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촌집(水村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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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사업]한국학 기초자료사업
영남학파의 사유세계와 역사인식 -영남학파 문집 상세 해제 및 주요저작 번역- (2단계)
서지사항
분야문학
유형문헌
시대조선
출전영남학파의 사유세계와 역사인식-영남학파문집 상세 해제 및 주요 저작
문서종류문집 해제

본문

卷1

春朝浩吟, 春日書懷, 次山泉精舍韻, 挽李丈 (運淵), 挽絅庵金戚丈(碩林), 旅山獨坐, 挽林 居鄭丈(昌黙), 挽硏庵李丈(承奎)十節, 訪河 晦峯丈於晋州士谷夜與河克中(泳允)子集(義 鎭)李汝宗(一海)共賦, 早發士谷暮抵矗樓下 宿朴君(祐鍾), 趙兄相基自英山注谷來寓晋府 一見甚疑, 挽權丈(相益), 挽東黎族叔(澤鎭), 挽黃小仙丈(炳欽)五絶, 挽族兄(濟弼), 挽上 舍權丈(喆淵), 挽李丈(世鉀), 挽山水亭族兄 (用濟), 挽斗皐山人姜小愚(璧元榮州曲八絶), 士谷訪晦峯丈不遇尋到大坪鄭氏華陽齋以雨 留宿, 隨長兒壽榮寓進永時書懷十絶(先廬, 先 楸, 仲父, 室人, 諸弟, 仲兒, 諸從弟, 諸宗, 舅 氏, 權春樊命燮柳包堂基元), 眼花, 晋州別李 汝宗, 八月五日夜夢拜先君, 乙酉秋與權春樊 及興八(昌鎭)而晦(明鎭)兩叔向鶴駕山止宿 北積人家, 登鶴駕山, 暮投柿木洞, 雨夜共酬, 挽全丈(鳳錫), 挽李丈(用華), 挽柳丈(璋植), 挽族叔(世鎭), 追次李丈(起淵)西汀韻, 次全 丈(在銖)先祖休溪公肅慕殿追配時韻, 挽宋丈 (冑煥), 遣懷), 祖妣諱辰有感, 修築茀莖洞碑 壇有感, 蘆洞澆奠有感, 挽金丈(建相), 挽誠庵 金先生(世榮), 挽族祖(浩奎), 挽權春樊兄, 挽 申翠洲舜佐(彦稷), 挽族祖(昌奎), 挽李仁叟 (根春)丈, 挽李達源(孝善)丈, 挽宋文五(鎔 燦)丈, 剡溪十景(愚汀灝光, 童巖候谷, 遠浦蒼 葭, 南山夕照, 前溪雪月, 鶴峀靑嵐, 茅岸明沙, 東嶺朝旭, 松遷石屛, 花屯積翠), 雨連日暗室 倍欝戴笠往柳澹兄(建瀷)所小酌, 庚寅上元效 權春樊舊韻, 挽柳伯振丈(東麟), 挽李應丈(在 敎), 挽全聖小(泰鉉), 挽李舜哉(起鎬), 次李 應丈(在敎)謹圃韻, 悶雨, 蘆洞楸下感吟, 七月 二十八日鶴溪先祖諱辰有感, 正元過從君(泰 漢)墓, 安奇待仲君來, 挽李景黙(晩靖), 八月 初五夜坐書懷, 歲暮感懷, 挽金養元(正模), 挽 高載卿(永泰), 挽李正夫(源河), 挽金殷佐(應 煥), 送申圓克(彦渠)移居京城, 和呈白聖和 (雲時), 伊溪全氏大巖精舍同柳渭卿(厚植)及 明叟(晦鎭)順邦(興鎭)二叔從舅子範(裕和) 共賦, 次權希元(泰春)新居韻, 挽柳聖春(泳 熙), 挽朴穆汝(鍾文), 挽丁泰叟(魯鎭), 挽柳 天普(惠雨), 挽柳翼八(建宇), 挽全玄瑞(河 璧), 挽李康叟(齡鎬), 挽柳星八(建瀷), 挽李 範雨, 挽趙孝可(承禧), 挽李範卿(源甲), 挽張 (穆熙), 挽金雲瑞(龍圭), 追次徐戚兄克初晬 席韻, 次李表叔(羲頊)晬年元朝韻, 又次示兒 輩韻, 春呈咸堂宗兄孝叟(源)晬筵咸堂宗兄環 甲之朝在庚寅中春之十有六日族弟承學遙呈 數句語以代一觴之祝焉, 挽族兄子平(準), 挽 全儀仲(炳彪)丈, 挽權公克(起燮), 挽李(志 寧), 己亥春三月入京書懷, 校閱兵要謄本追次 權兄寧鎬韻二首, 兵要準畢束裝書懷, 癸卯元 朝, 甲辰元朝, 乙巳先妣諱辰, 深夜坐玉孫讀書 燈下, 次呈而晦叔壽筵, 金雲沙(重勳)來自榮 州中校携我醉族祖(鳳奎)庄, 挽金武承(東烈), 挽裵允卿(埻), 挽金雲沙, 挽李周卿(炳埰), 挽 李(承璉), 挽金應天(浩雲), 挽李(極浩), 次安 東權氏一源亭韻, 次淸心臺創建韻, 滯邑底五日 停罷京行, 雪月夜, 寄玉孫三十一韻, 哭金君秉 瓐, 悼宋君一善, 次景臨亭落成韻, 次族叔禹玄 (錫鎭)晩山幽居韻, 和呈李志堂從舅(裕和), 閑臥偶吟, 龜山社酬唱, 斗巖會話, 滯雨, 續吟, 次李君謙(羲益)古善臺韻, 習讀李公(賢佑)改 碣時韻, 次李應胤(祚淵)明窩韻, 丁未元朝志 感(二絶), 次權啞盲公大隱亭落成韻, 次慕村 亭韻, 初秋權子健(丙極)庄同權雲卿(正漢)姜 忠伯(信甲)金和叔(熏)共賦, 次寄姜桂堂(敬 熙)晬盤, 次張(理燮)可隱幽居韻, 全甥遇翊濶 來旋歸, 次朴聲大(世鍾)還故有感韻, 次宋洛 卿(鳳祥)梧桐韻, 次呈李大源(承瀅)二首, 次 李士靈(用龜)松隱亭韻, 次權子健新居韻, 次 全明國(永粲)顧窩韻, 又次忍吾齋韻, 次金君 鍾植移居韻, 閱黃佑燮先蹟書贈黃君, 次權泰仁 三和幽居韻, 登碧節亭次板上韻, 東都懷古㐲 次先祖東軒韻, 佛國寺用前韻, 博物館, 瞻星臺, 鴈鴨池, 半月城, 鷄林, 先祖南亭舊墟用金梅月 韻, 宿李雅源膺, 再宿金冕九, 高靈訪直姪, 入 紅流洞, 籠山亭次孤雲韻, 洛花潭, 龍門瀑布, 磨崖石佛, 白蓮庵, 弘濟庵, 學士臺, 藏經閣, 大 衆光殿, 紅霞門, 出海印洞口, 星州法山訪崔文 哉(性郁), 法山分送柳顯卿(世佑)權孟三(寧 達)之檜淵, 還抵達句留五六日.

卷2

與河晦峯(謙鎭)丈 51
진주를 방문하여 朴祐鍾과 촉석루 아래에서 하루를 유숙하고, 다음 날 炳寬兄을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하였으며, 許, 趙, 金등과 담소하다 귀가했다는 것과, 부탁드린 비갈문의 완성 여부를 문의하는 내용이다.
與鄭林居(昌默)丈問目 52
정창묵에게 喪을 치를 때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을 제시하고, 이 상황에 따른 服制등을 질문하는 내용이다. 嫡子가 喪을 마치기 전에 사망했을 경우 嫡孫의 服制가 어떻게 되는가? 死後의 禮를 아버지가 행하 던 도중 사망했을 경우 그 아들이 이를 대행 하는가? 대행하면 成服의 절차는 어떻게 되는가? 혹은 장례를 치르기 전 또는 후에 상주가 사망했을 경우의 복제 등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 문헌과 여러 先賢들의 의견을 찾아 제시하면서 의문나는 점을 질문한 내용이다.
與權春樊(命燮) 54
김승학의 아들 壽榮과 권명섭의 딸의 혼인을 결정하면서, 아직 아들이 어리고 어리석어 결혼 생활을 감당하지 못할까 걱정되니 잘 살펴 달라는 내용이다.
與權春樊 55
승학의 老母가 다리가 붓는 병으로 보름 정도 일상사를 못하였는데, 며느리(권명섭의 딸)가 주방에서 시모를 잘 공궤하여 병이 나았다는 것과, 同人들과 죽령을 넘어 단양지역을 유람한 감상 등이 내용이다.
答權春樊 56
與權春樊 57
歲暮의 인사와 함께 월초에 晦峯河謙鎭을 방문하였다는 것, 創江氏가 노안이 와서 겨우 최근에 지은 글 수편만 열람하고 왔다는 것, 李一海란 아이가 매우 총명하였다는 등의 내 용이다.
答權春樊 58 도 차례에 걸쳐 보내주신 글이 매우 간결 하면서도 엄격하고 적실하였다는 것과, 글을 보내 주신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을 전달하는 내용이다.
與權春樊 59
子婦의 병세가 점점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위로의 말과, 방문하고자 정해 둔 날이 멀지 않았는데, 가야할지를 알지 못하겠다는 내용이다.
與權春樊 59
듣자하니 砂洞遺文이 이미 謄草되었다 하니, 이는 師門들이 매우 힘쓴 탓이라 하고, 이를 영세토록 드러내는 것이 우리들의 책임이라는 내용이다.
與權春樊 60 승학이 수개월 동안 동서로 바삐 돌아다니다 실족한 지 이미 月餘동안 걸음을 떼지 못 하였다. 이는 조물주가 妄動말고 조용히 있으 라고 징계한 뜻 같다는 내용이다.
與李內舅槐泉翁(善和) 61
외숙의 喪을 위로하고, 叔母와 어린 조카들의 슬픔을 표현할 길 없다며 위로하는 내용이다.
與李內舅 61
지난 달 17일, 풍기의 白谷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이주했다는 것을 알리고, 좁은 골짜기의 양지 바른 곳에서 농사지으며 사는 것이 細民들의 삶일 뿐이라는 내용이다.
答李內舅 62
오는 正月2日은 돌아가신 부친의 回甲이 되는 날로, 設位告辭를 할 것이다, 이는 後人들의 의리로서 마땅히 해야하는 일이라는 내용이다.
與高汝卿(永翼) 63
配喪에 조의를 표하고, 失足으로 다리를 저는게 이미 수년으로 걷는데 두려움을 느껴 직접 조문을 가지 못하였다는 내용이다.
答李孟三(會春) 64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자 더욱 모습이 초췌해지고, 음식도 싫어지며 건망증과 같은 여러 가지 증상이 마치 적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약한 곳을 공격하는 것과 같음이 날로 심하여져 더불어 싸울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華峯公의 덕망과 학문이 옛 儒賢들처럼 세상이 드러나게 된 것도 아프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는 내용이다.
答李孟三 65
喪을 당하여 매우 執禮를 잘 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춘번 권명섭의 글을 문집으로 발간할 때 비용을 아끼려하고, 監校에 소홀히 하여 여러 가지로 깨끗하지 못한 일이 생기면 진실로 우리처럼 뒤에 죽는 사람들의 恨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答李應文(在敬) 66
起居함에 遠遊必方이라 하였는데, 학자들이 遠遊하는 것은 각자의 일이 있음이니, 젊은 기백에 집에서 고개만 숙이고 있는 것을 누가 좋아 하겠는가? 역시 義方으로만 나아간다면 遠遊하지 않더라도 말을 타고 먼 곳에 나아가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 하는 내용이다.
