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산유고(石山遺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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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사업]한국학 기초자료사업
영남학파의 사유세계와 역사인식 -영남학파 문집 상세 해제 및 주요저작 번역- (2단계)
서지사항
분야문학
유형문헌
시대조선
출전영남학파의 사유세계와 역사인식-영남학파문집 상세 해제 및 주요 저작
문서종류문집 해제

본문

卷1
賦 1
杜門洞賦.
辭 2
次歸去來辭(幷序,1935)

聞兒子讀書, 與崔丈(炳寅)或有論說或有不 合往往出於相激至有不屑之敎惶恐慚怍亟以 詩謝焉, 種芹, 登高, 山松, 坐雨, 輓金亨一, 次 丁子晦(奎昌)人字韻二絶以自警, 贈丁魯叟 (泰鎭), 贈黃景度헌(土+憲), 霽月, 野行, 述 懷, 春訪黃晦老(炳欽)次草堂尋崔李韻, 輓李 舜佐(中燮)二首, 輓李應漢(中濯)二首, 輓孫 叔靜(晉濂), 閒中看唐人詩隨韻隨次以遣愁悶, 居昌道中二韻呈俛宇先生, 懷權德受(器淵)子 愼(頊淵), 寄金謹夫(思鎭), 冬寒, 冬旱歎, 盆 梅臈初不成蓓蕾戱作答問二絶, 輓黃聲遠(鍾 樂), 輓金丈(商濬), 輓西坡柳丈(必永), 輓權 丈(稷夏), 輓俛宇先生, 輓權丈(經夏), 輓朴丈 (叔觀), 輓朴致芳(尋洙)八絶, 輓金丈(啓羲), 輓族弟雲汝, 輓李丈(兢淵), 輓柳建叟(壽極), 輓金順窩(冑植), 輓金剩軒(紹洛), 輓權丈(相 大), 輓李敬緝(聖熙), 輓朴參奉(齊順), 輓持 菴金丈(在敬), 輓丁參奉(厚燮), 玉梅盛開, 野 行, 輞川圖歌壽內舅金公(翰洛)生朝, 輓石矼 金丈(㙽), 輓丁安峽丈(大稙), 輓金丈(濟相) 三絶, 哭從姪士安(明欽), 輓郭大淵(奫), 輓崔 姊兄(炳憲)二首, 輓晴山權丈(相翊), 輓丁相 武(鎬燮)四絶, 輓李鵬卿(源國)晬日韻二首, 輓龍西金丈(應洛), 冬杪訪謹夫調榻苦要止宿 余因私故遽掃其後寄短律示意却次以謝, 余案 蓄梅一蘭一而不能辦盆具以破缸綴繩以盛之 偪仄於什物之叢甚非所以待淸者之道固哉其 疎拙不解事也戱作謝詩贈答二絶以見意, 李侍 從亨伯分惠盆梅一根次益齋韻以謝之七絶, 臘 末盆梅始開五六蘂疎瘦可念次東坡韻呈同志 求和, 愁悶中讀益齋集仍次古詩一篇, 次孟浩 然除夕韻, 李道卿(誌鎬)惠我垂楊梅一本感其 意次東坡梅花詩韻(幷序), 輓東田李丈(中均), 石山梅贈西浦梅, 偶閱愚伏集敬次盆梅韻四絶, 輓金道源(灝鎭), 次晦老壬申除夕韻, 金剛山 謌哭金瀚于(秉宗), 輓恒齋崔丈(炳寅), 輓丁 仲昭(奎翊), 金士顯(世榮)自剛州歷叩作數餉 話別悵然有作, 訪權聖吉(喆淵), 己巳四月二 十日與李大運(中瀚)丁伯崇(敦燮)黃晦老金 謹夫金士顯約四郡之行會于白洞之正菴, 午憩 水鐵橋, 登竹嶺, 唐谷店, 入槐坪, 舍人巖, 中仙 巖, 下仙巖, 過二樂樓遺墟伏次退陶先生韻, 龜 潭精舍, 玉筍峰, 宿赤城李擇汝(誠求)寓庄, 到 堤川黃達欽金重杰沽酒敍歡, 龍瀑, 茅山訪張 誠遠, 登映湖亭, 向寧越, 雲莊壁, 拜鵑亭次板 上韻, 子規樓伏次御製韻, 錦江亭次板上韻, 落 花巖, 宿朴友周陽家, 謁彰節社登拜鵑樓次板 上韻, 淸冷浦, 莊陵懷古, 普德寺, 宿正陽有感, 泛舟南江, 登毗로(田+盧)絶頂, 望島潭(用前 韻), 靈田寺, 太白紀行, 癸酉元朝, 立春(二 首), 詩課廢之久矣春日無聊更次草堂韻以叩 應載(厚昌)詞案, 冬至寄應載, 應載步示痴字 韻仍賦短律謝意, 用前韻賦懷, 暮春病起登山 賦懷寄應載求和, 謹夫年五十八始有雙子之慶 因搆古軆二十韻以賀, 丙子立春敬次退翁韻二絶.

