사단체인 독서회를 조직하고,
최제학 / 崔濟學 [역사/근대사]
1882-1959. 일제강점기 유학자·독립운동가. 자는 중열(仲悅)이고, 호는 습재(習齋)이다. 본관은 탐진(耽津)이고, 전라북도 진안(鎭安) 성수(聖壽) 목동 출신이다. 독립운동 당시에는 전라북도 장수군(長水郡)에서 지냈다. 고려 인종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최종기 / 崔宗箕 [종교·철학/천도교]
1883-1953년. 일제강점기 천도교인·독립운동가. 호는 표암(杓菴)이다. 전라북도 임실군(任實郡) 운암면(雲岩面) 지천리(芝川里) 출신이다. 조부는 지포(芝圃) 최봉성(崔鳳成)이며, 부친은 복암(復庵) 최승우(崔承雨)이다. 평생을 종교운동과 구국운동에 종사하였다.
최종준 / 崔宗駿 [종교·철학/천도교]
1870-1937년.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천도교인. 본적은 함경남도 이원(利原)이다. 천도교 신자로 함경남도 이원교구장(利原敎區長)을 지냈다.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공시우(孔時祐)·박승룡(朴承龍)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최종협 / 崔宗協 [역사/근대사]
1879-1930.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다른 이름은 이종흡(李鐘洽)이다. 거주지는 함경남도 단천군(端川郡) 하다면(何多面)이다. 함경남도 단천군 하다면·복귀면·수하면·이중면 지역 주민들은 평소 땔나무를 팔고 숯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
최중호 / 崔重鎬 [역사/근대사]
1891-1934. 독립운동가. 황해도 신천 출신. 1906년 황해도 안악에서 김구(金九)와 함께 공부하다가 뒤에 평양으로 건너가 대성학교(大成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08년 김구가 독립투쟁을 전개하다가 잡힌 뒤 그뒤를 이어 독립투쟁을 계승, 발전시켰다. 그러나 19
최지관 / 崔志寬 [역사/근대사]
1868-1930. 독립운동가. 평안북도 구성 출신. 3·1운동 후 만주에 건너가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에 가담, 국내 특파원에 선출되고 이해 민국독립단이 임시정부 산하인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에 통합되자 역시 국내 특파원이 되어 평안북도의 연통제(聯通制)조직의 임
최진동 / 崔振東 [역사/근대사]
미상-1945. 독립운동가. 일명 명록(明錄, 明祿)·희(喜). 함경북도 온성 출신. 일찍이 만주로 건너가서 중국군(中國軍)에 가입, 군사지식과 전투실력을 함양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의 3형제와 같이 조국광복을 위하여 헌신분투할 것을 결의하고 동지
최진하 / 崔鎭河 [역사/근대사]
1890-미상.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출신지는 평안남도 평양(平壤)이다. 1916년 미국으로 망명한 뒤 1945년 해방 때까지 미주 지역의 대표적 독립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에서 활동하였다. 1917년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무를 지냈다. 1937년부터
최찬 / 崔燦 [역사/근대사]
1885-1921. 독립운동가. 일명 광윤(光胤). 자는 성조(聖祚). 황해도 벽성 출신. 1919년 3·1운동 당시 해주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그해 10월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담, 활동하였다. 1920년 5월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
최창섭 / 崔昌燮 [역사/근대사]
1893-1969. 독립운동가. 경기도 파주 출신. 1919년 3·1운동 때 고향 파주군 교하면 장터에서 황인수(黃麟秀) 등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고, 같은해 비밀독립운동단체인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에 입단, 독립투쟁에 헌신하게 되었다. 1920년 상해(
최창식 / 崔昌植 [역사/근대사]
1892-1957. 독립운동가. 서울 출신. 일찍부터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펴다가 1916년 12월에 체포, 징역 8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18년 오성학교(五星學校) 교사로 있을 때 학생들에게 민족의식·독립주의·주인의식을 고취하다가 문제가 되어 금고 1년형을
최창익 / 崔昌益 [역사/근대사]
1896-1957. 독립운동가·공산주의운동가. 함경북도 온성 출생. 창석(昌錫)·창순(昌淳)·동우(東宇) 등의 이름을 쓰기도 하였으며, 여성공산주의운동가 허정숙(許貞淑)의 남편이다.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정경과를 졸업하였다. 일본유학중 학우회(學友會)를 조직하고