與朴始萬(載一) 66
집으로 돌아와서야 전보가 왔고, 季氏가 집으로 직접 온 것과, 姪婦기 급히 돌아가 시중을 들었으나 患候가 가볍지 않다고 하니, 이는 지금 유행하는 일종의 괴질의 기운이라 여겨진다. 兄도 이를 피하지 못하였는데, 이 병은 모두 열(火)에서 비롯된 것이니, 마음을 편하게 하고 그 기운을 순조롭게 한다면 곧 열이 가라앉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與河克中(泳允) 68
승학의 학문이 부족하여 뛰어난 스승을 만나 억지로 옆에서 보좌하면서 배우고자 해야 하는데, 이도 차마 부끄러워 하지 못했다는 것과, 집안의 문집을 당초에는 빠르고 늦음에 구애받지 않으려 했으나, 사사로운 정에 급하게 하재촉하여 번거로움을 면치 못하게 하였다. 이렇게 급하게 하여 수치스러움이 매우 많다는 내용이다.
答宗兄孝叟(源) 68
우리 집안에서 다만 전설로만 내려오던 歷代兵要가 史草에서 본 이후에야 실제로 우리 조상(金談)이 쓴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 실록에서 그 사실을 찾아 출간하기로 하고, 월초에 회의에서 결의한 바를 급히 시행하여 이에 반대하는 의견을 막자며 實錄謄草의 당위성을 알리는 내용이다.
答李表叔國瑞(羲頊)
부친상의 탈상 이후 느낀 심정을 토로하고, 그 이후 다리와 눈에 이상이 생겨 병원을 찾 았다는 일과, 吾家千里駒라 칭송받던 손자가 고시 공부하는 일 등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與李表叔 71
望八의 나이에 몸이 아파오면서도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일제 합방 등으로 이루지 못하였음을 悔恨하며, 自愛保重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다.
答白聖和(雲時) 71
처음 만난지 20년이 지났는데 저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이 예전과 꼭 같으며, 앞으로도 권면하고 이끌어 주실 것을 청하며 감사하는 정을 표시하는 내용이다.
答白聖和 72
수년부터 사람들이 이끌려 文字를 맞추고 堪照의 役을 맡았으나 아는 것도 없고, 개인의 일을 도우며 단지 옆에서 웃고 있었을 뿐이다, 이른바 玩書會라는 것을 와서 보니 마음이 茫然하여 마치 전생의 業으로 이 자리에 있는 것 같다는 내용이다.
與柳奎彦(基元) 73
승학이 고향을 떠나고 부모 계신 곳을 떠난 것은 起居와 耳目이 마치 시장에서 물건 사고 파는 듯 雜然했기 때문이며, 사람의 情으로 차마 떨쳐버리지 못하고 머뭄을 면할 수 없었으나 한 달 여를 머물다보니 진실로 이주하기를 잘한 것 같다는 내용이다.
與李正夫(源河) 74
喪事에 우리 친구들이 모두 조문하였으나, 그 부모의 자애로움과, 그 상한 마음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냐며 위로하는 내용이다.
答李正夫 75
雅論을 듣고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거듭 편지를 보내 은혜를 베풀어주시니, 이것 이 바로 君子의 愛人하는 德目의 지극한 뜻이 아닌가 한다는 내용이다.
答朴外舅(圭瓚) 75
일찍 부모를 여의었으나, 안으로는 부모의 밝음을 이어갈 능력도 모자라고, 밖으로는 응 대의 번거로움이 더해진 몸과 집안이 전부 망망하여, 마치 물가(水邊)에 있어도 취한 것처럼 물을 볼 수가 없다. 안개 속 같이 사리를 구분하지 못하여 앞으로가 크게 두려우니 가 르침을 바란다는 내용이다.
答從舅李子範(裕和) 76
숙부께서 조카를 진흙길에 빠지지 않게 도와 주셨다는 것과, 우리 두 사람이 비록 두 곳에 서로 떨어져 있으나 늘 격려해 주시니 더욱 근면하겠다는 내용이다.
答李從舅 77
外舅의 원고를 謄草하기 시작한지 벌써 4-5 달인데, 이제 겨우 詩1권을 마쳤고, 書가 반 정도, 나머지 序, 記, 跋, 哀詞, 誄文, 祭文, 丘墓文, 遺事, 狀, 碣등은 卷半정도로, 전체를 4권으로 꾸몄다는 것과, 本草와 비교해 살 펴보면 많은 誤處와 落處가 있을터이니, 사람을 구해서 校勘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이다.
答李大源(承瀅) 78
승학이 애초부터 몽매하고 뜻은 세우되 돈 독하지 못하고, 뒤를 따르되 不實할 뿐 세월 만 자꾸 흘러 벌써 7순이 되니 이 生이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하는 한탄과, 하늘이 부여 한 德도 온전치 못하고 옛 사람만 사모하여 家計도 돌보지 못하였으며, 몸도 아프고 정신 도 흩어져 君子의 길을 버리고 小人으로 되돌아 갔다고 한탄하는 내용이다.
與族祖舜翼(鳳奎) 79
종질녀의 婚日에 부득이 참여할 수 없음을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내용이다.
與柳衡必(東銖) 80
승학이 최근 쇠약해져 先山의 奠堂을 살피는데도 몸이 움추려진다. 옛 문서를 살피는 정도는 괜찮으나 陶山集의 몇 개 板을 읽었더니 눈과 허리가 아프고 다시 생각이 흩트러졌는데, 다행히 尊兄이 저에게 炳燭之 業에 더욱 힘스라고 위로해 주셨다는 내용이다.
與柳衡必 81
닭실에 사는 權德陽이 말하기를 兄이 권덕양 先公의 挽語와 詩, 跋을 아우에게 전해여 淨本으로 옮기도록 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혹 잘못하여 不忠의 허물을 면치 못할까 저어한 다는 내용이다.
答柳衡必 81
동생이 가을부터 겨울까지 아파서 집에 칩거한 것이 아니라 바깥일에 몰두하여 安東을 오가다보니 여가가 없어서 尊兄의 두 가지 말씀에 한 가지도 집중하지 못하였으나, 지금 부터 눈을 크게 뜨고 즐거운 마음으로 실현 하겠다는 내용이다.
答丁運五(奎應) 82
큰 오류를 제가 평생을 지고 가겠으니, 文 字가 모두 고향 先賢들과 관계가 있으니 혹 고칠 수 있다면 淵民兄과 상의하여 삭제하고, 家傳은 대체로 완비되었으니 世系와 東翁의 卒年은 살피지 못하였다. 책 중에서 增訂하여 교체해 달라는 내용이다.
答丁進卿(學鎭) 82
畏齋集의 간역은 우리 門人後生들이 함께 다행스럽게 여겨야 할 일이니, 지난 날 誠翁 稿를 監役할 때를 생각하여 勘校에 만전을 기해 줄 것을 청하는 내용이다.
與李叔賓(珉鎬) 83
사는 곳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머리를 들고 바라만 보는 정이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더욱 절실하다는 내용이다.
與權大汝(錫晉) 85
몸의 병으로 부탁받은 尊先文字의 일에 중 대한 실수를 하였다. 망년되고 참람하게 起草하는 일을 어겨 季氏가 찾아와서 상의한 후 다시 헤아려 올리겠다는 내용이다.
答族叔省汝(旭鎭) 85
金談선조가 왕명으로 편찬한 七政算篇5冊과 兵要13책을 서울에서 등출하려 했으나 비용을 잘못 산출하여 전체의 1/3만 등출하였다. 元集간역의 비용을 각 지방에서 수금하고, 부족한 收刷之方을 어떻게 하면 좋은지 의논하는 내용이다.
答丁聖五(奎賢) 86
兄에게 喪事나 朞制등이 있을 때마다 승학이 먼 곳에 있어 찾지 못한 죄를 지었음에도 兄이 편지를 보내주신 은혜에 깊이 감사를 드리며, 스승의 문집 간행의 일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으며, 몇 책으로 정돈되었는지? 몇 질을 발간할 것인지 등을 묻는 내용이다.
卷3

答宋在軾 1
族人昌奎氏에게 먼 곳으로 이주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지금 추운 계절이라 한걸음에 달려가고 싶어도 백리 먼 곳이라 편지로 답을 한다는 내용이다.
答金建培 1
伯氏의 墓銘을 승학에게 맡겼는데, 이는 마땅히 作家를 구하여 오래도록 전해져야 하는데, 승학처럼 文章도 없는 사람에게 부탁을 하니 잘못된 생각이 아닌가 염려된다. 욕된 글을 보내니 한번 읽어보고 다시 지금의 大 筆을 구하여 대신할 수 있다면 다행이라는 내용이다.
答全堣煥 2
앞서 글을 부탁받고 고사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喪이 연이어 있어서 지금에야 겨우 글을 이루어 보내드리니 살펴보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答全慶錫 2
老叔의 喪을 당한 전경석에게 승학의 지난 날을 비유하며 위로하는 내용이다.
與李淵民(家源) 4
西洲文集을 편찬할 때 서주선생의 학술과 心法을 잘 드러낼 수 있다면 매우 다행스럽 겠다며 권면하는 내용이다.
答李淵民 4
濟璿君이 성균관대에 입학했다하니 농촌에서 생활하면서 학문에 뜻을 두고 중고를 수료한 후 다시 대학에 진학한 정성과 의지가 매우 가상하다며 격려한다는 내용이다.
答李淵民 6
誠庵集을 혹시 本家로부터 받았는가를 묻고, 西洲稿를 간행하는 일은 겹겹이 일이 방해를 받아 시일을 끌고 있으나, 승학이 불민하여 막연히 묻지 못하고 수삼개월 듣기만 했는데, 무도한 무리들의 행태에 전편을 전부 갈아버리고 싶은 자괴감을 느낀다는 내용이다.
與金馹鎭 7
先府君의 遺草가 간행되었는지를 묻고, 그 府君과의 관계를 회상하며 감개스럽다는 뜻을 밝힌 내용이다.
與丁正哉(湜) 8
先王府叔主의 遺文이 간행된 것을 하례하고, 문집을 잠시 살펴본 바 始末이 빼어나고, 크게 脫誤한 곳이 없어서 다행이니, 이는 모 두 先公형제들의 책임 때문에 이루어진 일 이라는 내용이다.
答楊口宗人(輝勳) 8
世譜와訒齋集의간행이어떻게되어가는 가를 묻고, 이는 모두 宗門의 大事인데 도움을 주지 못하여 恨스럽다는 내용이다.
答族弟明汝(哲濟) 9
우리 문중이 山南에서 文獻으로 이어온 문 중인데, 지금 父老들이 거의 없어져서 東南의 한 모서리에서 한미한 문중으로 전락되지나 않을까 염려가 된다. 先稿의 後識를 제대 내 지 못하여 犯手를 면치 못하였는데, 이미 刊事는 끝이 났고, 표지만 인출하면 완성이 되 는데 책값을 아직 거두지 못하였으니, 該派 문중이 급히 회의하여 보내도록 하라는 내용 이다.
寄長兒(壽榮) 10
결혼하여 離家한 장남에게 농사일을 잘 보살필 것을 세세히 알려주고, 안동병원에 입원하게 된 일, 誠庵族丈의 회갑에 가지 못하니 바쁘더라도 꼭 참여하라는 등의 집안 대 소사를 장남에게 알리는 글이다.
寄長兒 11
離家한 장남에게 집안을 두루 잘 살필 것과, 영주역을 떠나 서울을 거쳐 대전, 논산, 계룡산 등을 여행한 일정을 상세히 적은 글이다.

