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은집(白隱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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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사업]한국학 기초자료사업
영남학파의 사유세계와 역사인식 -영남학파 문집 상세 해제 및 주요저작 번역- (2단계)
서지사항
분야문학
유형문헌
시대조선
출전영남학파의 사유세계와 역사인식-영남학파문집 상세 해제 및 주요 저작
문서종류문집 해제

본문

序(1893)
李晩寅(1834~1897)이 1893년에 쓴 서문이다. 저자의 自傳 「白隱翁傳」의‘白屋에 있으면서 부귀에 급급해하지 않고, 白衣를 입고서도 빈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구절이 自序와도 같은데 외람되게 서문을 짓는다고 하면서 후손들의 정성으로 문집을 간행하게 된 경위를 서술하였다. 그의 문장에 대해서는 渾 厚醇古하여 조탁하거나 난삽하지 않고 평이하다고 평가하고, 동지와 친목을 도모할 목적으로 결성한 世好契와 信義契 등에 관한 내용도 담고 있다. 저자의 후손 鍾輔이 청하여 글을 쓴다고 하였다.

卷1

雲院次蒼雪齋權公(斗經)韻(1703), 次蔡使 君(成胤)倒前韻, 次李松沙(適意)韻(二首), 翌日與金以悅口占, 遊聖穴寺(二首), 贈楓嶽 過客, 送蔡綏彦(膺萬)歸花山, 雲院月夜與朴 錫之(天柱)金錫而會話, 次成華陰(世璜)謁燕 巖祠韻, 淨友池, 蔡府伯解歸時溪堂會話(1704), 贈別蔡使君解龜行四十韻, 次蔡使君歸洪州見 贈韻, 次申使君(必淸)遊浮石寺韻, 又次哦松 亭韻, 自遠堂與孫萬夫(以雄)權孟稱(大中)夜 話, 聚散吟, 投贈孫萬夫聞喜宴, 賀呈黃參奉 (昌述)慶席, 謝基川倅李(禎)見贈, 次基倅韻 贈別李仲弼(重台), 次齊雲樓板上韻, 李幼玉 (瑜)慶席次典籍宗丈(徵道)韻, 寄張上舍(世 相)草廬, 戲吟做策, 題東坡集, 次李訥隱(光 庭)韻送學諭宗丈赴職(1709), 泮中別柳仲新 (鼎茂), 中宮殿迎祥詩(代人作), 中宮殿春帖 (1710), 別權恒仲(適經), 贈別李使君(夏源) 以司諫赴京(1712), 雲院司馬會次座中韻, 敬 次翠寒臺韻, 翠寒臺次申澤卿, 竹溪客舍次洪 聖望(尙輔, 1715), 送兪使君(命岳)移任淸州, 次金睂湖(華重)大人慶席韻, 短歌贈金天美 (汝錂)疏行(1717), 次從兄季應詠扇韻, 贈基 川倅李(聖至), 甲辰三月初一日自寧海東萊等 邑訛言相傳云倭船數萬隻蔽海而來不日等陸 南中列邑一時騷亂有若兵火迫在呼吸至三日 始聞慶州烽臺失火浪說驚人先此又有北邊虛 騷感吟二律, 景宗大王因山日大雨終日不霽徃 參客舍哭班感吟(二首), 次徐華伯(曄)重修懶 隱亭韻, 初度日次孫萬夫韻, 次李訥訥齋亨茂 (敏樹)韻, 次典籍宗丈病中述懷, 無月吟, 有月 吟, 次奉先菴煎花會韻, 次徐上舍(聖耈)訥軒 韻(幷序), 次徐上舍台彦(鼎耈)竹隱堂韻(幷序), 敬次李蒼石(埈)題晩翠堂詩二十韻(幷序), 又 次重修韻(二首), 次南君(昌壽)追遠臺重修韻, 次趙玉川(德隣)江齋雜詠(十一首), 次洪伯仁 (儉)信美堂韻, 道溪陞配時次典籍宗丈韻(三 首), 次典籍宗丈病中韻, 辛亥歎, 初度日有感, 雲院次申使君(弼夏, 三首), 吳同知(命基)壽 席見邀有故未赴偶得一律, 次李上舍季實(恒 培)草堂韻, 次朴上舍命休(敬祉)求得先山韻, 溪堂講席示生徒, 雲院梧桐月次舍弟(鎭華)韻, 次權公(東著)耕巖雜詠, 耕巖亭, 養性齋, 一鑑 軒, 養正齋, 醉石, 八詠(東郭耦耕, 南溪獨釣, 前圃蒔藥, 後山菜芝, 坐石弄泉, 登臺望雲, 月 下彈琴, 花前酌酒), 十二景(文山晴旭, 龜峯落 照, 丹溪朝霞, 白屛暮雲, 淸丘霽月, 鷹坊驟雨, 松峴雪逕, 簷巖漁火, 鵝洞牧笛, 鹿谷樵歌, 光 田松籟, 芳坪花香), 謹次朱文公訓子詩(幷序), 賀呈黃同樞(道翊)慶席, 黃君(鱗采)聞喜宴席 又賀同樞丈, 次二老堂李同樞(東馦)慶席韻, 癸丑至月順榮兩邑蓮桂會合設于浮石寺分日 辦行連夜團話眞勝事也曬史官翰林金士迪(漢 喆)適來同榻首成一絶求和次其韻示座中, 題 太極啓蒙圖, 讀退溪先生集感吟, 次金上舍公 儀(式萬)病中自述多病故人疎五字吟, 次李訥 隱天祥鹿門精舍雜詠十五絶, 東坡病中遊祖塔 院詩有安心是藥更無方一句用其韻寓意, 次金 時伯(行秋)賓洞石役時記夢韻, 次映江亭韻 (1734), 次權淸源(泂)四而窩詩(幷序), 四賢 井次主人朴錫之絶句, 己酉立春夜會話奉先庵 次村老韻, 晨謁家廟, 濟兒放㮄日偶題(1738), 道溪社廟記事二十韻, 次同宗九老會韻(1744), 追次族大父僉樞公(成桔)重牢宴韻(幷序).

