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담실기(龍潭實紀)

홈 > 연구성과별 자료검색
[연구사업]한국학 기초자료사업
영남학파의 사유세계와 역사인식 -영남학파 문집 상세 해제 및 주요저작 번역- (2단계)
서지사항
분야문학
유형문헌
시대조선
출전영남학파의 사유세계와 역사인식-영남학파문집 상세 해제 및 주요 저작
문서종류문집 해제

본문

龍潭權公實記序(1979) 晩翠堂 金盖國(1548~1603)의 10대손 延城 金晉秀가 1979년에 지은 서문이다. 1545년(인종 1) 영주 남쪽 미산촌 龍湫 아래에 薇山精舍를 짓고 은거한 龍潭 權有善의 행적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竹牖 吳澐이 影江亭이라고 명명하고 鶴沙 金應祖가 그 경치의 빼어남을 사랑하여 郡誌에서 실었다고 하였다. 또 1934년 수해로 장자가 무너져 후손들이 중수하였다. 그리고 權泰佑와 權寧佑 등이 권유선의 시문과 역대 선현의 차운시와 서발문 수습하여 『龍潭實紀』를 만들고 김개국에게 서문을 받았다.
卷一

詩(七言2句) 1
又(七言2句) 1

龍潭歌(48韻) 1
附錄
先亭事略 2
저자의 8세손 慕竹齋 權文赫이 1824년(순 조 24)에 지은 선조의 影江亭에 대한 事略이다. 1798년(정조 22) 화재로 薇山精舍와 古蹟이 모두 소실되어 1804년(순조 4) 다시 중건하고 先人 權有善의 潛德幽志와 影江亭 주변 경관을 간략하게 기록하였다. 특히 정자 주변의 明勝으로는 서쪽에 愚川鄭侙(1601∼1663)의 愚川亭, 鶴沙 金應祖(1587~1667)의 鶴沙亭이 있고 동쪽에 雲谷書院이 있고 남쪽에 陳月寺 등이 있다.
先亭創修始末 3
저자의 9세손 密窩 權錫元(1798~1871)이 1847년(헌종 13)에 薇山精舍 창건과 중수의 시말을 적은 기록이다. 影江亭은 1575년(선 조 8)에 7칸 16楹으로 지어졌으나 1798년(정조 22) 3월 3일 화재로 전소되었다. 1804년(순조 4) 9월 11일 20칸 42楹으로 중건하였다. 그리고 1809년(순조 9)에 증축하고 1817년(순조 17)에 수해를 입어 다시 중수하고 1846년(헌종 12) 여름에 제현의 시와 기문을 새겨서 걸고 1847년(헌종 13) 映江亭에 映字 를 影字로 고치고 李家淳에게 影江亭이란 현 액 글씨를 받아서 걸었다.
影江亭事蹟 5
영주시 辰穴面 龍穴里 물가에 있는 影江亭의 사적이다. 권유선이 1575년(선조 8년)에 짓고 竹牖 吳澐(1540∼1617)이 影江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影江亭詩 85명의 인물이 오언율시 1수와 칠언절구 1 수씩 남겼고, 또 연작시를 남긴 인물도 있다. 시를 지은 사람의 명단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愚川鄭侙(1601~1663), 多笑子張龍 遇, 鶴沙 金應祖, 誠齋 吳益熀, 監役 金時敏, 野軒金雲望, 吳慶基, 知郡洪天叙, 格庵南師 古, 張琫, 柳世霖, 張琢, 張珌, 羅壽一, 金輝璧, 松沙李適意, 北厓李好意, 張世相, 權璍, 權玧, 李慶翊, 龍潭 任屹, 樂窩 李基定, 張是相, 李光翊, 全東善, 臥隱 張緯恒, 金儋, 李永培, 金秀三, 李在天, 金柱國, 全震久, 權灝, 吳錫 禧, 朴施彩, 柳世霖, 柳紀天, 臥隱 張緯恒, 砂 村權命守, 金恒烈, 柳㰒, 金埅, 具五性, 宋得 龍, 葛坡 李台翊, 金恒烈, 權啓萬, 半巖 全球, 鄭鎬, 宋文煥, 槐軒金瑩, 金相舜, 李賢黙, 李 祥奎, 酒隱 金基命, 素隱 金鎭龜, 柳信祚, 李殷 淳, 鹿門李一相, 篁巖金鎭河, 李昌奎, 松臯 權靖夏, 李吾周, 趙錫中, 影江亭詩小序 權遇 準, 金浩永, 金鎭憼, 霽谷 李亨秀, 權命夏, 金 重厚, 權錫琛, 李彙秀, 豊山後人 金宗烋, 權錫 元, 朴明壽, 白隱堂 李鎭萬, 權秉淵, 左湖 李彙 暻, 堯南 金載琡, 金周翰, 笑山 李庭德, 丁大 柱, 香山 李秀九, 權應三 등이다.