卷2

上俛宇先生(1901) 1
俛宇郭鍾錫(1846~1919)에게 올린 편지이다. 崔仁卿을 따르며 선인들의 위기지사를 듣게 되면서 엄한 스승과 잠언을 해주는 벗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 기질을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드러내 말하였다. 그리고 ‘천고를 거슬러 올라가 벗을 한다[尙友千古]’는 말까지 있는데, 지금 면우 선생과 자신은 동시대에 살면서 거리도 멀지 않으니, 문하에 들어가 배우고 싶다는 내용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지금 목에 병이 나서 책을 소리 내어 읽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答俛宇先生 2
면우 곽종석에게 답한 편지이다. 당시 시국에 대한 생각을 전개하고 있다. 당시 시대는 과거 춘추전국과 같이 혼란한데, 신학문까지 등장하고 있다. 이에 공은 육경을 근본으로 하여 완급의 차례를 정하고 떳떳한 도리 [彛常]로 利用厚生의 계책을 이뤄야 한다고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또한 당시 사람들이 이익만을 쫓으며 義를 등져서 인성이 무너지고 있는 것에 깊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는 내용이다.
上俛宇先生(1909) 4
곽종석에게 올린 편지이다. 세상이 쇠퇴하고 가르침이 잘못되어가고 있는 상황을 개탄하며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 그 올바른 마음을 회복하여 지켜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자신은 열흘 추위 속에 하루 볕 쬐는 환경에 있어서 실행하기가 쉽지 않으니, 부디 선생님 곁에서 교화를 받고 싶다는 뜻을 적고 있다.
上俛宇先生(1909) 6
곽종석에게 올린 편지이다. 해가 지날수록 자립심이 결핍되어 가는데, 곁에서 본받을 만한 잠언을 해주는 이가 없다고 하면서 나무하고 꼴 베는 아이의 하찮은 말이라도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얘기를 해주길 바란다 는 내용이다.
答俛宇先生 7
곽종석에게 답한 편지이다. 보내준 편지를 받고 열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는데, 글자마다 걱정과 사랑이 넘쳐나서 더없이 감격하였다고 답을 하고, 자신의 현재 건강과 학업에 대해서 말하였다. 특히 중용을 일 년 넘게 읽고 있어서 중용에서 말하는 性情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上東亭先生(1901) 11
東亭李炳鎬(1851~1908)에게 올린 편지이다. 상대의 안부를 물은 뒤 자신은 지금 목에 병이 나서 침과 약 등의 여러 방법을 시도해 보았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여 소리를 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최근 우연히 퇴계의 글에서 ‘存養專以靜言涵養兼動靜’을 보고 存養에 대해 생각한 것을 적고 있다.
與金丈(弘植, 1903) 11
김홍식에게 준 편지이다. 어려서는 다행히 집안의 비근한 곳에 나아가 힘쓸 수 있었는데, 지금은 성인이 공부할 곳에 나아가니 수 개월이 지나도 쉽게 체득되지 않는다며 그 고민을 말하고 있다.