咸昌金氏續刊大同譜序(1968) 14
김승학이 친구인 金敦榮과 친척 金重衡의 부탁을 받고 작성하였다. 본래 함창김씨 족보는 1807년에 대동보가 완성되었고, 여기에는 臨汝齋柳규(氵+奎)의 서문이 있었다. 이제 새로 대동보를 수치하여 5冊으로 만들고 김 승학에게 서문을 부탁한 것이다. 대동보를 만든 목적은 尊其尊, 親其親하는 것으로, 이는 곧 孝悌의 道이니 譜牒을 통하여 강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剡溪會話錄合編序 15
김승학의 외조인 石溪朴公의 집에 전해오는 會錄인 茂島會話錄(1762∼1763년/壬)癸 과)1819년(己卯)의 剡溪會話錄이 있었는데, 이 두 가지를 합하여 1帖으로 꾸미고 쓴 서문이다. 작성 연대는 미상이다. 회화록 안에는 참석자들의 姓, 諱, 字, 甲, 貫籍, 居住地 등과 당일에 吟詠한 인물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고, 己卯의 회화가 임계의 續編으로, 지금 전후의 회화 兩帖을 합쳐 1편으로 만든다는 것과, 原帖은 전쟁 중에 사라지고, 鈍翁이 家藏한 것과, 承學이 抄記한 것으로 二會의 名帖은 만들었으나 詩篇은 추고할 수 없다하였다.
晦山文集序(1968) 16
김승학이 쓴 李桭春의 晦山文集서문이다. 이진춘의 생몰연대와 본관 등을 알 수 없다. 서문에는 회산선생은 영주의 儒壇을 주도했던 인물의 한 사람으로 그 文行으로 인해 東南의 士友들이 모두 선생과 交遊하기를 원하였다고 한다.
權泰中壽詩帖序 17
권태중은 字允執, 本貫安東으로 冲齋權 橃의 후손이다. 일찍 부친을 여의고 집안이 가난하여 학문에 오로지 하지 못하였다. 집안이 대대로 장수하지 못하였는데, 권태중이 육순이 되자 그 조카들이 우리 집안에 전례가 없는 경사라 하고 잔치상을 차리고 술을 올리며 축수하는 시를 지었다. 이에 김승학을 찾아와 그 첫머리에 서문을 요청받고 쓴 것으로, 壽란 仁者라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지 壽를 원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며 권태중의 仁함을 칭송하는 글이다.
望越亭誌序(1969) 18
望越亭誌는 강원도 寧越의 戶長을 지낸 嚴 興道의 후손 嚴相奎(1818∼1893. 字良彦, 號 溪隱, 本貫寧越)가 편집한 것으로, 1971년에 간행되었다. 望越은 ‘寧越을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망월정은 端宗이 賜死당하고 그 시신을 몰래 수습한 忠毅公嚴興道를 기리기 위해 만든 정자로, 망월정지에는 金宗瑞, 皇 甫仁등과 六臣등과 엄흥도를 기리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景臨亭儒稧帖序 19
경림정은 臨陂縣令을 지낸 李畛(생몰년 미상, 本貫公州)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이진은 호서에서 妻家가 있는 영주의 斗西村으로 이주한 인물로, 관직의 영달을 바라지 않았으며, 자자손손 節行이 탁월했던 가문이다. 후손들이 이진이 살았던 舊墟의 동쪽에 정자를 짓고 ‘景慕臨陂公’이란 의미로 景臨이란 이름을 지었다. 정자가 낙성하는 날 鄕里의 인사들이 모여 이는 매우 아름다운 일이니, 후손들에게 이를 물려주지 않을 수 없다하고 座中에 모인 사람들의 이름을 열서하여 儒稧一帖을 만들고, 친구인 李暻이 승학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이진이 비록 이곳에 처음 터를 잡았지만 仁明한 자손들이 없었다면 오늘과 같은 성과가 없을 것이며, 자손들이 비록 仁孝하는 일이 독실하더라도 오늘날까지 쌓인바가 없었다면 오늘의 일이 없었을 것이라 하였다.
鵝湖亭落成會帖序(1950) 20
鵝湖亭은 영주의 서쪽 鵝川里에 있는 宣城 金氏上舍公이 병자호란을 피하여 숨어 살았던 舊墟에 생원 金潔의 주도하여 지은 정자이다. 1950년에 재물을 모으고 힘을 보태 정자를 지은 후 낙성식을 하는 날에 원근의 士友들이 모두 모여 말하기를 “이는 오로지 자 손들의 깊은 뜻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어찌 모두 이름과 나이를 적어 정자에 비치하여 後來의 古事로 삼지 아니하겠는가?”하였다.
李母權氏六十一歲壽序(1950) 21
1950년에 김승학의 外從되는 李承烈(本貫 永陽)의 모친 權氏의 61세의 祝壽宴을 맞아, 모친의 형제인 東煥, 德陽등이 四韻詩歌를 짓고, 宗老인 蔡山, 玉田公등이 그 뒤를 이었다. 이승렬이 김승학에게 시가의 서문을 청 하자, 김승학은 모친은 省齋翁의 中女로 자신의 大姑氏의 冢婦가 된다 하고 쓴 글이다. 모친은 喪을 당하여도 오직 禮法으로 하여 門戶를 지탱하게 하였고, 아들의 교육에 매우 엄하여 바른 곳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하늘이 부인의 현명함에 보답하여 더욱 壽를 누릴 수 있을 것이란 내용이다.
宋鳳文(泰翼)晬詩帖序(1956) 22
김승학의 오랜 친구인 宋泰翼(1896∼1974. 字鳳文, 號東寓, 本貫冶城)의 1周甲이 되던 1956년에 쓴 글이다. 송태익의 아들 一善이 송태익이 쓴 四韻一律과 相環大人公이 쓴 首題를 가지고 와 시첩의 서문을 요청받았다. 이에 김승학이 송태익의 風流光采를 칭송하고, 一善의 효심을 칭송한 내용이다.
贈朴在文序 22
제주도에 살고 있는 박재문(생몰년 미상, 本貫密城)이 제주도에서 가져 온 世錄을 열람하고 쓴 서문으로, 연대는 미상이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어느 날 저녁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내다보니 허름한 옷에 단장을 집은 자가 있어 문을 열고 들어와 예를 차리 고 자신이 제주에 사는 박재문이라 하였다. 자신들은 밀성군의 후예로, 正字公시절부터 제주도로 건너가 살면서 국도가 멀고 비록 관직에는 나아가지 못하였지만 文行으로 가문을 유지해 왔다고 하였다. 이에 자신이 世錄을 만들어 위로는 正字公으로부터 當世의 작가에 이르기까지의 事實, 銘, 誌, 贊등을 읽고 글을 부탁하는 내용이다. 이에 김승학은 선조의 아름다운 일을 전하지 못하는 것은 不仁한 일이라 하고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80 세가 된 모친을 모시며 효를 다한 것은 仁孝 의 道를 아는 것이라 칭송하였다.
執義臺記(1966) 23
宋宗洙, 宋秉瓚의 부탁으로 김승학이 쓴 執義臺의 기문이다. 記文에 의하면 단종이 왕 위에서 물러나자 司憲府執義로 있던 宋仁昌 (1403∼1479. 號龜巖)이, 副正을 지낸 부친 宋啓(1371∼?. 號東岡, 本貫礪山), 동생 宋 元昌(1426∼1496. 號潛巖)과 함께 영주의 休 川으로 낙향하였다. 낚시를 즐기고 시를 읊으 며 自娛하는 모습을 사람들이 淸靜하게 여겨 그들이 노닐던 숲을 ‘德山’이라 칭하고, 낚시를 즐기던 여울을 ‘副正’이라 하고, 그 노닐던 장소를 ‘執義’라 칭하였다. 후손들이 여울에 刻字를 하여 표시하고 또 정자를 세워 ‘東龜 臺’라 하였는데, 지금 영주군지에는 이를 ‘執 義臺’라 칭하고 있다고 하며, 세 父子의 忠과 德을 기린다는 내용이다.
思慕亭記(1967) 24
黃有定(생몰 미상. 本貫平海)의 祭壇인 思慕亭의 기문이다. 기문에 의하면 세월이 오래되면서 영주군의 동쪽 20리 艾洞에 일명 黃墳峴이란 곳에 큰 봉분이 하나 있어 황유 정의 묘라고 전해지나 지석을 찾지 못하였으나 그 아래에 壇과 비석, 齋舍를 세웠다. 세월이 오래 지나면서 묘를 손보지 않아 황폐화되었는데, 이에 1967년에 후손들이 재물을 모아 1여년 만에 6칸의 집을 완성하고 좌우에 房을 두고, 편액을 思慕라 하였다는 내용과 황유정의 따님이 김승학의 선조 文節公金淡 의 어머니가 되니 모두 한 집안이라는 내용이다.
敬松齋記 25
김승학이 어릴 때 늘 놀던 剡溪제방 위의 무성했던 소나무가 사태로 매몰되고 세월이 지남에 따라 3그루만 남게 되었는데, 朴興緖라는 노인이 말하기를 자신의 고조부인 侍郞公이 여기에 나무를 심은 지 200여년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제 재사를 지어 敬松으로 편액하고 祖先을 孝로 공경하는 장소로 삼고 싶다면서 김승학에게 그 顚末을 밝히는 기문을 부탁한 유래를 설명한 내용이다.
慕松亭記 26
친구인 方相運이 선조인 月峯公의 實紀를 가지고 김승학을 방문하여 월봉공의 후손으로 고려 때에 判典敎寺事를 지낸 文毅公晩松堂方恂(생몰년 미상. 本貫溫陽)을 추모하기 위한 亭子를 지었으며, 蔡山權公이 ‘慕松’이라 편액을 지었다면서 그 뜻은 만송당 선조를 앙모한다는 의미라 하였다. 이에 김승학에게 기문을 청하자 ‘풍설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소나무’뿐이라는 내용의 기문을 지었다.
烈女閣記 27
襄陽의 麻姑城동쪽 수십 리 밖에 조그만 고개가 있는데, 일명 烈女峴이라 하는데, 열녀가 어느 시대 사람인지 성씨가 무엇인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다만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남편이 병이 들자 遊離乞食하여 남편을 수발하다가 이 고개에서 약간의 밥을 얻어 남편 에게 돌아갔는데, 남편은 이미 사망했다고 한다. 이에 부인이 양 가슴을 잘라내고 하늘을 보고 통곡하다 사망하였는데, 사람들이 이곳에 전각을 세워 旌表하였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그 전각이 모두 허물어 졌다고 한다. 이에 인근의 선비 鄭忠洛, 張星井, 李亨鎬 등이 그 전각을 중창하고 김승학에게 기문을 요청하여 새로 지은 열녀각이 비록 좁기는 하지만 열녀를 사모하는 풍조가 금일까지 요동치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는 내용이다.

霽亭李先生文集重刊跋(1965) 29
文靖公李達衷의 중간본 문집의 발문이다. 이달충(1309∼1385)은 字仲權, 號霽亭, 本貫은 慶州이다. 후손 李宰吉의 요청으로 발문을 지었는데, 발문에는 선생이 불교를 배척하였으며, 익재 이재현과 함께 文章으로 이름나고 國史를 기록하였고, 선생의 立身과 行己는 고려사와 東史에 전해지는데, 모두 성품이 강직하고 藻鑑이 있다는 내용이다.
南谷金公逸稿跋(1958) 30
金溍(1598∼1684)의 逸稿 발문이다. 김진은 字晉卿, 號南谷. 本貫淸道로, 南谷逸稿 2권 1책이 있다. 嗣孫金瀅植 등이 상자에 담은 남곡공의 手本詩와 祭文, 狀銘등을 가지고 와서 발문을 부탁하였다. 김진은 김승학의 선조 栢潭金玏의 문하로 병자호란에 淸과 싸우기 위해 가다가 화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 와서 약초를 캐면서 은거하고 거처하는 곳은 南谷이라 편액하였으니, 이는 義理를 확실히 잡고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이라 하였다.
芝園金公逸稿跋(1960) 31
김승학이 쓴 宣城金氏출신의 학자 金泰萬의 시문집인 芝園逸稿의 발문이다. 발문에 의하면 김태만은 檀溪金海一의 아들로, 백부인 蘆州金台一, 형인 鶴皐金履萬등과 함께 선성김씨 宗中의 학자로 이름난 사람 중의 한 명이다. 본래 남긴 글이 많았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전부 사라져 후손들이 이를 드러낼 바가 없었다. 이에 후손인 國鉉, 哲濟등이 宗 門에 남겨진 공의 詩文약간을 모아 逸稿를 만들었으니, 내용에 大篇은 없으나 후래의 선비들이 지키고 삼가야 할 일이 기술되어 잇 다는 내용이다.