최천호 / 崔天浩 [역사/근대사]
1900-1989. 독립운동가. 이명은 만년(萬年). 평안북도 의주 출신.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이어 중국 봉천성(奉天省) 관전현(寬甸縣)으로 건너가 이용규(李龍奎)·김관봉(金寬鳳)·김광진(金光振) 등의 권유로 오동진(吳東振)을 단장으로 하는 광제청년단
최철 / 崔鐵 [역사/근대사]
1919-미상. 광복군. 경기도 개성 출신. 광복군 일성(一成)의 동생이다. 1938년 형 일성과 함께 뤄양(洛陽)으로 건너갔다. 1940년 10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에 입대하는 한편, 중국 중앙전시간부훈련 제4단 특과총대학원대한청반(中央戰時幹部訓練
최태환 / 崔太煥 [역사/근대사]
1897-1984.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호는 영산(瀛山)이다. 본관은 양주(楊州)이고, 전라북도 정읍(井邑) 출신이다. 1926년 6월 10일 순종황제 인산일(因山日)에 종이로 백기(白旗)를 만들어 집집마다 달았다. 그도 이 일에 동참하였으며 이 일로 인하여 일본
최팔용 / 崔八鏞 [역사/근대사]
1891-1922. 2·8독립선언의 조선청년독립단대표 중의 한 사람.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당남(塘南). 함경남도 홍원 출신. 1910년 봄에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몇 달 뒤 일제에 조국이 강점당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오성중학교(五星中學校)를 졸업하였다. 다
최학소 / 崔學韶 [역사/근대사]
1916-미상.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사회주의운동가. 본관은 강릉(江陵)이고, 본적은 강원도 울진(蔚珍)이다. 수헌공(睡軒公) 최응현(崔應賢)의 후손으로, 부친 최익한(崔益翰)의 4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은 2000년 독립운동 공훈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된
최한두 / 崔漢斗 [역사/근대사]
1879-1928.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본적은 강원도 양양(襄陽)이다.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巽陽面) 주리(舟里) 이장(里長)을 지냈다.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후 인근 우암리(牛岩里) 이장 김진열(金振烈)과 상왕도리(上
최해 / 崔海 [역사/근대사]
1895-1948. 항일기의 독립운동가. 호는 단사(檀史). 1910년 만주로 망명하여 1915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다. 1919년 김좌진 등과 함께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여 여단장으로 청산리전투 등에 참전했다. 1923년에는 고려혁명군 총사령부관을 지냈다. 광복 후
최해풍 / 崔亥豊 [역사/근대사]
1897-미상.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자는 한빙(翰馮)이고 호는 암은(岩隱)이다. 본관은 탐진(耽津)으로 전라남도 옥구군(沃溝郡) 서수면(瑞穗面)에서 태어났다. 장경공(莊景公) 최사전(崔思全)의 후손이다. 1919년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최호준 / 崔皓俊 [역사/근대사]
1898-1945. 독립운동가. 황해도 재령 출신. 재령의 보명학교(普明學校)를 졸업하였다. 재령군일대의 궁장토(宮庄土)가 일제의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로 넘어가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작료착취가 강화되자, 나석주(羅錫疇)·김덕영(
최호천 / 崔浩天 [역사/근대사]
1899-1960.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본적은 경기도 시흥(始興)이다.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 현 배재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재학 중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확산되자 김인한(金仁漢)·유지호(柳志浩)·윤의병(尹宜炳)·이종원(李宗遠)·최정
최홍준 / 崔弘俊 [역사/근대사]
1920-미상.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호는 소민(素民)이다. 출신지는 경상북도 영일(迎日)이다. 1940년 3월 신병으로 보성중학교를 휴학하고, 같은 해 9월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연수학관 영문과에서 수학하던 중 일본인들의 민족차별의식에 통탄하면서 경제력 향상·자
추규영 / 秋圭映 [역사/근대사]