與金丈(應洛, 1914) 12
김응락에게 준 편지이다. 道理는 公物이고, 文章은 公器라서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운 뜻을 용납할 수 없다고 하면서 문집간행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上水西書堂僉座(1903) 14
수서서당의 僉座에게 올린 편지이다. 서당에서 講規를 정하고 교육과정을 엄격히 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당은 궁극적으로 배우는 자들에게 어두운 거리의 나침반이 되어야 한다고 경계한 내용이다.
答崔恒齋(炳寅, 1909) 15
최병인에게 답한 편지이다. 어린아이에게 가르침을 세우려 할 적에는 위엄과 사랑을 함께 사용하여야 하고, 제 스스로 반성하고 깨닫게 하는데 묘책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與丁子晦(奎昌, 1905) 16
정규창에게 준 편지이다. 상대의 안부를 묻고 자신의 정황을 애기한 뒤에 묘비를 다시 세우는 행사에는 寒疾로 인해 참여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答韓鼎吉(禹鉉, 1905) 16
한우현에게 답한 편지이다. 오늘날의 유학 자들의 학문은 현실에 힘쓰는 것임을 새삼 강조하면서 학문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말하고 있다.
答韓鼎吉(1906) 18
한우현에게 답한 편지이다. 세상사 여러 가지가 경악스러워 오래도록 병이 난 사람같이 거의 죽음을 드리우고 있다고 하면서, 이 때 기이한 묘책이 있어서 구제를 하면 좋으련만 쉬운 일이 아니라서 근심스러워하는 내용이다.
與權聖吉(喆淵, 1919) 18
권철연에게 준 편지이다. 이치상 물건이 없으면 이룰 수도 없으니, 내년의 계획을 위해서 올 가을에 들판에 나가 힘써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내년의 계획은 요동에 가려는 계획이라고 말하고 있다.
答金謹夫(思鎭, 1901) 19
김사진에게 답한 편지이다. 四端七情에 대해 논의하면서 사단은 칠정에서 나왔고, 칠정은 氣質의 性에서 나왔는데, 성인도 이러한 性을 지니고 있다고 하면서 특히 기질의 氣에 대해 말하고 있다.
與金謹夫(1934) 21
김사진에게 준 편지이다. 상대의 안부를 묻고 난 뒤, 자신의 일상사에 대해 간단히 말 하고 있다. 지금 읽는 책은 깊은 뜻을 모르며 읽고 있으며, 몇 일 동안 丹山[丹陽]에 간다는 말을 하고 있다.
答金謹夫(1936) 22
김사진에게 답한 편지이다. 차운시를 지을 적에는 원시 선택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경계한 내용이다.
與孫伯淵(晉洙) 23
손진수에게 준 편지이다. 상례를 마치고 좌절에서 벗어나 평소의 일에 힘쓰는 것은 돌아가신 분을 위로하는 일이라고 하였고, 실제로 현실을 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答李德純(漢杰, 1906) 24
이한걸에게 답한 편지이다. 전일하게 공부하여 학문이 마음을 떠나지 않게 해야 하니, 원대한 학문은 오로지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答權德受(器淵, 1916) 25
권기연에게 답한 편지이다. 인간세상의 지극한 즐거움은 현실에서 멀리 있는 것이 아 니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있다고 하면서 자족하는 삶을 말하고 있다.
與權德受(1917) 25
권기연에게 준 편지이다. 마음의 본령은 마음 안팎의 분수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與權德受(1918) 26
권기연에게 준 편지이다. 산 속에 살면서 투병 생활하는 자신과 가족의 얘기를 하며 이 역시 하늘의 운수가 아니냐며 겸허히 받아들이고, 상대에게 안부를 묻고 있다.
與權德受子愼(頊淵, 1934) 26
권욱연에게 준 편지이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변하여 인정이 습속에 물들어 사대부도 이따금씩 천박한 물건에 끌려가는데, 다시 회복될 기미가 있을 것이니 이러한 시대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유학자의 본분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與金國源(澮鎭, 1920) 28
김회진에게 준 편지이다. 재주가 부족한 것을 근심하지 말고 마음이 다른 곳으로 벗어나는 것을 근심해야 된다고 하며 본령을 강조하였다.
