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 근대 > 일제강점기 총 2,118건의 주제어가 있습니다.
시대 : 근대 > 일제강점기
김관오 / 金冠五 [역사/근대사]
1901-1965. 독립운동가. 호는 우당(愚堂). 서울 출신. 1919년 보성중학교 재학중에 3·1운동에 참가하여 선전문을 비밀리에 배부하다가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경성지방검사국으로 이송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뒤 평강에 있는 친척집에 피신
김관용 / 金寬龍 [역사/근대사]
1900-1975.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승려. 본적은 충청남도 서산군(瑞山郡) 해미면(海美面)이다. 충청남도 서산군 해미면에 위치한 해미공립보통학교(海美公立普通學校)에서 수학하였다. 학생으로 재학 중 1919년 3월 24일 이계성(李啓聖)로부터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김관준 / 金寬俊 [예술·체육/국악]
생몰년 미상. 서도소리의 명창. 〈배뱅이굿〉의 창시자. 한말에서 민족항일기 초기에 걸쳐 활약하였다. 평안남도 용강 출신으로 선배인 허득선(許得善)에 이어 서도소리 명창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용강군 해운면 신덕산(新德山)의 보림사(寶林寺) 주지로 있었던 적이 있으며,
김관호 / 金觀鎬 [예술·체육/회화]
항일기의 서양화가(1890-?). 고희동에 이어 우리나라의 두 번째 양화가로서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주로 평양과 서울을 오가면서 개인전을 열고 회화연구소인 소성회(塑星會)를 개설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지만 그의 작품은 거의 전하는 게 없다.
김광서 / 金光瑞 [역사/근대사]
1883-미상. 독립군 지휘관. 본관은 시흥. 아명은 현충(顯忠), 별명은 경천(擎天). 함경북도 북청 출신. 대한제국의 포병 부령(副領)이며, 군기창장(軍器廠長)을 역임한 정우(鼎禹)의 아들이다. 1911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23기졸업생으로 기병장교로 동경 제1사단
김광용 / 金匡溶 [역사/근대사]
1908-1979.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본적은 전라남도 나주시(羅州市) 본양면(本良面)이다. 광주고등보통학교(현 광주제일고등학교) 재학 시절인 1926년 11월 3일, 국순엽(鞠淳葉)·김창주(金昌柱)·김한필(金漢苾)·문승수(文升洙)·박인생(朴仁生)·안종익(安鍾翊
김광욱 / 金光郁 [역사/근대사]
미상-1919.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본적은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이다. 1919년 3월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반석면(班石面) 반육리(班六里)에 소재한 반석교회(盤石敎會)의 조진탁(曺振鐸) 장로가 시도한 독립만세운동이 일본 경찰에 의해 사전 검거되어 실패하였
김광윤 / 金光允 [역사/근대사]
1907-미상. 일제 강점기 농민운동가·사회주의운동가. 본적은 함경남도 안변(安邊)이다. 배화공립보통학교와 북경대학(北京大學)을 졸업하였다. 1932년 2월 배화농민조합 결성식에 참여하였으며, 《신소년》·《신계단》 등의 책을 구입하여 배화농민조합원들에게 배포하였다.
김광제 / 金光濟 [역사/근대사]
1866-미상. 민족운동가. 충청남도 보령 출신. 1907년 대구에서 출판사인 광문사(廣文社)의 사장으로 있으면서 부사장 서상돈(徐相敦)과 함께 〈국채일천삼백만환보상취지서 國債一千三百萬과報償趣旨書〉라는 격문을 전국에 발송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제의하였다. 그 요지는 대한국
김광진 / 金光振 [역사/근대사]
1889(고종 26)∼1964년. 독립운동가. 가명 광해(廣海). 평안북도 의주 출신. 3·1운동 때 의주군 광평면에서 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한 뒤 조선총독부 경찰의 눈을 피하여 오동진(吳東振) 등과 남만주로 망명하여 청년단조직에 헌신하였다. 1920년 9월 18일에 미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