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 조선 총 10,287건의 주제어가 있습니다.
시대 : 조선
김영행 / 金令行 [종교·철학/유학]
1673년(현종 14)∼1755년(영조 31). 조선 후기의 문신. 아버지는 관찰사 김시걸. 김창흡의 문인이다. 1725년 영조가 즉위하자 풀려나 우사어로 다시 기용되고, 이어서 임천군수를 거쳐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시문을 모은《필운유고》가 전한다.
김예직 / 金禮直 [종교·철학/유학]
1565∼1623. 조선 중기의 무신. 아버지는 첨정 희철, 광해군의 어머니인 공빈김씨의 동생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평범한 선비로서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다음 해 무과에 급제, 1604년평안도 용천군수를 거쳐 1610년(광해군 2) 첨지중추부사
김옥균 / 金玉均 [정치·법제/정치]
조선 후기의 정치가·개화운동가(1851∼1894). 갑신정변을 주도하였다. 갑신정변에 투영된 김옥균의 사상 속에는 문벌의 폐지, 인민평등 등 근대사상을 기초로 하여 낡은 왕정사 그 자체에 어떤 궁극적 해답을 주려는 혁명적 의도가 들어 있었다. 저서로는《기화근사》·《
김용 호종일기 / 金涌扈從日記 [역사/조선시대사]
조선시대 문신 김용이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하면서 보고 들은 사실들을 기록한 일지. 공무일기. 보물 제484호. 3책. 필사본. 이 책은 초서로 쓰여졌으며,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하는 선조를 호종하였을 때 직접 체험하고 보고 들은 사실들을 그대로 기록한 일기로,
김용겸 / 金用謙 [종교·철학/유학]
조선 후기의 학자·문신(1702∼1789). 김시보에게서 수학하였다. 1748년에 선공감감역에 제수된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우승지·공조판서가 되었다. 정조와 경서·사기·백가로부터 국조헌장에 이르기까지 두루 토론하였다.
김용규 / 金龍圭 [종교·철학/유학]
1892년(고종 29)∼1964년. 조선 말기의 유학자. 보백당 김계행의 후손, 증조부는 김기순, 조부는 김찬근, 부는 김병희이다. 5세에 권상익 문하에서 수학, 이제상의 문하에서 성리를 탐구하였다. 유교경전에 박학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로 두문불출하고 경서
김용락 은산현감 해유문서 / 金龍洛 殷山縣監 解由文書 [정치·법제/법제·행정]
김용락 은산현감 해유문서. 1840년(헌종 6) 후임관이 겸순찰사에게 첩정을 올렸고, 동년 11월 29일 행평안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도순찰사관향사평양부윤이 호조에 문서를 이관, 1841년(헌종 7) 4월 일에 호조에서 이조로 문서를 이관, 동년 4월 초9일에 이조에서
김용래 부산진수군첨절제사 해유문서 / 金用來 釜山鎭水軍僉節制使 解由文書 [정치·법제/법제·행정]
김용래 부산진수군첨절제사 해유문서. 1884년(고종 21) 12월 초4일 후임관이 수군절도사에게 첩정을 올렸고, 동년 12월 초5일에 절도사가 호조에 첩정을 올렸으며, 1885년(고종 22) 11월 일에 호조에서 이조로 문서를 이관하였다. 김용래는 1883년(고종 20
김우규 / 金友奎 [문학/고전시가]
조선 후기의 가객(歌客). 『청구가요(靑邱歌謠)』의 김우규 작품 후서에서 김수장(金壽長)은 김우규가 자기보다 한 해 뒤인 신미년(1691)에 태어났으며(聖伯年令辛未我庚午), 당시에 그가 생존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此輩已沒 只有聖伯與我矣). 김수장이 이 글을 쓴 해가
김우창 / 金禹昌 [종교·철학/유학]
1830년(순조 30)∼1906년(광무 10). 조선 말기의 학자. 아버지는 김진필,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권방도의 딸이다. 외삼촌 권재정을 사사하였다. 1883년(고종 20) 도내 유생들이 정경세의 문묘배향을 주장하여 소를 올릴 때 소두가 되었다. 1895년 민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