1901-1977.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본관은 경상남도 부산(釜山)이다. 경상남도 부산 동래구(東萊區) 복천동(福泉洞) 동래고등보통학교(東萊高等普通學校: 현 동래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재학 중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동학생 고영건(高永建
추득천 / 秋得千 [역사/근대사]
1895-1953.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본적은 충청남도 연기(燕岐)이다.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같은 마을에 사는 박성교(朴聖敎)·이수욱(李秀郁)·추경춘(秋敬春)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하고, 비밀리에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
추정수 / 秋丁洙 [역사/근대사]
1883-미상. 일제강점기 항일운동가. 제주도 북제주군(北齊州郡) 추자면(楸子面) 대서리(大西里)에서 태어났다. 어부로 생활을 하던 중 1926년 5월 관제어업조합(官制漁業組合)의 횡포와 착취에 대항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일본 어부들은 유자망(流刺網) 어업으로
편강렬 / 片康烈 [역사/근대사]
1892∼1928. 항일기의 독립운동가. 호는 애사(愛史). 이강년(李康埏)의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1907년 선봉장 겸 소모장이 되어 구국항일운동에 가담하였다. 1908년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였고, 1911년 ‘105인사건’과 1919년 ‘구월산주비단사건’ 등으로
편덕렬 / 片德烈 [역사/근대사]
1897-1976. 독립운동가. 황해도 연백 출신. 1919년 6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가입, 국경주재 연통(聯通) 책임자로 선임되어 국내와의 연락업무를 담당하였다. 같은해 9월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1월 임시정부 국내실정조사원이 되어 고향인 황
편무경 / 片茂景 [역사/근대사]
1893-1961.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자는 운기(雲起)이고 호는 덕포(德圃)이다. 본관은 절강(浙江)으로 전라남도 함평군(咸平郡) 나산면(羅山面) 수상리(水上里)에서 태어났다. 다른 이름은 편수채(片受彩)이다. 아버지는 편진성(片振聲)이다. 1909년(융희 3)
표영준 / 表永俊 [역사/근대사]
1896년∼미상. 독립운동가. 일명 최승환(崔昇煥). 평안남도 강동 출신. 1919년 3·1운동 직후 만주로 망명하여 활동하다가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귀국하였다. 1920년 임시정부 특파원 김석황(金錫璜)과 평양 기홀병원(紀笏病院: 미국인이 경영하는 병원
하용기 / 河龍基 [역사/근대사]
1891-1964.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1919년 전라북도 임실군(任實郡) 둔남면(屯南面) 오수리(獒樹里)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李基松), 오병용(吳秉鎔)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2시 오수리 장터에서 천도교(天道敎)와 기독교도가 중심이
하의철 / 河誼喆 [교육/교육]
1907-미상. 일제강점기 교사·독립운동가. 전라남도 영암군(靈巖郡) 미암면(美岩面)에서 출생하였다. 광주사범학교 재학시절에 학생비밀결사(學生秘密結社)인 성진회에 가입하였고, 민족차별 교육을 일삼았던 일본인 교사를 타학교로 전근시키는 등의 활약을 하였다. 이후 성진회
한규상 / 韓圭相 [역사/근대사]
1896-1971.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다른 이름은 한판도(韓判道)이다. 본적은 경상남도 진주(晉州)이다.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강달영(姜達永)·강상호(姜相鎬)·김재화(金在華)·박용근(朴龍根)·박진환(朴進煥)·이강우(李康雨) 등과 함께 독
한규설 / 韓圭卨 [역사/근대사]
1848-1930. 항일기의 무신·애국지사. 자는 순우(舜佑). 호는 강석(江石). 1885년 우포도대장이 되어 갑신정변에 연루되었던 유길준을 연금 형식으로 보호하는 가운데 그의 《서유견문》 집필을 도와 완성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1896년 법부대신 겸 고등재판소
한기수 / 韓淇洙 [역사/근대사]
1879-1926.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한자명을 한기수(韓琪洙)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전라북도 임실군(任實郡) 청웅면(靑雄面) 출신이다. 1919년 3월 16일부터 19일까지 임실군 청웅면 구고리(九皐里)의 주민 200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고 마을을 돌면서
