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재문집(畏齋文集)

홈 > 연구성과별 자료검색
[연구사업]한국학 기초자료사업
영남학파의 사유세계와 역사인식 -영남학파 문집 상세 해제 및 주요저작 번역- (2단계)
서지사항
분야문학
유형문헌
시대조선
출전영남학파의 사유세계와 역사인식-영남학파문집 상세 해제 및 주요 저작
문서종류문집 해제

본문

卷1

次陶靖節集四言體懷金震維(貞欽)金謹夫 (思鎭)金士顯(世榮)四首, 鳳凰山, 龍巖, 春意, 餞春詞, 夏日幽居, 苦旱行, 聽泉, 郡齋無竹歎 (退溪先生嘗莅豐基郡有手植竹而今無之), 竹 嶺行, 停雲(六首), 聖泉, 蒔竹, 遠遊, 贈別(四 首), 鏡, 錦仙亭敬次錦溪先生韻, 十三日夕後 送鄭致一之溪南中邨病未相隨悵然獨述, 錦榭 贈別, 鹿里罷寂(丁未歲寓居)七首, 東亭李先 生輓(十三首), 黃晦老(炳欽)來訪阻雨, 浦上 雅話, 會校溪堂柳公(疇睦)全禮類輯有賦, 光 化門感懷, 輓剛齋李丈(承熙)五首, 輓孫叔靜 (晉濂), 輓金永日(昶鎭), 輓權洛汝(宅永), 輓 李舜佐(中燮)二首, 輓金丈(敬淵)二首, 輓李 丈(元鎬), 俛宇郭先生輓, 輓金丈(龍奎), 輓朴 參奉(齊顥)二首, 與古巖金丈(世洛)及諸長老 登駕鶴樓, 輓柳參奉丈(萬植)三首, 輓石矼金 丈(석[土+奭]), 輓姜承旨丈(鎰)三首, 次悠 然堂重修韻, 儉巖亭與權致三(相圭)姜舜五 (壎)姜應載(厚昌)權聲之(鍾遠)謹次儉巖集 中韻, 與權致三姜舜五姜應載權聲之儉巖亭夜 坐, 駕鶴樓晩酌, 自駕鶴樓移坐新市店, 次金丈 (奎燁)東洢幽居韻, 輓黃丈(世鎭)二首, 輓晦 堂張丈(錫英)五首, 輓族祖參奉德哉(厚燮)四 首, 謙庵先生輓(緬禮時), 江右紀行(有序)-十 八日謹夫約行來到‧十九日與謹夫李述祖(源 學)發行到鹿峴黃元吉家午憩‧宿星山書贈崔 仁卿(炳寅)‧二十日到高坪訪鄭聖七‧仙夢臺 次板上韻‧二十一日過麻田津共飮‧訪鄭石門 舊宅‧二十二日自愚川發行舟到退津‧洛東-, 輓崔仁卿(三首), 儉巖亭雨中與姜舜五黃晦老 朴學明(勝復)有吟, 賀呈張泰古生朝, 輓朴進 士丈(勝振), 輓權孟存(泰鎔)三首, 輓金道源 (灝鎭), 輓晴山權丈(相翊)二首, 輓東田李進 士丈(中均)二首, 輓朴致芳(尋洙), 輓黃聲遠 (鍾洛)二首, 乙亥臘月盆梅盛開忽憶前冬石山 老人權聲之嘗用東坡韻賦梅花一疊求和於予 因循未副對景起懷追步以寄, 復用其韻賦一篇 呈石山兼簡淡山姜應載求和, 石山老人寄詩一 首題以石山梅贈西浦梅遂用其韻以答之, 浦梅 再答石梅, 淡石兩兄和余梅花詩旣感其賜又步 其韻以謝之, 輓李敬執(聖熙), 輓孫伯淵(晉 洙)二首, 輓鄭聖田(在龍), 輓金致卓(漢鎭), 奉酬李兮人(賢求)三首, 輓權聲之(四首), 戊 寅秋往聞喜適逢柳元若(泰榮)相與步鎭南橋, 輓鄭主事(東璿)五首, 駕鶴樓與柳舜敎(冑榮) 及諸人有賦, 輓姜博士(壽昌), 輓張見山(命 朝)二首, 輓李舜成(韶久), 輓李朗山(垕), 四 月十七日同金景章(應燮)昆季金兩吉(秉喆) 及族祖伯崇(敦燮)將爲龜潭之遊自豐基乘車 到長淮避雨店舍, 宿龜潭精舍, 泛舟龜潭, 玉筍 峯, 輓姜應載, 僑居甚無聊被諸友勤招赴華山 詩契, 鳳笙亭, 輓姜允和(璧元), 輓朴丈(鎬九), 輓姜舜五(二首), 輓金卓汝, 輓李尙賢(昌和) 二首, 輓黃景世(永祖)二首, 酬金君(昶基)花 壇十二詠韻, 次題李敎官天弼(炳弼)寓庄, 次 寄姜士行(道熙)古松, 輓李賢職(述鎬), 徽榮 孫迎婦志喜, 李養賢(載浩)來訪金德裕(炳禧) 繼至遂相與拈老杜韻, 輓鄭春仲(二首), 輓金 丈三(益秀)五首, 李雲卿(祥鎬)來訪共拈老杜 韻, 李養賢李善章(冕和)李雲卿來訪(二首)

卷2

遊仙遊洞詩(幷序), 夜遊巖, 鳳巖寺, 白雲 臺, 內仙遊洞, 仙遊九曲, 蜂巖龍湫, 外仙遊洞, 外仙遊九景, 聖來歸後以詩寄贈且有閒中諸作 幷投固要步其韻忘拙構呈(五首), 輓李養賢, 輓河叔亨(謙鎭), 三月二日與李雲卿會于金德 裕南湖庄, 輓黃晦老(二首), 金景章昆季自京 城來到會諸友共登鳳笙亭, 臘月十日赴鳳笙亭 會, 步李士能(定鎬)見贈韻却寄, 輓權悳夫(魯 燮), 輓金德裕(二首), 輓金士執(三首), 輓權 聖吉(喆淵), 輓李參奉汝卿(忠鎬), 八月少晦 李仁叟(根春)高在卿(永泰)高文一(斗煥)訪 余於茅谷寓舍余適往隣比三兄徑歸翌日余追 躡於華山金雲瑞(龍圭)廬次因相携到新基李 雲卿庄留宿, 苦雨, 聞時報有歎, 輓全舜韶(鳳 錫)四首, 次李雲卿新基十詠韻, 輓李主事(炳 奎), 次李應文(在敎)槿圃韻, 輓金謹夫, 輓李 仁叟(三首), 涔寂中走筆謾呈李雲卿, 次題龍 岡精舍, 輓鄭文顯(昌黙)

上東亭李先生 11
李炳鎬(1851∼1908)에게 보낸 편지이다. 字는 子翼, 호는 東亭, 초명은 正鎬이고 본관은 眞城이다. 龍山李晩寅(1834∼1897)의 門人으로, 寒洲李震相(1818∼1886)을 찾아가 학문을 질정하였다. 俛宇郭鍾錫(1864~1919)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理氣說ㆍ心性說등에 대해 논하였는데, 퇴계의 ‘心合理氣說’을 이어받아 ‘心밖에 理가 없고 理밖에 心이 없으며, 理와 氣가 합하여 理가 위주인 것이 心이다.'라는 관점에서 논리를 전개하였다. 저서로 東亭遺稿 4卷2冊이 있다. 이 편지에서 저자는 論語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한 다음 동정선생이 준 과제 가운데 ‘顔子之樂’에 대해 논하였다. 대체로 안자의 즐거움이란 한 가지 사물을 지적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만나는 모든 상황들이 다 즐거워할 만한 것이라는 논지로 스승의 물음에 답하였다.
上東亭先生論語發問 12
저자가 李炳鎬과 문답 형식으로 정리한 論語發問答案의 일부이다. 원래 이 책은 李 炳鎬의 교정을 거쳐 온전히 정리되었는데, 병란으로 소실되고 學而와 爲政두 편에 관한 것만 남았으므로 여기에 기록한다고 하였다. 42조목의 문답이 실려 있다.
上俛宇郭先生(1908) 32
俛宇郭鍾錫(1864~1919)에게 보낸 편지이다. 자는 鳴遠, 본관은 玄風이고, 경상남도 居昌에서 태어났다. 1910년 국권이 침탈되자 고향에서 은거하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 儒林들의 궐기를 호소하고, 居昌에서 金昌淑과 협의하여 파리의 만국평화 회의에 독립호소문을 보내고 옥고를 치렀다. 李滉의 학문을 계승한 스승 李震相에게서 성리학을 이어받아 主理에 입각한 理氣說을 주장하였다. 이 편지에서 저자는 암울한 당시의 상황에서 느끼는 자신의 무력감을 이야기 하고, 이어 東亭遺稿 의 간행에 대해 상의하였다.
答俛宇先生(1910) 33
郭鍾錫(1864~1919)에게 보낸 편지이다. 시대상황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였다.
上俛宇先生 34
儉巖詩集 의 간행과 臨窩逸稿 교정에 도움을 준 데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말미에 喪禮와 祭禮등 禮制에 관한 질문 11조목을 적은 別紙를 附記하였다.
卷3

