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 근대 > 일제강점기 총 2,118건의 주제어가 있습니다.
시대 : 근대 > 일제강점기
강창제 / 姜昌濟 [역사/근대사]
1898-1965. 독립운동가. 본관은 진주. 호는 창산(蒼山). 평안북도 창성 출신. 아버지는 시홍(時洪)이다. 1919년 3·1운동 때 향리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뒤 상해로 망명하여 1922년에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기자로 활약하였고, 1924년에는 임
강철구 / 姜銕求 [역사/근대사]
1894-1943. 독립운동가. 충청남도 부여 출생. 1917년 대종교신도로 만주에 건너가 동간도의 천영학교(天英學校) 교사가 되어 제2세 민족교육에 정열을 쏟았다. 1920년 1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총재 서일(徐一)과 뜻을 같이하여 북로군정서에 가입하여 총재비서
강철규 / 姜徹奎 [역사/근대사]
1873-1920.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기자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만주(滿洲)로 이주하였다. 중국 길림성(吉林省) 혼춘현(琿春縣)의 한민회(韓民會)에 가담하였다. 박면하(朴冕河)·이창민(李昌敏)·임종영(林鍾英)·정정협(鄭正協
강철호 / 姜哲鎬 [역사/근대사]
1860-1947년. 일제강점기 항일운동가. 호는 농은(農隱)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제주도 대정(大靜)에서 태어났다. 제주 대정상무사(大靜商務社)의 중심인물중 한 사람으로 채구석(蔡龜錫)·송희수(宋希洙) 등과 함께 학문에 몰두하였다. 1910년(융희 4)에
강태동 / 姜泰東 [역사/근대사]
1889-1946. 독립운동가. 일명 석룡(錫龍). 함경남도 이원 출생. 1911년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김구(金九) 등과 같이 붙잡혀 황해도 해주형무소에서 복역한 바 있으며, 향리에서 3·1운동을 주동하여 고문을 받은 바 있다. 이어 그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가
강태홍 / 姜太弘 [예술·체육/국악]
1897-1957. 가야금산조의 명인. 호는 효산(曉山). 전라남도 무안 출신. 원각사에서 창극활동을 하던 명창 용안(龍安)의 셋째 아들이다. 아홉살 때부터 가야금을 배웠으며, 가야금산조의 창시자로 알려진 김창조(金昌祖)에게서 전수받았다. 거주지를 대구로 옮겨 살면서
강한수 / 姜漢秀 [역사/근대사]
1921-1944. 독립운동가. 전라남도 담양 출신. 학생비밀결사인 무등회(無等會)를 조직,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옥사한 애국지사이다. 1938년 광주서중학교 3학년 재학중 학우 주만우(朱萬尤)·유몽룡(劉夢龍) 등과 함께 서중독서회(西中讀書會)를 조직하여 배일운동에 참가
강해석 / 姜海錫 [역사/근대사]
1904-1973. 일제 강점기 애국계몽운동가·독립운동가. 본관은 진주(晋州)이고, 본적은 전라남도 광주(光州)이다. 부친 강호일(姜浩一)과 모친 박씨(朴氏) 사이에서 7남 4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둘째 형은 대한인국민회 지부에서 활동하며 3·1운동에 참여한 강석
강혁호 / 康奕豪 [역사/근대사]
1892-미상. 일제강점기 항일운동가. 본관은 곡산(谷山)이고, 제주도 성산(城山)에서 태어났다. 1927년 5월 16일 제주 정의현중앙청년회 주관으로 성산면에서 체육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때 열린 씨름 대회에서 심판의 판정에 승복하지 않은 일본인 선원의 도발에 의하여
강혜원 / 康蕙園 [역사/근대사]
1885-1982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본적은 평안남도 평양시(平壤市)이다. 동생은 강영승(康永昇)이고, 남편은 김성권(金聲權)이다. 1905년 가족과 함께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가서 사탕농장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였다. 191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였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