한기악 / 韓基岳 [역사/근대사]
1898년∼1941. 독립운동가. 자는 명오(明五), 호는 월봉(月峰). 강원도 원성 출신.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한 뒤 이승복(李昇馥)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국내에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 등과
한도원 / 韓道源 [역사/근대사]
1906-1984. 독립운동가. 일명 이국화(李國華)·왕소산(王少山).평안남도 대동 출신. 1925년 평양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를 중퇴하고 상해(上海)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상해전차회사의 차장으로 근무하면서 박창세(朴昌世)·강창제(姜昌濟) 등과 함께 항일무장단체인 병
한돈석 / 韓敦錫 [역사/근대사]
1896-1993.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출신지는 전라북도 임실군(任實郡) 삼계면(三溪面) 어은리(漁隱里)이다. 1919년 3월 지방 유지 이기송(李起松)·오병용(吳秉鎔)·이만의(李萬儀) 등은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천도교 및 기독교와 은밀히 연락하여 거사를 준비하였
한백흥 / 韓伯興 [역사/근대사]
1897-1950. 일제강점기의 항일운동가.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출신지는 제주도 제주시(濟州市) 조천읍(朝天邑) 조천리(朝天里)이다. 1919년 3월 21일 조천리 만세운동은 서울에서 3·1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던 김장환(金章煥)이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조천읍(朝
한병기 / 韓炳基 [역사/근대사]
미상-1919년 8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1919년 4월 15일 의병장 출신 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 등이 조직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참여하였다. 길림성(吉林省)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소재한 대한독립단이 본부·서간도·국내 각 지부에 재무
한봉근 / 韓鳳根 [역사/근대사]
1896년∼미상. 독립운동가. 호는 금산(錦山). 경상남도 밀양 출신. 정권이 일본에게 침탈당하고 일제의 무단정치가 극악해짐에 따라 만주의 길림성(吉林省)으로 망명하여 김원봉(金元鳳)·황상규(黃尙奎)·이종암(李鍾岩) 등을 만나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의, 의열단(義烈
한봉석 / 韓鳳錫 [역사/근대사]
1893-1942. 독립운동가. 경기도 김포 출신. 1919년 조선총독부의 토목기사로 근무하고 있던 중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였으며, 그뒤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에서 활동하였다. 1921년에 군자금모금의 사명을 띠고 귀국하여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대구복심
한봉수 / 韓鳳洙 [역사/근대사]
1872-1970. 한말의 의병장. 일명 봉서(鳳瑞)·봉용(鳳用)·봉룡(鳳龍). 충청북도 청주 출신. 1907년 8월 의병장 김규환(金奎煥)을 만나 감화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의병에 가담하게 되었다. 청주 세교장(細橋場)에서 기의하여 4년 6개월 동안 33전 1패
한봉인 / 韓鳳仁 [역사/근대사]
1898년∼1968. 독립운동가. 경상남도 밀양 출생. 1919년 만주 길림성(吉林省) 길림(吉林)에서 김원봉(金元鳳)·이성우(李成宇)·서상락(徐相洛)·한봉근(韓鳳根) 등과 함께 의열단(義烈團)을 조직, 독립운동을 위하여 무력으로 투쟁할 것을 모의하고 군자금을 조달하기
한상렬 / 韓相烈 [역사/근대사]
1876∼1926. 항일기의 의병장·독립운동가. 자는 문극(文極). 1907년 고종이 강제퇴위되자 횡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500여 차례의 전투를 치뤘다. 1920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의용부·대한독립단 등 애국단체의 참모로 지내다 1926년 암살당했다. 1963년 건
한상호 / 韓相浩 [역사/근대사]
18990-1921. 독립운동가. 함경북도 경성 출신. 일찍이 간도에서 성장하여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졸업한 뒤 와룡소학교(臥龍小學校)교원으로 봉직하였다. 1919년 3·1 운동 이후 간도에서 윤준희(尹俊熙)·임국정(林國禎)·최이붕(崔以鵬) 등과 철혈광복단(鐵血光復
한석동 / 韓石東 [역사/근대사]
