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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조선 > 조선 후기
조홍시가 / 早紅枾歌 [문학/고전시가]
1601년(선조 34)박인로(朴仁老)가 지은 연시조. 모두 4수. 작자의 문집인 『노계집(蘆溪集)』 권3에 실려 있고, 『청구영언』·『해동가요』 등에도 전한다. 이덕형(李德馨)이 도체찰사로서 영천에 이르렀을 때에 홍시를 보내자 그 자리에서 이 시조를 지은 것이라 한다.
조홍진 홍산현감 해유문서 / 趙弘鎭 鴻山縣監 解由文書 [정치·법제/법제·행정]
해유문서. 1782년(정조 6) 10월 일에 후임관이 병조에 첩정을 올렸고, 동년 10월 초9일에 공충도관찰사겸순찰사가 병조에 문서 이관, 동년 10월 일에 병조에서 호조로 문서를 이관하였다. 조홍진(趙弘鎭)은 재검(載儉)의 아들로 양부는 재운(載運)이다. 1780년(
조휘영 / 趙徽榮 [종교·철학/유학]
1805년(순조 5)∼1854년(철종 5). 조선 후기 유학자. 부친은 조현상이다. 초시에는 합격, 1850년(철종 1)에 실시된 전시에서 실패한 후, 과거에 대한 뜻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고향의 문사들과 교유하며,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조흥진 / 趙興鎭 [종교·철학/유학]
조선 후기의 문신(1748∼1814). 홍경래 난에 의주를 지키고, 철산·용천 등 7읍을 수복하는 데 전공을 세웠으나 논공행상에 불만, 사직하였다. 양사의 건의로 병조참판에 기용되고, 이어서 한성부우윤·부총관을 역임하였으며, 사후 이조판서·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조희룡 / 趙熙龍 [종교·철학/유학]
조선 후기의 화가(1789∼1866). 서화에 뛰어났던 여항문인화가로서 글씨는 추사체를, 그림은 남종문인화를 따랐으나 김정희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그가 저술한 《호산외사》는 중인들에 대한 생생한 기록으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조희백 / 趙熙百 [문학/고전시가]
조선후기 진산군수, 함열현감 등을 역임한 문신. 아버지는 형조참의와 동부승지를 지낸 조규년(趙奎年)이며, 어머니는 해평 윤씨(海平尹氏)로 윤정렬(尹鼎烈)의 딸이다. 31세 때인 1855년(철종 6)에 진사가 되고, 이듬해에는 참봉이 되어 진산군수에 음서(蔭敍)되었다.
조희유 / 曺喜有 [종교·철학/유학]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1742∼1814). 문과 급제 후, 성균관전적·장악원주부·병조좌랑·예조정랑 등을 지냈다. 그 뒤 사헌부지평·사간원헌납·사헌부장령이 되었으며, 그해에 서산군수로 부임하였으나, 다음해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학행이 뛰어나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
조희필 대구도호부판관 해유문서 / 趙熙弼 大丘都護府判官 解由文書 [정치·법제/법제·행정]
해유문서. 1868년(고종 5) 10월 일에 후임관이 겸도순찰사에게 첩정을 올렸고, 동년 10월 22일에 행경상도관찰사겸도순찰사가 호조에 문서 이관, 1870년(고종 7) 9월 일에 호조에서 이조로 문서 이관, 동년 9월 22일에 이조에서 조희필(趙熙弼)에게 조흘하였다
족징 / 族徵 [경제·산업/경제]
조선 후기 삼정문란의 한 사례인 군정의 폐해. 국법으로는 생활의 곤궁으로 군역을 피하여 도피한 자가 10년이 경과해도 행방불명인 경우 면역조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규정을 무시하고 도피자의 미납분을 족징이라 하여 그 친족에게 대신 군포를 납부하게 하던 일을
존재가첩 / 存齋歌帖 [문학/고전시가]
조선후기 학자 위백규와 위세보의 시조 「농가」와 가사 「자회가」·「금당별곡」 등을 수록한 가집.첩·가곡류. 위백규의 「농가」 9장은 농부화의 추세 속에 놓인 향촌사족층인 서생(書生)이 자영농(自營農)의 자리로 이전해가는 단계를 전형적으로 반영한 작품으로 평가되며, 위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