答俛宇郭先生 1
郭鍾錫(1864~1919)에게 보낸 답장이다. 7일에 찾아뵙고 이제 20일이 지났는데, 그간 평안하신지 안부를 물으며 편지를 시작하였다. 禮制에 대한 논의가 주된 내용이다.
上俛宇先生(1916) 2
郭鍾錫(1864~1919)에게 보낸 편지이다. 객지에 지내는 중에 손수 보내주신 편지를 받으니 너무도 위안이 된다고 하였다.
上俛宇先生 3
郭鍾錫(1864~1919)에게 보낸 편지이다. 현재 공부해나가는 상황과 그 과정에서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答俛宇先生(1917) 4
郭鍾錫(1864~1919)에게 보낸 답장이다. 喪禮와 祭禮에 대한 질문이 주된 내용이다.
上俛宇先生 5
郭鍾錫(1864~1919)에게 보낸 편지이다. 東亭李炳鎬(1851∼1908)선생 誌文의 내용에 대해 의견을 구하는 내용이다.
與晦堂張丈(錫英) 6
張錫英(1851∼1929)에게 보낸 편지이다. 일명 碩敎, 호는 晦堂, 본관은 仁同이고 경상북도 칠곡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李承熙‧郭鍾錫등과 함께 고종에게 請斬五賊疎를 올렸다. 1907년 국채보상 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칠곡의 국채보상회 회장이 되어 활약하였다. 1912년에는 해외독립 운동의 현황과 해외이주자들의 동태를 기록한 遼左紀行을 저술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郭鍾錫‧金昌淑등과 파리강화 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의 초안을 작성하고 유림대표 137명 중 1인으로 서명하였다. 4월 2일에는 星州장날에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가 체포되어 대구복심법원에서 금고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45권 분량의 회당집이 전한다.
與古巖金丈(世洛) 7
金世洛(1854~1928)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자는 文顯, 호는 古巖이고 본관은 豊山이다. 奉化와 榮州에 살았다. 忘窩金應祖의 후손으로, 碁局이 넓고 志操가 굳었으며 學問이 高邁하여 사림의 추중을 받았다. 저서로 古巖集 6권이 전한다.
答橘園李丈(善求) 8
橘園李善求(1856~1922)에게 보낸 답장이다. 이명은 正佑, 호는 橘園이고 본관은 眞 城이다. 저자의 스승인 李炳鎬(1851∼1908) 에게는 再從姪이 된다. 경북 안동시 陶山面 土溪洞출신으로, 절식 순국한 李賢求의 형이고, 權連夏의 외손이다. 1896년 2월 경북 (宣城 예안)의진의 書記로 활동하였다. 2005년에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答橘園李丈 9
橘園李善求(1856~1922)에게 보낸 답장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 편지이다.
答孫伯淵(晉洙) 10
孫晉洙에게 보낸 답장이다. 호는 伯淵이고 본관은 月城이다. 경상북도 慶州출신의 독립 운동가 孫厚翼(1888~1953)의 부친이다.
與李參奉恕卿(忠鎬) 11
李忠鎬(1872~ 1951)에게 보낸 편지이다. 자는 恕卿, 호는 霞汀이고 본관은 眞城이다. 退溪선생의 13대 宗孫으로, 章陵參奉을 지냈다.
答全舜韶(鳳錫) 12
全鳳錫에게 보낸 답장이다. 호는 舜韶이고 본관은 沃川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고을에 칭 송이자자하였다. 형 建錫‧弼錫, 동생 胤錫고 함께 영풍군 이산면 지동리 이계에 大巖精舍를 건립한 뒤 그 곳에서 기숙하며 宣祖의 묘소를 돌보는 한편 학문을 연마하는 장소로 삼았다. 權相奎가 기문을 지었다.
答李叔衍(墩永) 12
李墩永에게 보낸 답장이다. 李墩永의 편지에서 질문한 내용을 개괄적으로 설명하였다. 別紙 退溪와 高峯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변한 心統性情圖 및 四端七情의 내용에 대한 문답이다.
答柳參奉丈(萬植○1926) 14
柳萬植(1860~ )에게 보낸 답장이다. 자는 楗一, 호는 二江이고 본관은 豊山이다. 洛 坡柳厚祚(1798~1876)의 후손이고, 龍山李晩寅(1834∼1897)의 門人이다.
答朴致述(祖洙) 15
朴祖洙(1868~1942)에게 보낸 답장이다. 자는 致述, 호는 文溪이고 본관은 咸陽이다. 부친은 義鏞, 生父는 義悅이고 醴泉에 살았다. 西山金興洛(1827∼1899)의 문인이다.
與族叔直閣(奎年○1915) 15
저자의 族叔인 丁奎年에게 보낸 편지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 편지이다.
答權致三(相奎○1916) 16
權相奎(1874~1961)에게 보낸 답장이다. 자는 致三, 호는 號蔡山‧忍菴이고 본관은 安東이다. 冲齋權橃(1478~1548)의 후손으로, 부친은 世淵이고 奉化에 살았다. 性齋許傳(1797~ 1886)의 門人이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키고, 1896년 다시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였다. 경술국치 이후로 세상과 인연을 끊고 동서양의 역사서적을 구해 읽으며 당시의 국제 정세를 파악하였다. 저서로는 東國史略 6권‧ 經濟私議‧忍庵集 등이 전한다.
答趙(沅九) 17
趙沅九에게 보낸 답장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 편지이다.
答族弟(學鎭○1926)
저자의 四從弟인 丁學鎭에게 보낸 답장이다. 자는 進卿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 편지이다.
與李舜佐(中燮○1915) 18
李中燮(1875~ )에게 보낸 편지이다. 자는 舜佐이고 본관은 眞城이다. 曉庵李中轍(1848 ∼1934)의 門人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 편지이다.
與河羲文(中煥○1927) 19
河中煥(1875~1952)에게 보낸 편지이다. 자는 羲文, 호는 砥峯이고 본관은 본관 晋州이다. 1905년 을사조약 때 매국노규탄운동을 벌였으며, 1907년 안동 임하협동학교 교사로 재임하였는데, 屈强한 氣節로 博學多 識하였다.
答鄭文顯(昌黙○1906)20
저자의 벗인 鄭昌黙에게 보낸 답장이다. 자는 文顯이고 본관은 晉陽이다.
別紙 22
具衆理應萬事存體應用에 대한 문답 및 心 의 主宰에 대한 문제, 心의 體用에 대한 문제, 天命의 문제와 공자의 말 중에 存亡의 문제 등에 대한 문답이다.
答鄭文顯 23
鄭昌黙에게 보낸 답장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고, 평소 공부하는 과정에서 생긴 의문점을 별지의 형식으로 첨부하였다.
別紙 24
心의 虛靈知覺, 性命, 敬, 心의 體用, 知敬 등에 대한 문답이다.
答鄭文顯別紙 27
鄭昌黙에게 답장으로 보낸 別紙이다. 心統 性情, 寂感, 心學, 하늘이 주재하는 것으로서의 敬, 先儒들이 언급한 敬에 대한 문제, 涵養 과 致知, 動靜과 存養, 明明德, 敬이 禮라고 한 程子의 말 등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문답이다.
答鄭文顯 32
鄭昌黙에게 보낸 답장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물은 다음 鄭昌黙이 보내온 편지의 내용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대체적으로 개진하였다.
別紙 33
仁義禮智, 神明과 具應, 知敬, 明에 대한 주자의 해석, 存心養性, 心의 主宰에 대한 문제, 虛靈知覺, 心統性情, 心合理氣, 性情이 心의 體用이 되는 문제, 朱子의 말에 대한 해석 문제, 聖賢이 이해한 心의 體用문제, 知覺의 문제, 心과 性情의 관계, 涵養의 문제, 禮卽主於 敬이라는 주자의 말에 대한 해석 등 다방면에 대한 심도 있는 문답이 실려 있다.
與鄭文顯 40
鄭昌黙에게 보낸 편지이다. 知敬과心體의 관계에 대한 논변이 주된 내용이다.
答鄭文顯別紙 41
鄭昌黙에게 보낸 답장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 편지이다.
卷4 書 答鄭文顯 1
鄭昌黙에게 보낸 답장이다. 私欲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 설들을 인용하여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였다.
答鄭文顯(1926) 1
鄭昌黙에게 보낸 답장이다. 二江丈의 喪事에 마음을 다해 주선한 공에 대해 치하하고, 자신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答鄭文顯(1928) 2
鄭昌黙에게 보낸 답장이다. 首春이 누이의 喪事를 당한 일로 인해 喪禮및 祭禮에 대해 家禮 및 諸家의 설을 인용하여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였다.
別紙 4 帶下尺, 衽, 辟領등에 대한 문답이다.
答鄭文顯(1928) 6
鄭昌黙에게 보낸 답장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고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 한 다음, 앞 편지에서 질문해 온 深衣의 제도에 대해 여러 가지 사례를 인용하여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였다.
答鄭文顯(1930) 7
鄭昌黙에게 보낸 답장이다. 祠堂에神主를 모실 때 그 크기와 배열 순서를 물어온 데 대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였다.
與鄭文顯(1937) 8
鄭昌黙에게 보낸 답장이다. 權鍾遠(1880~ 1937)의 죽음에 대해 아쉬운 마음을 표현한 편지이다.
答鄭文顯(1931) 9
鄭昌黙에게 보낸 답장이다. 편지를 통해 물어온 내용을 별지에 적어 보내니 살펴보고 의견을 달라고 하였다.
別紙 9
喪禮에 대한 4조목의 문답이다.
答鄭文顯 10
鄭昌黙에게 보낸 답장이다. 편지를 통해 물어온 내용을 별지에 적어 보내니 살펴보고 의견을 달라고 하였다.
別紙 11
喪禮에 대한 6조목의 문답이다.
答鄭文顯 13
鄭昌黙에게 보낸 답장이다. 편지를 통해 물어온 내용을 별지에 적어 보내니 살펴보고 의견을 달라고 하였다.
別紙 14
祭禮에 대한 5조목의 문답이다.
答鄭文顯 16
鄭昌黙에게 보낸 답장이다. 편지를 통해 물어온 내용을 별지에 적어 보내니 살펴보고 의견을 달라고 하였다.
別紙 16
三綱領 및 祭禮와 喪禮에 관한 문답이다.
答鄭文顯(1932) 18
鄭昌黙에게 보낸 답장이다. 吾道의 道統에 대한 언급과 祭禮에 대한 논의가 주된 내용이다.
答鄭文顯(1933) 19
鄭昌黙에게 보낸 답장이다. 편지를통해 물어온 내용을 별지에 적어 보내니 살펴보고 의견을 달라고 하였다.
別紙 20
帶下尺, 衽, 辟領등 상례와 장례에 대한 8 조목의 문답이다.
答鄭文顯(1940) 24
鄭昌黙에게 보낸 답장이다. 敬以直內와 義以方外에 대하여 朱子의 논의를 중심으로 논의하였다.
答鄭文顯 25
鄭昌黙에게 보낸 답장이다. 居敬과 存養을 致知와 力行에 관련지어 설명하면서 大學 과 中庸 등 경전의 내용과 程子등의 말을 인용하면서 논의하였다.
答鄭文顯 27
鄭昌黙에게 보낸 답장이다. 敬의 의미에 대해 여러 경전의 내용과 古人의 말을 인용하여 깊이있게 논의를 전개하였다.
答鄭文顯 31
鄭昌黙에게 보낸 답장이다. 敬의 의미에 대해 여러 경전의 내용과 古人의 말을 인용하여 깊이 있게 논의를 전개하였다.
卷5 書 答鄭文顯 1
鄭昌黙에게 보낸 답장이다. 편지를 통해 물어온 내용을 대략 설명하고 상대의 의견을 물었다.
別紙 1
心, 敬, 천지의 운행, 敬이 天德이라 한 程子의 말에 대한 해석, 主一無適등 16조목에 대한 문답이다.
答鄭文顯(1942) 14
鄭昌黙에게 보낸 답장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고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 한 다음, 편지를 통해 물어온 내용을 대략 설명하였다.
別紙 15
衆理를 갖추고 萬事에 應하는 것으로서의 心, 性情의 문제, 致知와 格物의 문제, 體用과 儉約의 문제, 心의 性情, 心의 著藏, 水火交濟 등에 대한 문답이다.
答鄭文顯 18
鄭昌黙에게 보낸 답장이다. 당시의 정국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글이다.
答鄭文顯 19
鄭昌黙에게 보낸 답장이다. 時事와 그에 대처하는 처신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答鄭文顯 20
鄭昌黙에게보낸답장이다. 일상적인안부 를 묻고 서로 간에 면려하는 내용이다.
答鄭文顯 20
鄭昌黙에게보낸답장이다. 剛州의喪變을 언급하면서 그 처참한 상황과 직접 조문하지 못한 아쉬움을 말하였다.
別紙 22
家禮와 喪禮에 대한 4조목의 문답이다.
答鄭文顯 23
鄭昌黙에게 보낸 답장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고 서로 간에 면려하는 내용이다.
答鄭文顯 24
鄭昌黙에게 보낸 답장이다. 지난번 질문에서 잘못 대답한 부분에 대한 오해를 풀고 양해를 구하는 내용의 편지이다.
答鄭文顯 25
鄭昌黙에게 보낸 답장이다. 喪禮와 服制에 대해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別紙 26
心의 體用에 관한 문제, 虛靈知覺, 東銘, 除是와 除非의 해석 문제, 대학 誠意章등에 대한 문답이다.
答鄭文顯 27
鄭昌黙에게 보낸 답장이다. 작금의 현실과 그에 대처해 나가는 자세에 대해 언급하였다.
答鄭文顯 28
鄭昌黙에게 보낸 답장이다. 先禮類輯의 교감과 출간에 관한 일을 비롯하여 몇 가지 사안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이다.
答鄭文顯 29
鄭昌黙에게 보낸 답장이다. 祭禮와服制에 대한 의논이 주된 내용이다.
答金謹夫(思鎭○1916) 29
金思鎭(1878~1954)에게 보낸 답장이다. 자는 謹夫, 호는 西洲이고 본관은 宣城이다. 부친은 龍奎이고 榮州에 살았다. 栢巖金玏(1540~ 1616)의 후손이고 睡山金輝轍(1842~1903)의 문인이다. 1917년 丁敦燮‧李承熙등과 함께 서간도로 건너가 덕흥보에서 황무지를 개척하였다. 저서로는 心卽理攷‧心理究源‧證雲陶書範‧小學問答‧讀史備遺‧遂志錄‧遼行日記‧詩文雜著 등이 전한다.
答金謹夫 31
金思鎭(1878~1954)에게 보낸 답장이다.
答金士顯(世榮○1916) 32
金世榮(1879~1941)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자는 士顯, 호는 誠庵이고 본관은 宣城이다. 부친은 濟相이고 奉化와 榮州에살았다. 玏의 후손이고 李炳鎬(1851∼1908)의 문인이다. 金思鎭과 함께 영호남을 유람하며 郭鐘錫‧朴世和‧李承熙‧尹冑夏‧金在敬등과 교유하였다. 誠庵集 4권 2책이 전한다.
與金士顯 33
金世榮(1879~1941)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열흘 사이에 차남과 손자가 세상을 떠나는 일을 겪은 상대를 위로하고 더욱 면려하기를 당 부하였다.
答金士顯 34
金世榮(1879~1941)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喪禮에 대한 논의가 주된 내용이다.
答鄭聖敏(東璿○1922) 36
鄭東璿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자는 聖敏, 본관은 晉州이고 公州에 살았다. 부친은 鄭師 武이다.
答鄭聖敏(1926) 36
鄭東璿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물은 다음, 先亭을 건립하는 일과 遺稿를 정리하는 일에 대해 언급하였다.
答金景章(應燮) 37
金應燮(1878~1957)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자는景章, 호는東田이고본관은豐山이다. 金 慶祖(1583~1645)의 後孫으로, 부친은 秉璿이다. 漢城法官養成所를 졸업하고, 咸興裁判所 檢事역임하였다. 경술국치 후에 사퇴하고 辯護士가 되었다가 1919년 上海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滿洲吉林省에서 日警 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되었다. 1933년 국내에서 지하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48년 3월 南北協商次金九와 동행하였다.
答金禹玄 38
金洪培(1874~1938)에게 보낸 답장이다. 初名은 錫逵, 자는 禹玄이고 본관은 金海이다. 부친은 璣元이고 尙州에 살았다. 1894년 式年試생원에 합격하였다.
卷6 書 與權聲之(鍾遠) 1
權鍾遠(1880~1937)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자는 聲之, 호는 石山이고 본관은 醴泉이다. 시조 暹은 고려말에 穆王으로부터 權氏성을 하사받았고 관직은 典工判書를 지냈다. 고조는 應大, 증조는 進魯, 조부는 周相, 부친은 錫煥이고 俛宇郭鍾錫(1864~1919)의 門人이다. 모친은 義城金氏로 士人奎鎭의 따님이다. 저자가 행장을 짓고 權頊淵이 묘갈명을 찬하였다.
與權聲之 1
權鍾遠(1880~1937)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 편지이다.
答權聲之 1
權鍾遠(1880~1937)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 편지이다.
與金啓源(在洙) 2
金在洙(1878~ )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자 는 啓源이고 본관은 商山이다. 俛宇郭鍾錫 (1864~1919)의 門人이다.
與權子愼(頊淵○1916) 3
權頊淵(1880~1959)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자는 子愼, 호는 素谷이고 본관은 安東이다. 冲齋權橃(1478~1548)의 후손으로, 부친은 稷夏이고 奉化와 안동에 살았다. 경학에 밝고 문사가 엄정하였으며 언행이 바르고 효우가 독실했다. 특히 역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평생 일기를 쓰고 평생 초하루와 보름에 꼭 성묘를 했다. 만년에는 심성 수양에 주력하였고, 유림 활동을 전개하였다. 저서로는 隣里慶弔史‧素谷集 등이 전한다.
答權子愼 3
權頊淵(1880~1959)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고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한 다음, 權相奎(1874~1961)등 몇 사람에 대한 일을 언급하였다.
答權道遠(泰泳) 5
權泰泳(1879~1946)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자는 道源, 號는 素石이고 본관은 安東이다. 啓沃의 후손으로, 祖父는 東鳳이고 榮州에 살았다. 星州郡守를 지냈다. 權東鎭(1861~1947)의 문인이다.
答李奇範(鍾洙) 5
李鍾洙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松齋先生 遺集의 중간에 대한 일을 언급한 짧은 편지이다.
答權殷弼(相用) 6
權相用(1881~1956)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자는 殷弼, 號는 玉田이고 본관은 安東이다. 冲齋權橃(1478~1548)의 후손으로, 奉化에 살았다. 학문과 덕행으로 사림의 추중을 받았으며,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고 효행이 지극하며 형제간 우애가 또한 대단하였다. 재주가 비상하여 立岩書院에서 현판 글을 한번 훑어 보더니 10년 뒤에 방문하여 다 외웠다고 한다. 저서로는 玉田集이 전한다.
與李聖來(翊元) 7
李翊元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고, 더욱 면려하기를 당부하는 내용이다.
與權顯伯(1925) 7
權昌謩에게보내는편지이다. 자는顯伯이 고 본관은 安東이다.
答李正民(秀杰)李德純(漢杰)李敬哉 (學基)李舜韶(鏞杰○1917) 8
李秀杰(1877~1963), 李漢杰, 李學基(1881 ∼1953), 李鏞杰(1883~1964)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李秀杰의 자는 正民, 호는 巖皐이고 본관은 眞城이다. 유교경전과 서예에 능통하였으며, 14세 때부터 비석의 글씨를 쓸 정도로 서예에 뛰어나 한석봉에 버금가는 서예가라는 칭송을 받았다. 영남 일대의 비석, 병풍에 그의 글씨가 많이 남아 있다. 慄齋集이 전한다. 李漢杰은 자가 德純이고 호는 后村이다. 李學基의 자는 敬哉, 호는 蒼溪이고 관향은 永春이다. 어릴 때부터 기국이 뛰어나고 자질이 특출하여 가문의 촉망을 받았다. 천성이 黙重하여 일생동안 스스로를 수양하고 자신을 감추어 사람들이 인정해주기를 구하지 않았다. 李鏞杰은 자는 舜韶, 호는 晦山이고 본관은 眞城이다. 와룡면 주하리에 서당을 개설 하여 향리의 청장년들에게 한학을 전수하였다. 晦山遺稿가 전한다.
答李敬哉 9
李學基(1881∼1953)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先師인 東亭李炳鎬(1851∼1908)의 遺稿와 李起鎬(1889~1965)의 부친인 東田李中均(1861~1933)의 유고 印行에 대한 일을 언급한 다음, 서로 간에 학문하는 방향에 대해 의논한 편지이다.
答權子山(相立)權禹卿(相翕) 10
權相立과 權相翕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선조의 묘갈명을 부탁한 일에 대해 곡진한 마음을 전하며 거절하는 내용의 짧은 편지이다.
答李達元(鍾雷○1922) 11
李鍾雷(1889∼ )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자는 達元이고 본관은 月城이다. 俛宇郭鍾錫 (1864~1919)의 門人이다.
答柳養中(道庠) 11
柳道庠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先父君의 유집 교정을 부탁받고 그 결과물을 전해주며 함께 부친 편지이다.
與郭大淵(奫○1926) 12
郭奫(1881~ )에게 보낸 편지이다. 자는 大淵, 본관은 苞山이고 俛宇郭鍾錫(1864~1919)의 문인이다.
答族叔(奎軾○1912) 12
저자의 族叔인 丁奎軾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고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 하였다.
答李仁叟(根春) 13
李根春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古巖遺稿 再校에 대한 일을 언급하고 服制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 하였다.
答李仁叟 14
李根春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시사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의 편지이다.
答李仁叟 15
李根春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 편지이다.
答李仁叟 15
李根春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 편지이다.
答李雲卿 16
李祥鎬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자는 雲卿이고 호는 陽田이다.
答金惠卿(世相) 17
金世相(1885~ )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자는 齊卿이고 본관은 咸昌이다. 朋齋金敬淵 (1856~1919)의 門人으로, 西山金興洛(1827 ∼1899)의 淵源이다.
答族叔(奎顯○1921) 17
저자의 族叔인 丁奎顯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伍子胥와 楚平王의 고사를 인용하여 당시의 상황에 대처하는 의리를 설명하였다.
與金友三(益秀○1917) 19
金益秀(1872~1945)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자는 友三, 호는 雙坪이고 본관은 延安이다. 부친은 福淵이고 榮州에 살았다. 숙부인 金敬淵(1856~1919)의 문인으로, 김경연의 문집인 朋齋遺稿 를 정리하고 萬姓譜를 편찬 하였다.
與金友三(1918) 19
金益秀(1872~1945)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 편지이다.
與金友三 19
金益秀(1872~1945)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 편지이다.
答金友三(1922) 20
金益秀(1872~1945)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 편지이다.
答金友三 20
金益秀(1872~1945)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 편지이다.
答李元甫(善和) 20
李善和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자는 元甫이다.
答李範卿(源甲) 21
李源甲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자는 範卿이고 본관은 眞城이다.
答曺(秉萬) 22
曺秉萬(1889~ )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호는 海溪이고 본관은 昌寧이다. 性齋許傳 (1797~1886)의 門人이다.
答曺(秉萬) 23
曺秉萬(1889~ )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고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하였다.
答李士能(定鎬) 24
李定鎬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고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한 다음, 時事에 대해 언급하였다.
答李舜哉(起鎬) 25
李起鎬(1889~1965)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자는 舜哉, 호는 學田이고 본관은 眞城이다. 성균진사 東田李中均(1861~1933)의 아들로 학행이 있었다. 學田遺稿 6권 3책이 전한다.
答李舜哉 26
李起鎬(1889~1965)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자신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한 다음 時事에 대해 의논하였다.
答李伯純(中冕) 27
李中冕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고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하였다.
與姜士行(道熙) 27
姜道熙(1888~1954)에게 보낸 편지이다. 자는 士行, 호는 南洲‧靜思齋이고 본관은 本貫晉州이다. 부친은 壁元이고 榮州에 살았다. 俛宇郭鍾錫(1864~1919)의 문인이다. 일제강점 후 은둔을 시도하다 독립당으로 지목되어 3달 동안 옥고를 치르고, 말년에 고장 선비들과 龜山吟社를 조직하여 자적하였다. 靜思齋集이 전한다.
與李子乾(基元○1915) 28
李基元(1885)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자는 子乾이고 본관은 星山이다. 俛宇郭鍾錫(1864~ 1919)의 門人이다.
答孫德夫(厚翼) 28
孫厚翼(1888~1953)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자는 德夫, 호는 文巖이고 본관은 月城이다. 부친은 晉洙이고 慶州와 蔚山및 大邱에 살 았다. 1905년 영남 유림의 을사조약 폐기상소에 연명으로 참가하였으며, 1912년 이후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金昌淑으로부터 군자금 모집의 권유를 받고 鄭守基와 함께 군자금 수합활동에 참여하였다. 1925년 김창 숙이 조직한 신건동맹에 참여하여 경남의 울산‧양산‧동래 방면의 군자금 모집을 담당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答孫德夫(1922) 28
孫厚翼(1888~1953)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더욱 학문에 매진하기를 당부하는 내용의 편지이다.
與太(昌東) 30
太昌東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 편지이다.
答李應文 30
李在敎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자는 應文, 호는 槿圃이다.
答金雲瑞(龍圭) 31
金龍圭(1892~1964)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자는 雲瑞, 호는 樊窩이고, 본관은 安東이다. 증조부는 氣淳, 조부는 瓚根이고 부친은 炳禧이다. 權相翊의 문하에서 孝經을 읽고 李濟相의 문하에서 四書를 읽어 性理學 탐구하였는데, 李濟相은 학문에 몰두하는 공의 向學熱을 극구 칭찬하였다. 文辭가 남달리 高尙하고 深 奧하였으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의 학덕을 추모하는 立雪契가 지금까지 존속되고 있다.
答金雲瑞 33
金龍圭(1892~1964)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고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 한 다음, 학문의 방향에 대한 생각을 말하고 더욱 면려하기를 당부하였다.
答李國材(校澤) 35
李校澤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고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한 다음, 학문의 방향에 대한 생각을 말하고 더욱 면려 하기를 당부하였다.
答李國材 35
李校澤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고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한 다음, 형제간에 서로 면려하여 성취가 있기를 바란다 고 하였다.
答李範九 36
李範九에게 보낸 답장이다. 자는 禹錫이고 본관은 全州이다. 西山金興洛(1827∼1899)의 문인으로, 定齋柳致明(1777~1861)의 淵源이다.
答孫碩士(亮翰) 37
孫亮翰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고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한 다음, 벗들 간에 酬唱한 詩을 모두 정리하여 책으로 간행하고 저자에게도 한 부 보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答南周卿(相禹) 38
南相禹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고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하는 짧은 편지이다.
答柳(弘植) 38
柳弘植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부인상에 조문해준 후의에 사례하는 내용의 편지이다.
與柳士用(佑國○1927) 39
柳佑國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상중에 있는 柳佑國에게 祭禮와 服制에 대한 생각을 개진하였다.
卷7