密窩權公遺集跋(1964) 32
김승학이 쓴 密窩文集의 跋文이다. 문집을 지은 權錫元(1798∼1871)은 字孟善, 號密 窩, 本貫은 安東으로, 발문에 의하면 錦江張 璶의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李新野, 朴逸圃, 李霞溪 등과 交遊하였다. 김승학은 권석원의 詩를 읽고 그 시의 뜻이 넓고 크며, 文을 읽고 平順하면서도 애절하다며 古雅의 풍취가 남아 있다고 평하였다.
感慕錄跋(1960) 34
김승학이 쓴 丹陽張氏感慕錄의 발문이다. 감모록은張允和(?∼1422)와후손張溍 (1550∼1640. 字汝澄, 號鹿野堂)의 始末을 적은 책으로 1冊이다. 발문에는 두 사람의 행적이 전해진 바 없었으나 지금 다행히 이 책이 간행되어 책의 말미에 망령되게 글을 싣게 되었다.
澹翁丁公遺集跋(1967) 34
김승학이 쓴 澹翁遺集의 발문이다. 담옹유 집은 모두 4권 2책으로 丁奎昌(1872∼1950. 字子晦, 號澹翁, 本貫羅州)의 시문집이다. 손자 丁湜의 요청으로 김승학이 발문을 지었다. 정규창은 龍山이 선생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고, 이어 東亭李炳鎬, 晦窩郭鍾錫과 교유하며 성리학을 講究하였다. 김승학이 50여 년간 정규창을 살펴보니 조석으로 拜廟하고 깨끗한 자리에 앉자 종일토록 몸을 기대지 않고 소리내어 책을 읽는 모습을 기억하며, 공의 深厚함을 가족들도 미처 예측하지 못하 였다고 한다.
城東酬唱錄跋(1959) 35
김승학이 쓴 城東酬唱錄의 文이다. 權素石, 朴鐵塢, 李晦山등과 김승학의 장인 槐泉李公등이 주도하여 歌嘯를 위한 結社를 꾸미 고, 이를 책으로 엮은 것이 城東酬唱錄이다. 발문에서는 그 詩를 읊는 것은 그 세상을 論 하는 것이라 하고, 이 책은 그 기상이 매우 風慨하며 세상의 불빛이 될 만하다 하였다.
誠庵集跋(1962) 36
김승학이 쓴 誠庵集의 跋文이다. 성암집은 4권 2책으로 金世榮(1878∼1941. 字士顯, 號 誠庵, 本貫禮安)의 문집이다. 성암집은 嗣子淵黙이 遺文을 모아 丁西浦, 金西洲, 姜道熙 등이 누차 정리하여, 詩, 書, 雜著, 誄文등 4권 2책으로 꾸미고, 김승학에게 발문을 부탁 하였다. 김세영은 李一嵓, 晦窩郭鍾錫등에게 성리학의 요체를 얻고 깊이 연구하여 돈독히 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君子의 修辭는 간결함을 위주로 하고 要道를 밝히는데 있을 뿐이라 하였으며, 학문의 근본을 實理에서 찾았다. 배우러 오는 자가 있으면 모두 그 자질에 따라 가르쳤다고 한다.
鳳岡遺集跋 37
김승학이 달성으로 全慶錫을 방문하였을 때, 전경석이 그 선조 鳳岡先生(생몰년, 본관, 諱등 미상)의 유문을 보여주고 발문을 부탁받았다. 봉강공은 김승학의 선조 睡山公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자태가 매우 청아하고 재주가 남달랐다고 한다.
西汀遺集跋(1963) 38
김승학이 쓴 西汀遺集의 跋文이다. 西汀遺集은 李起淵(1875∼1955. 字贊商, 號西汀, 本貫永川)이 남긴 시문집이다. 그 아들 羲兌가 남긴 글을 모아 김승학에게 발문을 부탁하였다. 발문에 의하면 이기연은 著述에 몰두하지 않았고 스스로 한가롭게 거하는 중에 약간의 筆錄을 남겼을 뿐인데, 이 글에 西汀 이 唱酬한 것과 誌, 狀, 輓詞, 祭文등을 모으고, 權頊淵, 金喆熙등이 교정을 봐서 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養浩齋實記跋 39
李天本(생몰년 미상. 字道源, 號養浩齋, 本貫禮安)실기의 발문으로, 김승학이 안동의 明倫坊을 방문하였을 때, 李有敎가 찾아와 양호재의 유문과 遺事를 보여주며 石印本으로 책을 만들 것이라 하며 발문을 부탁받았다. 발문에는 이천휴가 효심이 매우 돈독하여 鄕里의 선비들이 모두 ‘天心孝子’라 칭송 하고, 마침내 이를 기록한 것이 실기가 만들어진 까닭이라 하였다.
道隱遺集跋 40
黃道淵(1857∼1913. 字聖貫, 號道隱堂, 本 貫平海)이 남긴 시문집의 발문으로, 문집은 2권 1책이다. 발문에 의하면 황도연은 西山 金興洛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향리의 뛰어난 선비로 손꼽혔다. 스승인 김흥락이 권해준 학봉 김성일의 ‘童子禮’를 읽고 日用節度로 삼았다. 황도연이 사망한 후 후손들이 상자에서 유문을 꺼내 정리하여 책으로 엮은 전말을 수록하고 있다.

伴鶴亭朴公實記後識(1957) 40
김승학이 쓴 伴鶴亭實記의 後識이다. 伴鶴 亭實記는 朴景曾(1611∼1669. 字汝唯, 號伴 鶴亭, 本貫潘南)의 시문집으로 2권 1책이다. 후지에는 박경증이 집안의 어른인 六友堂朴 檜茂(1575∼1666)와 三樂堂朴從茂(1582∼ 1664)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나 과거보는 것을 즐겨하지 않고 林泉에 은거하기를 즐겨하여 正郞宋公이 남긴 건물에 伴鶴亭이라 이름하고 名碩韻豪들을 초치하여 술과 詩賦로 풍류를 즐겨 선비들이 南道主人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박경증의 후손 朴休陽이 遺文약 간과 반학정 중건기, 반학정의 기문, 頌, 狀, 銘등을 모아 舊錄과 합하여 實記1권을 만들었다고 한다.
草謄歷代兵要後小識(1958) 41
김승학이 쓴 小識에 의하면 김승학의 선조 인 金淡이 承文院에 근무할 때 歷代兵要를 완성하였으나 집안에는 전해 오는 것이 없이 늘 후손들이 恨으로 여겼다가 1956년에 김승학과 金濟容이 선조들의 逸事를 수소문하고 서울의 대학 도서관을 찾아 세종실록과 兵要 를 보니 문종 癸酉年(문종 1. 1451)에 李石亨 이 全州의 任所에서 開刊하였으나 지금 3卷이 실전된 것을 확인하였다. 이듬해 다시 서울에 가서 政篇을 謄出하고, 1958년에 謄寫하여 原集을 인출할 때까지의 과정을 소상히 기록한 것이다.
世譜五刊後識 42
後識의 내용에 보면 선성김씨의 족보는 1685년부터 1855년까지 모두 4刊되었고, 그 이후 60년 만에 다시 발간할 기회를 얻었다. 先父老들이 통문을 내어 收單하고 1954년에 設廳하여 7개월 만에 각 派를 合本하고 3개월 간 淨本하고, 다시 7개월 간 석인본으로 간행하여 모두 9권으로 만들었다. 元綱大體는 舊本의 例에 따르고, 細目등은 시대의 변화에 맞추었다는 등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讀先祖文節公行狀後小識 43
김승학이 선조인 文節公金淡(1416∼1464. 字巨源, 號撫松軒)의 행장을 읽고 쓴 小識이다. 김담이 입사 이후 조정에서의 행적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先世五世祭田稧帖後識 44
김승학의 선조 5세대의 祭田을 따로 마련한 연유를 설명한 글로 작성연대는 미상이다. 5세대는 敎授公金友仁(善山敎授)→金鍫 (號逸草堂)→ 미상 → 金一柱(號薇軒)→ 金彦烈(號長春)으로 이어지는 5세대 선조들이다. 여러 세대의 조상들 중에서 굳이 이 5 세대의 조상들을 위한 祭田을 따로 마련한 것은 위 5대의 선조들의 墓가 있는 黃鳥에는 齋舍도 亭子도 없으며, 제전으로 한 고랑의 농사지을 땅도 없이 사방이 구름에만 둘러 싸여 있을 뿐이라 하였다. 이에 5세 조상들의 후손들이 祭田을 마련하기 위해 계를 결성하고자 하는 뜻을 밝히는 내용이다.
薇軒先祖遺集識(代嗣孫作)(1960) 46
薇軒金一柱의 嗣孫金孝鎭을 대신해 작성한 後識이다. 김일주가 남긴 閑居雜詠 약간 卷에 첨삭을 가하고 부록을 첨부하여 시문집 5권 2책으로 편집, 간행하는 과정을 설명한 내용이다.
書孝經大義抄謄後(1952) 47
예전 안동에 살 때 아이들이 천자문을 배우고자 했으나, 김승학은 孝經보다 開蒙에 더 좋은 것이 없다하고 여러 친구들에게 효경을 구하고자 했으나 구하지 못하였다. 그러다 경남의 機張에 사는 鄭氏성을 가진 노인의 집에서 集註孝經이 있음을 보고 이를 빌려 돌아와 아이들에게 빈 종이에 베껴 옮기도록 하면서, 효경을 읽어 至德의 要道를 깨닫게 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書權孟三家藏書籍樊失記後(1954) 48
權孟三(본관 안동)은 龍巒權紀의 후손으로, 이 집에는 용만선생 이래 家藏한 一家의 문헌들이 전해지고 있었다. 김승학이 이 집에 머물 때 권맹삼이 용만선생부터 선친에 이르기까지 經史書帖을 보관해 온 것은 세상이 아는 일이지만, 누차 灰燼된 나머지를 소장하고 있었는데, 1954년 童學의 실화로 선친이 만년에 소장한 것이 또 거의 불타버렸다고 하였다. 이어 권맹삼이 없어진 서적의 목록을 작성하여 후손들의 경계로 삼고자 한다며 그 문서를 보여주자, 김승학도 선조 때부터 家藏된 서적들을 한국전쟁으로 불태워 버린 적이 있었다 하면서 권맹삼이 옛 서적들을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뜻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書訒齋集後49
인재집의 발간 과정을 설명한 내용이다. 본래 인재집은 2卷으로 만들어진 遺稿가 있 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유고의 분실을 염려하여 인재공의 후손 金鎭福이 1권을, 진복의 從兄이 1권을 나누어 보관하고 있었는데, 전쟁 중 종형이 가진 2권을 분실했다고 한다. 이에 남은 1권에 다시 기록을 찾아 첨삭하여 문집을 간행하고자 한다는 뜻을 설명하고 있다.
書鄭君寅海隨得錄後 50
文殊學校長鄭寅海는 篤志를 지닌 사람으로, 집안이 가난한 가운데 학업에 열중하여 교사로 재직하던 중, 틈틈이 지은 吟詠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이를 隨得錄이라 이름하여 이 책을 후세에 남기고자 한다는 뜻을 설명한 내용이다.
卷4 雜著 朴氏婦黃氏傳 52
外舅朴公의 집안 며느리인 黃氏부인에 대한 내용이다. 12살에 朴雲均에게 시집와서 풍기의 月洞에서 어렵게 살다가 병든 남편의 치유를 위해 약초를 구해 지극 정성으로 구호하여 살려낸 烈婦의 이야기를 外舅에게 전해 듣고 옮긴 것이다.