與朴致芳(尋洙) 28
이심수에게 준 편지이다. 자신의 현재 고충에 대해 간략히 얘기하며 상대의 안부를 묻고 있다.
答金運中(斗煥) 29
김두환에게 답한 편지이다. 독서하며 이치 를 밝히는 일은 우리들이 끝까지 연구해야 할 일들인데, 독서하지 않으면 유학이 이득만 생각하는 학문으로 변하게 되는 것을 경계한 내용이다.
答金士顯(世榮, 1932) 30
김세영에게 답한 편지이다. 상례에서 예를 다하는 것은 자식의 도리이지만, 질병이 이르 게 해서는 안 되니 자중하라는 내용이다.
與權性厚(命燮, 1917) 30
권명섭에게 준 편지이다. 거친 땅을 조금 얻어서 밭 갈고 나무하며 틈나면 고인의 서적을 읽으며 세상사를 잊고 진리를 보전하는 것은 인생의 낙이라고 말하고 있다.
與權性厚(1933) 31
권명섭에게 준 편지이다. 시대가 바뀌어 과거에 배우고 익힌 것이 쓸모없게 되었다고 체념하면서 깊은 골짝의 이름난 산수를 찾아서 살길 바란다고 말한 내용이다.
與金仁可(東煥, 1904) 33
김동환에게 준 편지이다. 안으로는 가정, 밖으로는 마음에 師友의 유익함이 있도록 해야 한다고 경계한 내용이다.
答安箕五(在極) 33
안재극에게 답한 편지이다. 지금의 유학이 유명무실해진지 오래된 것을 말하고, 실제 필요한 일에 힘써야 됨을 말하고 있다.
與權子愼(頊淵, 1916) 34
권욱연에게 준 편지이다. 소학을 읽으면 그 도리를 기뻐하며 실제로 그러한 일들을 실천해야 된다고 말하였다.
答權子愼(1916) 35
권욱연에게 답한 편지이다. 艮齋田愚(1841~ 1922)의 ‘心卽理’세 글자를 되새기며 독서를 넓게 하지 않으면 이치가 미숙하니, 넓게 읽어서 고명해지도록 노력해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答權子愼(1917) 37
권욱연에게 답한 편지이다. 權命燮과 함께 안부를 물은 뒤, 봄기운이 만연한 산수를 유람하러 가는 것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答權子愼(1919) 37
권욱연에게 답한 편지이다. 仁은 세상 생물들이 가진 마음으로 우리들의 性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구하면 天道의 유행을 마음속에 증험할 수 있다고 말 하며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與權子愼(1923) 38
권욱연에게 준 편지이다. 울타리의 국화가 막 필 무렵 상대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간절해진다는 마음을 나타내며, 인생에서 형통함이 빠르고 느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與權子愼(1924) 39
권욱연에게 준 편지이다. 學에 대한 저자의 진지한 생각이 드러난다. 學은 實理를 밝히고 實心을 실천하는 것으로 하늘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 名利와 사사로 움을 쫓는 태만한 것은 하늘을 속이고 기만 하는 죄라며 경계한 내용이다.
答權子愼(1929) 41
권욱연에게 답한 편지이다. 저자가 살던 시대는 중국의 전국시대와 같은데, 지금은 孔孟처럼 세상을 구제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탄식하고 있다. 상대방에게는 학문을 넓 히고 이치를 밝히는데 더욱 힘쓰길 바라고 있다.
卷3 書 答朴學明(勝復, 1904) 1
박승복에게 답한 편지이다. 상대방은 자질이 후덕하고 뜻이 돈독한데도 근심이 있는데, 하물며 자신은 일생을 근심 속에서 보냈다고 말하고 있다.
答李敬哉(學基, 1936) 2
이학기에게 답한 편지이다. 유람을 가는 길에 仙鄕과 편지의 상대방, 그리고 객지에 있는 장경일을 방문하겠다는 내용이다.
答金子敬(承學, 1920) 3
김승학에게 답한 편지이다. 상대방에게 평상시 계획에 대해 말하면서 나이가 들어 사 우들을 쫓으며 살고, 인생의 사업이 文藝와 名聞의 말단에 있지도 않고, 하류 풍속도 미워한다고 말하고 있다.