卷2

輓金蘆峯(정), 輓金丹砂(景溫), 輓黃龍岡 (壽一), 輓金天則(元烈), 輓鄭天叙(硯範), 輓 金丹巖(重鼎), 輓權秉燭齋(胤錫), 輓李進士 (再昌), 輓金進士晦仲(英曄), 輓金同年(始 鏵), 輓黃進士(宇鎰), 輓吳同知(命基), 蒼雪 齋權公輓, 輓朴進士重伯(聖任), 輓申使君(必 淸), 輓族弟眞寶(鎭周), 輓黃同年(復圭), 輓 張賚予(夢相).

請錦城大君立祠丹溪書院勿撤疏(1719) 8
端宗이 종묘에 陞祔되고 사육신도 복권되어 사당에 제향된 것을 비롯하여 順興府의 復設을 언급하면서 世宗의 여섯째아들로서 사육신과 같은 출처를 보인 錦城大君瑜(1426~1457)와 文節公金淡(1416~1463)을 배향한 丹溪書院을 훼철하지 말 것을 청한 疏이다.

與宋昌伯(大振) 10
宋履昌(1678~1715)에게 보낸 서신이다. ‘信’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朋友사이에는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 믿음에는 큰 믿음〔大信〕과 작은 믿음〔小信〕이 있고, 하루의 믿음〔一日之信〕과 백년의 믿음〔百年之信〕이 있다고 하면서 믿음의 중요 성과 진정한 믿음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전하고 있다.
卷3