讀書隨得 53
김승학이 책을 읽으며 남겨 둘 만한 구절을 적은 것으로 모두 25개조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自警箴 55
스스로 지켜나갈 箴句를 적은 것으로, 日 新이나 촌음도 아껴 쓸 것 등의 내용이다.
祭文 祭族父貞山先生(東鎭)文(1952) 55
金東鎭(1867∼1952, 字國卿, 號貞山, 本貫 宣城)의 제문이다. 당대 유림의 領袖로 활약하고 파리 長書사건의 대표자중의 한명으로 활약하였다.
祭蔡山權公(相圭)文(1961) 56
權相圭(1874∼1961. 字致三, 號蔡山‧忍庵, 本貫安東)의 제문이다. 권상규는 冲齋權橃 의 후손이며 郭鍾錫의 문인이다. 經學, 禮學, 性理學에 능했던 인물이다.
祭重內叔澹翁丁公(奎昌)文(1949) 56
丁奎昌(1872∼1949, 字子晦, 號澹翁, 本貫 羅州)의 제문이다. 李炳鎬, 郭鍾錫등과 交遊 하였고, 신학문을 피해 산속에서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祭族父東藜公(澤鎭)文 57
金澤鎭(생몰년 미상, 字源中, 本貫宣城) 의 제문이다. 淸雅한 자태를 지녔으며, 세상의 일에 慷慨하여 파리長書를 파리로 우송한 것이 발각되어 투옥되었다.
祭大姑夫李公(鳳淵)大姑母李孺人文 (遷厝時)(1904) 58
1904년 李鳳淵(1868∼1904, 字學韶, 號芝南, 本貫永川)과 配宣城金氏를 안동의 臥龍 山아래로 遷葬하면서 지은 제문이다.
祭悔山全公(在銖)文 59
全在銖(생몰년 미상. 本貫沃川)의 제문이다. 아침저녁으로 拜廟하며 宗族의 의리를 기리고, 농사를 지으며 벗들과 어울리면서 학문에 몰두하던 모습을 추모하는 내용이다.
祭畏齋丁先生(泰鎭)文(1960) 59
丁泰鎭(1876∼1960. 字魯叟, 號畏齋‧西浦, 本貫羅州)의 제문이다. 郭鍾錫의 문인으로, 파리長書에 참여하였고,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遼東으로 건너가 德興堡에서 개간에 종사하였다.
又(鄕校儒生) 60
향교의 유생들을 대신해서 김승학이 지은 丁泰鎭의 제문이다. 천년 文獻의 고장 榮州의 학문 遺風을 이어간 丁泰鎭의 학덕을 기리는 내용이다.
祭族父西洲先生(思鎭)文 61
金思鎭(생몰년 미상, 本貫宣城)의 제문이다. 함께 誠庵公金世榮에게 학문을 배운 인연을 회상하고, 그가 남긴 글을 읽으면서 그 高明과 高見이 측량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 는 내용이다.
祭誠庵金先生(世榮)文 62
金世榮(1878∼1941, 字士顯, 號誠庵, 本貫 宣城)의 제문이다. 김승학의 스승으로 혼잡한 세상을 피해 산림으로 이사를 했으나 배우고자 찾아오는 자는 모두 받아 들여 그 자질에 따라 차등있게 교육하였다.
祭李公(鍾博)文 63
李鍾博(생몰년, 본관 미상)의 제문이다.
祭石山權公(鍾遠)文 64
權鍾遠(생몰년 미상, 字聲之, 號石山, 本 貫安東)의 제문이다. 영주 유림중의 君子로 추앙받고 있었으며, 독서 40년에 文章을 이루지 못함이 없었다. 지금 그의 죽음을 보니 하늘의 뜻이란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안타까워 하는 내용이다.
祭大觀族叔(晦鎭)文 65
金晦鎭(생몰년 미상, 號眉湖, 本貫宣城)의 제문이다. 학문의 시작은 父兄의 도움 없이 독학으로 시작하였다. 宗中에서 世譜를 修治하야 중간할 때 모두 김회진을 추천하여 主筆로 삼아 校閱을 보도록 할 정도로 학문에 뛰어난 성취를 보였다.
祭金丈遠汝(近淵)文 66
김근연(생몰년, 본관 미상)의 제문이다. 김승학과 40년 교우하였으며, 평소에 조용히 벗들과 시를 주고받으며, 그 편안한 자세와 하늘을 거슬리지 않는 마음을 추모하는 내용이다.
祭宗叔忠彦(孝鎭)文 67
金孝鎭의 제문이다. 김승학과 서로 아끼며 規檢하며, 노쇠했어도 서로 방문하여 정담을 나누던 모습과 병으로 다리를 절었던 모습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祭李羲賓寅鎬文 67
羲賓이인호(생몰년, 본관 미상)의 제문이다.
祭舅氏槐泉公文 68
외숙인 槐泉公의 제문이다. 모친과 함 께 賢弟가 되어 才藝를 발휘하던 모습과 合骨合肉할 정도로 가까웠으며, 서로 師友의 義를 널리 구하던 모습을 추모하는 내용이다. 又大祥時 69 외숙 괴천공의 大祥때 올린 제문이다.
祭朴叔纘(興緖)文 70
박흥서(생몰년, 본관 미상)의 제문이다.
祭丁雲卿戚叔(奎集)文 71
丁奎集(1884∼1950, 字雲卿, 號剛齋, 本貫 羅州)의 제문이다. 소백산에 은둔해 살면서 가풍과 학덕을 키워 온 丁奎集을 추모하는 내용이다.
祭朴始萬(載一)文 72
박재일(생몰년, 본관 미상)의 제문이다.
祭族叔孝兼(台鉉)文 73
金台鉉의 제문. 祭朴汝聖(勝彦)文 73 朴勝彦의 제문이다. 효우가 깊었고 書史를 깊이 공부하였다.
祭徐表叔敬初(丙直)文 73
徐丙直의 祭文이다. 石灘을 방문했을 때 서병직이 찾아와서 환담하고, 蘭山에서 서병직을 찾아가 환담하였으나, 다 나누지 못한 담화가 있음을 아쉬워 하며 추모하는 내용이다.
祭姜士行(道熙)文 74
姜道熙(1884∼1954, 字士行, 號靜思齋, 本 貫晉州)의 제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얻기를 원하는 才志, 文章을 함께 얻었으나 불행히도 쓰이지 못했음을 아까워하며 거문고를 옆에 끼고 한 밤에 홀로 앉아 逍遙하던 모습을 추 모하는 내용이다.
祭柳包堂(基元)文 75
柳基元(1894∼1962, 字圭彦, 號包堂, 本貫 全州)의 제문이다. 협동학교를 세워 후진의 양성에 몰두했다. 김승학은 함게 호형호제한 것이 평생의 즐거움이었다고 추모하고 있다.
祭堂姨母金孺人文 76
유일한 堂姨母의 자애롭고 懇惻해 주던 모 습을 추모하며, 九幽에서 어머니와 함께 만나 기를 바라며 애통해 하는 내용이다.
祭朴外舅(圭瓚)文 76
김승학의 장인 박규찬(생몰년 미상. 字光 彦, 號松山, 本貫寧海)의 제문이다. 1926년에 장인으로 인연을 맺은 후 40여 년간의 情義를 추모하는 글이다.
祭族叔興人(昌鎭)文 77
족숙인 김창진의 제문이다. 마땅히 살아야 할 사람은 빨리 죽고, 강직하고 과단성 있는 이는 요절하고 明快하고 端重한 사람은 어찌 이리 빨리 가는가? 하며 애통해 하는 내용이다.
祭李璇七(政鎬)文 79
세상에 벗을 구할 때 利를 헤아려 벗을 구하지 않는 친구의 下世에, 이정호의 高風, 高義는 지금 사람에 비할 수가 없다고 추모하는 내용이다.
祭族叔伯三(台鉉)文 79
족숙 金台鉉의 제문이다.
祭丁允伯(岱鎭)文 80
마음가짐이 곧고 행동거지가 강직하고 바른 것이 君이 君인 까닭이라 하며, 그 성정을 상기하고, 예전에 喪을 당했을 때 찾아와서 위로해 주던 允伯이 지금 돌아감에 진실로 애달프다는 내용이다.
祭稼山族叔而晦(明鎭)文 81
四海가 비록 넓다고 하지만 족숙과 같은 이를 찾기 어렵다며 그 죽음을 안타까워 하고, 그 따습고 자애로운 성품, 함께 족보를 修治하던 일 등을 회상하며 족숙을 추모하는 내용이다.
祭族祖舜翼(鳳奎)文 82
족조 김봉규의 제문이다.
祭族從學愚(淵默)文 83
김연묵의 제문이다.
祭金和叔(熏)文 84
김훈의 제문이다. 김훈이 자신을 찾아 왔을 때, 소백산에서 김훈을 만났을 때를 회상하며 갑작스런 그이 사망 소식에 황망한 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祭金君世鎭文 85
김세진의 제문이다. 내가 龜江에서 사흘을 머무는 때에 홀연히 김군의 사망 소식을 듣고 경악하면서, 항상 동생과 같은 마음으로 함께 하였다는 내용이다.
誄文 誄張纘叔(烱文)文 86
장경문이 사망했을 때 김승학은 병이 들어 조문하지 못했음을 애통해 하고, 장경문의 天品이 온화하였으며, 일찍부터 貞山先生의 문하에서 공부하다 마침내 온 집안이 옆으로 이주해 온 인연을 표시하며 조문하는 글이다.
誄李君東斗文 86
李東斗(本貫眞城)는 김승학의 친구 恥堂 翁李喆의 사손이다. 어려서부터 기상이 빼어 났고, 가정에서는 恂恂했으며 회사에 들어가서는 근면하고 민첩한 아이였다. 근년 들어 쇠약해졌다가 홀연히 요절해 버렸다. 이에 친구인 恥翁을 위로하는 내용이다.
壙誌 族叔稼山子壙誌(1962) 87
김명진(1895∼1959. 字而晦, 號稼山, 本貫 宣城)의 壙誌. 가산공이 돌아가신 뒤 그 아들 溵間이 승학에게 묻기를 “아버지의 장례를 급하게 치러느라 묘지석이 빠져버렸는데, 만일 무덤을 새로 옮기게 되면 형의 책임이 아 닌가?”하였는데, 과연 2년이 지난 1962년에 무덤을 이장하게 되었다. 이에 승학이 오열하면서 壙誌를 지어 새 무덤에 넣었다. 내용은 김명진의 일대기로, 1908년에 김승학과 誠庵公에게 학문을 배웠고, 1911년에는 신학문을 피하여 안동의 西美洞으로 피신하였다. 1912년 성암공이 돌아가시자 愼窩洪鍾洛, 毅庵 朴齊濤와 교유하였다. 1954년에 문중의 족보 간행에 참여하였고, 1957년에 大祖의 문집을 간행한 후 병이 들어 1959년에 사망하였다.
告由文 白雲池壇所安石告由文 90
단소의 石床을 새로 교체하면서 올린 고유문이다.
先祖集重編告成文 90
선조인 文節公金淡의 문집 간행이 완성되 었다는 것을 고하는 글이다.
司直朴公(㻠)墓道改碣告由文(代本孫) 91
朴㻠의 묘도에 새로 돌을 깔고 튼튼히 오래 지탱되기를 바라는 고유문이다.
默齋權公(運大)竪碣告由文 91
권운대(1741∼?, 字休仲, 號默齋, 本貫安 東)는 龍巒權紀의 5세 손이다. 무덤에 묘갈을 세우고, 이 묘갈이 천만년 유지되기를 바라는 고유문이다.
擊壤堂全公(是天)墓道立石告由文(代本孫) 92
全是天(생몰년 미상. 本貫沃川)의 무덤에 비석을 세우고, 이를 고하는 글이다.
張烈婦金氏竪碣告由文(代本孫)(代本孫) 92
열부 김씨의 무덤에 묘갈을 세우고 이를 알리는 글이다.
