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 : 예술·체육 > 연극 총 72건의 주제어가 있습니다.
분야 : 예술·체육 > 연극
조선배우학교 / 朝鮮俳優學校 [예술·체육/연극]
현철이 1924년 12월 설립에 착수하여 1925년 1월 15일 40여 명의 제1기생을 뽑아 개교한 본격 연극학교. 무대극과 영화극의 배우를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학교는 1924년에는 서울 종로구 와룡동 김덕격의 집 2층을 빌려쓰다가 1925년 2월 창신동으로 이
조선성악연구회 / 朝鮮聲樂硏究會 [예술·체육/연극]
찬극과 판소리 대가인 정정렬이 국창 송만갑, 이동백 등과 함께 1933년 재경 창악인, 창극인, 기악인 등 남녀 명인명창 중견급을 총망라하여 서울 종로구 관훈동 4번지에서 조직한 창극인 단체. 이 단체는 회원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자신들의 기예를 연마하며 창극의 정립
조선연극문화협회 / 朝鮮演劇文化協會 [예술·체육/연극]
일제 말 예능의 일원화를 기하고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서 조선연극협회와 조선연예협회를 통합 발족시킨 단체. 1942년 7월 26일 발족한 이 단체의 회장에는 신도요, 이사에 서항석 외 몇 명, 상임평의원에 유치진 외 몇 명이 임명되었다. 1944년 4월 '연극 연예 흥행
조선연극사 / 朝鮮演劇史 [예술·체육/연극]
조선어문학회의 조선어문학총서 31집으로 1933년 5월에 총 230면으로 간행된 노정 김재철의 유저. 김태준의 서, 목차, 본문, 경론, 부록의 순으로 되어 있다. <조선연극사>는 연극학 제1세대의 결정으로서, 수백년동안 전해 내려오던 한국 연극의 윤곽을 잡아놓았고 그
조선연극사 / 朝鮮演劇舍 [예술·체육/연극]
취성좌가 해체되고 그 후신으로 1929년 12월 창단한 극단. 지두한을 중심으로 이경환, 강홍식, 천한수, 권일청 등 당시 대중연극의 스타급인 30여 명의 단원과, 밴드부 30여 명, 그리고 연구생까지 합쳐 90여 명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상업극단이었다. 1933년에 전
조선연극협회 / 朝鮮演劇協會 [예술·체육/연극]
1936년 8월 오정민, 박학, 이화삼 등 동경유학생들과 극예술연구회의 조직적 모순에 불만을 품고 극연실천부를 탈퇴한 사람들이 모여 신극운동의 보다 순수한 목표를 실현코자 만든 단체. 1936년 10월 부민관에서 몰리에르의 <수전노>를 가지고 창립공연을 가졌는데, 오정
조일재 / 趙一齋 [예술·체육/연극]
1863-1944년. 소설가·신극운동가. 본명은 중환(重桓). 일재(一齋)는 호이다. 서울 출생. 개화기에 가장 많이 활약한 번역문학가·소설가였으며 동시에 신파극운동가였다. <매일신보>의 기자로 있으면서 1912년 윤백남(尹白南)과 함께 신파극단 문수성(文秀星)을 발
종합예술협회 / 綜合藝術協會 [예술·체육/연극]
1927년 7월 중순에 토월회세서 활동한 바 있는 연학년이 이준열과 더불어 조직한 극단. 사무소를 서울 동숭동에 둔 이 단체는 8월 22일 목적이 동일하고 처지가 같은 백양회와 합동성명서를 발표하고 11월 5일 안드레예프의 <뺨맞은 그 자식>과 안톤 체흡의 >결혼신청>
지두한 / 池斗漢 [예술·체육/연극]
생몰년 미상. 초창기의 연극운동가. 함흥 출신.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잠시 소학교 훈도를 하다가 독립운동을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거기서 일본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출감 후 민족운동의 방편으로 연극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1922년 함
직공생활 / 職工生活 [예술·체육/연극]
황순원의 단막희곡으로 공장에 다니는 직공들의 부당한 해고와 노동조합의 일로 쫓겨다니는 직공의 이야기를 묘사한 작품. 1932년 6월 27일부터 29일가지 <조선일보> 독자문예란에 게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