祭儀述遺訓序(1736) 1
예로부터 맏아들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報本追遠의 祭祀를 주제하기 위함이었는데, 자신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어서 曾祖父母와 祖父母2대는 宗家에서 주제하고 父母 두 분의 忌日과 冬至‧ 寒食‧端午‧秋夕 등 4대 名節에 올리는 祭祀는 돌아가며 모시라는 부친의 처분이 있었다고 하면서 평소 부친의 가르침이 3가지가 있었는데, 첫째는 제사는 정성을 다하는 것이 귀한 것이지 祭物의 풍성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둘째는 서로 미루어 지내지 않으려고 할 바에는 차라리 지내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며, 셋째는 스스로 화목하게 지내도록 노력하여 家風을 떨어뜨리지 않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1736년(영조 12)섣달 그믐날 기록한다고 적고 있다.
世好契序 2
契의 이름을 ‘世好’라고 한 것은 ‘誼’를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일시적인 우호를 맺는 것이 아니라 子弟들이 父兄의 우호관계를 대대로 이어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인생에 있어서 같은 甲子에 속한 사람과 함 께 한다는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어서 春秋佳節로 父兄을 모시 고 자리를 함께하는 일 등을 언급하면서 세 세토록 金蘭이 契가 오래갈 수 있기를 바란 다고도 하였다.
丙丁契帖序 3
같은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것도 어렵지만 같은 해에 태어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인 데, 우리는 서로 2~30리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곳에서 이렇게 함께 살고 있으 니 이는 더욱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하면서 계 원 중에는 1676년(숙종 2)과 1677년(숙종 3)에 태어난 사람들이 각각 몇 명명씩 있지만 모두가 50대이며, 거주하고 있는 마을도 먼 곳도 20리를 넘지 않고 가까운 곳은 10리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信義契序(居泮時) 3
저자가 成均館에 있을 때에 儒生들과 맺은 契會의 序文으로 친구 사이에 契를 함에 있 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信義’라고 하면서 믿음은 계를 공고하게 하고 의리는 계를 깊이 있게 만든다고 전하고 있다. 이어서 진정한 믿음과 의리에 대해서는 心志가 같고 言行에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하며, 反側이 없이 의 리로서 주창하고 화답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 였다. 1709년(숙종 35)겨울 10월에 기록한다고 하였다.
道講書堂學錄序 4
權大中이 편찬한 道講書堂의 講學錄에 대 한 序文이다. 저자가 灘西孫以雄(1740~ 1808)의 초청으로 愚溪에 있는 道講書堂을 방문하였을 때 학생들이 5, 60명 제자의 예를 행하고 講誦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면서 당 시에 권대중이 그가 지은 講學錄을 보여주며 글을 청하여 썼다고 하였다. 후진들에게 模範 이 될 것으로 이 책이면 충분할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贈別趙九卿序 5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趙九卿을 전송하며 지은 序文이다. 비록 멀리 해어지기는 하지만 金蘭之交를 맺은 친구로서 마음이 멀어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하면서 友誼를 다짐하는 뜻을 전하고 있다.
贈關西李寢郞(萬秋)序 7
關西로 돌아가는 李萬秋를 위해서 지은 序 文이다. 함께三溪書院‧陶山書院‧伊山書院‧ 丹溪書院등을 배알하고 산수를 유람했던 일 들을 언급하면서 이별을 아쉬워한다는 뜻을 전하고 있다. 送申上舍(鎭夏)赴寢郞恩命西歸序 8 申鎭夏를 전송하면서 지은 序文이다. 順興 白雲洞書院에서 만났을 때에 그의 풍골이 뛰 어나고 담론이 각별하였다고 하면서 毅陵參 奉으로 임명되어 이별하게 된 것이 아쉽다는 뜻을 전하고 있다.
龍澗集序 9
龍澗南斗元(1655~1713)의 龍澗集 序 文이다. 손자 明晉(1698~1755)이 조부의 遺 稿를 가져와서 글을 청하여 지었다고 하였다. 박식하였을 뿐만 아니라 言辭가 弘暢하였다 고 전하면서 從曾祖父賁趾南致利(1543~ 1580)의 逸稿를 수습하여 魯林書院에서 刊行 한 일 등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台庄草廬序 10
小白山남쪽 台溪가의 草廬에 은거하고 있 는 台庄張某의 시문집을 위해 지어준 序文 이다. 자연과 벗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전하 면서 세상에 뜻을 펴지 못하고 자연과 벗해 서 살아가는 것은 불행일지도 모르지만 이곳 의 자연이 이처럼 훌륭한 주인을 만난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것이라고 하였다. ‘張上庠’ 이라고 칭한 것으로 보아 成均館에는 오른 것으로 보인다. 同宗九老會序 11 집안의 九老會에 대한 序文이다. 奉化沙 堤의 觀稼堂에서 집안의 노인들을 모셔 잔치 를 열고 이 때 지어진 시를 모아 전말을 언급 하고 책으로 만들어 서문을 쓴다고 하면서 70 세로부터 87세에 이르는 분들 중에서 78세의 新村翁이 먼저 시를 짓고 다른 여러 사람들 이 和韻하여 지었다고 전하고 있다.