謹拙齋朴公(聖輝)墓道竪碣告由文(代本孫) 93
박성휘의 무덤에 묘갈을 세우고 이를 고하는 글이다.
六代祖考處士府君墓道安石告由文 93
김승학의 6대조인 金集鍊의 무덤에 안석을 깔고 이를 고하는 글이다.
源泉宋公(冑煥)墓道立石告由文(代本孫)94
송주환(1870∼1954, 字世玄, 號源泉, 本貫 冶城)의 묘도에 비석을 세우고 이를 고하는 글이다.
處士宋公(容燦)墓道立石告由文(代本孫) 94
송용찬의 묘도에 비석을 세우고 이를 고하는 글이다.
上梁文 榮州鄕校詠歸樓移建上梁文 95
1577년에 당시 영주군수 이희득이 지은 영귀루를 현재의 장소로 이전하면서 올린 상량문이다.
卷5 遺事 七代祖考從仕郞府君遺事 1
김승학이 쓴 金臺의 遺事. 김대(1732∼1809). 字子俊. 처음에 從弟인 艾軒과 함께 薇軒公에게 학문을 배웠고, 장성하여 朴昌朝와 朴弘儁문하 에서 글을 배워, 박홍준에게 天才라는 칭송을 받았다. 학가산 앞에 峙流亭을 짓고 휴식과 자손들을 교육하는 장소로 삼았다. 어릴 때부터 經의 뜻을 밝히는데 주력하였고, 科擧에 한번 나아갔다가 포기한 후, 평생 과거를 보지 않았다. 부모상에 정성을 다하여 墓아래 祭田을 두어 몸소 경작하였다. 겨울에 추위에 떠는 자에게 옷을 벗어주고, 출입할 때마다 주머니에 돈을 넣고 나가 유리걸식하는 자들 에게 베풀었다. 집안은 늘 검약하되 근본을 돈독히 하는데 힘을 썼고 일체의 名利를 구하지 않았다. 돌아가실 즈음에 손수 遺誡數 條를 지어 자손들이 修省하는 조목으로 삼게 하였다. 평생 소학을 옆에 두고 실천하였으며, 소학의 문자로 自省하는 자료로 삼았다. 수 백여 권의 책을 읽고 손수 방점을 찍고 朱 墨으로 懸吐를 달아 자손들이 이를 읽도록 하였다.
高王考處士府君遺事 5
김승학의 고조부 金樂洪의 유사. 김낙홍 (1811∼1895). 字範汝. 어릴 때부터 외모가 준수하였고 언행이 정중하였다. 처음에 叔父에게 학문을 배웠다. 효성에 매우 지극하여 조부모나 부모가 병이 나면 지극한 정성으로 약을 다려 올렸고, 한 겨울이나 홍수 때도 부모님이 生魚를 원하시면 이를 반드시 구하여 드렸고, 문 밖에 과실 나무를 심어 가을이면 이를 드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마치 어린아이가 젖을 구하듯 슬피 哭하였다.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과거 시험 장의 뇌물 사건이 발각되어 함께 罷榜이 되었으나, 부군은 이에 실망하지 않고 의연하였다. 손님을 접할 때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였고 몸이 아파 약을 먹을 때에도 의관을 정제 하여 사람을 대할 때에 조금도 나태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자질이 매우 강명하였으며, 모습이 준수하였고, 앉아있어도 서있는 것처럼 빼어났고, 바위를 바라보는 것처럼 위엄이 있었다. 일의 처리가 매우 확연하였다. 제사를 지낼 때는 마당을 청결히 쓸고 집안의 부녀자와 비복들 은 모두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히고 함구하도 록 하여 감히 떠들지 못하게 하고, 촛불을 켜 고 시간을 기다려 제사를 올렸다.
王考處士府君遺事 15
김승학의 조부 金海奎의 유사. 김해규(1854∼ 1894), 字羲弼. 配錦城丁氏 하늘이 내린 효자란 칭송을 받았다. 공의 부친이 병이 들어 여름철에 배(梨)가 먹고 싶다고 하자 배를 구하여 공궤하였다. 가뭄이 심하자 빚을 진 사람들의 장부를 모두 불태워 버렸으며, 성격이 忠厚하여 한 터럭이라도 치우침이 없어 동네 사람들과 친족들이 모두 우러러 보았다. 갑오년 여름에 학가산에 가서 僧舍에서 머물던 중 갑자기 병을 얻 어 옆에 있던 형제들이 야밤에 등에 업고 산을 내려와 새벽에야 집으로 돌아와 숨을 거 두었다.
行略 孺人鳳城琴氏行略 17
孺人琴氏(1886∼1941)의 行略. 夫朴圭瓚, 本貫寧海. 태몽에 문수산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어 집안 어른들이 모두 비범한 조짐이라 여겼다. 자라면서 성품이 넓고 후덕하였다. 14세에 朴氏문중으로 시집을 와서 시조부모와 시부모를 함께 봉양하였다. 시집온 지 3년 되는 해에 집안에 모셔둔 媚神을 없애버렸다. 1903년에 연이어 시조부모와 시부모의 喪을 당하였을 때 집안이 매우 어려웠으나 한 터럭이라도 상례에 군색함이 없도록 잘 치렀다. 장자 浩均이 일본으로 건너가 금씨에게도 일 본으로 건너올 것을 청하자 子婦가 매우 유약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사셨다. 안질과 해 소, 일본의 풍토가 맞지 않아 병이 악화되어 56세에 돌아가셨다. 장자 호균이 일본에 안장했다가 귀국하면서 시신을 함께 모셔왔다. 3남 1녀를 두었다.
墓表 從高祖處士公墓表 19
族叔金獻鎭의 부탁으로 지은 金樂熙의 묘표. 金樂熙(1821∼1883). 字大彦. 配英陽南氏. 부모에게 효성이 매우 지극하여 부모가 연로하여 절제가 없을 때에도 마음으로는 늘 부모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있을까 두려워하였으며, 매일 새로운 음식으로 부모를 공양하였다. 학을 가르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아 집 안에는 늘 책을 옆에 끼고 글귀를 묻는 자들로 가득하였다. 안동의 북쪽 楸谷枝田洞亥 坐에 묘소가 있다.
金致善墓表 21
金輝東(1892∼1959), 字致善, 本貫宣城. 충청도 청원에서 영주의 樊浦로 이주하여, 1953년∼1954년에 世譜를 만드는 일에 온 힘을 다하였다.
家狀 成均生員東溪金公家狀 22
金輝宅(1855∼1935), 字漢卿, 號東溪, 本 貫禮安. 태어날 때 용모가 비상하여 부친과 백부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12∼13살 때 경전을 들고 산사에 들어가 읽었으며, 25세에 생원시에 급제하였다. 31세에 성균관에 들어가 渚樵黃肇夏등과 講說하였다. 연이어 부모상 을 당하고, 또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깊이 은거하여 경전 읽기에 몰두하였다. 52게에 李光龍, 尹大鉉등과 南遊하여 김천에서 鑑湖呂 大老의 舊居를 방문하였다. 伽倻에 이르러 紅 流洞을 감상하고 籠山亭에 오르고, 一蠹鄭汝昌의 사당에 참배하였다. 德裕에서 정여창의 고택을 방문하고, 膠宇尹冑夏, 俛宇郭鍾錫과 시를 읊조리고 講論하였다. 合邦이 되자 湖南의 大屯山에 은거하였다. 世情을 익히지 않아 점차 가계가 기울었으나 조금도 원망하 지 않았다. 세상이 어지러워져도 겨울이 오면 곧 봄이 오고, 한번 어지러워지면 곧 한번 다스려지는 것이 하늘의 이치라하고, 星湖僿 說, 磻溪隧錄은 經世의 大論이 갖추어진 책이라하여 즐겨 읽었다.
西洲金先生家狀 26
金思鎭(1878∼1954), 字謹夫, 號西洲, 本 貫禮安. 어려서부터 매우 활달했으나 글을 잘 읽지 못하여 부모의 근심을 샀으나, 丁震燮公이 이를 보고 “遠器”라 평하였다. 어느 날 번연히 깨닫고 집에 있는 小學諺解 1권을 들고 강구하여 寢食을 잊을 정도였다. 부친이 이를 보고 族大夫睡山金輝轍에게 보내 학문을 배우도록 하고, 이후 대학, 소학, 주자서절요, 퇴계선생문집 등을 차례로 읽었다. 다시 東亭 李先生에게 가서 성학십도, 고경중마방과 성리학 관련 여러 서적을 탐독하고, 性情의 구별 등을 선생에게 질문하였다. 다시 人心人欲을 논하고, 氣質之性등을 논하였다. 1905년 에 城庵金世榮, 震維金東鎭등과 山海를 둘러보고자 하여 월악산을 거쳐 탄금대, 화양 동, 속리산, 계룡산 등을 보고, 강경, 덕유를 거쳐 茶田에서 郭徵君선생을 뵈었다. 가야 홍류동, 회연서원을 보고 낙동강을 건너 옥산, 포항 등을 두루 살펴 2천 여리의 여정을 마쳤다. 여정 중에 毅堂朴世和, 大溪李承熙, 膠 宇尹承熙, 持庵金在敬등을 만나 논설을 펼 쳤다. 여행을 마친 겨을에 陳月寺에 들어가 논어와 퇴계집을 읽었다. 1907년 정미의병이 일어나 풍기, 영주 등에서 일본군과 격돌하자 이를 피하여 箭溪(현 영주시 이산면 전단마 을)에서 二曲(雲浦九曲중의 하나. 현 영주시 평은면 용혈리)으로 피신하여 閉門하고 독서 에 열중하였고, 1908년 東亭先生이 돌아가시자 동문들과 遺文을 편집하였다. 1916년에 郭 徵君先生에게 글을 올려 氣質性, 心卽理의 고 증에 대해 질문하고, 1919년에 파리長書에서 명하였다. 1943년에 晦峯河謙鎭과 名理에 대 해 강론하였다. 1947년에 西浦(현 영주시 석포면 범계리)를 방문하고, 曦陽山, 白雲臺, 七 愚亭, 仙遊洞, 玉梁瀑布등을 둘러보았고,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東浦(현 영주시 이산면 석포리)로 피신하였다. 이때 이미 몸에 병이 들어 1954년 77세로 타계하였다.
行狀
石欄張公行狀 36
張瑢(1650∼1726), 字次潤, 號石欄, 本貫 仁同. 형으로부터 학문을 배워 아침부터 책을 읽고 저물도록 이를 익혔다. 1674년에 번잡한 동네를 떠나 조용한 산중에 精舍를 짓고 독서하였다. 1692년에 생원시에 응시하였고, 1694년에 유림들이 상소를 올릴 때 疏廳에서 疏頭가 되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병으로 고사하였다. 1711년에 형이 돌아가시자 애통해 하면서 그 언행을 모아 실기를 꾸미고, 1724년에 원근의 여러 벗들과 會賞新巖泉石 錄의 後識를 썼다. 선생은 늘 달빛처럼 정신이 빛났으며, 바닷가의 鶴처럼 풍모가 의젓하였다.
無猶齋全公行狀 38
全宗周(1823∼1880), 字德潤, 號無猶齋, 本貫旌善. 형제들과 친척어른인 龜庵全秀東에게 학문을 배웠다. 공부를 하다 쉴 때에도 雜戱를 좋아하지 않았다. 龜庵公이 參判公(諱濬欽. 全宗周의 父)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보다 총 명한 사람이 없으니, 성품이 근실하고 생각이 많으며 寬厚한 기질을 가졌다”고 칭찬하였다. 6형제들과 늘 학문에 힘을 쏟았고 부모의 執喪에 정성을 다하였다. 평생 음주를 즐기지 아니하였고, 바둑을 두거나 사람들이 술에 취한 장소, 크게 떠드는 자리 등을 피하였다. 늘 자제들에게 자신은 中庸을 가장 많이 읽었는데, 중용의 主旨는 ‘誠’한 글자라 하면서 자 신은 늘 옷에 이 글자를 패용하고 한순간이 라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나 能이 하지 못한 것이 恨이 된다면서 자식들에게 늘 그 마음과 그 業에 근실하라고 가르쳤다.