1893-1933.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다른 이름은 한석동(韓錫東)이다. 본적은 경기도 이천(利川)이다.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독립만세운동을 시행하기로 결심하고 권중효 등과 함께 사전 준비 작업을 하였다. 1919년 4월 2일 경기도 이천
한석영 / 韓晳瑛 [역사/근대사]
1897-1964.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제주도 조천읍(朝天邑) 함덕리(咸德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에 걸쳐 일어나자, 광복회제주도지부와 공동으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른바 조천만세운동이다. 조천만세운동은 서울에서
한석화 / 韓錫化 [역사/근대사]
1898-1959.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제주도 조천읍(朝天邑) 함덕리(咸德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에 걸쳐 일어나자, 1919년 광복회제주도지부와 공동으로 조천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조천만세운동은 서울에서 3·1운동
한성수 / 韓聖洙 [역사/근대사]
1920-1945. 광복군. 일명 이상일(李相一)·한성수(韓成洙). 평안북도 용천 출신. 1944년 3월 학도병으로 일본군병영을 탈출하여 중국 푸양(阜陽)에 주둔한 광복군에 입대한 열혈청년으로서 제3지대의 발전을 위해서 자진 푸양에 잔류한 기간간부의 한 사람이다. 중
한성옥 / 韓成玉 [역사/근대사]
1882-미상.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제주도 표선면(表善面) 성읍리(城邑里)에서 태어났다. 어느 날 성산면(城山面) 온평리(溫平里)에서 마을 일을 보고 있을 때 성산포(城山浦)에서 일본의 선박이 침탈해오자, 주민들과 마찰이 자주 발생하였다. 1927년 5월 1
한시대 / 韓始大 [역사/근대사]
미상∼1981.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출신지는 황해도 해주(海州)이다. 1902년(광무 6) 캘리포니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신민회에 가입하여 위원장을 역임하며 임시 정부를 지원하는 일에 힘썼다. 1937년 미주 지역 애국단 대표로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의에 참
한양리 / 韓良履 [역사/근대사]
1883-1946. 한말의 의병. 자는 여경(女敬), 호는 석초(石樵). 경상북도 문경 출신. 1906년부터 1908년에 걸쳐 이강년(李康埏)의 의병부대에서 종사관(從事官)으로 의병소집활동을 하였으며, 원주·단양·제천·갈평·안동·내성·재산, 경기도 관악산 등의 전투에
한영애 / 韓永愛 [역사/근대사]
1920-미상. 일제 강점기 광복군. 다른 이름은 한말다(韓末多)이다. 본적은 평안남도 평양(平壤)이다. 중국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광복군(光復軍)에 입대하여 제2지대(支隊) 대장 이범석 휘하의
한용운 / 韓龍雲 [종교·철학/불교]
항일기의 승려·시인·독립운동가(1879∼1944). 호는 만해(萬海)·만해(卍海). 1919년 3.1독립운동 때 백용성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참여하였다. 1926년 민족의 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사랑의 노래한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였다. 1927년 항
한운용 / 韓雲用 [역사/근대사]
1895-1921. 독립운동가. 함경남도 정평 출생. 일명 운룡(雲龍)·자룡(子龍). 중국 저장성 항저우(浙江省杭州)에서 체육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연해주로 건너가 대한독립단결사대를 조직, 일본군에 항전하였다. 이듬해 일본군이 대거 만주로 출병하여
한원빈 / 韓元彬 [역사/근대사]
1905-1986. 독립운동가. 평안남도 평양 출생. 1930년 천도교인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농민운동단체인 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에 가입하여 알선부장 겸 조사출판부원으로 이 단체의 기관지인 《농민》을 편찬, 간행하였다. 1932년 이 단체의 상무로 근무하면서 《농민》
한이경 / 韓利敬 [역사/근대사]
1883-1927. 독립운동가. 별명은 이경(履敬·理景). 평안북도 의주 출신. 1920년 3월 군자금 모금과 친일배 주살을 목적으로 평안북도 의주군 비현면에서 출범한 대한청년결사대는 1920년 5월 하순 대조선독립 보합단(일명 普合團)으로 명칭을 바꾸고 부서를 정비하
한일동 / 韓一東 [역사/근대사]
1891-1934년 4월 3일.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본적은 경상남도 함안(咸安)이다. 강기수(姜琪秀)·박건병(朴建秉)·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조한휘(趙漢輝)·한관열(韓灌烈)·한종순(韓鍾淳) 등이 고종 황제 국장(國葬)을 다녀오면서 서울에서 시행된 독립선