答李述祖(源學) 1
李源學(1894~ )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자는 述祖이고 본관은 眞城이다. 俛宇郭鍾錫 (1864~1919)의 門人이다.
答李述祖 1
李源學(1894~ )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先師인 東亭李炳鎬(1851∼1908)의 遺稿교 정에 관한 의견을 이야기하였다.
答金(粹應) 2
金粹應(1887~1954)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자는 純夫, 호는 直齋이고 본관은 義城이다. 부친은 昊逸이고 星州에 살았다. 恭山宋浚弼 (1869~1944)의 문인이다.
答金子敬(承學○1914) 3
金承學(1894~1969)에게 보낸 답장이다. 자는 子敬, 호는 水村‧蔿堂이고 본관은 宣城이다. 부친은 灝鎭이고 榮州의 水島에 살았다. 金世榮(1889~1979)‧金東鎭(1867~1952)의 문인이다. 문예와 행실로 이름이 높았다. 저서로는 水村集이 전한다. 柳東銖가 행장을 짓고 李家源이 묘갈명을 찬하였다.
答金和叔(熏) 3
金熏(1898~ )에게 보낸 답장이다. 자는 和叔, 호는 心堂이고 본관은 義城이다. 貞山 金東鎭(1867~1952)의 門人이다.
別紙 4
讀書法에 대한 문답으로, 大學을 예로 들어 설명하였다.
答金和叔 5
金熏(1898~ )에게 보낸 답장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고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한 다음, 더욱 면려하지를 당부하였다.
答金而晦(榥) 6
金榥(1896~1978)에게 보낸 답장이다. 자는 而晦, 호는 重齋이고 본관은 義城이다. 俛宇郭鍾錫(1864~1919)과 寒岡鄭逑(1543~ 1620)의 門人으로, 退溪의 淵源이다. 2460수의 시와 4051편의 산문을 포괄하는 방대한 분량의 重齋先生文集과 周易小箚, 尙書 舊讀, 詩經餘義, 春秋譾言, 周禮箚疑, 儀禮通讀, 禮記記疑, 論語存疑, 孟子附演, 中庸追繹, 大學私繹, 小學零言, 近思錄私箚, 近思錄追繹, 心經追繹, 孝 經章句, 歷代紀年, 獨立提綱, 東史略, 東國歷年圖捷錄, 續綱目義例考異 등 수 많은 저서를 남겼다.
答金而晦(1941) 6
金榥에게 보낸 답장이다. 시사에 대한 언급과 함께 心體와 居敬등 철학적인 내용에 대해 의논하였다.
別紙 8
禮說에 관한 문답으로, 여러 가지 자료와 사례를 통하여 喪禮와 服制에 대해 자세히 논의하였다.
答金而晦 10
金榥에게 보낸 답장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고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한 다음, 時事와 학문에 대해 언급하였다.
與郭可豪(澶○1924) 11
郭澶(1897~ )에게 보낸 편지이다. 자는 可豪이고 본관은 玄風이다. 大溪李承熙(1847 ∼1916)의 문인으로, 寒洲李震相(1818∼1886) 의 淵源이다.
答金敬九(濟容○1915) 12
金濟容(1898~ )에게 보낸 답장이다. 자는 敬九이고 본관은 宣城이다. 貞山金東鎭 (1867~1952)의 門人으로, 西山金興洛(1827 ∼1899)의 淵源이다.
答鄭武伯(希文) 12
鄭希文(1900~ )에게 보낸 답장이다. 자는 武佰이고 본관은 東萊이다. 晦峯河謙鎭(1870~ 1946)의 門人으로, 俛宇郭鍾錫(1864~1919) 의 淵源이다.
答鄭武伯 13
鄭希文에게 보낸 답장이다. 학문하는 순서와 자세에 대해 언급하였다.
答李德遠(馨鎭) 13
李馨鎭(1903~ )에게 보낸 답장이다. 자는 德遠, 호는 敬山이고 본관은 公州이다. 典工 侍郞을 지낸 李堣의 후손이다. 濟西李貞基의 門人으로, 西山金興洛(1827∼1899)의 淵源 이다.
答李德贊(鍾國) 14
李鍾國에게 보낸 답장이다. 敬을 위주로 근 본을 세우고 이치를 궁구하여 지식을 쌓으며 자신을 돌이켜보아 실천에 옮기라는 古人의 말을 인용하며 더욱 면려하기를 당부하였다.
答李德贊 15
李鍾國에게 보낸 답장이다. 편지를 통해 물어온 禮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간략하게 말하였다.
別紙 15
禮說에 관한 문답으로 喪禮와 祭禮에 대한 10조목의 문답이다.
與族弟(南鎭) 19
저자의 族弟인 丁南鎭에게 보낸 편지이다. 祝文양식을 말하고 例示하였다.
與申周一(徹均) 19
申徹均에게 보낸 편지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 짧은 편지이다.
答李(鎭國) 20
李鎭國에게 보낸 답장이다. 부탁한 묘갈명을 전하며 함께 부친 짧은 편지이다.
與族姪(海轍) 20
저자의 族姪인 丁海轍에게 보낸 편지이다. 부탁한 告由文을 보낸 뒤에 부친 짧은 편지이다.
答族大父(大懿) 20
저자의 族大父인 丁大懿에게 보낸 답장이다. 先稿의 간행에 대한 일을 의논하였다.
答四從弟進卿(學鎭) 21
저자의 四從弟인 丁學鎭에게 보낸 답장이다. 자는 進卿이다. 世稿의 편찬에 대한 일을 의논하는 짧은 편지이다.
答四從弟進卿 21
저자의 四從弟인 丁學鎭에게 보낸 답장이다. 三從祖考의 행적을 서술하는 일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전하는 짧은 편지이다.
答四從弟進卿 22
저자의 四從弟인 丁學鎭에게 보낸 답장이다. 世稿의 편찬에 대한 일을 의논하는 짧은 편지이다.
與鄭(在鋏) 22
鄭在鋏에게 보낸 편지이다. 先禮類輯의 序文과 출간에 관한 일을 의논하는 짧은 편 지이다.
答李淵民(家源) 23
저자의 제자인 李家源(1917~2000)에게 보낸 답장이다. 호는 淵民이고 본관은 眞城이다. 안동 출신의 한학자이자 대학교수이다. 退溪선생의 14세손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혔다. 1952년에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고 1966년에 모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69년에 대만중화학술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5년부터 성균관대학교 문리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1964년부터는 연세대학교 국문학과로 자리를 옮겨 국학 연구 및 후진 양성에 힘썼다. 저서로는 23권의 이 가원전집 을 비롯하여 연암소설연구 , 금 오신화역주 , 중국문학 사조사 , 한국한문 학소사 , 조선호랑이 이야기 , 조선문학사 등이 있다. 이 편지는 사제간에 주고받은 수 십 편의 강론 중 하나이다.
與李淵民 23
李家源(1917~2000)에게 보낸 답장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고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 하였다.
答李淵民 24
李家源(1917~2000)에게 보낸 답장이다. 질문에 대한 답을 별지의 형식으로 정리하여 보낸다고 하였다.
別紙 25
孟子의 내용 가운데 梁惠王이 참람되게 왕이라 칭한 일 및 造端託始, 拔本塞源, 願比死者, 善推其所爲, 終身飽, 轉附朝儛, 先王觀 指古先聖云云, 晏子對景公之問何以先王之事言之云云, 吾何以助助字, 爲諸侯憂諸侯謂附庸之國云云, 煢獨, 聞誅一夫紂, 萬鎰云云, 雲霓, 死其長등에 대한 문답이다.
答李淵民 27
李家源(1917~2000)에게 보낸 답장이다. 질문에 대한 답을 별지의 형식으로 정리하여 보낸다고 하였다.
別紙 27
孟子 의 내용 가운데 造端託始, 王道政治, 牛山之木, 浩然之氣, 語句에 대한 풀이 문제, 不動心, 주석의 문제, 四端七情, 采薪之憂및 祭禮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문답이다.
答李淵民 30
李家源(1917~2000)에게 보낸 답장이다. 편지를 받아보니 그간 공부가 많이 진보하여 기쁘다고 하면서 더욱 분발하기를 당부한 다음, 喪禮와 祭禮에 대해 諸家의 說을 인용하여 언급하였다.
答李淵民 32
李家源(1917~2000)에게 보낸 답장이다. 孟子 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遏人欲存天理에 대해 설명하였다.
別紙 32
陳仲子章의 주석 문제, 牛山之木의 夜氣의 문제 등에 대한 6조목의 문답이다.
答李淵民 33
李家源(1917~2000)에게 보낸 답장이다. 학문하는 방법과 자세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答李淵民 34
李家源(1917~2000)에게 보낸 답장이다. 과정을 정해 공부해나가고 詞章과 功利의 末習은 배제할 것을 당부하였다.
答李淵民 35
李家源(1917~2000)에게 보낸 답장이다. 학문하는 방법과 자세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答李淵民 36
李家源(1917~2000)에게 보낸 답장이다. 학문하는 방법과 자세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答李淵民 37
李家源(1917~2000)에게 보낸 답장이다. 학문하는 방법과 자세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다음, 더욱 면려하기를 당부하였다.
答李淵民 38
李家源(1917~2000)에게 보낸 답장이다. 仁과 孝悌의 의리에 대해 강조하고 현 세태에 대해 언급하였다.
與李淵民 39
李家源(1917~2000)에게 보낸 답장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전하고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한 다음, 주변의 知人들에 대한 일을 언급 하였다.
卷8

答四從弟士安(國鎭) 1
저자의 四從弟인 丁國鎭에게 보낸 답장이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간 아우에게 알맞은 처방을 찾아 완쾌한 다음 속히 돌아오기를 당부하였다.
答族姪正哉(湜) 1
저자의 族姪인 丁湜에게 보낸 답장이다. 仁義를 확충하는 요점에 대해 제시한 다음 더욱 면려하기를 당부하였다.
答族姪正哉(1934) 2
저자의 族姪인 丁湜에게 보낸 답장이다. 讀書法에 대해 사례를 통하여 언급한 다음, 더욱 면려하기를 당부하였다.
答族姪正哉 2
저자의 族姪인 丁湜에게 보낸 답장이다. 독서를 통해 立志, 居敬, 窮理, 反躬, 實踐의 의리에 대해 강조한 다음, 더욱 면려하기를 당부하였다.
與酉谷權氏門中 3
봉화군 酉谷에 있는 안동 권씨 문중에 보낸 편지이다. 忠定先生文集 가운데 보충할 내용에 대해 의견을 전달하였다.
與京中宗會 5
서울에 있는 宗中에 보낸 편지이다. 先祖인 月軒公의 문집과 世稿의 印刊에 대한 일을 의논하였다.
與宗中譜所 6
서울에 있는 宗中의 譜所에 보낸 편지이다. 족보의 간행 시기와 내용에 대한 일을 의논 하였다.
寄海麟 8
저자의 장남인 丁海麟에게 보낸 편지이다. 자는 士遊이다. 孟子의 중요성과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 언급한 다음 더욱 면려하기를 당부하였다.
寄海麟 8
丁海麟에게 보낸 편지이다. 일상적인 안부 를 물은 다음 자신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寄俊榮孫 9
저자의 손자인 丁俊榮에게 보낸 편지이다. 난리 중에 祖母의 상을 만나 애통한 가운데 장례를 치른 점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하고, 그간의 경위와 근황에 대해 궁금한 마음을 전하였다.