與郭可浩(澶) 5
곽전에게 준 편지이다. 예를 실행하는 것에 대해 자신과 상대방의 경우를 들었다. 자신은 늙고 병들어 예를 다하지 못했는데, 그것이 스스로 바라거나 편안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상대방에게는 예를 강건히 실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上從兄(聲駿) 6
종형인 권성준에게 올린 편지이다. 한 집안의 경사는 옛사람의 언어를 탐구하여 몸을 다스리고 덕을 기르는데 있지, 부귀공명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지금이 바로 가문의 경사가 큰 시기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與族兄(裕遠) 7
족형인 권유원에게 준 편지이다. 퇴계문집을 간행할 적에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이 휴가를 내어 함께 참여한 사실을 말하면서 지금 종가의 양대 어른 문집간행은 우리 집안이 10대 동안 바라던 일이니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答族侄禹玄(錫龜, 1907) 9
족질인 권석귀에게 답한 편지이다. 산에서 나무하고 들에서 김매면서 자제들을 가르치고 독서하는 자신의 처지를 말하면서 일을 따르면 기운이 고요하고, 마음이 안정되면 궁달이나 빈부가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였다.
與從侄士安(明欽, 1901) 10
종질인 권명흠에게 준 편지이다. 천하에는 어느 한 곳이라도 이치가 없는 곳이 없고, 잠시라도 공부할 수 없는 시간이 없다고 하면서 종질에게 경계한 내용이다. 특히 학문은 ‘敬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義로써 밖을 바르게 해야 한다[敬以直內義以方外]’고 강조하였다.
與族侄士綬(錫虎, 1924) 11
족질인 권석호에게 준 편지이다. 얼마 전에 주역의 剝卦(艮上坤下)上九爻를 얻었는데, 이 효사는 급선무가 아랫사람들을 검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조카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몸을 자중하라’고 경계한 내용이다.
寄瀞兒 12 장남인 권정흠에게 붙인 편지이다. 여행하면서 집안 걱정으로 집에 있는 장남에게 농사가 큰비와 거센 바람에 손해를 입지 않도록 경계하라는 내용을 적고 있다.
寄瀞兒 13 장남인 권정흠에게 붙인 편지이다. 아들과 떨어진지 6일 만에 아들의 생활이 궁금하여 보낸 것이다. 특히 음식과 술을 경계하여 병이 나지 않도록 하라는 내용이다.
寄澓兒13
셋째인 권복흠에게 붙인 편지이다. 저자는 몸이 불편하고 쇠약하여 일간에 생식이 좋다는 얘기를 듣고 실행하려고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그런데 셋째 아이가 절에서 생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운 마음에 글을 쓴다고 하였다.
寄澓兒14
셋째인 권복흠에게 붙인 편지이다. 떨어져 있는 아들의 병에 대해 걱정하며 현재 집안의 사정을 말해주고 있다.
後識
書箴銘贈族弟漢遠後識 15
경계의 글을 써서 족제인 권한원에게 준 글이다. 학문을 하는 방법은 마음을 다스리고 이치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고 작은 기예에 마음을 쓰면서 실무를 태만히 해서는 안된다고 경계한 내용이다.

四躁箴 16 본원을 함양하기 위해서 心‧言‧身‧事에 대해 각각 경계하는 내용이다.
怠箴 17
하루의 경영이 게으르면 아무것도 이루는 것이 없고, 일 년의 농사가 게으르면 아무런 공이 없다면서 게으름에 대해 경계한 내용이다.

盆梅贊 17
매화는 눈보라 속에서 유독 빼어난데, 방에 두고 있으면서 그 매화의 본성을 찬미한 것이다.
盆蘭贊 18
난을 아들에 비유하며 찬미한 내용이다. 난은 우리나라 고유의 식물이 아니며 난의 향기는 멀리 퍼진다고 하면서 엄동설한을 겪고 나서 봄이 되면 스스로 피어나는 모습을 기뻐하고 있다.