한일청 / 韓一淸 [역사/근대사]
1899년(광무 3) 11월 15일∼1960년 11월 29일.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사회주의운동가. 다른 이름은 한세(韓世)‧한용구(韓用求), 본적은 경상북도 예천(醴泉)이다. 1926년 6‧10만세운동에 가담하여 태극기와 격문을 배포하였고, 일본에서 조선운동의 기
한재호 / 韓在鎬 [역사/근대사]
1901-1969. 독립운동가. 일명 기복(基福). 경기도 안성 출신. 1919년 4월 1일 원곡면사무소 앞에서 1,000여명의 만세시위대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앞세우고 양성면 동항리로 행진하였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경계로 하는 고개에 이르러
한종순 / 韓鍾淳 [역사/근대사]
1893-1932.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본적은 경상남도 함안(咸安)이다. 1919년 강기수(姜琪秀)·박건병(朴建秉)·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조한휘(趙漢輝)·한관열(韓灌烈) 등과 함께 고종 황제 국장(國葬)에 참여하였다가 서울에서 시행된 독립선언식을 목격
한진교 / 韓鎭敎 [역사/근대사]
1887-1973. 독립운동가. 호는 송계(松溪). 평안남도 중화 출신. 1914년 6월 중국 상해(上海)로 이주하여 해송양행(海松洋行)을 설립, 경영하면서 거기에서 나오는 수익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헌납하였으며, 홍성린(洪成麟)·선우 혁(鮮于赫)과 협의하고 인성소학교(
한징 / 韓澄 [언어/언어·문자]
1887-1944. 항일기의 한글학자·독립운동가. 호는 효창(曉蒼). 시대일보·조선중앙일보 등의 기자로 민족언론창달에 노력했다. 조선어학회에 가입하여 이윤재(李允宰) 등과 함께 조선어사전편찬전임위원이 되었고,〈한글맞춤법〉을 제정하고 조선표준어사정위원이 되어 표준어제정
한태석 / 韓泰錫 [역사/근대사]
1876-1949. 독립운동가. 충청남도 청양 출생. 향리에서 서당교육을 받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충격을 받고 홍성의 민종식(閔宗植)의병부대를 찾아가 합류, 항일투쟁에 적극 가담, 활동하였다. 그뒤 독자적으로 충청남도 홍산(鴻山) 지치(支峙)마을에
한훈 / 韓焄 [역사/근대사]
1890-1950. 항일기의 독립운동가. 자는 성초(聖初). 호는 송촌(松村). 의병활동을 하다가 만주로 망명했고, 광복단을 조직해 활동하다가 광복회로 개편되어, 강화된 항일전을 전개하고 친일파 숙청활동을 하던 중 발각되자 재차 만주로 망명했다. 1920년 암살단과
한흥 / 韓興 [역사/근대사]
1888-1959. 항일기의 독립운동가. 연해주의 권업신문사 통신원과 간북북부총판부 서기 등으로 항일운동을 했고, 군자금 조달을 하다가 붙잡혀 복역한 뒤, 신간회 상무간사로 활약하였다. 함흥중앙학원·경성여자상업학교·함흥대흥상업학원을 설립하여 교육에 힘썼고, 함흥대동학
한흥교 / 韓興敎 [역사/근대사]
1885-1967. 독립운동가. 일명 진산(震山)·헌산(憲山). 부산 출생. 1911년 10월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혁명군 구호의장(救護醫長)으로 쑤저우(蘇州)·전장(鎭江) 등 전선에 나가 참전하였다. 1912년 북벌혁명군홍십자회대장(北伐革命軍紅十字會隊長)에 임명되었으며
한흥근 / 韓興根 [역사/근대사]
1886-1948. 독립운동가. 본관은 청주(淸州). 호는 백암(白岩). 함경남도 원산 출신. 응구(應球)의 아들이다. 어려서 향리에서 사서삼경을 수학하다가 근대화에 관심을 가지고 원산 보명학교(普明學校)를 졸업한 뒤 측량학교(測量學校)를 다시 이수하였으며, 20세
한희룡 / 韓羲龍 [역사/근대사]
1888-1977.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다른 이름은 한의룡(韓義龍)이다. 본적은 평안남도 용강(龍岡)이다. 1919년 서울에서 시행된 독립만세운동을 시발점으로 용강군 일대에서도 소규모 시위운동과 집회들이 산발적으로 시행되자 강예순(姜禮舜)·최용선(崔龍善) 등이
함석은 / 咸錫殷 [역사/근대사]
1892-1928. 독립운동가. 평안북도 용천 출신.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평양의 숭덕학교(崇德學校)교원으로 평안도 지방 학생운동의 책임자가 되어 평양의 각 학교 교사 및 학생을 규합,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함수만 / 咸壽萬 [역사/근대사]
1907-1930.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본적은 충청남도 서천군(舒川郡) 마산면(馬山面)이다. 전주신흥학교(全州新興學校) 교우회(校友會) 임원 등을 역임하던 중 1929년 11월 3일에 발발한 광주학생운동으로 인해 민족의식이 크게 고취되었다. 이에 개교 22주년
함찬근 / 咸贊根 [역사/근대사]