古鏡重磨方序 10
退溪가 엮은 古鏡重磨方 에 붙인 서문이 다. 이 책은 1607년(선조 40)退溪가 옛 銘‧箴 중에서 수양이 될 만한 것을 뽑아 1책 54장으로 정리하였는데, 1744년(영조 20)그의 제자 寒岡鄭逑(1543~1620)가 간행하였다. 책머리에는 1744년 金在魯가 쓴 ‘御製古鏡重磨方扁題’가 있으며 영조의 御製詩가 있다. 본문에는 고대의 성왕인 殷湯의 盤銘과 周武王의 席四端銘등으로부터 당송의 명현인 韓愈의 五箴, 程子의 四勿箴등 23명의 잠‧명 76편을 수록하였다. 말미에는 朱子의 시 古鏡重磨가 인격수양에 지침이 된다는 내용의 칠언시와 그 대의를 밝힌 퇴계의 해설이 있고, 그 뒤에는 이 책의 題名이 先哲의 학문태도를 본받는 것에서 유래하였음을 밝힌 퇴계의 오언시와 그것을 해설한 寒岡鄭逑(1543~1620)의 글이 함께 실려 있다.
先禮類輯序 12
立齋鄭宗魯(1738~1816)의 來孫인 寓庵 鄭夏黙이 엮은 先禮類輯에 붙인 서문이다. 이 책은 퇴계의 재전 제자인 愚伏鄭經世 (1563∼1633)와 그의 來孫인 立齋鄭宗魯 (1738~1816)의 문집에서 평소 禮에 관해 논한 조목과 知舊門人과의 문답 및 雜著에 있 는 禮說을 뽑아내어 家禮의 篇目대로 분류하여 정리한 것으로, 上卷과 下卷의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정리하여 집안에 보관하고 있던 것을 鄭夏黙이 세상을 떠난 뒤에 그의 三從弟인 鄭昌黙이 저자에게 부탁하여 재정리한 다음 서문을 붙여 간행했다고 하였다.
花譜序 13
물과 육지에 사는 초목의 꽃은 그 종류가 매우 많은데, 好事者가 이를 종류별로 분류하 여 책으로 엮은 것이 花譜의 유래라고 하였다. 저자는 일찍이 그런 소문만 듣고 직접 보지는 못했는데, 어느 날 從人이 화보를 구해 와서 보여주었기에 내용을 읽어보고 서문을 붙인다고 하였다.
夢吟寺仙遊續契帖序 14
경북 영주 지역은 선인들의 자취가 골골이 남아 있으니, 예컨대 退溪선생의 蓉臺遊賞과 嘯皐선생의 疑石唱酬등은 세상 사람들이 입으로 전하여 지금까지 그 즐거움을 상상한다고 하였다. 저자의 선조 丁彦숙[王+ 肅](1600~1693)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풍 모를 그리워하던 사람들이 鶴駕山의 夢吟寺에 모여 3일 동안 모임을 가진 다음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성명과 관향, 나이 등을 적어 契帖을 만들고 그 이름을 仙遊錄이라 하였는데, 뒤에 이들의 후손들이 다시 그 모임 을 이어가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에 宋寅璣와 朴齊衡및 저자의 族叔인 丁奎集이 결의하여 고을에 通文을 돌리고 자금을 모금하여 계회를 영구히 지속할 터전을 삼았다고 하였다. 그런 뒤에 저자에게 계첩을 만들고 서문을 써달라고 부탁했다고 하였다.
伴鶴亭朴公實紀序 15
朴景曾(1611~1669)의 문집인 伴鶴亭實記에 붙인 서문이다. 자는 汝惟, 호는 伴鶴 亭이고 본관은 潘南이다. 朴檜茂의 문인으로 榮州에 살았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항복한 것을 분개하여 과거를 단념하였다. 마을 부근 산수풍광이 아름다운 곳에 伴鶴亭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權省吾‧羅以俊‧丁儉岩 등과 함께 酬唱한 三日仙遊錄이 전한다. 실기는 공의 후손 齋衡이 공의 시문과 여러 선배의 글을 엮어 1책으로 만든 뒤에 저자에게 서문을 부탁했다고 하였다.
烈女丹陽禹氏實紀序 17
金東一의 아내 丹陽禹氏의 실기에 붙인 서문이다. 실기는 시아버지인 金益濟가 그녀의 婦德기리는 글과 평소 가정에서 지은 글을 모아 1책으로 만든 다음 저자에게 서문을 부탁했다고 하였다.
羅州丁氏族譜序(1931) 18
저자의 가문인 羅州鄭氏족보에 붙인 서문이다.
贈金君(鳳垕)序 20
關北지역에 사는 金鳳垕에게 주는 서문이다. 나이 18세에 큰 뜻을 품고 1100리 길을 달려 영남지역으로 왔는데, 名儒碩學을 두루 찾아 뵙고 받은 詩와 序文이 무려 수십 편이 되었다고 하였다. 한번은 저자를 찾아왔는데, 살펴보니 모습이 공손하고 재주가 민첩하며 행동거지는 편안하고 한가로운 것이 많은 선비들의 부러움을 살 만하다고 하였다. 하루를 묵으면서 저자에게 한 마디 말을 청하여 이 글을 적어준다고 하였다.
送人遊松嶽序 21
세상에 불평을 품고 松嶽으로 찾아가는 벗을 전송하는 상황을 설정한 다음, 그와의 대화 형식으로 자신의 흉금에 품고 있던 포부와 학문에 대한 생각을 서술한 서문 형식의 글이다.
送人遊中國序 23
위의 글과 같은 형식의 글이다. 중국으로 가는 벗을 전송하는 상황을 설정한 다음, 그와의 대화 형식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관계, 그리고 저자가 생각하는 中國觀등을 서술한 글이다.
擬微子送箕子之朝鮮序 24
微子가 조선으로 가는 箕子를 전송하는 상황을 설정한 다음, 자신의 생각을 서술한 글이다. 저자의 역사관이 잘 나타나 있다.
擬漢帝送嚴子陵還山序 25
後漢의 光武帝가 산으로 돌아가는 嚴子陵 을 전송한 일에 비겨, 자신의 포부를 피력한 글이다.

小白山水記 26
소백산의 산수를 돌아보고 지은 기행문 형식의 기문이다.
節友社重修記 29
節友社를 중건하고 지은 기문이다. 절우사는 陶山書堂 동쪽 산기슭에 있는 건물로 퇴계 선생이 화단을 조성하여 소나무, 대나무, 매화, 국화를 심고 四節友라 명명한 뒤에 자연과 벗하며 생활하던 소박한 곳이다. 이 글에서 저자는 四節友의 의미에 대해 여러 가지 고사를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松梧臺記(1926) 30
저자의 族曾大父인 俏翁이 國難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뒤 茁浦里의 집 후원 산 기슭을 ‘송오(松梧)’라고 이름하고 그 위에 지은 작은 정자를 지어 松梧臺라는 편액을 붙였다고 하였다. 날마다 그곳에서 기거를 하면서 직접 소나무와 오동나무, 대나무, 난초, 국화 등을 심어 숲을 가꾸고 집까지 오솔길을 내어 손님을 맞이하도록 하는 한편, 수백 권의 서책을 쌓아두고 언제나 열람할 수 있게 하고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스스로 취하 면서 세상의 모든 시름을 잊으며 살았다고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저자를 불러놓고 “내 가 이 대(臺)를 지었지만 아름다운 경관도 없을 뿐 그다지 알려진 곳도 아닌데, 행여 남 들이 보면 비웃지나 않을런지!그러나 온 나 라가 어수선하고 뒤범벅이 된 처지에 내가 그나마 머무를 곳이 있었기에 다행하게도 모 든 것을 잊고 그런대로 이름 없이 재야에서 늙어 죽게 된 것이 아닌가. 자네가 기문을 짓 되 과장되게 표현하지 말게!”라고 하며 기문 을 부탁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族曾大父생애 의 특징적인 면을 들고 그 사연을 기록하여 기문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兼山齋記 32
저자의 벗인 鄭武伯은 일찍 학문에 뜻을 두고 부지런히 도리를 탐구하였는데, 학업을 익힐 장소가 없어서 집 근처에 조그만 집을 짓고 兼山齋라는 편액을 걸어 서재로 삼았다 고 하였다. 그래서 저자는 그 이름의 의미를 大學과 中庸및 여러 가지 典故를 들어 설명 한 다음 ‘그쳐야 할 곳에서 그칠 줄 알아야 한다. ’는 말로 요약하여 그의 학문을 권면하 였다.
希賢堂記 33
저자의 族大父都正公은 躬行實踐으로 칭송되는 인물이라고 하였다. 그가 程子의 ‘선비는 현인이 되기를 소망해야 한다. ’는 말에서 의미를 취하여 堂號를 希賢堂이라 하고 기문을 부탁하기에 그 의미를 부연하여 기문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可隱齋記 34
영주에있는龜臺는栢巖金玏(1540~1616) 先生이 강론하고 독서하던 곳인데, 그 후손인 金輔應이 그 곁에 작은 집을 지어 可隱齋이라 편액을 걸고 저자에게 기문은 부탁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隱居의 의미를 부연 설명한 다음기문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金玏의 자는 希玉, 호는 栢巖, 諡號는 敏節이고 본관은 宣城이다. 부친은 士文, 生父는 士明이고 祖父는 祐이며 奉化‧安東‧榮州에 살았다. 朴承任과 黃俊良의 문인이다. 1564년 생원시에 급제하고, 1576년 式年試에서 문과에 급제하였다. 成均館典籍‧司諫院正言‧弘文館副修撰‧吏曹佐郞‧慶尙右道觀察使‧吏曹判書‧大司諫‧大司憲‧大司成 등을 역임하였다. 栢巖集 6권 4책이 전한다.
泉庵食記 35
저자가 同志들과 함께 스승인 東亭李炳鎬 (1851∼1908)선생을 모시고 聖泉庵에서 기거하며 그 곳의 자연 풍광과 즐거움을 설명한 記文 형식의 글이다. 李炳鎬의 자는 子翼, 초명은 正鎬이고 본관은 眞城이다. 龍山李晩寅(1834∼1897)의 門人으로, 寒洲李震相 (1818∼1886)을 찾아가 학문을 질정하였다. 俛宇郭鍾錫(1864~1919)과 편지를 주고받 으며 理氣說ㆍ心性說등에 대해 논하였는데, 퇴계의 ‘心合理氣說’을 이어받아 ‘心밖에 理가 없고 理밖에 心이 없으며, 理와 氣가 합하여 理가 위주인 것이 心이다. '라는 관점에서 논리를 전개하였다. 저서로 東亭遺稿 4卷 2冊이 전한다.
松皐亭記 36
榮州동쪽 수 십리 자리 잡은 望洞에 處士 李公이 살고 있었는데, 여러 번 과거에 실패 한 뒤로는 자연에 뜻을 붙이고 자신을 수양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공은 송림이 우거진 집 주변의 작은 언덕을 좋아하여 松臯라 自號하였는데, 날이 추워져도 변치 않는 소나무의 절개를 사랑하여 그 곳에 정자를 짓고 싶어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래서 공의 來孫인 某氏가 光武 年間(1897∼1907)에 그 언덕 가에 작은 집을 짓고 동쪽 채에 松皐亭이란 편액을 걸었는데, 睡山金輝轍(1842~1903)이 기문을 지었다. 10년 뒤에 집을 重修하고 古巖金世洛(1854~1928)에게 기문을 부탁하였으니, 모두 공이 先人의 뜻을 계승한 것이었다. 그 뒤 李某氏의 아들 李根春이 집안사람들과 상의하여 1940년에 별채를 신축하여 송고정이라 편액한 다음 저자에게 기문을 부탁했다고 하였다.
龜潭精舍重修記(代族曾大父佐郞公大植作) 37
丹陽의 수려한 자연 경관 중에서도 강을 끼고 상류와 하류에 자리 잡은 龜潭, 石門島, 鵑巖, 玉筍峯, 花灘등이 손에 꼽힌다. 그 가운데서도 龜潭은 주위의 기암괴석과 울창한 산림 등과 어우러져 경관이 더욱 아름다우니, 퇴계 선생도 단양의 산수를 읊은 기문에서 ‘龜潭을 본 뒤에야 앞서 내가 보았던 것들이 기이한 풍광이 아님을 비로소 알았다.’라고 하였다. 저자의 선조인 愚潭先生이 벼슬에서 물러난 뒤 이곳에 정자를 지어 龜潭精舍라 이름하였는데, 세월이 지나 퇴락함을 면치 못 하였다. 그래서 저자의 族曾大父인 丁大植 (1847~ ?)이 집안사람들과 상의하여 정사를 중수한 다음 記文을 짓는다고 하였다. 이 글은 저자가 族曾大父를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烈女朴氏旌閭閣重建記(代族曾大父佐郞公作) 39
열녀 박씨의 정려각을 중건하고 지은 기문이다. 저자의 族曾大父인 丁大植을 대신하여 지은 글이다.
卷9

雲陶雅選跋 1
雲陶雅選은 저자의 스승인 東亭李炳鎬 (1851∼1908)이 雲谷선생과 退溪선생의 문집 중에서 周南, 召南의 풍치가 어린 詩를 가려 뽑아 편집한 책으로, 上下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편집을 마친 뒤 스스로 서문을 지어 그 뜻을 드러내고 다시 저자에게 발문을 지으라고 하여 외람되게도 선생의 뜻을 기록한다고 하였다. 東亭李炳鎬의 자는 子翼, 초명은 正鎬이고 본관은 眞城이다. 龍山李晩寅(1834∼1897)의 門人으로, 寒洲李震相(1818 ∼1886)을 찾아가 학문을 질정하였다. 俛宇 郭鍾錫(1864~1919)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理氣說ㆍ心性說등에 대해 논하였는데, 퇴계의 ‘心合理氣說’을 이어받아 ‘心밖에 理가 없고 理밖에 心이 없으며, 理와 氣가 합하여 理가 위주인 것이 心이다. '라는 관점에서 논리 를 전개하였다. 저서로 東亭遺稿 4卷2冊이 전한다.
龍峯文集跋 2
龍峯黃益淸(1589∼1659)의 문집인 龍峯集의발문이다. 冑孫인 鐘樂이 1908년에 散逸된 遺文들을 모아 上下로 합편하여 간행하려고 하다가 그해 가을에 죽었는데, 그 뒤 1935년에 막내 동생인 聖樂이 집안 어른들과 상의하고 필요한 경비를 모아 3권 1책으로 간행하였다. 앞뒤에는 柳東濬의 서문과 저자와 공의 후손 永祖와 永紹의 발문이 있다. 卷 1에는 賦1편과 詩113首, 卷2에는 對策과 疏 2편‧書11편‧序2편‧碑文1편‧上樑文2편이 수록되어 있다. 卷3은 附錄으로 공의 家狀과 墓碣銘이 각각 1편씩 실려져 있다. 공은 어려서 가학을 하다가 蒼石李埈의 문하에서 朱子書 등을 공부하였다. 1624년(인조 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630년(인조 8)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權知成均館學諭를 거쳐 成均館典籍‧兵曹佐郞‧戶曹正郞‧江原都事‧全南都 事등을 역임하였다.
四無翁遺稿跋 3
丁載老(1731~1802)의 문집인 四無子遺 集 의 발문이다. 丁載老는 저자의 族先祖이다. 문집은 2권 1책의 구성으로, 卷1에는 貞窩 黃龍漢이 쓴 서문과 300여 수의 詩를 비롯하여 南野朴孫慶에게 올리는 誄辭가 수록되어 있다. 卷2에는 편지와 記‧銘이 수록되어 있다. 附錄에는 權聖翊이 쓴 行狀‧鄭宗魯가 撰한 墓碣銘‧후손인 저자가 撰한 墓誌銘을 비롯하여 輓詞와 祭文이 수록되어 있고, 延谷 權聖翊이 쓴 後記와 孫子文敎의 跋文, 玄孫 珠燮이 쓴 後識가 수록되어 있다. 丁載老의 자는 玄之, 호는 四無子이고 본관은 羅州이다. 부친은 志翼, 모친은 南陽洪氏이고 生父는 志謙이며 醴泉에 살았다. 1756년(영조 32) 進士試에 합격하였다.
岌山遺集跋 4
安永鎬(1854∼1896)의 시문집인 岌山遺集의 발문이다. 1937년에 아들인 承胤이 편집하여 4권 2책으로 간행하였다. 권1, 2는 賦와 詩, 권3은 書‧告由文‧祭文‧銘‧贊‧序‧識, 권4는 行錄‧墓表‧雜著‧附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安永鎬의 자는 敬能, 호는 岌山, 본관은 順興이다.
訥淵集跋(代族曾大父佐郞公作) 5
丁敏道의 문집인 訥淵集의 발문이다. 1915년 10세손 규호(圭浩)가 편집하여 1915 년 2권 1책으로 간행하였다. 丁敏道의 자는 德邵, 호는 訥淵이고 본관은 羅州이다. 부친은 宣務郞을 지낸 復이고 모친은 月城李氏이 다. 1609년 향리의 선비들과 愚淵書院을 수리 하여 경학을 강독하고 예설을 강론하였으며, 향교와 서당의 學規13절목을 제정하였다. 이 글은 族曾大父인 佐郞公丁大植(1847~ ?)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書道南書院事蹟後 6
道南書院史蹟 의 後序이다. 道南書院史蹟은 저자의 벗인 鄭昌黙이 편집한 책이다. 書院은 경상북도 상주시 도남동에 있는데, 1606년 지방유림의 공의로 鄭夢周‧金宏弼‧鄭汝昌‧李彦迪‧李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 곳이다. 1616년에 는 盧守愼‧柳成龍을, 1635년에는 鄭經世를 추가 배향하였다. 1677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왔다. 경내의 건물로는 묘우인 道正祠, 東齋인 遜學齋, 西齋인 敏求齋, 神門인 入德 門, 강당인 一貫堂, 누각인 靜虛軒과 風雩壇‧ 詠歸門 등이 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으로 1868년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 현재는 강당인 일관당만 남아 있으며, 묘우와 강당자리에는 礎石이 원형대로 남아 있다.
書柳葉杯序後 7
柳葉杯에 적은 後序로, 저자의 從先祖인 丁允祐(1539∼1605)이 萬曆年間(1573∼1620) 에 명나라로 사신 갔다가 神宗皇帝에게서 받은 것이다. 초명은 胤祐, 자는 天錫, 호는 草庵이고 본관은 羅州이다. 1567년 司馬試에 합격하고 1570년 大科급제하였다. 형조와 예조, 병조의 3좌랑을 거쳐 사간원 정언, 성균관 대사성, 사간원 대사간, 동부승지, 황해도사, 동래부사, 여주목사, 광주목사, 강원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천성이 맑고 고결하며 학문에 독실하고 나라에 충성스러웠다. 형제와는 우애가 두터웠으며 늘 義理를 강구하고 학문을 토론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났을 때 宣祖가 賜祭文을 내렸는데, “청렴함과 절조 그리고 아름다운 이름은 儒林에서 가장 빼어나고 여러 관청에서 권위와 명성을 드날렸다. 홀로 행한 충정은 사람들이 감복하였으며 符 節을 차고 지방관으로 가서는 봄바람처럼 교화를 행하였다. ”라고 하였다.
箴 靜思齋箴(幷敍) 8
저자의 벗 姜道熙(1888~1954)의 부탁으로 그가 독서하는 집인 靜思齋에 적은 箴이다. 자는 士行, 호는 南洲‧靜思齋이고 본관은 本貫晉州이다. 부친은 壁元이고 榮州에 살았다. 俛宇郭鍾錫(1864~1919)의 문인이다. 일 제강점 후 은둔을 시도하다 독립당으로 지목 되어 3달 동안 옥고를 치르고, 말년에 고장 선비들과 龜山吟社를 조직하여 자적하였다. 靜思齋集이 전한다.