碧山齋閔公行狀 41
閔鼎鎬(1857∼1936), 字應鉉, 號碧山齋, 本 貫驪興.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강 건너에 사는 외숙에게 학문을 배웠다. 책을 읽을 때면 밤 이 깊은지 알지 못하였고, 山水를 좋아하여 호남과 영남의 명승을 두루 돌아보았다. 1910년에 합방이 되자 聽荷朴勝振과 압록강을 건너 間島로 건너갔지만 蠻夷의 습속을 보고 居하지 못할 곳이라 하고 곧 되돌아 왔다. 오 래지 않아 집안 전부를 거느리고 태백산의 西碧村에 집을 짓고 약간의 밭을 구입하여 농사와 뽕나무 들을 기르면서 그 땅을 碧山齋라 이름하였다. 이곳에서 聽荷朴勝振, 明齋金敬淵, 聽山柳鳳熙, 省齋權相翊등과 終年토록 交好하였다. 이곳에 거처한 지 10년 만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막내아들 閔泳佑의 부탁으로 행장을 지었다.
龍岡權公行狀 44
權柄遠(1862∼1935), 字德兼, 號龍岡, 本 貫醴泉. 草澗權文海의 후손이다. 어릴 때부터 才氣가 보통 사람과 달랐으며, 효성이 매우 뛰어나 天出之性을 지녔다는 칭찬을 받았다. 태어날 당시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학문을 따로 배울 여유가 없었으나 스스로 분발하여 宗兄에게 학문을 배웠다. 매일 낮에 농사를 마치면 학문에 매진하여 1畝의 밭을 갈면 1篇을 글을 이루었다. 經傳, 제자서, 역사서 등을 두루 읽고 性理學관련 서적에 더욱 침잠하여 마음으로 요체를 체득하고 사람들에게 이를 강론하였다. 經山權相大, 龍西金應洛, 聽田金昌洙 등 주변의 명사들이 名理說을 듣기 위해 飮射의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만년에 仙洞에서 虔龍洞으로 이주하여 살면 서 스스로 龍岡이란 號를 사용하였다. 세상의 일에는 일체 시시비비를 논의하지 않고 可否를 말하지 않고 종신토록 爲己之學에만 전념 하였다. 선생 사후 30여년 뒤에 장자 錫晉이 찾아와 행장을 지어 줄 것을 청하자 여러 차 례 사양하다가 행장을 지었다.
處士金公行狀 46
金駿鏞(1864∼1934), 字德彦, 號小巖, 本 貫咸昌. 어려서 문자를 빨리 깨우쳐 다른 아들에 비해 부친이 매우 사랑하였다. 東湖徐在正 (1828∼1898)에게 학문을 배웠다. 1891년 伯 氏와 함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 하고 돌아온 후 학문연마에 온 힘을 기울였 다. 1908년 貞山金東鎭등과 白雲洞講會를 설립하고, 1910년에 洞主되어 文風을 북돋우는데 힘을 썼다. 1934년에 世譜가 완성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다가 스스로 挽詩1수를 짓고 자제들에게 父父子子兄兄弟弟란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아들 華洛이 선생의 遺事를 가지고 와 선생의 實記를 간행하려고 하는데 행장이 작성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지었다.
卷6 墓誌銘 外舅白午金公墓誌銘幷序 50
金昶鎭(1870∼1908), 字永白, 號白午, 本 貫淸道. 1969년에 쓴 장인 金昶鎭의 묘지명이다. 金昶鎭은 기묘명현의 한사람인 缾山金鸞祥의 후손이다. 金昶鎭은 풍채가 뛰어나고 성격이 호탕하여, 먼 곳에서 배움을 청하면 숙식을 허락하고 자제와 같이 대하였다. 동네에서도 어린 아이가 침을 흘리면 반드시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었다. 김승학이 혼인 전에 글을 배울 때는 반드시 세수하고 堂宇를 청소한 후 책을 마주하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가르쳤고, 승학의 부친이 천식에 걸 리자 5∼6개월 동안 매일 아침에 문진하고 해가 져서야 돌아갔다. 계단 앞에 핀 한 그루 꽃을 매우 사랑하여 ‘大明紅’이라 이름하고 아침 저녁으로 돌아보고, 손님이 오면 술상 을 내고 酬唱하였다. 金坦堂, 柳石塘, 崔恒齋, 黃小仙, 金西洲, 金一草등과 交遊하였으며, 手稿여러 책이 있었으나, 전쟁 중에 보존하지 못하였다.
畏齋丁先生墓誌銘幷序 52
丁泰鎭(1876∼1959), 字魯叟, 號畏齋‧西 浦, 本貫羅州. 1959년 정태진이 사망하자 그 문인인 李家 源과 金榥이 묘지명을 부탁하였고, 정태진의 아들 丁海龍등의 부탁을 받고 쓴 묘지명이다. 정태진은 東亮李炳鎬, 俛宇郭鍾錫에게 학문을 배웠다. 동정선생에게 心理諸說을 미처 다 배우기도 전에 선생이 돌아가시자 다 시 면우 곽종석에게 나아가 질의하였다. 林居 鄭昌黙, 寢郞李忠鎬등과 여러 책의 깊은 뜻을 더욱 밝히고 상세히 더하였으며, 晩年에는 禮學에 뜻을 두고 면우 등에게 질의하였다. 약관에 이미 科擧는 폐하고 甲午亂(東學), 乙 未亂(乙未倭變)등을 경험하면서 “선비가 세 상의 바른 길을 행하지 아니하면 선비의 수 치이다”라 하였다. 경술국치에 면우 곽종석이 遼東으로 피신하자 이를 따랐고, 1919년 파리長書에 서명한 것이 발각되어 수개월간 달성감옥소에 구금되었다. 구금에서 풀려나 자 수삼명의 동지들과 다시 요동으로 건너가 땅을 개간하여 농사짓다가 오래지 않아 되돌아 왔다. 세상이 더욱 어지러워지자 수천권 책을 쌓아놓고 문생들과 講討하다 마침내 책을 짊어지고 茅谷으로 되돌아와 문을 걸어 잠그고 독서에 열중하면서, 西洲金思鎭, 小 仙黃炳欽, 誠庵金世榮, 毅庵朴齊濤, 石山 權鍾遠등과 交遊하였다. 1914년, 1915년에는 여러 제자들과 草谷, 鷗湖등에서 모여 서로 권면하기를 수 삼개월하면서 育英의 풍조를 길렀다. 配는 豊山柳氏로 서애선생의 후손이다.
春樊權公墓誌銘幷序 54
權命燮(1885∼1949), 字性厚, 號春樊, 本貫安東. 1958년에 김승학인 쓴 권명섭의 묘지명이다. 권명섭은 冲齋權橃의 후손으로, 어릴 때는 병약했으나 배움을 시작하자 총명하여 빨 리 깨닫고 능히 文句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처음에 族祖花陰公에게 문장을 배우고, 族父省齋公(權相翊)문하에 들어갔다. 그는 학문을 함에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 의 길을 가며, 만인과 교유하고, 만 번의 변화를 살피지 아니하면 원대한 뜻을 이룰 수 없 다하고 경전과 제자서를 침식을 잊고 힘써 연구하였다. 수년을 공부한 후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伽北에서 郭鍾錫을 배알하고, 襄 陽에서 金在敬을 방문하였으며, 晦峯河謙鎭, 深齋曺兢燮, 郎山李垕, 西洲金思鎭, 金在華, 鄭寅普등과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 질문하였다. 1918년에 고종황제가 붕어하시 고 1919년에 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파리에서 만국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파리장서 서명운동을 하다 달성감옥에 투옥되었다. 1927년에 온 가족을 데리고 春陽의 濂水村으 로 이주하였다. 1939년에 대구에서 省齋稿를 간행하고, 경주로 가서 濯溪亭을 방문하고, 玉山書院에 배알하였다. 1945년에 해방이 되자 수 명의 동지들과 학가산 정상에 올랐다. 配는 義城金氏로, 대사간 金翰東의 현손이다.
處士朴公墓誌銘幷序 58
朴齊翼(1806∼1841), 1)字鴻仲, 本貫潘南. 묘지명을 작성한 연대는 미상이다. 박제익은 문정공 朴尙衷의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났으며, 性理學과 諸家의 文章을 두 루 섭렵하였고, 학문을 익히는데 매우 근면하였다. 奉先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사람을 禮 로 대하였고, 거처에 근검하였다. 配安東權 氏로 思復齋權定의 후예이다.
小愚姜公墓誌銘幷序 60
姜璧元(1859∼1941), 字允和, 號小愚‧斗 皐山人‧蘆亭, 本貫晉州. 西洲金思鎭이 묘지명을 쓰기로 했으나, 서주가 병이 들자 김승학의 제자 金子敬과 강병원의 둘째 아들 姜周熙의 청으로 묘지명을 쓰게 되었다. 강벽원은 어릴적부터 성격이 매우 호방하여 꺼리는게 없었고, 성인이 되어 같은 동리에 살았던 睡山金輝轍의 문하에 들어갔다. 經史에 두루 통하였으며, 옛 書法 을 배워 顔魯公(즉 顔眞卿)과 米襄陽(즉 米芾)의 眞蹟을 터득하였다. 科場에 갔으나 과거를 포가하고 되돌아와 표주박 한 개와 벼루만 들고 소백, 태백산을 거쳐 강화도, 임진, 지평, 평양을 둘러보고, 청천강에서 배를 타 1)묘지명에는 박제익의 출생연도를 純祖庚寅 (1830년)이라 하였으나, 配安東權氏의 출생연 도가 甲子年(1804년)임을 미루어 볼 때, 이는 순조 丙寅(1806년)의 誤記라 생각된다. 고 永朗寺를 거쳐 다시 한양에 돌아오는 길 에 李元戎의 집에 머물면서 時務에 대해 담론하였다. 계속 머물러 주기를 청하였으나 거절하고, 되돌아와 거처하는 山齋에 ‘晩學’이 라는 편액을 달고, 왼쪽에는 ‘海鶴送老’오른 쪽에는 ‘琴書消憂’라 題額하고 자제들을 교육시켰다. 을사늑약과 경술합방의 소식을 듣자 자제들에게 독서를 폐하고 농사를 지어라 명하면서 이것이 ‘時義’라 하였다. 돌아가시기 1개월 전에 둘째 道熙에게 “處士는 德望者를 칭하는 것이니, 내가 죽은 후 반드시 평소의 호칭을 사용하라”하였다. 사후 아들들이 그 명을 받들어 銘旌에 ‘斗皐山人’이라고 썼다. 빈객을 대할 때 貴人이라해도 그 禮를 더하 지 않았으며, 옷이 남루하고 더러워도 난색을 표하는 일이 없었다. 저서로는 蘆亭筆訣, 五友畵集, 小愚稿등이 있다. 配慶州李始榮의 女.
白下安公墓誌銘幷序 62
安秀學(1843∼1905), 字國彦, 號白下, 本 貫竹山. 5세에 천자문을 익혔다. 아버지가 산불이 난 것을 보고 시를 지어라 하자 즉시 “지금 燧人氏도 없는데, 저 산불은 어디서 왔는가” 라고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柳下姜泰重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웠고, 다시 小宰洪鍾大의 문하에 들어갔다. 틈날 때마다 직접 주자서와 東儒들이 남긴 말씀들은 손으 로 직접 베껴 늘 책상 위에 두고 이를 읽었다. 벗을 삼을 때는 黨을 가리지 않고 오직 그 德만 보고 사귀었으니, 寢郞洪淳奭, 尙書洪淳 響, 宗正李冕宙, 知府李敬英등과 같은 사람 들이다. 집안이 매우 淸寒하였으나 한 터럭이라도 不義로 재물을 취하지 않았다. 일찍이 八當十勿의 조목을 써서 늘 눈에 보이는 곳에 붙혀 두었으니, 八當은 持心當敬, 修己當 勤, 處世當和, 臨事當忍, 父母當孝, 兄弟當友, 夫婦當別, 子孫當敎이며, 十勿은 勿怠稼穡, 勿廢學問, 勿妄言語, 勿閑出入, 勿好是非, 勿 挾驕矜, 勿謟富貴, 勿侮貧賤, 勿淫酒色등이 다. 配義城金時行의 女.