愚谷書院重修記 12
愚谷書院重修記文이다. 1704년(숙종 28) 사림의 창의로 건립 된 우곡서원은 柳雲龍 (1539~1601)‧李埈(1560~1635)‧黃暹(1544~ 1616)등을제향한곳으로豐基芙蓉山아래에 있다.
麴巖亭記 13
麴巖亭記文이다. 麴巖에 다녀와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지은 시를 가져와 글을 청하 지었다고 하면서 전해 關東을 유람할 때 雉 嶽山에 올라서 麴巖을 찾았던 일을 회상하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1698년(숙종 24)봄에 지었다고 하였다.
順受窩記 14
順受窩記文이다. 順興동쪽 鑑溪에 수십 가구가 살고 있는데 그 서쪽에 조그만 초가 집을 짓고 사는 주인 李公이 우연히 고인이 책을 보다가 ‘順受’라는 두 글자를 얻어 당호로 삼았다고 전하면서 回甲이 된 것을 기리면서 쓴 글이라고 하였다.

族兄松關公(錫智)省墓圖跋 16
族兄錫智의 省墓圖에 붙인 跋文이다. 족형 석지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3년을 하루같이 매일 부모의 묘에 성묘하여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그의 아들 漢英이 畵師를 구해 이것을 그림으로 그렸다고 하면서 효행을 전하고자 하는 뜻을 담았다.