祭文
祭俛宇先生文(1919) 18
俛宇郭鍾錫(1846~1919)을 추모하는 글 이다. 선생께서는 평소 널리 배워서 요약하고, 전일하게 실행하시어 한 시대의 시초와 거북점같이 믿음을 주었고, 유림에서는 기준이 되는 북두성 같은 분이셨다. 게다가 절의 와 도학의 근본을 펼쳐나가시어 살아계실 적 에는 유학자들이 의지할 곳으로 여겼는데, 이제는 의지할 곳이 없다며 애통해하고 있다.
又(緬禮時, 1924) 19
곽종석의 묘소를 이장할 적에 지은 추모의 글이다. 천고를 지나는 동안에 지금처럼 혼란한 시기가 없었는데, 선생이 계셨기에 그나마 세상이 멸망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선생의 덕을 말하며 이제는 옥황상제와 옛 성현들 곁에 있을 것으로 여기며 추모하고 있다.
祭東亭先生文 21
東亭李炳鎬(1851~1908)를 추모하는 글 이다. 동정선생은 퇴계의 후손이다. 선생의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학문은 천명의 성인을 연원으로 하는 전일한 이치를 말하는 것으로 性을 논하고 氣를 논하더라도 결국에는 ‘心卽理’세 글자에 귀결된다고 하면서 퇴계부터 내려오는 집안의 가풍을 추억하며 선생을 추모하고 있다.
又(大祥時, 1910) 22
이병호의 대상 때 지은 추모의 글이다. 선생의 자질은 드넓고 굳세며 강대했고, 학문은 독실하며 연원이 똑발랐다. 그래서 이치가 통하여 밝고 넓었다며 추억하면서 그 크기가 천지일월과 같고, 섬세하기는 곤충초목과 같으며, 그윽이 귀신같고, 떳떳한 인륜과 예절처럼 드러난다고 하였다. 특히 후덕한 자질에 올바른 학문은 우뚝이 향리에서 주춧돌 역할을 했다고 하면서 선생이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라고 추모하였다.
祭愚軒先生文(1902) 24
우헌 선생을 추모하는 글이다. 성현의 글 을 읽고 본원을 궁구하여 독실한 학문과 꼼 꼼한 공부는 안팎으로 교차하며 성장하여 ‘敬’이라 하고, ‘誠’이라 하며 진리에 모이게 했다며 선생에게 입은 학문을 올바로 바라보는 안목이 크다며 추모하고 있다.
祭丁丈(春燮)文(1909) 24
정춘섭을 추모하는 글이다. 공은 사려가 매우 깊고 몸가짐은 두려운 듯 삼가 성실하게 근본을 쫓으며 부지런히 공부하는 것으로 자식 가르치는 방법을 삼았다. 집안에서 검소하고 일을 할 적에는 남을 먼저 생각하며, 자 신의 행실에는 허물이 없게 하는 등 지금 세 상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모범적인 사람이라고 추모하고 있다.
祭金丈(濟相)文(1933) 26
김제상을 추모하는 글이다. 공은 옛사람처 럼 풍류의 기상이 있어서 호탕한 생활을 했 지만, 내면을 지켜서 밖으로 운용하기 때문에 한 가지도 어긋남이 없었다. 자기 분수를 알 아서 거짓으로 수식하려고 하지 않으며 세상 의 부귀영달 보기를 하늘의 뜬구름 같이 여 겼다며 추모하고 있다.
祭權丈(稷夏)文(1920) 26
권직하를 추모하는 글이다. 공의 행실은 근본을 힘써서 동백의 높은 기상이 있었다. 은둔자락을 생활하며 재물이 없어도 건강하기만 하면 가난도 아무런 해가 없다고 여기 며 검소함으로 자신을 단속하였다며 추모하 고 있다.
祭金丈(蓉奎)文(1922) 27
김용규를 추모하는 글이다. 공을 알고 지 낸 20년 동안에 공은 힘든 인생 역경을 견디 며 기력이 쇠해져 지난해 늦봄에 세상을 떠나, 옛 추억을 떠올리며 추모하고 있다.
祭丁仲昭(奎翊)文(1930) 28
정규익을 추모하는 글이다. 저자는 공과 서로 알게 되면서 막역한 사이가 되어서 공의 평소 이력을 비교적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몸가짐이 忠厚하고 孝悌를 실천하며 이익을 쫓지 않고 청렴한 생활을 했다며 추모하고 있다.