詩板後識 28
錦江張璶(1629~1711)이1701년(숙종27)에 影江亭 詩板에 적은 後識이다. 舊本에는 忘窩 金榮祖의 아들 金時敏(1578~?)의 詩 뒤에 있었다. 시를 모아 간행하게 된 과정을 지은 글로서 영강정 주인의 접빈하는 태도가 진실 하고 나태함이 없어 한 시대의 長老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 시를 짓기를 좋아하였다. 嗣孫이 權用鎭이 당시의 시문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 까워 후세에 전하려고 간행한다는 내용이다.
影江亭重修韻 28
影江亭을 重修하고 9명이 같은 韻으로 칠언율시 1수씩 남겼다. 시를 지은 사람은 梧竹齋 趙宜陽(1719~1808), 黃昭漢, 宋文煥, 槐 軒金瑩, 趙秉相, 金相舜, 金永之, 李賢黙, 晩開軒 權遇準(1788~?) 등이다.
重修記 31
李瀣의 후손 新野 李仁行(1758∼1833)이 1830년(순조 30)에 지은 중수기이다. 權有善은 1545년(인종 1)에 剛州(榮州의 고호) 남 쪽 龍穴里에 은거하고 정침 龍潭齋를 짓고, 1575년(선조 8년) 동쪽에 影江亭을 만들고, “옛날부터 영예가 있으면 반드시 치욕이 있으니 분수에 따라 강호에서 노년을 보내는 것만 못하다. [從古有榮須有辱, 不如隨分老江湖]”라는 시를 읊조리고 낚시를 하며 소요하였다. 1798년(정조 22) 權文藻의 집에 일어난 화재가 영강정까지 태워버려 고적이 모두 사라졌다. 8대손 權文赫이 1804년(순조 4)에 정침과 정자를 중수하고 9대손 權錫元이 이인 행에게 중수기를 부탁하여 朱子의 天光雲影의 뜻을 부연하여 기문을 지었다.
重修記 32
逸圃 朴時源(1764~1842)이 1825년(순조 25) 2월에 지은 중수기이다. 영강정 앞에는 錦江의 상류 내성천이 九曲을 이루어 마을을 안아 흐르고, 북에는 鶴駕山 한 줄기가 내려와 있고 동에는 雲谷이 있고 남에는 陳麓이 있으며 서에는 薇山이 둘러싸 있는 곳이다. 龍潭實紀 權文赫의 8대조인 直長公 權有善이 乙巳士禍 (1545년)를 피하여 이곳에 寓居한 뒤 1575년 (선조 8년)에 지은 것이다. 1798년(정조 22)에 화재를 만나 전소되어 1804년(순조 4) 옛날처럼 중수했으나 화재로 옛날 선배들의 시와 기문이 없어져 박시원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이에 여말선초에 不事二君의 절의를 지켜 벼슬을 버리고 安東 玉山 桃花洞(현 禮安 棄 仕里)에 은거한 思復齋 權定의 행적과 龍潭 권유선의 은거한 행적으로 정자의 취지를 설명하고, 후손들은 선조의 거룩한 뜻을 잘 계승하라고 당부하였다.
重修記 34
霞溪 李家淳(1768~1844)이 1827년(순조 27) 지은 중수기이다. 학가산 북쪽 龍湫 아래에 直長公 權有善이 은거한 影江亭은 愚川 鄭侙, 鶴沙金應祖, 錦江張璶등의선현이 노닐면서 題詠한 名勝이다. 나머지는 朴時源의 중수기의 내용과 비슷하고 끝부분에 끝에는 칠언율시를 지어 影江亭 주변의 승경과 權有 善의 절의를 칭송하였다.
龍潭歌後識 36
朴時源이 1828년(순조28) 10월에 지은「龍潭歌」의後識이다. 친구 權文赫의 상사에 갔다가 아들 權錫元의 부탁을 받고 權有善의 절의와「용담가」에 대하여 평하였다. 즉 절의를 지켜 벼슬을 버리고 棄仕里에 은거한 思復齋 權定의 행적과 을사사화로 벼슬을 버리고 龍穴村에 은거한 용담 권유선의 隱居自樂 한 행적은 서로 상통하고, 「용담가」의 소리는 청량하고 宏博하며 내용은 渾厚하고 청아하여 영욕에 대한 한 점의 俗氣도 없다고 평하였다.