御筆九字宣賜泮宮三箴(幷序) 16
1732년(영조 8)여름 윤5월 5일에 英祖가 成均館儒生들에게 ‘尊聖廟正士習務誠實’이라는 어필을 大司成藏密軒宋寅明(1689~ 1746)을 통해서 내리자 이를 보고 감읍한 저자가 각각의 조목에 부연하여 지은 글이다. 「尊聖廟箴」‧「正士習箴」‧「務誠實箴」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 간략하게 정리하고 스스로 경계로 삼고자 한다고 전하고 있다.
上樑文
詠歸樓上樑文 18
白雲洞書院동쪽 개울 건너편에 지은 詠歸樓의 上樑文이다. ‘詠歸’의 뜻이 孔子의 제자 曾子의 부친인 曾點의 고사에서 따온 것임을 전하고 있다.
紹修書院食樓上樑文 20
紹修書院에 지은 食樓의 上樑文이다. 1719 년(숙종 45)9월 강당을 重修하면서 단청을 올리고 수백 명이 앉을 수 있도록 넓힌 경과 등을 기록하여 전하고 있다.
錦城壇典祀廳上樑文 22
錦城大君의 제단 세우고 典祀廳을 지을 때 쓴 上樑文이다.
丹溪書院食樓上樑文 24
丹溪書院의 食樓를 지을 때 쓴 上樑文이다. 식루를 天群峰끝자락 鷹坊山과 鶴駕山이 한 눈에 보이는 곳에 세우고 그 경과를 기록한 다고 전하고 있다.
梅鶴堂上樑文 26
文節公金淡과伯巖金玏(1540~1616)의 후손인孤山金鋈(1596~1660)이梅鶴堂을 짓고 은거하여 살았다고 하면서 뒤에 그의 후손이 매학당을 중수하고 글을 청하여 지었 다고 하였다. 당호는 林逋의 西湖故事에서 따온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卷4
祭文
社稷壇祈雨文(代府使作) 1
社稷壇에서 祈雨祭를 지낼 때 올린 祈雨文이다. 府使를 대신하여 지었다.
太白山食沙井祈雨文 1
太白山食沙井에서 祈雨祭를 지낼 때 올린 祈雨文이다.
小白山祈雨文 2
小白山에서祈雨祭를지낼때올린祈雨文이다.
祭李密菴先生(栽)文(代人作) 3
密菴李栽(1657~1730)에게 올린 祭文이다.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지었다. 부친 葛庵 李玄逸(1627∼1704)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평생 性理學에 전념한 일생을 서술하면서 슬픔을 전하고 있다.
祭申府伯(必淸)文(鄕堂代作) 4
府伯申必淸에게 올린 祭文이다. 鄕黨을 대신하여 지었다. 문장과 성품을 비롯하여 지방관으로서의 업적을 서술하면서 세상을 떠난 것을 슬퍼하고 있다.
祭外舅李公(惟遠)文 5
外舅李惟遠에게 올린 祭文이다. 성품이 점잖고 醇雅하여 가난하였지만 顔子처럼 安 貧樂道한 삶을 기리면서 자신을 자식처럼 대해주었는데 과거로 인해서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이 아쉽다며 슬픔을 전하고 있다.
祭姨從弟成仲祥(世瓚)文 6
姨從弟成世瓚을 위해 지은 祭文이다. 52세로 세상을 떠난 성세찬이 저자와 한 살 차이로 비록 이종지간이지만 친형제처럼 가깝게 지냈는데 이렇게 세상을 떠나게 되어 애통하다면서 슬픔을 전하고 있다.
祭安亨甫(泰國)文 8
妹弟安泰國을 위해 지은 祭文이다. 弱冠에 이미 풍채가 장건하고 재지가 기민하여 문장이 넉넉하고 필력이 호방하였는데, 30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누이가 의지할 곳이 없고 세 딸이 어려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도 모르는 상황이라면서 슬픔을 전하고 있다.
行狀
族兄松關公行狀 9
族兄인 李錫智(1667~1729)를 위해 지은 行狀이다. 1693년(숙종 19)에 모친을 잃고 1700년(숙종 26)부친까지 세상을 떠나자 양친을 합장하고 매일같이 성묘하였는데, 그의 장남漢英이 그 모습을 「省墓圖」로 그렸다. 만년에 「誠敬圖銘」을 짓고서‘操心寶鑑’이라며 아침저녁으로 玩賞하였고, 「天象圖」를 모의하여 벽에 걸어두었다. 1708년(숙종 34)杏 溪書堂을 세우고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729년(영조 5)향년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漢英이 청하여 썼다고 전하고 있다.
雜著
白隱翁傳 12