鏡銘 8
거울의 덕목을 찬양한 銘으로 모두 3편이 실려 있다.
丌銘9
書案의 덕목을 기리는 銘이다. 丌는 책을 놓는 곳이고 책은 道를 싣은 그릇이므로 군자가 늘 곁에 두어 구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欹器銘(幷敍) 9
欹器에 적은 銘이다. 欹器는 약간 기울어 지게 만든 그릇으로, 물이 가득 차면 뒤집어 지고 비었을 때는 조금 기울어지며 절반 정도 차면 반듯하게 놓인다고 한다. 그래서 고대 중국에서는 왕이 앉는 자리의 오른쪽에 놓고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고 알맞게 처신하도록 스스로 경계하는 데 사용하였다고 한다. 공자가 魯나라 桓公의 사당에 갔을 때 이 그릇을 보고 무슨 그릇이냐고 묻자, 환공이 자리 오른편에 두었던 그릇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공자가 제자에게 물을 떠오게 해 서 그릇에 담고 실험해보니 실제로 그와 같았다고 한다.
金剛硯銘(幷敍) 9
저자의 벗 晩山全胤錫이 금강산 유람에서 얻어 애지중지하던 金剛硯에 적은 銘이다. 李家源(1917~2000)이 頌을 지은 뒤 저자에게 권하여 명을 지었다고 하였다.

聖學十圖贊 10
聖學十圖 에 붙인 贊이다. 이 책은 퇴계 선생이 1568년 12월 왕에게 올린 상소문으로, 선조가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군왕의 道에 관한 학문의 요체를 도식으로 설명한 것이다. 원래의 명칭은 進聖學十圖箚幷圖이다. 내용은 서론의 성격이 담긴 進聖學十圖箚 에서 시작해 10개의 도표와 그 해설로 되어 있다. 도표는 太極圖‧西銘圖‧小學圖‧大學圖‧ 白鹿洞規圖‧心統性情圖‧仁說圖‧心學圖‧敬齋 箴圖‧夙興夜寐箴圖이다.
草廬三顧圖贊(幷敍) 12
저자의 집안에 옛날부터 전해오던 草廬三 顧圖라는 畵帖에 붙인 贊이다.
渭水漁獵圖贊(幷敍) 13
渭水漁獵圖에 붙인 贊이다. 어느 날 從人이 이 그림을 가져왔는데, 그 畵法이 高古하고 筆勢가 신묘하여 마치 직접 그 광경을 보는 듯이 생생했다고 하였다.
牧童吹笛圖贊(幷敍) 14
저자에게 일찍부터 畵本하나가 있었는데, 위에는 수풀과 푸른 대나무가 우거지고 아래 로는 시원한 냇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으며 한 명의 童子가 그 속에서 소를 먹이면서 피리를 불고 있는 그림이었다. 저자는 이 그림 속의 목동을 箕山의 물가에 은거하는 사람으로, 그가 불고 있는 피리는 鐵亭의 신선이 불던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仙境에서 목동이 피리를 불고있는 이 그림에 다 贊을 붙인 것이다.
山水屛贊 14
자신의 병풍 속에 그려진 산수의 수려한 자태를 보고 붙인 贊이다.
蓍贊(幷敍) 15
저자의 벗 金澤鎭(1874~1961)의 집에 49蓍가있는데, 바로 그의 선조인 栢巖金玏(1540~1616)이 중국으로 사신 갔을 때 神宗 皇帝가 大學衍義와 함께 하사한 것이다. 그래서 저자가 이 귀한 물건을 어루만지며 느끼는 바를 서술하여 贊을 붙인다고 하였다. 金澤鎭 의 자는 源仲, 호는 東黎이고 본관은 宣城이다. 부친은 慶奎이고 榮州에 살았다.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金昌淑등이 유림대표가 되어 독립청원서를 작성하고 유림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 되었다.

懷友(昭君怨○仄平進退叶) 15
벗을 그리는 내용의 詞로, 3首가 실려 있다.

東海頌(幷敍) 16
천지 사이에 바다가 가장 거대하고 그 바다 가운데는 東海가 祖宗이 된다고 하였다. 저자가 그렇게 광활하여 온갖 물상을 포괄할 듯한 동해의 거대한 모습을 보고 그 덕과 은택에 대해 頌을 지어 표현한 글이다.
時雨頌(幷敍) 16
비는 百穀을 기르는데 필수적인 것이지만 너무 많으면 홍수가 되고 너무 적으면 가뭄이 되니, 반드시 적당하게 내린 연후에 만물을 생장시키는 공을 볼 수 있다. 올해 가뭄이 들어 작물들이 다 말라 죽을 지경이 되었다 가 때마침 윤택한 비가 내려 오곡이 생기를 띠고 백성들의 얼굴이 펴지는 것을 보고, 저자가 그 공을 기려 지은 頌이다.
雜著
擬孟子與莊周 17
孟子가 莊周에게 편지를 보내어 학문을 토론하는 상황으로 상정하여, 평소 자신이 이해 하고 있던 맹자와 장주의 사유 양식에 대한 내용을 정리한 글이다.
擬張良招四皓 19
張良이 四皓, 즉 秦나라 말기에 暴政을 피 해 商山에 숨어 살았던 네 명의 노인인 商山 四皓에게 편지를 보내어 질정하는 양식으로, 자신의 역사관 및 처세관에 대해 정리한 글이다.
開化議 20
개화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개진한 것으로, 저자의 시대 인식이 드러난 글이다.
氷鯉幕雀解 22
중국 24孝 중의 한 사람인 王祥, 즉 자기에게 잔인하게 대하는 계모를 봉양하기 위해 잉어를 잡으러 강에 갔다가 하늘의 감응으로 한 쌍의 잉어를 잡은 이야기와 계모를 봉양하기 위해 참새를 잡으려 하다가 역시 하늘의 감응으로 黃雀을 얻은 이야기를 읽고, 자신의 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서술한 글이다.
鷄對 24
마당에서 곡식을 쪼아 먹는 닭을 보면서 主人과의 대화 형식으로 자신의 생각 을 표현한 글로 저자의 시대 인식을 볼 수 있는 글이다.
擬周羣臣賀袞職有闕維仲山甫補之表25
시경 大雅烝民에 “임금님 의복에 터진 곳이 있으면, 우리 중산보가 꿰매어 드린다네. [袞職有闕維仲山甫補之]”라는 말에서 착안하여, 周나라의 신하들이 하례하는 형식을 빌어 자신의 의중에 있는 생각을 표현한 글이다.
策 士 26
옛날의 學者는 처음에는 선비가 되었다가 마침내 聖人에 이른다는 말을 하면서 顔淵의 말과 孟子의 말 및 공자의 제자들에 대한 일을 인용한 다음 저자가 느끼는 당시 선비들의 성향에 대해 설파한 策文글이다.
仁 31
천지간에 지극히 높은 것은 道이고, 지극히 귀한 것은 仁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 이치는 모든 사람에게 있은 것이지 聖人만이 소유한 것은 아니고, 賢人이 많이 가지고 어리석은 사람이 적게 가진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다만 氣의 淸濁과 깨우침의 先後와 資質의 粹駁에 따라 聖人과 賢人, 凡人이 나뉜다고 하였다.
敎 34
聖人을 대하여 배우는 것이 吾道의 목표이고 學習이란 성인의 道를 구하는 것이라 규정한 다음, 공자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표출한 策文이다.
學校 38
사람은 가르침을 받은 뒤에야 알 수 있고 학문은 강론한 뒤에야 밝아질 수 있으며 인재는 양성한 뒤에야 이루어질 수 있으니, 가르침이 아니면 알 수 없고 강론하지 않으면 밝아질 수 없으며 양성하지 않으면 이루어지 지 않는다고 하였다. 때문에 학교는 敎化의 근원이고 학문은 인재를 기르는 관건이라고 하였다.
卷10