祭恒齋崔公(炳寅)文(1917) 29
최병인을 추모하는 글이다. 저자가 어렸을 적에 공을 알게 되면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우쳤고, 나중에서야 공이 덕을 좋아하는 모습을 敬愛하게 되었다고 서술했다. 또한 자신이 중병으로 겨우 살아났을 때 부형들은 살아난 것에 만족하며 가르치진 않았는데, 공만이 자신을 저버리지 않고 일깨워 줬다며 추모하고 있다.
祭丁尙武(鎬燮)文 33
정호섭을 추모하는 글이다. 지금 같은 어지러운 시대에는 세상을 떠나 신선의 손을 잡고 즐거워하는 편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고 위로하면서, 지난 30년간 管鮑之交를 맺은 벗이 죽은 것에 대해 애절한 슬픔을 서술 하였다.
祭李晦夫(昺鎬)文 34
이병호를 추모하는 글이다. 한 평생 살면서 꿈에서 깬 잠깐 사이에 상대를 만났는데, 그 때 자신은 관례를 치른 나이고, 상대는 약관의 나이였다. 삼십년을 서로 알고 지내는 동안 상대는 기쁜 일보다 슬픈 일이 많아 양쪽 살쩍이 빨리 새었고, 평생토록 하나의 질병을 안고 사는 불운이 있었다며 추모하고 있다.
祭黃士元(基德)文 35
황기덕을 추모하는 글이다. 사람의 정이 오래되면 잊기 마련인데, 죽은 士元은 쉽게 잊을 수 없는 인물이라며 그의 덕을 기술하였다. 재물을 가볍게 여기며 倫理에는 독실하고,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위급한 사람을 용기 있게 도와주는 등의 훌륭한 자질은 쉽게 잊을 수 없다며 추모하고 있다.
祭金道源(灝鎭)文 37
김호진을 추모하는 글이다. 지금 세상은 공허하고 거짓된 게 나날이 늘어나고 있는데, 공은 오직 내면을 힘써서 싫어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저자와는 30년 간 서로 의지하며 같은 마음으로 살았기에 지기를 보내는 안타까움이 제문에 묻어난다.
壙銘
處士丁公壙銘 38
신미년(1931)5월 9일 丁奎翊(1871~1931) 선생이 돌아가시어 무덤 안에 넣는 銘을 지 은 것이다. 공은 字가 仲昭이고 본관이 錦城이다. 부친은 震燮이고 모친은 豐山金氏奎五의 따님이다. 향년 61세로 저자와는 평생지기였다. 사람됨이 충후하고 질박하며 올곧았다. 어려서 선친으로부터 노둔하여 배움이 독실 하지 못하다는 말을 듣고 분발하여 아침에 일어나서 문안을 드린 뒤 바로 책을 펴서 밤까지 읽고 등불이 꺼지면 암송을 하였다. 형 의 권유로 晦窩와 東亭 두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성품이 드높으며 굴곡이 없어서 남을 따르려고 하지 않았으니, 당시 권세가를 대하더라도 또한 위엄있게 말하며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공은 豐山金氏와 公州李氏, 冶城宋氏에게 세 번 장가들어 8남매를 두었다.
遺事
恒齋崔公遺事 41
崔炳寅(1869~1917)의 유사이다. 공의 字 는 仁卿이고, 호는 恒齋이며 본관은 完山이다. 부친은 冕植이고 모친은 眞城李氏퇴계의 후손인 晩轍의 따님이다. 공은 막내로 태어나 어려서는 몸이 허약하여 부형들이 가르치지 않았는데, 스스로 분발하여 동정선생에게 나아가 배움을 청하였다. 특히 소학을 강론하면서 초학자들은 학문에 뜻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학문에만 오로지 의존하지 않고 독서로 마음의 요체를 삼아야 한다고하였다. 「太極圖心說」과 「性情圖」를반 복해서 연구하며 晦窩와 東亭 두 선생에게 물어보았다. 언행에 허물이 있거나 체험에서 깨달은 것이 있으면 글로 써서 경계하고 두려워하였다. 永川李氏在大의 따님과 결혼하였는데, 자제를 두지 못하였다. 이씨는 어진 행실로 공을 보좌하였고, 집이 가난했지만 힘써 시부모를 섬겨 뜻을 어긴 적이 없었다. 형제의 아들 중 成基를 양자로 들였는데, 지금 세 아들을 두었다.
