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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정치·법제
김약수 / 金若水 [정치·법제/정치]
1892년(고종 29)∼미상. 노동운동가·정치가. 서울의 휘문의숙과 경성공업학교를 졸업, 3·1운동의 소식이 중국에 전해지자 김원봉과 헤어져 이여성과 함께 귀국하였다. 1923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국내에 잠입한 정재달과 접촉하여 구금, 1924년 4월에는 김사국·
김영근제유문 / 金永根提諭文 [정치·법제]
1853년(철종 4) 9월 10일. 철종이 신임 황해감사 김영근(金永根)을 소견하고 제유한 내용을 기록한 문서. 《철종실록》에 의하면, 철종은 새로 황해감사에 임명된 김영근이 1853년(철종 4) 9월 10일에 사폐할 때에, 그를 소견하고 감사의 임무를 잘 수행할 것을
김영삼 / 金永三 [정치·법제/정치]
1927년 12월 20일 - 2015년 11월 22일. 정치가. 경남 거제 출신. 1952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 졸업, 장택상 총리 인사담당 비서가 되었다. 1954년 26세의 최연소자로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된 후, 제5, 6, 7, 8, 9, 10, 13대
김영한 / 金榮漢 [정치·법제/정치]
1857년(철종 8) 6월 14일∼1927년 8월 19일. 일제 강점기 관료. 조선 말기 의금부도사와 탁지부주사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대한제국기에 법부참서관·중추원의관·탁지부 인쇄국장 등을 지냈다. 1921년부터 1927년까지 조선총독부의 중추원참의를 지냈다. 1924
김옥균 / 金玉均 [정치·법제/정치]
조선 후기의 정치가·개화운동가(1851∼1894). 갑신정변을 주도하였다. 갑신정변에 투영된 김옥균의 사상 속에는 문벌의 폐지, 인민평등 등 근대사상을 기초로 하여 낡은 왕정사 그 자체에 어떤 궁극적 해답을 주려는 혁명적 의도가 들어 있었다. 저서로는《기화근사》·《
김용락 은산현감 해유문서 / 金龍洛 殷山縣監 解由文書 [정치·법제/법제·행정]
김용락 은산현감 해유문서. 1840년(헌종 6) 후임관이 겸순찰사에게 첩정을 올렸고, 동년 11월 29일 행평안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도순찰사관향사평양부윤이 호조에 문서를 이관, 1841년(헌종 7) 4월 일에 호조에서 이조로 문서를 이관, 동년 4월 초9일에 이조에서
김용래 부산진수군첨절제사 해유문서 / 金用來 釜山鎭水軍僉節制使 解由文書 [정치·법제/법제·행정]
김용래 부산진수군첨절제사 해유문서. 1884년(고종 21) 12월 초4일 후임관이 수군절도사에게 첩정을 올렸고, 동년 12월 초5일에 절도사가 호조에 첩정을 올렸으며, 1885년(고종 22) 11월 일에 호조에서 이조로 문서를 이관하였다. 김용래는 1883년(고종 20
김원봉 / 金元鳳 [정치·법제/정치]
항일기의 독립운동가·정치가(1898∼?). 3·1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폭탄제조법을 습득하는 등 일제와의 무장투쟁노선을 분명히 하여 6년여에 걸쳐 의열단 단장으로 대규모암살계획 및 경찰서·동양척식주식회사 등에 대한 폭탄투척사건 등을 배후에서 지휘 조종하였고, 1
김유성 영흥도호부사 해유문서 / 金裕成 永興都護府使 解由文書 [정치·법제/법제·행정]
김유성 영흥도호부사 해유문서. 1892년(고종 29) 4월 21일 후임관이 절도사에게 첩정을 올렸고, 동년 5월 초1일 절도사가 병조에 첩정을 올린 것이다. 김유성은 원직(元稙)의 아들로 유행(裕行)의 동생이다. 1891년(고종 28) 10월 14일에 본직을 제수 받았
김윤식 / 金允植 [정치·법제/정치]
항일기의 관료·문장가(1835∼1922). 유신환·박규수의 문인으로, 임오군란 후 호군·강화부유수에 임명되어 규장각직제학을 겸임하였고, 갑신정변 이후 병조판서를 거쳐 독판교섭통상사무가 되어 대외관계를 담당하였으나, 아관파천사건 이후 외무대신 직에서 면직되었고, 을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