學 1
“세상에서 聖人을 이야기 할 때 나면서부터 세상의 이치를 아는 사람이라고 하거나 배우지 않고도 세상의 이치를 아는 사람이라고들 하지만, 공자처럼 큰 성인도 자신은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한 것을 보면 이 말의 의미를 자세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작성한 策文이다.
麥韓愈 4
천하에서 道를 이야기하는 자는 반드시 聖 人을 말하고 곡식을 이야기하는 자는 반드시 稻梁을 말하니, 성인의 가르침은 도 가운데 지극한 것이고 稻梁은 곡식 가운데 지극한 것이다. 때문에 稻梁이 아니면 사람들은 귀신을 섬기거나 하늘을 받드는 데에 쓰지 않고, 성인의 가르침이 아니면 사람들은 立身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田制 7
사람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식량이고 그 식량은 田制에 의해 좌우된다는 관점에서 서 술한 對策文이다. 각종 경전의 말과 역사서에 기재된 사례를 인용하며 자신의 논지를 전개 하고 있다.
海 10
천지 사이의 만물은 이치에 따라 제자리에 있고 氣運을 부여받아 형체를 가지는데, 이치는 순환하는 것이고 기운은 왕래하는 것이다. 때문에 순환하는 이치의 오묘함과 왕래하는 기운의 기미가 참으로 정미롭고도 추측하기 어려운 것이니, 참으로 이런 관점에서 말한다면 천하에는 이해할 수 없는 물건이 없는 것이다. 이 글은 이런 생각에서 출발하여 바다 의 광대한 덕과 끝이 없는 은택을 기술한 대 책문이다.
理學 13
道는 하나일 뿐이다. 사람이 천지간에 하 루를 생활하면서 사람으로 사는 것도 이 道 에서 말미암을 뿐이다. 때문에 이 道가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저자가 세상에 태어나 사람 구실을 하며 사는 이유 역시 이 도를 구하 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글에서는 이런 관점에서 여러 경전의 글을 인 용하고 古人의 논설을 끌어와 理學에 대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해 나가고 있다.
道 17
저자는 평소 천지가 없어지지 않는 한 吾道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 면 道라는 것은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이치이고 사람이 당연히 지켜야할 이치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람이면서 이 이치를 준수하지 않으면 천지도 거의 운행을 중지할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하늘을 대신하여 이 道를 체득한 聖人이 아니면 누가 그 은미한 부분을 發明할 수 있겠는가?이런 논지에서 출발하여 河圖洛書에서부터 하나하나 사례를 들어가며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箕子受封朝鮮論 21
周武王이 殷나라 紂王을 정벌하여 牧野에서 싸울 적에 “피가 흘러서 절굿공이를 떠내려가게 했다. [血流漂杵]”라는 글이 서경 武成篇에 나오는데, 이에 대해 “ 서경의 내용을 모두 믿는다면 차라리 서경이 없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나는 무성편에서 두세 쪽만 취할 뿐이다. 인자한 사람은 천하무적인데, 지극히 인자한 사람이 지극히 불인한 사 람을 치는 마당에, 어떻게 피가 흘러서 절굿 공이를 떠내려가게 할 수가 있겠는가. [盡信 書則不如無書吾於武成取二三策而已矣仁 人無敵於天下而至仁伐至不仁而何其血之流 杵也]”라고 비판한 孟子말을 인용하여 이 글을 시작하고 있는데, 저자가 이 글을 쓰게 된 취지를 여기서 짐작할 만하다. 그런 다음 箕子가 洪範을 아뢴 다음 무왕이 그를 朝鮮 에 封하고 신하로 여기지 않았다는 史記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科擧論 23
우리나라에서 과거제도를 시행한 유래와 의미부터 시작하여 그 역사와 폐단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견해를 하나하나 기록한 논설문이다.
書院論 26
옛날 學宮의 제도는 한 둘이 아니어서 집 안에 있으면 塾이라 하고 黨에 있으면 庠이 라 하며 향리에 있으면 序라 하고 州郡에 있으면 校라 하며 나라에 있으면 學이라 하는데, 정작 書院이란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서 글을 시작하고 있다. 그러면서 서원의 시초를 朱子의 白鹿洞書院에서 찾아 그 유래와 역사 그리고 기능과 의미에 대해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井田論 27
“보통 사람은 일정한 산업[恒産]이 없으 면 일정한 마음[恒心]이 없으니, 진실로 일 정한 마음이 없으면 태만하고 사치한 죄에 스스로 빠지게 되어 유종의 미를 거두는 일 이 없게 된다. "라고 하면서 맹자의 恒産과 恒 心의 개념을 인용하면서 글을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항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田制를 바로잡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옛날부터 시행된 井田제도의 장점과 그 의미에 대해 서술하였다.
田賦論 30
위의 글 井田論과 같은 관점에서 출발하여 백성의 부세 제도를 바로 잡는 것이 국가를 영위하는 기본이라는 취지로 설명한 논설문이다.
用人論 31
군자가 조정에 있으면 치세가 이루어지고 소인이 조정에 있으면 난세가 시작된다는 말 로 시작하여, 인재 등용의 중요성에 대해 논 하고 있다.
名實論 33
명분은 실상이 따르는 것이고 실상은 명분 이 말미암는 것이니, 명분과 실상이 함께 행 해져서 서로 表裏를 이루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천하에는 실상이 없는 명분이 없고 명분이 없는 실상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예컨대 그림자와 형체의 관계에서 형체가 옮겨 가면 그림자가 따르지 않는 경우는 없고, 형체가 없는데 그림자가 혼자 행하는 이치는 없다고 하였다. 이처럼 명분과 실상은 함께 행해져야만 귀한 것이라고 하였다.
史學論 35
역사는 없을 수 없고 역사에서 배울 점이 있다는 관점에서 출발하여 堯典과 舜典이 지어지다 人道가 밝아지고 春秋가 지어지자 천하의 의리가 공변되어 졌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 역사서의 기능을 탐색하여 그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文章論 37
무릇 물건은 내면의 아름다음이 있으면 외면에 찬란한 광채가 드러나는 법이라고 하면서 문장의 가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神仙論 38
성인이 나면서부터 人道가 바로잡혔는데, 그 道는 平常中正일 뿐이라고 하였다. 세간에 榮辱이 다방면으로 노출되면서 인생의 질곡 이 시작되고, 때문에 세속의 굴레를 초월하여 永生不死하는 신선술에 대한 말이 세상 사람들을 의혹에 빠뜨리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 면서 그 시초를 皇帝 때의 廣成子와 神農 때의 赤松子에게서 찾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생사는 천지에 陰陽이 있는 것과 꼭 같아서 끊임없이 운행하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영원히 삶을 영위하는 것이 결코 행복한 일이 아 니라고 하면서 그 신선술에 대한 비판으로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妻請去論 39
晏平仲[晏嬰]이 節儉力行으로 宰相직을 수행하면서 齊나라의 치세가 시작되었고 말하면서, 군신관계를 부부관계를 대비하여 설명하였다. 그런 다음 아내를 내쫒을 수 있는 경우의 예를 들어 신하를 내칠 수 있는 의리에 대해 설명하였다.
急擊勿失論 40
楚나라 역사를 읽다가 項羽가 沛公을 급습한 일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 논설문 이다.
讓天下於許由論 41
莊子 를 읽다가 堯임금이 許由에게 천하를 사양한 대목을 보고 느낌이 있어서 지은 논설문으로, 저자의 세계관을 살필 수 있는 글이다.
卷11
雜著
治生學者之先務論 1
옛날 三代의 성대한 시절에는 儒學을 하는 선비를 중시하여 유학에 능통한 사람은 반드 시 등용되고 등용되면 卿大夫의 직임에 발탁 되어 일신과 집안을 영위할 정도의 녹봉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후세로 내려와 세도가 점점 무너지면서 권모술수를 숭상하고 正學을 버리는 지경이 되자 유학을 공부한 사람 가운데는 경륜을 품고 외진 곳에 숨어들어가 곤궁하여 굶주리는 자가 종종 생겨나게 되었다. 그래서 近古의 儒者가운데는 먹고 사는 것이 學者에게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 나왔으니, 참으로 애석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吾道를 공부하는 學者에게 중요한 문제는 孝弟와 忠信이고 아울러 治心과 居敬以涵 養이라고 하였다.
叔孫通制禮論 4
윗사람이 禮를 모르면 백성을 가르칠 수 없고 아랫사람이 배울 줄 모르면 난신적자가 생겨나와 나라가 빨리 망할 것이라는 孟子의 말을 인용하여 禮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漢 高祖때 叔孫通이 조정 의례를 제정하여 나라를 안정시켰던 고사를 사례로 들어 국가의 경륜에 있어서 禮의 중요성을 강조한 글이다.
衣食足而知禮節論 5
衣食이 충분하면 禮節을 안다는 管仲의 말을 인용한 다음, 이 예절과 의식을 本末의 관계로 설정하여 자신의 견해를 풀어나간 논설문이다.
貧賤者驕人論 7
富貴와 貧賤에 대처하는 것은 각각 그에 걸맞는 도리가 있으니, 각기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그에 합당한 행동을 하면 윗사람은 교만하다는 비방이 없고 아랫사람은 무례하다는 주벌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교만은 惡德인데, 교만한 마음은 가득 찬데서 생기고 가득차면 넘치는 것이 이치의 떳떳함이라고 하였다. 그런 다음 魏나라의 子擊과 田子方 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자격은 권세가 있다고 교만하게 행동했던 자이고 전자방은 조금 아는 것이 있다고 하여 교만하게 행동했던 자이니 두 사람의 병통이 모두 같다고 하여 교만한 마음을 경계하였다.
田橫論 9
중국의 난세에 일어났던 사례를 인용하여 田橫이 백성들에게 끼치는 해악에 대해 설파한 논설문이다.
項籍論 11
사납고 교활하고 잔인하고 각박한 성품으로 왕명을 칭탁하고, 공이 있는 자를 시기하여 부하들로 하여금 친하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갖지 못하게 하다가 끝내 대업을 이루지 못하였던 項籍의 사적을 이야기하면서, 힘과 세력으로는 결코 백성을 복종시킬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 논설만이다.
項伯論 13
項羽의 季父인 項伯이 鴻門의 연회에서 范 增이 沛公, 즉 한고조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 을 알고 그 전날 張良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 는 동시에 당일에는 자신이 劍舞를 추며 몸으로 감싸 구해주었는데, 뒤에 한고조로부터 射陽侯에 봉해지고 柳氏를 姓으로 하사받았다는 漢書項籍傳의 故事를 인용하며, 그 상황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풀어나가는 논설 문이다.
四豪論 15
戰國時代의 네 임금, 즉 魏나라의 信陵君, 齊나라의 孟嘗君, 趙나라의 平原君, 楚나라의 春申君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며 자신의 논지를 전개한 논설문이다. 이들이 진실로 인심 얻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다면 오히려 師旅를 규합하여 강한 秦나라를 대항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각각 3천 명의 문객을 두고 있었지만 모두 금은보화 등 재물을 이용하여 대우하였을 뿐 애당초 지략은 없었다고 하였다. 재물이란 민간에서 나는 것이다. 남의 위가 된 자로서의 날로 쓰는 여러 가지 물품이 모두 백성의 膏血이 아닌 것이 없었으니, 백성들은 해독을 입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하였다. 때문에 저자는 이들이 백성의 힘과 나라의 세력을 등에 업고 빈객들의 자질을 이용하여 당세의 이름을 이루었을 뿐, 列國이 망한 것이 근본적으로는 모두 이들에 의한 것이라고 하면서 후세의 權貴한 신하들 을 경계한다고 하였다.
子陵論 16
後漢때의 隱士인 子陵과 光武帝의 고사를 인용하며 자신의 견해를 밝힌 논설문이다. 子陵은 嚴光의 자인데, 후한 광무제와는 어려서부터 절친한 사이였다. 그는 광무제가 천자가 되자 자취를 감추고 은거하였는데, 광무제가 찾아내어 잠자리를 함께하기까지 하고, 諫議 大夫에 제수했으나 나아오지 않고 富春山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을 마친 인물이다.