卷4
附錄
輓詞 1
丁泰鎭, 金思鎭, 黃炳欽, 金世榮, 姜厚昌, 權 器淵, 權頊淵, 權相圭, 李中洙, 李遠國, 朴勝 復, 金憲植, 權相銖, 朴敦洙, 朴祖洙, 黃永紹, 權喆淵, 晉祚永, 姜啓昌, 黃永祖, 韓禹鉉, 李淳 學, 安在極, 安敬熙, 姜道熙, 李秀杰, 權相用, 李學基, 朴蘭緖, 權廷燮, 金황(示+晃), 金熏, 丁湜, 族侄錫虎등이 지은 만사가 실려 있다.
祭文 13
丁奎昌, 朴齊濤, 金澮鎭, 權命燮, 金景植, 朴 勝直, 金章煥, 丁魯鎭, 李奎鎬, 金承學, 丁岱 鎭, 姜信甲, 權相復, 金泰漢, 朴璉緖, 李中悳, 金時佑, 族侄錫虎, 從侄永欽등이 지은 제문이 실려 있다.
誄辭 34
李縉鎬가 權鍾遠의 죽음을 슬퍼하여 지은 글이다. 이 글에서는 문학과 행실이 뛰어난 공이 나이가 60도 채 되지 못하여 죽은 것을 매우 슬퍼하고 있다. 공의 자질을 높게 평가 하였는데,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나가니 헤아릴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을 진솔하게 나타 내고 있다. 저자는 공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만날 수 없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살아있을 때는 다시 볼 수 있는 것을 염두에 두었기에 볼 수 없다고 하지 않는데, 죽음으로 갈라진 뒤에는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알게 된 것이다. 공 의 부고가 전해지자 士友들이 “우리들은 이제 고아가 되었구나, 사문이 무너졌구나. ”라며 탄식하였으니, 그동안 공의 文辭‧志意‧ 持身‧接人‧處世등이 남들의 모범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공은 詩書와 禮義를 익히고, 親賢과 樂善의 근본을 세웠으며 朴穉芳, 崔仁 卿등과 친하게 지냈다. 세상이 어지러운 것을 보고 가솔들을 이끌고 산으로 들어가 평생을 자녀들을 가르치며 농사에 힘썼다. 저자는 마지막에 공의 생활을 ‘강줄기가 길고, 산이 우뚝하니 비록 가난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라며 풍류 있는 삶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行狀 36
1943년 嘉平節(臘日로 동지가 지난 셋째 未日)동문의 벗인 錦城丁泰鎭이 지었다. 자세한 내용은 글 앞의 저자 소개에 나와 있다.
墓碣銘 43
永嘉權頊淵이 지은 묘갈명이다. 여기에서는 공의 본관을 襄陽으로 표기하였다. 양양은 고려 983년(성종 2)부터 불리게 된 예천의 옛 이름이다. 자세한 내용은 글 앞의 저자 소개에 나와 있다.
墓誌銘 47
宣城金思鎭이 지은 묘지명이다. 자세한 내용은 글 앞의 저자 소개에 나와 있다.
墓表 49
1963년 공의 처가의 동생인 李奎鎬가 지은 묘표이다. 자세한 내용은 글 앞의 저자 소개에 나와 있다.

1963년 족제 權鯉周가 지은 발문과 1964년 장남 權瀞欽이 지은 발문이 있다. 권이주가 지은 발문에서는 석산유고의 간행경위와 담당자의 이름까지 나열하고 있다. 권정흠이 지은 발문에서는 자식들이 감히 이룰 수 없었던 유고 간행을 일가 형님들이 “공은 근래 우리 문중의 중망이다. ”라고 말하며 문집 간행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밝히고 있다. (裵鍾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