미상-1920.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1919년 4월 초순 이상룡(李相龍) 등을 중심으로 서간도(西間島)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서 조직된 한인자치기구 한족회(韓族會)의 구도검찰(區都檢察) 등을 역임하면서 한족회의 자치조직을 효율적으로 지도하였으며, 재만동
함태영 / 咸台永 [역사/근대사]
1873-1964. 독립운동가·정치가·종교인. 본관은 강릉(江陵). 호는 송암(松岩). 함경북도 무산 출생. 우택(遇澤)의 아들이다. 1884년(고종 21) 방랑벽이 심한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와 함께 상경하여, 조선 말엽 격동하는 내외정세하에서 사숙(私塾)을 전전하면
허경두 / 許瓊斗 [역사/근대사]
1876-1919.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본적은 경상남도 거창군(居昌郡) 이다. 1919년 3월 22일 어명철(魚命喆)·이병홍(李秉洪)·오문현(吳文鉉)·김호(金濩)·신병희(愼炳禧)·어명우(魚命佑) 등이 주동한 거창 가조면(加祚面)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만학정
허근 / 許根 [역사/근대사]
미상-1926.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출신지는 함경북도 회령(會寧)이다. 다른 이름은 허근(許瑾)·허은(許垠)·허재근이다. 1907년(융희 1) 함경북도 갑산에서 홍범도(洪範圖)·차도선(車道善) 등과 함께 의병활동을 하였으며, 1919년 4월 왕청현 춘화향(春華鄕
허내삼 / 許迺三 [역사/근대사]
1888-1964년. 독립운동가. 경기도 개성 출신. 1919년 3월 1일 이래로 전국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4월 1일 동민에게 몽둥이와 기와조각을 가지고 만월대로 모이게 하였다. 이날 수십명의 만세운동시위대가 모여들자, 횃불을 붙여들고 만월대로부
허병률 / 許丙律 [역사/근대사]
1897-1930.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거주지는 함경남도 단천군(端川郡) 하다면(何多面)이다. 함경남도 단천군 하다면·복귀면·수하면·이중면 지역 주민들은 평소 땔나무를 팔고 숯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 치하의 정부에서 산림보호를 명목으
허병률 / 許秉律 [역사/근대사]
1885-1943년. 독립운동가. 경상북도 경산 출신. 1917년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이 조직한 광복회(光復會)에 가입,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9월경 양한위(梁漢緯)·권태일(權泰鎰)로부터 상해판 《독립신문》 및 경고문 등을 전달받아 부호와 관공리
허빈 / 許斌 [역사/근대사]
1891-1931년. 독립운동가. 일명 성묵(聖默). 황해도 장연 출신. 1919년 이창실(李昌實)과 함께 구월산에 입산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락하면서 《독립신문》을 배포, 항일의식을 고취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1년간 복역하였다. 1922년 출옥 후 부일배 숙청공작
허상기 / 許相基 [역사/근대사]
1871-1946년. 독립운동가. 충청북도 옥천 출신. 1919년 3월 15일 고향사람 육창주(陸昌柱)와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3월 27일의 이원(伊院)장날을 이용하여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일본헌병에게 제지당하면 모두 주재소로 몰려가되, 만일
허윤송 / 許潤松 [역사/근대사]
1919-1985. 일제 강점기 광복군. 본적은 경상남도 김해(金海)이다. 1934년 16세 때 만주(滿洲)로 건너갔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담하여 중국 봉천(奉天)과 길림(吉林)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또 중국군관학교에 입
허익근 / 許益根 [역사/근대사]
미상-1920년.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다른 이름은 한창걸(韓昌杰)이다. 만주(滿洲)로 이주하여 생활하면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독립군(獨立軍)에 가담하였다.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국내 전국으로 확산되자 만주 일대에서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19
허일선 / 許日善 [역사/근대사]
1900-1922년 6월 21일.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본적은 평안북도 구성군(龜城郡)이다. 한족회(韓族會)·독립단(獨立團)·광한단(光韓團) 등 몇 개의 독립단체가 통합된 통군부(統軍府)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중국 봉천성(奉天省) 관전현(寬甸縣)에서 제 1소대 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