庭草說 18
仲春에 문을 나와 뜰을 지나다가 정원에 돋아난 풀을 보고 느낌이 있어서 지은 글이다. 하늘의 도가 유행하여 만물을 발육시키는데, 각기 부여받은 기가 달라서 사람과 물건으로 나뉘지만 그 속에 품은 이치는 동일하다고 하였다. 이는 程子의 庭草一般이라는 구절을 떠올리게 할 만큼 철학적인 내용으로, 저자의 사유양상을 살필 수 있는 글이라 하겠다.
耘草說 19
농사지으면서 잡초를 제거하여 모종을 보호하는 도리를, 학자가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 에 접목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힌 글이다.
玩花說 20
천하 사이의 만물은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당연한 旨趣를 그 속에 품고 있기 때문에 옛날의 군자는 주위의 물건을 琓賞하며 그 이치를 살피는 것을 한가한 가운데 한 가지 일로 여겼다고 하였다. 저자 역시 몇 이랑의 場 圃를 만들어 화초를 심어두고 달 밝은 밤이면 마주하며 스스로 즐긴다고 하였다. 꽃이란 물건은 군자가 가까이 할 것이 못된다고 혹자는 말하지만 저자의 생각에는 천지의 道는 물건으로 인해 살피는 것이고 내 마음의 發 用은 물건으로 인해 징험하는 것인데, 초목도 마찬가지로 그 가운데 하나의 물건이기 때문에 역시 천지의 기운이 융화된 것이라고 하였다.
種樹說 21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을 마음 다스리는 일에 비유하여 설명한 글이다.
治圃說 22
시절을 살피고 지세를 살핀 다음 흙을 모아 기초를 배양하고 잡초를 뽑아 뿌리를 북돋우는 등 場圃를 관리하는 일을 나라를 경륜하며 백성을 보살피는 일에 비유하여 설명한 글이다.
櫟說 23
길을 가다가 언덕에 자리 잡은 상수리나무를 보고 느낌이 있어 지은 글이다. 나무를 길러 재목으로 사용하는 것이 인재를 양성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과 같다고 하였다.
四維說 24
배는 노를 이용하여 저어가지 않으면 강을 건널 수 없고 말을 고삐를 이용하여 제어하 지 않으면 마차를 끌 수 없다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백성은 법도로 인도하지 않으면 인륜을 알 수 없다고 하면서 禮義廉恥의 四維가 중요함을 강조한 글이다.
朋友說 26
同門을 朋이라하고 同志를 友라 하는데 朋 友는 五倫의 한가지이니, 사람이 서로 도와 덕을 이루는 것은 오직 붕우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사귐에는 또한 道가 있으니, 자신이 생각하는 붕우간의 사귐은 글을 매개로 모이고 서로 善을 구하며 義理를 講明하여 서로의 덕을 이루는 것이라고 하였다.
四友說 27
종이, 붓, 먹, 벼루 등 학자라면 늘 주위에 비치하고 있는 文房四友의 덕과 그 의미를 예찬하는 글이다.
六藝說 28
儒者가 겸해야 한다는 여섯 가지 과목, 즉 禮, 樂, 射, 御, 書, 數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설파한 글이다. 禮는 마음을 제어하는 것이고 樂은 화락함을 표현하는 것이며 射는 덕을 볼 수 있는 매개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御는 규범을 지키며 말을 모는 것이며 書는 마음의 畫을 볼 수 있는 것이고 數는 物象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것이기에 모두 지극한 이치가 깃들어 일상생활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天君說 30
마음을 天君이라 하는 것은 하늘에 上帝가 있고 백성에게 人君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때문에 하늘에 상제가 없으면 四時가 운행할 수 없고 백성에게 君上이 없으면 만사에 기강이 서지 않으며 사람에게 天君이 없으면 사지를 제어할 수 없으니 모두 主宰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라고 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사람에게 있어서 마음의 기능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글이다.
立敎說 31
道가 행해지지 않으면 가르침이 세워지지 않는다.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한 존재가 되는 이유는 仁義禮智信의 五性을 구비하고 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의 五倫을 알아서 이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를 道라고 하는 것이니, 이대 로 행하면 천하의 모든 일에 있어서 聖人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 아니어도 구애되는 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氣稟에 차이가 있고 사욕에 가리우는 일이 있기 때문에 방종하여 그칠 곳을 몰라서 五性을 끊고 五倫을 버리는 지경이 되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인이 근심하여 學校를 세우고 官職을 설치하여 가르치는 방법을 세웠다고 하였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小學과 大學등 교육의 내용과 차례에 대해 언급하였다.
安宅說 32
“인은 사람의 편안한 집이고 의는 사람의 바른 길이다. 편안한 집을 비워두고 거처하지 않으며 바른 길을 버려두고 가지 않으니, 슬프다![仁人之安宅也義人之正路也曠安宅而 弗居舍正路而不由哀哉]”와 “천하의 너른 집에 거처하고,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며, 천하의 대도를 행하여, 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 께 행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를 행하여, 부귀가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 못하고, 빈천이 절개를 바꾸지 못하며, 위세나 무력이 그 지조를 꺾을 수 없는 이런 사람을 대장부라 한다. [居天下之廣居立天下之正位行天下之大道得志與民由之不得志獨行其道富貴不能淫貧賤不能移威武不能屈此之謂大丈夫]”라는 맹자의 말과 가운데, 仁을 의미하는 安宅과 廣居라는 말을 가져와서 그 의미를 부연 설명하는 글이다.
鏡說 33
사람의 마음을 거울에 비유하여 자신의 견해를 풀어나간 글이다. 사람이 처음 태어났을 때의 마음은 거울처럼 깨끗하여 온갖 사물을 다 그대로 비추어 거짓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욕의 유혹에 가리워지게 되면 거울 표면에 먼지가 끼인 것처럼 본연의 깨끗함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하늘에서 부여받은 밝은 본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욕의 사사로움을 제거하면 거울의 먼지를 닦는 것과 같이 다시 본연의 천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하였다.
舟說 34
땅에는 강이 흘러 사람들이 건너지 못하기 때문에 伏羲가 배를 만들어 사람들이 통행하게 하였는데, 배를 운행하는 것은 반드시 도구와 그 도구를 사용하는 기술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저자는 이 글에서 天下를 큰 강물에, 蒼生은 나와 함께 배를 탄 사람에 비유하였다. 때문에 어진 임금이 위에 있으면서 모든 백성을 공평하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仁義의 은혜와 政敎의 가르침을 베푼다면 천하의 사람들이 물에 빠지는 근심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蠹說 35
독서에 뜻을 두었으면서도 정장 책을 읽지 않고 방치하는 선비를 책상자 속에서 종이를 갉아먹는 좀벌레에 비유한 다음, 그 폐해에 대해 하나하나 이야기 하였다.
雞覆狗說 37
만물 중에 사람이 가장 귀한 이유는 바로 仁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니, 仁은 실로 천지의 樞紐이고 造化의 關鍵이다. 그리고 이 仁을 행하는 일에는 孝가 근본이 되기에 孝는 모든 행실의 근원이라고 하였다. 또 王祥과 陳氏의 일은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감동하여 생긴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말한 다음 董生의 집에서 어미 닭이 어린 개를 품어 길러 준 일을 인용하며 董生의 효성에 하늘이 감동하여 이런 기이한 현상이 나타난 것이고, 이 또한 仁의 한 가지 단서이고라고 말하였다.
山泉說 39
깊은 산골의 샘물이 끊임없이 흘러 온갖 장애물을 지나 큰 강과 바다에 이르는 것처럼, 사람도 어린 시절의 순진한 마음을 잃지 않고 부단히 공부하여 근본을 두터이 하고 용맹정진하게 되면 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도에 이르게 된다는 이치를 설명한 글이다.
奢儉說 40
사람의 일에는 각기 당연한 분수가 있는 법이니 이 분수가 사람에게 있어서 중대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 사람의 興亡盛衰가 모두 분수를 지키고 분수를 범하는 사이에서 말미암는 것인데, 분수를 범하는 것을 奢라 하고 분수를 지키는 것을 儉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렇게 말한 다음 이 奢와 儉의 의미에 대해 여러 가지 故事를 인용하며 설명하였다.
禮樂不可斯須去身說 41
혹자와 자신이 묻고 답하는 상황을 설정한 뒤에 心經附註 에 나오는 “禮와 樂은 잠시 도 몸에서 떼어 놓아서는 안 된다. "는 말의 의미를 설명한 글이다.
言說 42
詩經 의 “흰 옥구슬의 흠집은 오히려 갈 아 없앨 수 있지만 이 말의 허물은 어찌 할 수 없다. [白圭之玷尙可磨也斯言之玷不可 爲也]"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신중하지 못한 말의 폐해를 경계하고, 말의 기능과 의미에 대해 말하고 있다.
聲說 43
“소리의 지극함은 소리가 없음이다. "라는 관점에서 출발하여 소리의 의미와 그 영향에 대해 설명한 글이다. 천하의 만물이 모두 소리를 내지만 소리의 근본은 소리가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소리가 없는 산천이 雷霆을 통해 소리를 울리고, 소리가 없는 초목이 바람과 비를 통해 소리를 일으킨다고 하였다. 오직 사람만이 만물 가운데 가장 영험하여 온갖 소리를 합하여 전달하고 천지의 소리에 순응하여 백성을 화합하게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堯舜과 孔孟등 성인의 일을 인용하여 자신의 견해를 하나하나 검증해가고 있다.
名說 44
혹자와 자신이 묻고 답하는 상황을 설정한 뒤에 이름이 가지는 의미와 그 영향에 대해 설명한 글이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런 경륜과 업적 없이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다면 그 인생은 애처로운 것이라고 하면서 이 때문에 군자는 죽을 때까지 소문이 나지 않는 것을 미워한다고 하였다. 이름은 실상에 상응하는 것이니, 몸이 있으면 그림자가 따르고 바람이 불면 소리가 따르는 것처럼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실상이란 무엇인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道이고 가장 높은 것은 덕이니, 진정 進德修業을 통해 덕이 쌓인 후에야 명성이 널리 퍼져 나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敬說 45
사람이 태어나 천지의 운행에 참여하고 만물의 化育에 대해 기리는 것은 바로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은미한 마음으로 변화무쌍한 세상사에 대처할 때 외면에서 어지러이 밀려오는 사물에 의해 욕심이 내면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하늘에서 부여 받 은 본연의 이치가 위태로워진다고 하였다. 그래서 성인이 후세에 전한 교훈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敬이라는 한 글자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 敬자에 담긴 의미와 내용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다.
卷12
雜著
吊杜門洞七十二賢文 1
조선 건국 후 出仕하지 않고 杜門洞에 은거함으로써 고려 왕조에 대해 충절을 지킨 고려의 儒臣72인을 조문하고 그 절개를 칭송하는 글이다. 이들 72명의 이름은 鄭夢周, 金澍, 李存吾, 鄭樞, 崔瀁吉再, 南乙珍, 林先味, 元天錫, 曹義生, 孟裕, 都膺, 李思之, 陶東明, 金自粹, 張安世, 程廣, 韓哲沖, 鞠유, 羅天瑞, 成溥, 李明成, 李穡, 鄭地, 河自宗, 李養中, 金震陽, 安省, 李思敬, 趙忠肅, 許徵, 崔文漢, 徐甄, 申德隣, 孟希德, 金若恒, 裴尙志, 李茂芳, 李行, 邊肅, 金光致, 李種學, 李陽昭, 閔楡, 文益漸, 林貴椽, 曹希直, 金士廉, 金承吉, 趙瑜, 金濟, 趙鐵山, 范世東, 具鴻, 尹忠輔, 成思齊, 金沖漢, 柳구[王句], 朴門壽, 閔安富, 蔡王 澤, 宋皎, 崔七夕, 車原부[兆頁], 金子進, 趙胤, 金若時, 鄭溫, 李涓, 宋寅, 郭樞, 蔡貴河이다.
吊梁山童文 2
난리를 만나 절개를 지키며 단식하다가 3일 만에 순절한 梁山의 童子를 추모하는 글 이다. 날씨가 추워져야 松栢의 절개를 알 수 있고 난리를 격어야 烈士의 마음을 알 수 있으니, 지금 왜란의 변괴를 격은 뒤에야 梁山에 이 童子가 있음을 알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전하는 말이 없어 이 동자의 성명을 알 수 없고 그래서 그 집안에 褒揚의 恩典을 시행할 수 없는 점이 아쉽다고 하였다.
擬漢帝吊嗚乎島文 3
田橫의 죽음을 조문하고 그의 절개를 찬양하는 형식으로 쓰여진 글이다. 田橫은 齊王 田榮의 아우로, 漢나라 초기에 韓信이 齊王 田廣[전영의 아들]을 사로잡자 스스로 齊나라 왕이 되었다. 漢나라 高祖가 천하를 통일하자 그는 부하 5백여 명을 거느리고 섬으로 도망하였는데, 뒤에 고조가 불렀으나 신하되기를 거부하고 자살하자 5백여 명의 부하들도 따라서 죽었다. 뒤에 고조가 전횡의 절개를 높이 찬양하고 王의 禮로 장사지냈는데, 당시 그가 도망한 섬이 嗚乎島이다.
黃花祭伯夷文 3
殷나라가 망하자 西山즉 首陽山에서 周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고사리만 뜯어 먹다가 굶어 죽었다는 伯夷의 절개를 찬양하고 그의 죽음에 조문하는 글이다.
擬冶隱祭伯夷文 4
조선이 건국된 뒤 1400년(정종 2)에 李芳 遠이 太常博士에 임명하였으나 두 임금을 섬 기지 않겠다는 뜻을 말하며 이를 거절했던 吉再가 殷나라가 망한 뒤 首陽山에서 고사리 만 뜯어 먹다가 굶어 죽은 伯夷의 절개를 찬 양하고 그의 죽음에 조문하는 형식을 빌어 자신의 견해를 밝힌 글이다.
擬晦翁祭蔡西山文 5
朱子가 지은 祭蔡西山文의 체제를 빌어 지은 글이다. 蔡西山은 宋나라 蔡元定을 가리킨다. 西山은 그의 호이고 자는 季通이다. 어려서는 아버지에게 배웠고, 자라서는 朱子와 從遊하였는데 주자가 그의 학문을 시험해 보고는 크게 놀라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의 老 友이다. 弟子의 반열에 두는 것은 마땅치 않다. ”라 하고 마주앉아 한밤중까지 經義를 講論하였다고 한다.
祈文
小白山祈雨文 6
소백산에서 기우제를 올릴 때 지은 祈雨文이다.
毘盧峯祈雨文 6
毘盧峯에서 기우제를 올릴 때 지은 祈雨文이다.
上樑文
儉巖精舍重建上樑文 7
경상북도 영주시 가흥 2동 줄포리의 나주 정씨 세거지에 있는 정자로, 저자의 선조인 丁彦숙[王+肅](1600~1693)이 지은 것이다. 원래는 강원도 원주시 치악산 아래 검암리에 있었는데, 1925년에 현재의 자리에 이건하였 다. 1635년 안동 판관으로 있던 정언숙은 병자호란 후 원주로 이사하여 검암정사를 지었 는데, 정사가 퇴락하자 후손들이 “옛 자리는 아니지만 선조께서 좋아하여 머물던 곳이고 손수 심은 나무가 지금도 있으니, 치악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하며 1925년 경상북 도 영주시 가흥 2동 줄포의 자리로 이건하였다고한다. 정언숙의 자는 君瑞, 호는 儉巖‧ 壽考軒이다. 1623년(인조 1)에 진사시에 장 원했으나 파방되고, 이듬해 다시 진사시에 합 격했다. 의금부도사‧사헌부감찰‧호조좌랑‧ 안동판관등을 역임하였다. 천성이 효성스러 워 60이 넘어서도 모친상에 3년 시묘를 하였 으며, 벼슬에 있어서도 공정함을 지켜 사사로 움이 없었고, 엄하면서도 너그러웠다. 백성을 돌봄에는 살뜰하여 이르는 곳마다 칭송이 있 었다.
告由文
通政大夫行弘文館副提學丁公墓道樹碣時告由文(代本孫作)
通政大夫行弘文館副提學丁公의 墓碣을 세울 때의 告由文이다.
都正公墓道樹碣時告由文
저자의 族大父인 都正公의 墓碣을 세울 때의 告由文이다.
祭文
祭東亭李先生文(1908) 9
東亭李炳鎬(1851∼1908)선생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자는 子翼, 초명은 正鎬이고 본관은 眞城이다. 龍山李晩寅(1834∼1897) 의 門人으로, 寒洲李震相(1818∼1886)을 찾아가 학문을 질정하였다. 俛宇郭鍾錫 (1864~1919)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理氣說 ㆍ心性說등에 대해 논하였는데, 퇴계의 ‘心合理氣說’을 이어받아 ‘心밖에 理가 없고 理밖에 心이 없으며, 理와 氣가 합하여 理가 위주인 것이 心이다. '라는 관점에서 논리를 전개하였다. 저서로 東亭遺稿 4卷2冊이 전한다.
祭東亭先生文(1910) 11
東亭李炳鎬선생의 大祥때 지은 제문이다. 文詞를 일삼고 功利를 쫒는 세태 속에서 性理의 학문을 뿌리내리고 忠信의 의리를 천명했다고 하였다. 세월이 빨리 흘러 大祥의 기일이 임박하였으니 이제 儀床을 걷고 나면 선생의 전형이 더욱 아득해지게 되었다고 하면서, 우러러 기댈 데 없는 막막한 심정을 애절하게 표현하였다.
祭俛宇郭先生文(1921) 12
俛宇郭鍾錫(1864~1919)선생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자는 鳴遠, 본관은 玄風이고, 경상남도 居昌에서 태어났다. 1910년 국권이 침탈되자 고향에서 은거하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 儒林들의 궐기를 호소하고, 居昌에서 心山金昌淑(1879∼1962)과 협의하여 파리의 만국평화회의에 독립호소문을 보내고 옥고를 치렀다. 24세에 李震相의 문하에 나아가 性理學을 배웠는데, 李滉의 학문을 계승한 스승의 영향으로 理에 입각한 理氣說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心卽理說이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저서로 俛宇先生文集 177권 63책이 전한다.
祭雲圃李丈(中麟)文 13
雲圃李中麟(1838~1917)선생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자는 振伯, 호는 雲圃‧潢山이고 본관은 眞城이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국권이 위태로워지자 1895년 음력 12월 李晩燾를 의병장으로 하는 宣城義陣에 가담하여 副將의 직책으로 활동하였다. 1896년 2월에 의진이 해산되자 자신의 토지를 팔아 청량산을 근거지로 의병을 규합하고 의진을 재정비하여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祭金參書丈(奎一)文 14
金奎一(1849~1913)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자는 景極이고 본관은 豊山이다. 부친은 重淵이고 榮州에 살았다. 通訓大夫惠民院參書官에 제수되었다.
祭族曾大父佐郞公(大植)文 15
丁大植(1847~ ?)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자는 而建이고 본관은 羅州이다. 저자의 族曾 大父로 縣監을 역임하였다.
祭古巖金丈(世洛)文 16
金世洛(1854~1928)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자는 文顯, 호는 古巖이고 본관은 豊山이다. 奉化와 榮州에 살았다. 忘窩金應祖의 후손으로, 碁局이 넓고 志操가 굳었으며 學問이 高 邁하여 사림의 추중을 받았다. 저서로 古巖集 6권이 전한다.
祭李敎理丈(晩煃)文(代人作)17