저자가 自傳의 형식으로 기록한 자신의 傳記이다. 富貴에 급급하지 않고 貧賤에 연연하 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단청을 입히지 않은 작은 초가집에 ‘白’이라는 한 글자를 걸어놓고, 세상이 富貴功名을 좆아도 자신은 깨끗한 ‘白’의 뜻을 따라 隱居하겠다는 포부 를 밝히고 있으며, 銘과 箴이 함께 수록되어 전하고 있다.
銘 13
전하고 있다.
箴 13
전하고 있다.
卷5
附錄
家狀 1
六代孫潤璞이 撰한 家狀이다. 太祖를 보필하여 開國勳官에 오른 薿의 후손으로 高祖는 汝馪이고 曾祖는 成材이며, 祖父는 熽이고 부친은 基定이다. 어머니는 眞城李氏炯漢의 딸 이다. 1675년(숙종 1)12월 23일 鑑谷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남달라 보는 이들마다 많은 기대를 하였으며, 말을 배운 뒤로 는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文義를 깨우치기도 하였다. 1702년(숙종 28)司馬兩試에 합격하였고, 1705년(숙종 31)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예를 다하여 어른들을 받들었으며, 춥거나 덥거나 하루같이 조금도 자세가 흔들림이 없었다. 1726년(영조 2)부친의 상을 당해서는 슬픔을 다하였고 제사 때는 마치 곁에 계신 듯이 정성 을 다하였으며, 심한 병이 아니면 반드시 衣冠 을 갖추고 사당에 참배하는 것을 나이가 들어도 조금도 태만히 하지 않았다고 한다. 만년에 는 세상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山水를 벗하며 거처에 ‘白隱’이라는 편액을 걸어두고 號로 삼고는 스스로 傳을 지어 말하기를, “白屋에 거처 하면서 富貴에 급급하지 않고, 白衣를 입고서 貧賤에 연연해하지 않으니 단단하기가 白玉과 같고 밝기가 白雪과 같다. ”라고도 하였다. 또한 銘을 지어 말하기를, “세상이 ‘靑紫’를 흠모하여 도 나는 ‘白’을 숭상하며, 사람들이 ‘繪采’를 숭 상하여도 나는 ‘백’을 으뜸으로 여기니 ‘백’을 지키며 생을 마칠지언정 ‘以文勝質’하지는 않겠 다. ”고도 하였다. 뜻이 미치는 바가 澹泊하여 하나의 티끌도 오염됨이 없었고 그 거처하는 곳에는 詩書가 풍부하였으며, 정원에는 꽃들이 가득하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시를 읊조리며 당시 蒼雪齋權두경‧訥隱李光庭‧松沙李‧丹邱黃‧武陵李 등 당대의 宗匠들과 道義之交로 교류하기도 하였다. 그밖에 평소에 책읽기 를 좋아하여 세상의 책 가운데 읽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周禮註疏‧性理 大全‧大學衍義‧朱子語類‧陸宣公奏議 등과 같은 책을 가까이 하여 살피면서 중요한 부분을 모아 大成集說 16卷을 엮기도 하였다. 이 책은 저자의 立志와 힘쓴 바의 大要가 무엇인지 알기에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는 1752년(영조 28) 3월 26일 향년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原配眞城李氏惟遠의 딸과의 사이에 慶澤‧慶潝‧慶泓‧慶濟등 4남과 2녀를 두었다.
行狀 3
權世淵이 撰한 行狀이다. 자세한 내용은 앞의 저자 소개에 나와 있다.
墓碣銘 7
權璉夏(1813∼1896)가 撰한 墓碣銘이다. 내용은 行狀과 비슷하며, 간략하게 정리하였다.
白隱堂重建記 9
權璉夏(1813∼1896)가 지은 白隱堂重修 記文이다. 백은당을 짓고 은거한 뜻이 선조 桃邨李秀亨(1435~1527)이 端宗손위 때 拱北軒을 짓고 은거한 뜻과 5대조 炊沙李汝馪 (1556~1631)이 光海君 때 因樹亭을 짓고 은거한 뜻과 맥을 같이 한다고 전하고 있다.
方山里社奉安文 12
進士金宗烋가 쓴 方山里社 봉안문이다. 識 후손 潤範이 쓴 後識가 실려 있다. 훌륭한 재주를 품고서도 은거하여 詩文과 著述을 많이 남겼으나 화재로 남은 것이 얼마 없다고 하면서 후손 潤珌이 11년 동안 白隱堂과 문집을 관리하였는데, 그 사이에 백은당은 복원되었고 文集도 간행하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鄭義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