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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인물 > 의병·독립운동가
양전백 / 梁甸伯 [역사/근대사]
1869∼1933.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호는 격헌(格軒), 평안북도 선천 출신이다. 26세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1897년 예수교장로회 전도사가 되었고,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여, 선천 북교회에서 성직자 생활을 하였다. 1919
양제안 / 梁濟安 [역사/근대사]
1860-1929. 의병장·독립운동가. 본관은 남원(南原). 호는 벽도(碧濤). 경상북도 영일 출신. 1876년(고종 13) 병인양요 때 격문을 만들어 척양척왜를 주장하였으며, 1894년 충청북도 진천에 의병총본영을 설치하고 의병을 모집, 훈련시켜, 1895년 이기찬(
양준명 / 梁濬明 [역사/근대사]
1876-1949. 독립운동가. 평안북도 선천 출생. 1912년 데라우치(寺內正毅)조선총독암살사건 연루 혐의로 일본경찰에 잡혀 1심에서 징역 7년을 언도받았다가 2심에서 무죄로 풀려났다. 1919년 2월 신성중학교(新星中學校)교사 때 이승훈(李昇薰)의 지시로 교회목사
양창을 / 梁昌乙 [역사/근대사]
1900-1932.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출신지는 평안북도 희천군(熙川郡) 북면(北面)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 임시 정부의 국내주재(國內駐在) 대원(隊員)으로서 천마대(天摩隊)에 가입하여 평안북도 위원(渭原)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을 담당하였고, 또
양한나 / 梁漢拿 [역사/근대사]
1893-1976. 독립운동가·사회사업가. 부산의 기독교 가문에서 태어나 상경하여 진명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학비조달의 어려움으로 부산으로 돌아가 1911년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제1회졸업생이 되었다. 마산 의신여학교(義信女學校)에서 7년간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양한묵 / 梁漢默 [역사/근대사]
항일기의 독립운동가(1862-1919). 1902년 동학에 입교하고, 손병희 등과 함께 이용구로 하여금 진보회를 결성하게 했다. 1905년 귀국하여 헌정연구회를 조직했다. 1919년 2월 27일 김상규의 집에서 천도교 대표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3월 1일 오후
양한위 / 梁漢緯 [역사/근대사]
1883-1949. 독립운동가. 충청북도 옥천 출생. 1910년 8월 나라를 잃게 되자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독립운동에 뜻을 둔 맹보순(孟甫淳)·양기탁(梁起鐸)·이병옥(李秉玉) 등 10여명과 수시로 회합, 협의하면서 독립운동의 기본방략을 수립하고 그 기반 조성을
엄인섭 / 嚴仁燮 [역사/근대사]
생졸년 미상. 한말의 의병장. 1907년 (安重根)‧김기식(金起植)과 결의형제를 맺었고, 1908년 안중근과 함께 두만강 최하단의 일본군수비대를 급습하고 사상시키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그 뒤 1911년 연해주 한인사회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권업회(勸業會)에 가담하고,
엄창섭 / 嚴昌燮 [역사/근대사]
1891-미상. 독립운동가. 충청남도 부여 출신. 1919년 강경의 사립 창영학교(昌永學校)교사로 있을 때 군산의 영명학교(永明學校)학생인 강금옥(姜金玉)으로부터 3·1독립운동의 소식을 전해 듣고 3월 6·7일에 재직중인 창영학교에서 고상준(高相俊)·추병갑(秋炳甲) 등
여운형 / 呂運亨 [역사/근대사]
1886-1947. 구한말의 독립운동가·정치가. 상해에서 민단을 조직하였으며,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총무간사에 취임하였다. 1919년 임시정부 수립에 가담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을 역임하였고, 광복 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좌우합작운동 중 암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