李晩煃(1845~1921)를 추모하는 제문으로,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자는 順則, 호는 柳川이고 본관은 眞城이다. 生父는 彙濬이고, 숙부 彙澤에게 출계하였다. 響山李晩燾(1842~1910)의 아우이다. 1879 사마시 합격하였다. 경술국치를 당하여 순국의 뜻을 가졌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19년 고종의 장례에 참례한 후 巴里長書 署名운동에 참여하였고, 이 혐의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5년에 건국훈장에 추서되었다.
祭族祖(周燮)文 18
족조 丁周燮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공이 행한 바는 일용의 평상적인 일이었고 힘쓴 바는 이치에 가까운 실재의 일이었다고 하였다. 학업을 수행하는 자세는 ‘자자불식(孜孜 不息)'그 자체였고 심신을 수행하는 자세는 ‘긍긍자수(兢兢自守)'이었다고 하였다.
祭李公(中鳳)文(代家大人作) 20
李中鳳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자는 儀仲, 호는 平齋이다. 家大人을 대신하여 지은 제문이다.
祭金公恭叔文 20
金恭叔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저자의 부친과 論交한 것을 인연으로 여러 차례 스승으로 모시며 의지하였는데, 벌써 세월이 흘러 大祥의 기일이 임박하고 보니 사뭇 마음이 허전하다고 하였다.
祭柳公(道湜)文(1914) 21
柳道湜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공의 집에서 3년 동안 몸을 의탁하면서 자상하게 대해주어 늘 마음으로 감사하고 있었는데, 이제 세상을 떠나게 되어 매우 가슴이 아프다고 하 였다.
祭李公(彙容)文 22
李彙容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작년 가을 처음 공을 만났을 때 잘 보살펴주었는데, 이 제 세상을 떠나게 되어 매우 가슴 아프다고 하였다.
祭崔仁卿文(1919) 23
崔炳寅(1869∼1917)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자는 仁卿, 호는 恒齋이고 본관은 全州이다. 東亭李炳鎬(1851∼1908)의 문인으로 저자와는 동문수학한 사이이다. 恒齋先生文集 이 전한다.
祭金公(敬淵)文 24
金敬淵(1856~1919)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자는 聖穆, 호는 朋齋‧滄陵‧杜皐亭이고 본관은 延安이다. 부친은 錘, 生父는 鐫이고 安東과 榮州에 살았다. 西山金興洛(1827∼1899)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理學類選‧聖學十 圖集說 등이 있다.
祭族祖(敦燮)文 25
저자의 族祖인 丁敦燮(1870~ )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자는 伯榮이고 본관은 羅州이다. 俛宇郭鍾錫(1864~1919)의 門人이다.
祭族祖參奉(厚燮)文(1929) 27
저자의 族祖인 丁厚燮(1878~ )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자는 德哉이고 본관은 羅州이다. 俛宇郭鍾錫(1864~1919)의 門人이다.
祭金進士(福淵)文 28
金福淵(1844~1927)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자는 卓予, 호는 芝庵이고 본관은 延安이다. 부친은 鍵, 生父는 錘이고 榮州에 살았다. 1880년 增廣試에 합격하였다. 恭山宋浚弼 (1869~1944)이 행장을 짓고 저자가 墓碣銘을 찬하였다.
祭三從叔(奎翊)文 29
저자의 三從叔인 丁奎翊(1871~1931)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자는 仲昭, 초명은 奎晉, 본관은 羅州이고 榮州茁浦里에 살았다. 俛宇 郭鍾錫(1864~1919)의 門人이다. 시조 允宗은 고려의 檢校大將軍을 지냈다. 증조는 洙敎, 조부는 大根, 부친은 震燮(1848∼1904)이다. 모친은 豊山金氏로 士人奎五의 따님이다.
祭全公(建錫)文 31
全建錫(1856~1928)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본관은 沃川으로, 조선조 단종 때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成均司直希哲의 자손이고, 진사를 지낸 奎炳의 아들이다. 지극한 효성으로 칭송되고 있다. 모친이 병들어 백약이 무효일 때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입에 넣어드렸는데, 이를 본 동생 弼錫과 누이동생도 따라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넣어드리자 모친이 깨어났다고 한다. 영주시 이산면 지동리 伊溪마 을 도로변에서 공의 효성을 기리는 三孝閣 이 있다.
祭族叔(奎昌)文 32
저자의 族祖인 丁奎昌(1872~ )를 추모하는 제문이다. 자는 子晦, 본관은 羅州이고 貳相應斗의 후손이다. 龍山李晩寅(1834∼ 1897)의 門人이다.
祭金士顯文 34
金世榮(1879~1941)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자는 士顯, 호는 誠庵이고 본관은 宣城이다. 부친은 濟相이고 奉化와 榮州에 살았다. 玏의 후손이고 李炳鎬(1851∼1908)의 문인이다. 金思鎭과 함께 영호남을 유람하며 郭鐘錫‧朴世和‧李承熙‧尹冑夏‧金在敬등과 교유하였다. 誠庵集 4권 2책이 전한다.
祭朴賢叔(齊濤)文 35
朴齊濤를 추모하는 제문이다. 어린 나이에 만나 평생을 형제처럼 지낸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니 너무도 슬프다고 하였다.
祭權聲之文 36
權鍾遠(1880~1937)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자는 聲之, 호는 石山이고 본관은 醴泉이다. 시조 暹은 고려말에 穆王으로부터 權氏성을 하사받았고 관직은 典工判書를 지냈다. 고조는 應大, 증조는 進魯, 조부는 周相, 부친은 錫煥이고 俛宇郭鍾錫(1864~1919)의 門人이다. 모친은 義城金氏로 士人奎鎭의 따님이다. 저자가 행장을 짓고 權頊淵이 묘갈명을 찬하였다.
祭權恭汝文(1947) 37
權道默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자는 恭汝, 호는 履歷이고 본관은 安東이다.
卷13
祭文
祭金友三文 1
金益秀(1872~1945)를 추모하는 제문이다. 자는 友三, 호는 雙坪이고 본관은 延安이다. 부친은 福淵이고 榮州에 살았다. 숙부인 金敬 淵(1856~1919)의 문인으로, 김경연의 문집인 朋齋遺稿 를 정리하고 萬姓譜 를 편찬 하였다.
祭族叔參奉(奎集)文 1
저자의 族叔인 丁奎集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자는 運卿이다. 어릴 때 발분 독서하고 스승을 잘 섬겨 일찍부터 진보가 있었다고 하였다. 민첩하고 총명하여 사람들과 다툼이 없었고 자신을 낮추고 사람들을 존중하여 주위에 사람이 많았다고 하였다.
祭李國材(敎澤)文(1931) 2
李敎澤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다재다능한 자질을 타고 난 사람이 무슨 이유로 이렇게 빨리 세상을 떠나게 되었냐고 하면서 한없는 추모의 정을 서술하였다.
祭李國材文(1933)
李敎澤의 大祥때 지은 제문이다.
祭鄭文顯文(1954) 4
鄭文顯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1954년 3월 9일 小祥때 지은 제문이다. 자신의 평생의 친구라고 표현하였다.
祭全孟直(河悳)文 5
全河悳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난리를 만나 남북으로 헤어지게 되었고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다시 만날 기약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니 너무도 애통하다고 하였다.
祭李仁則(鎬榮)文 5
李鎬榮의 大祥을 맞아 지은 제문이다. 어릴 때부터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며 교유하던 이가 이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어 너무도 슬프다고 하였다.
祭外姑金氏文(1926) 6
저자의 장모인 金氏를 추모하는 제문이다. 30여 년 동안 조금의 변함도 없이 한결 같은 마음으로 애정을 보여주던 장모가 이렇게 세상을 떠나게 되어 너무도 애통하다고 하였다.
祭三從叔君輔(奎奭)文 8
저자의 三從叔丁奎奭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자는 君輔, 본관은 羅州이고 性齋許傳 (1797~1886)의 門人이다. 집안의 어른들이 거의 돌아가시고 나서는 오직 숙부 형제들이 자신과 三從관계로 가장 가까운 분들이었다고 하였다. 게다가 다들 식견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일을 이 분들과 상의하여 결정하였는데, 해를 이어 세상을 떠나고 마침내 奎奭從叔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니 천지에 기댈 곳이 없어졌다고 하면서 애통한 심정을 표현하였다.
祭李氏妹文 9
李鎬榮에게 시집간 둘째 누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제문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아우마저 요절한 뒤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는데, 어찌 이리도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느냐. ”라고 하면서 동기의 죽음을 애석해하였다.
祭金禹玄文 10
金禹玄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祭姜舜五墓文 11
姜鑂(1874~1941)를 추모하는 제문이다. 자는 舜五, 호는 白農이고 본관은 晉州이다. 부친은 父聖奎이고 奉化에 살았다. 定齋柳 致明(1777~1861)의 문인이다.
祭四從弟(魯鎭)文 12
저자의 四從弟丁泰叟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자는 魯鎭이고 본관은 羅州이다. 아직 세상에서 할 일이 많은 아우가 이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어 매우 슬프다고 하였다.
祭長孫祖榮文(1940) 13
1939년 8월 20일에 18세의 나이로 湖西의 客舍에서 요절한 저자의 큰손자인 丁祖榮을 죽음을 슬퍼하는 제문이다. 손자에 대한 기대와 사랑을 구구절절이 기록하며 크나큰 아쉬움을 표현하였다.
誄辭
柳建叜誄辭16
東亭李炳鎬(1851∼1908)선생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하던 柳建叜의 명복을 비는 誄辭이다. 동정선생이 일찍이“근래 柳建叜이란 젊은이를 만났는데 기질이 아름답고 才器가 총명하고 심호한데다 학문을 좋아하니, 우리가 이런 사람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다. ”라고 하면서 저자에게 기대를 보였다고 하였다. 저자 또한 그의 재주의 아름다움과 학문의 독실함을 추억하며 시간이 지나면 큰 성취를 이루어 동량이 되리라 여겼다고 하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가진 재주를 펴보기도 전에 3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냐고 하면서 아쉬움과 슬픔을 표현하였다.
行狀
東亭先生行狀 18
東亭李炳鎬(1851∼1908)의 행장이다. 자는 子翼, 초명은 正鎬이고 본관은 眞城이다. 龍山李晩寅(1834∼1897)의 門人으로, 寒洲 李震相(1818∼1886)을 찾아가 학문을 질정하였다. 俛宇郭鍾錫(1864~1919)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理氣說ㆍ心性說등에 대해 논하였는데, 퇴계의 ‘心合理氣說’을 이어받아 ‘心 밖에 理가 없고 理밖에 心이 없으며, 理와 氣가 합하여 理가 위주인 것이 心이다. '라는 관점에서 논리를 전개하였다. 저서로 東亭遺稿 4卷2冊이 전한다.
學生羽溪李公行狀 27
李潤秀(1851~1936)의 행장이다. 자는 俊汝, 호는 鐵樵, 본관은 羽溪이고 榮州鐵呑山 아래에 살았다. 시조 陽植은 고려 때 中書舍人을 지냈다. 고조는 相梅, 증조는 宜宬, 조부는 範喆이고 부친은 敎鐸이다. 모친은 全義李氏로 良靖公樺의 후손이고 學生南九의 따님이다.
權聲之行狀 30
權鍾遠(1880~1937)의 행장이다. 자는 聲之, 호는 石山이고 본관은 醴泉이다. 시조 暹은 고려말에 穆王으로부터 權氏성을 하사받았고 관직은 典工判書를 지냈다. 고조는 應大, 증조는 進魯, 조부는 周相, 부친은 錫煥이고 俛宇郭鍾錫(1864~1919)의 門人이다. 모친은 義城金氏로 士人奎鎭의 따님이다. 저자가 행장을 짓고 權頊淵이 묘갈명을 찬하였다.
先考處士府君行狀 37
저자의 부친인 丁奎悳(1855~1911)의 행장이다. 자는 賢必, 본관은 羅州이고 榮州茁浦里에 살았다. 시조 允宗은 고려의 檢校大將軍을 지냈다. 고조는 若奎, 증조는 序敎, 조부는 大翊, 부친은 寅燮이다. 모친은 光山金氏로 惟 一齋彦璣의 후손이고 士人泰圭의 따님이다.
卷14
壙誌
三從叔處士公壙銘(幷序) 1
저자의 三從叔인 丁奎翊(1871~1931)의 壙銘으로, 序文이 幷記되어 있다. 자는 仲昭, 초명은 奎晉, 본관은 羅州이고 榮州茁浦里에 살았다. 俛宇郭鍾錫(1864~1919)의 門人이다. 시조 允宗은 고려의 檢校大將軍을 지냈다. 증조는 洙敎, 조부는 大根, 부친은 震燮(1848∼1904)이다. 모친은 豊山金氏로 士人 奎五의 따님이다.
墓誌銘 族先祖四無公墓誌銘(幷序) 3
저자의 族先祖인 丁載老(1731~1802)의 묘지명으로, 序文이 幷記되어 있다. 자는 玄之, 호는 四無子, 본관은 羅州이고 醴泉에 살았다. 시조 允宗은 고려의 檢校大將軍을 지냈다. 증조는 道明, 조부는 喜愼, 부친은 志翼이고 모친은 南陽洪氏로 영의정 暹의 후손이자 통덕랑 德相의 따님이다. 공의 생부는 志謙이고 생모는 宣城金氏로 통덕랑 弘烈의 따님인데, 공의 부친인 志翼이 요절하자 조부인 喜愼이 공으로 후사를 잇게 하였다.
成均館進士金公墓誌銘(幷序) 7
金福淵(1844~1927)의 묘지명으로, 序文이 幷記되어 있다. 字는 卓予, 호는 芝庵, 본관은 延安이고 榮州斗月에 살았다. 上祖인 暹漢은 고려조에 國子博士를 지냈다. 고조는 慶集, 증조는 瑩文, 조부는 龍秉, 부친은 鍵.이고 모 친은 潘南朴氏로 진사 宗垕의 따님이다. 生父는 錘이다. 1880년 增廣試에 합격하였다.
成均進士月塘朴公墓誌銘(幷序) 10
朴鎬陽(1851~1899)의 묘지명으로, 序文이 幷記되어 있다. 자는 成弼, 호는 月塘, 본관은 潘南이고 榮州에 살았다. 上祖인 應珠는 고려조에 戶長을 지냈다. 고조는 時翕, 증조는 致中, 조부는 在文이고 부친은 世仁이다. 공의 생부는 齊臣이고 생모는 安東權氏로 士人修의 따님이다. 부친인 世仁이 요절하여 생부의 명으로 그의 후사를 잇게 되었다. 1880년 진사시 합격하였다. 그러나 당시 시국이 험난한 것을 보고 고향으로 돌아와 郭鍾錫‧李炳鎬‧金奭‧金世洛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분을 쌓았다. 그는 특히 관광을 좋아하여 小白山을 비롯하여 관동의 명산대천을 두루 유람하였다. 저서로는 月塘集 2권 1책이 전한다.
尊姑全孺人墓誌銘(幷序) 13
저자의 曾王考松圃丁大翊의 3째 따님인 全建錫(1856~1928)의 처에 대한 묘지명으로, 序文이 幷記되어 있다. 유인은 1851년에 태어나 1898년 12월 27일 향년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시집가서는 오직 시부모의 명을 공경히 따라 어기는 일이 없었는데, 스스로도 순중을 미덕으로 여겼다고 한다. 전건석의 본관은 沃川으로, 조선조 단종 때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成均司直 希哲의 자손이이고, 진사를 지낸 奎炳의 아들이다. 지극한 효성으로 칭송되고 있다. 모친 이 병들어 백약이 무효일 때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입에 넣어드렸는데, 이를 본 동생 弼錫과 누이동생도 따라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넣어드리자 모친이 깨어났다고 한다. 영주시 이산면 지동리 伊溪마을 도로변에서 공의 효성을 기리는 三孝閣이 있다.
墓碣銘
崔仁卿墓碣銘(幷序) 15
崔炳寅(1869∼1917)에 대한 묘갈명으로, 序文이 幷記되어 있다. 자는 仁卿, 호는 恒齋이고 본관은 全州이다. 東亭李炳鎬(1851∼ 1908)의 문인으로 저자와는 동문수학한 사이이다. 恒齋先生文集이 전한다.
東巖太公墓碣銘(幷序) 18
太玄稷(1824∼1869)에 대한 묘갈명으로, 序文이 幷記되어 있다. 자는 姬祖, 호는 東巖 이고 본관은 永順이다. 太氏는 원래 渤海의 국왕 大祚榮에서 시작하여 大氏를 사용하였는데, 고려 때 金就가 공을 세우고 永順에 封해지면서 처음 太氏를 사용하였다. 조선으로 들어와 中宗때 執義를 지낸 斗南은 호가 西菴先生으로 청렴한 명성과 강직한 절개로 칭송되었다. 공의 7세 大夫인 舜壽는 임진왜란 때 향병을 모집하고 倡義하여 그 공으로 軍資監主簿에 증직되었다. 大夫는 綏來, 부친은 象井이고 모친은 慶州金氏이다.
三從大父處士公墓碣銘(幷序) 19
저자의 三從大父인 丁震燮(1848∼1904)에 대한 묘갈명으로, 序文이 幷記되어 있다. 자는 羲宅, 호는 晩浦, 본관은 羅州이고 榮州茁 浦里에 살았다. 시조 允宗은 고려의 檢校大將 軍을 지냈다. 조부는 洙敎, 부친은 大根이고 모친은 安東權氏로 士人東轍의 따님이다. 어릴 때부터 자질이 뛰어나고 천성이 신중하여 노숙한 학자의 기상이 있었으며, 조금 자라서는 독서를 좋아하고 문사에 뛰어나 鄕里의 노숙한 원로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1899년에는 豊基의 錦陽精舍에서 東亭李炳鎬(1851 ∼1908)와 함께 朱子書를 강론하였는데, 東 亭선생이 공의 해박한 지식과 정미로운 학문에 탄복하였다고 한다.
從先祖通政大夫弘文館副提學贈嘉 善大夫吏曹參判草菴公墓碣銘(幷序) 23
저자의 從先祖인 丁允祐(1539∼1605)에 대한 묘갈명으로, 序文이 幷記되어 있다. 초명은 胤祐, 자는 天錫, 호는 草庵이고 본관은 羅州이다. 시조 允宗은 고려의 檢校大將軍을 지냈다. 고조는 子伋, 증조는 壽崗, 조부는 玉亨이고 부친은 應斗이다. 모친은 恩津宋氏로 이조 판서에 추증된 世忠의 따님이다. 1567 년 司馬試에 합격하고 1570년 大科급제하였다. 형조와 예조, 병조의 3좌랑을 거쳐 사간원 정언, 성균관 대사성, 사간원 대사간, 동부 승지, 황해도사, 동래부사, 여주 목사, 광주목 사, 강원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천성이 맑고 고결하며 학문에 독실하고 나라에 충성스러웠다. 형제와는 우애가 두터웠으며 늘 義 理를 강구하고 학문을 토론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났을 때 宣祖가 賜祭文을 내렸는데, “청 렴함과 절조 그리고 아름다운 이름은 儒林에서 가장 빼어나고 여러 관청에서 권위와 명성을 드날렸다. 홀로 행한 충정은 사람들이 감복하였으며 符節을 차고 지방관으로 가서는 봄바람처럼 교화를 행하였다. ”라고 하였다.
李敬哉墓碣銘(幷序) 26
李學基(1881∼1953)에 대한 묘갈명으로, 序文이 幷記되어 있다. 자는 敬哉, 호는 蒼溪이고 관향은 永春이다. 시조 敏이 고려 때에 門下平章事를 지내고 永春에 봉해졌기 때문에 자손들이 관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증조는 象極, 조부는 光夏이고 부친은 成均進士郁成이다. 모친은 宜人仁同張氏로 果齋壽禧의 후손이고 士人曰矩의 따님이다. 생부는 壽禧의 從弟인 敎成이고 생모는 安東權氏로 松巢宇의 후손이고 處士秉星의 따님이다. 공은 어릴 때부터 기국이 뛰어나고 자질이 특출하여 가문의 촉망을 받았으며, 천성이 黙重하여 일생동안 스스로를 수양하고 자신을 감추어 사람들이 인정해주기를 구하지 않았다고 하 였다.
墓表
折衝將軍龍驤衛副護軍李公墓表 29
李世元(1866∼1949)의 묘표이다. 자는 士善, 호는 蓮溪이고 본관은 全州이다. 恭靖王의 둘째 아들인 孝寧大君의 補의 11세 손이다. 증조는 副司果應吉이고 조부는 생원 覺民이며 부친은 進勇校尉藪이다. 모친은 贈淑夫人豊壤趙氏로 직장굉[王+宏]의 따님이다. 공은 천성이 순후하고 근실하여 효우로 향리에서 칭송되었으며, 과거 공부를 하지 않고 은거하며 의리로 스스로를 수양하였다. 壽職으로 龍驤衛副護軍에 제수되었다.
附錄
行狀 1
李家源이 지은 저자의 행장이다. 자세한 내용은 글 앞의 저자 소개에 나와 있다.
壙誌 6
樊窩金龍圭(1892~1964)가 지은 壙誌이다. 내용은 행적과 대동소이하다.
墓誌銘(幷序) 8
門人金承學이 지은 묘지명이다. 내용은 행적과 대동소이하다.
墓碣銘(幷序) 11
1962년 重齋金愰(18961978)이 지은 묘갈명이다. 내용은 행적과 대동소이하다.

1961년 李家源이 지은 跋文이다. (전백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