陶庵丁公墓誌銘幷序 64
丁敦燮(1870∼1941), 字伯崇, 號陶庵, 本貫羅州. 합방이 되자 요동으로 망명하여 길림성 永吉縣山隈子에서 사망한 정돈섭이 묘지명이다. 아들 奎應에게 묘지명을 요청받자 나라를 떠나 망명하여 시신이 본국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은 志士之知恥라 칭송하였다. 어릴 때 부친의 명으로 東亮李炳鎬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고, 이병호와 곽종석이 春陽의 筬山에 은거하자 다시 곽종석에게 배움을 청하였다. 이에 곽종석은 “이는 같은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라”하고 字辭를 지어 주었으며, 太極圖說을 강해하며 일일이 그 뜻을 알려 주었다. 1889년에 이병호와 愼窩洪洛鍾, 鶴山姜鑌과 함께 태백산에 오르고 동해안을 기행하였고, 이병호를 따라 石庵에 들어가 心經과 近思錄 등을 읽었다. 1910년 합방이 되자 곽종석에게 편지를 보내 요동으로 떠난다는 것을 알렸고, 1914년에 星山으로 되돌아 왔다. 1915년에 다시 上舍李光龍과 奉天의 德興堡로 옮겨 이미 이곳에 와 있던 大溪李承熙와 조우하였다. 그해 가을 西川趙貞奎와 泰山, 曲阜등을 둘러보았다. 1917년에 다시 본국으로 돌아오고 1938년에 다시 요동으로 건너가려 하니 주위에서 연로하였음을 이유로 요동행을 말리자 “깨끗한 몸을 깨끗한 땅에 묻는 것이 옳 다”하고, 요동으로 건너가 시를 읊고 自適하다 병을 얻어 요동에서 사망하였다. 늘 말씀 하기를 “학문의 길은 근본을 밝히고 실천하는 것 뿐”이라 강조하였다.
醉軒趙公墓誌銘幷序 67
趙某(1805∼1854), 號醉軒, 本貫漢陽. 취헌의2)현손 普永등이 제공한 취헌의 遺文과 家傳을 바탕으로 김승학이 지은 취헌공의 묘지명이다. 13∼4세에 이미 長文을 지었다. 從族丈趙龍來의 문하에 들어가 明經業을 익혔다. 1836년에 4서 3경을 직접 손으로 적어 산사의 승방에서 주야로 읽고 암송하였으 2)묘지명에 생몰연대는 표시되어 있으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며, 1850년에 會試에 급제하고 다시 殿講에 응했으나 罷報되었다. 이에 돌아와 문을 걸어 잠그고 부모를 모시면서 經史를 공부하고, 사는 곳의 지척에 있는 梅巖에 올라 嘯詠하며 지내면서, 살던 집을 梅巖幽居라 이름하였다. 또 醉軒이란 편액을 趙亨復에게 받았다. 평소 에 말이 없었고 틈이 나면 山澤을 거닐었으며 宗祀를 잘 지켰다. 1854년에 병이 들었으나 경전을 외우는데 한 글자도 틀림이 없었다.
處士張公墓誌銘幷序 69
張奎晦(1870∼1935), 字顯五, 本貫仁同. 성품이 민첩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효심이 깊었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였으나 부모를 섬기는데 수고를 다 하였다. 건물 한 채를 지어 管心齋라 이름하고, 鶴巖張華植, 草庵朴公의 기문을 받았다. 늘 근면하였으며 書史를 즐겼다.
墓碣銘 菊軒權公墓碣銘幷序 70
權思溥(1735∼1807), 字如天, 號菊軒, 本 貫安東. 冲齋權橃의 후손이다. 자질이 매우 영명하였으며 소싯적부터 과거에 뜻을 두었으나 나이가 들면서 어려워져 가족들과 함께 西碧里로 이주하였다. 朱退書를 좋아하였고, 집의 편액을 菊軒이라 하고, 늘 心性을 다스리고 後進을 훈도하는 데 힘썼다.
華峯李公墓碣銘幷序 72
李迪裕(1796∼1870), 字文吉, 號華峯, 本貫宣城. 族叔尤園李禎國에게 학문을 배워 10여세가 되자 이미 經義를 깨달았다. 1816년에 中庸 을 立齋鄭宗魯에게 묻고, 舊堂趙沐洙의 칭 송을 받았다. 만년에는 주역을 공부하여 卦의 해석에 깊이를 드러냈다. 당시의 儒論을 보면 鶴棲柳台佐는 “우리 고장이 이 사람에게 기 대하는 것이 매우 重하다”하였고, 定齋柳致 明은 “이적유의 篤行에 내가 일찍이 탄복하였다”하였다. 또 당시 안동부사 金應均이 직접 찾아와 鄒經과 太極圖說疑義를 묻고 매우 칭송하였다.
黙齋權公墓碣銘幷序73
權運大(1683∼), 字休仲, 號黙齋, 本貫 安東. 龍巒權紀의 후손이다. 과거에 응시했으나 급제하지 못하고, 密庵李栽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는데 주력하였다. 영조 때 戊申亂이 일어나자 逋軒權德秀와 함께 안동 서쪽의 松夜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松堤로 옮겨 거처 하는곳에黙齋란 편액을 걸고 살았다.
成均進士贈通政大夫吏曹參議挽溪 庵金公墓碣銘幷序 75
金鎛(1621∼1709), 字聲彦, 號挽溪庵, 本貫宣城. 저자 김승학의 從先祖인 栢巖金玏의 손자이다. 1648년에 진사가 되었다. 眉叟許穆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詩名과 筆法으로 일찍부터 이름이 높았다. 여러 차례 관직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壽職으로 부호 군에 제수되었다가, 曾孫金鳳儀의 현달로 通政大夫吏曹參議로 증직되었다.
通政大夫敦寧府都正琴湖金公墓碣銘幷序 76
金樂淵(1792∼1872), 字士能, 號琴湖, 本貫宣城. 14∼5세에 이미 詞賦를 지었다. 1825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宗簿寺主簿를 지냈고, 이 후 훈련원을 거쳐 사헌부 持平, 掌令을 역임 하였으며, 외임으로 黃山道察訪을 지냈으며, 당상관에 올라 敦寧府都正이 되었다.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松竹齋朴公墓碣銘幷序 78
朴齊衡(1808∼1889, 字仲璇, 號松竹齋, 本 貫潘南)의 묘갈명이다. 從祖棄翁에게 受學하고, 여러 번 科擧에서 실패하자 山林에 隱居하였다. 학생을 가르침에 지극한 정성으로 가르쳐 師表로 추앙받았다. 이에 本郡에 守令으로 오면 반드시 敬禮를 드렸다. 平時에는 冊床을 떠나지 아니하고 큰 病이 아니면 讀書를 중단하지 않았다. 續千字文을 지었는데 周興嗣의 천자문 중의 한 글자도 犯하지 않았다.
處士芝南李公孺人宣城金氏合葬墓 碣銘幷序(1905) 79
1904년 李鳳淵(1868∼1904, 字學韶, 號芝 南, 本貫永川)과 配宣城金氏를 안동의 臥龍 山아래로 옮겨 合葬하고, 이듬해 세운 묘갈 명이다. 이봉연은 족부인 李世鋼에게 小學한 권을 받고 그대로 실천하여 사람들로부터 “옛날에 소학동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 보니 바로 너”라는 칭송을 받았다. 효성이 지극하였다.
醒巖柳公墓碣銘幷序 82 柳東翼(1884∼1960. 字鵬一, 號醒巖, 本貫 全州)의 묘갈명이다. 글을 배우지 않았는데, 이미 그 뜻을 이해했다. 鄭源達이 큰 그릇이 라 하고 사위로 삼았다. 장성하자 遠遊를 즐기면서 域內의 勝所를 다니면서 酬唱하여 당대의 名流가 되었다. 1911년 큰 홍수로 瓢溪 로 이주했으니, 곧 慵蘆의 舊坊이다. 이곳에서 여러 선비들과 아침저녁으로 講磨하였고, 1918년에 와룡산 아래로 들어와 避世하였다.
南岡金公墓碣銘幷序 84
金鈺(1843∼1916. 字成玉, 號南岡, 本貫 延安)의 묘갈명이다. 성품이 매우 단정하고 온아하면서도 강직하였다. 배움에 싫증을 내지 않았고, 장성해서는 주역을 좋아하였으며, 曆算, 地志등에도 정통하여 사람들이 어려운 것을 물어도 금방 해결했다. 南陽山아래 韶巖이란 곳에 세세토록 살면서 巖居權敦淵, 竹坡朴鎬相등과 교유하였으며, 서로 오가며 酬唱하였다.
愚堂宋公墓碣銘幷序 86
宋世鎬(1875∼1945. 字兩斌, 號愚堂, 本貫 礪山)의 묘갈명이다. 朋齋金敬淵의 문인으로 窮理實踐의 요체를 묻고, 宋冑煥, 全在洙, 金益秀, 李起淵 등과 講討하였다. 小學과 四 子書, 八家文, 선조들의 遺文, 國故등 수백 권을 직접 손으로 필사하였다. 방안에는 퇴계 선생의 성학심도, 각종 箴規와 직접 지은 五箴을 걸어두고 儒風을 일으키려 노력하였다.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鄭公墓碣銘幷序 87
鄭應三(1827∼1907, 字致光, 號雲樵, 本貫 奉化)의 묘갈명이다. 효성이 매우 지극하여 공의 효성은 하늘이 내린 것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1878년에 부친이 奇疾에 걸리자 한 겨울에 청개구리를 잡아 약으로 사용하여 아버지의 병환을 구해 내었다. 사람들이 이를 알고 관아에 알려, 관아에서 포상하려고 하자 “아들이 부모를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면서 이를 사양하였다. 사림들이 嶺南文獻錄의 孝行編p공의 이름을 수록하였다.
黃烈婦全公墓碣銘幷序 89
1841년에 사망한 영주의 士人黃壽範(本貫 昌原)과 같은 날 따라 죽은 부인 沃川全氏의 합장묘에 130년 뒤에 세운 묘갈명이다. 황수범이 질병으로 목숨이 경각에 달렸으나 온갖 방법으로도 살려내지 못하였다. 부인이 입은 옷을 벗어 시신을 감싸고 옆에서 기절했다가 함께 사망하자, 사람들이 열부라 크게 칭송하 였다.
孺人安東權氏墓碣銘幷序 90
孺人權氏(1861∼1896)는 宣城金會奎와 혼인하였는데, 김회규는 몸이 매우 허약하여 孺人이 늘 걱정하였다. 1896년 남편이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자 함께 따라갈 것을 결심하고 조용히 상을 마쳤다. 남편이 죽은 지 6일 만에 대문을 나서 물이 구비치는 강 하류의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 몸을 던져 남편을 따라 절명하였다.
附錄 行略 91
손자 金壽榮이 쓴 김승학의 행략이다. 자 세한 내용은 글 앞의 저자 소개에 나와 있다.
行狀 97
柳東銖가 쓴 김승학의 행장으로, 내용은 행략과 거의 같다.
墓碣銘幷序(1972) 100
李家源이 쓴 김승학의 묘갈명이다. 글 앞의 저자 소개와 거의 같다.
墓誌銘幷序(1973) 102
李裕和가 쓴 김승학의 묘지명이다. 내용은 행략 등과 거의 같다.
跋(1972) 104
김승학의 族弟金濟殷이 쓴 수촌집의 발문으로, 수촌집의 발간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박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