次版上韻幷序 37
古溪 李彙寧(1788~1861)이 影江亭 시판 에 차운하고 지은 서이다. 龍潭處士 權有善이 은거했던 영강정은 삼면에 산을 대하고 앞에 내성천이 흐르는 명승지이다. 그곳에는 竹牖 吳澐, 愚川鄭侙, 鶴沙金應祖, 錦江張璶등의 선현이 노닐면서 題詠한 名勝이라고 칭송하고, 오언율시 1수와 칠언절구 1수를 차운하였다.
書亭誌後 38
勿巖 金隆의 8대손 金騏獻(1797~?, 字 舜 擧, 號 觀卜齋)이 影江亭誌 뒤에 적은 글이다. 영강정은 사면이 산으로 둘러있고 중간에 맑고 깨끗한 내성천이 흘러 속기를 끊어버리는 기상이 있다. 그리고 주변에 산, 시내, 계곡, 바위, 陳月寺 등의 경관을 열거하면서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집중적으로 勝景이 배치된 곳은 드물다고 하였다.
薇山精舍事略 39
9세손 權錫元(1798~1871)이 지은 事略이다. 剛州(榮州의 고호) 남쪽 30리에 있는 孤 竹洞의 薇山村은 9대조 權有善이 은거했던 곳이다. 1575년(선조 8년)에 정침 龍潭齋와 정자 影江亭을 합하여 薇山精舍라고 하고, 「龍潭歌」를 지어 隱遁의 뜻을 나타내었다. 9대손 權錫元은 8대손 權文赫이 선조의 유적을 복원하려던 유업을 계승하여 정침 龍潭齋와 정자를 중수하고 사실을 대략적으로 기록하였다.
薇山精舍詩幷序 40
李彙秀가 1852년(철종 3)에 지은 薇山精舍 詩 서문이다. 아래에 17명의 인물이 지은 시 가 실려 있는데, 金周翰, 觀卜齋 金騏獻, 惺庵 朴宗垕(1792~1864), 全秀東, 全秀衡, 宋瑛基, 金樂休, 金樂聞, 金毅壽, 香山 李秀九, 朴永中, 宋相璟, 權命夏, 李彙暻, 鶴浦散人 金禹銖, 金載琡, 權錫元 등이다.
薇山精舍記 45
篁巖 金鎭河(1786~1865)가 1855년(철종 6) 11월에 지은 기문이다. 薇山精舍가 있던 龍穴里의 옛날 지명은 孤竹洞 薇山村이다. 權有善은 그곳에 정사를 짓고 강호에 절의를 지키며 은거하였다. 그것은 그의 6대조 思復 齋 權定이 여말선초에 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키며 벼슬을 버리고 安東 桃花洞(棄仕里)에 伴鷗亭‧鳳松臺를 짓고 은거하며 西山에 올라 采薇歌에 和答한 유풍을 계승한 것이다. 후손 權錫元도 思復齋 權定의 마음을 마음가짐으 로 삼으면 伯夷의 忠節이 침체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薇山精舍記 47
宣城 金樂淵(1792~?)이 1864년(고종 1) 에 지은 기문이다. 權錫元가「薇山精舍事略」을 가지고 와서 기문을 청탁했으므로 내용은 앞에 나오는 金鎭河의 것과 대동소이하다. 다만 『맹자』에 나오는 “백이의 풍도를 듣게 되면 완악한 자는 청렴해지고 나약한 자는 지조를 세우게 된다. [聞伯夷之風者, 頑夫廉 懦 夫有立志. ]”라는 말을 인용하여 절의를 강조 하였다.
薇山精舍上樑文 50
함창 김씨 觀卜齋 金騏獻(1797~?)이 薇山 精舍를 중수하고 지은 상량문이다. 내용은 앞 에 나오는 기문과 대동소이하다. 다만 薇山에서 伯夷叔齊의 淸風을 본받고, 影江에서 주자의「觀書有感」에나오는“반 이랑의 방당이 거울 하나로 펼쳐지니, 하늘빛 구름 그림자 그 속에 배회하네. [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 影共徘徊]”라고 하는 도학세계를 본받기를 강조하였다.
卷二
三好樓詩 1
남양 홍씨 洪天敍(1639~?)가 영주군수로 시절 영강정에 와서 지은 “정자가 좋고 사람도 또한 좋으며, 강과 산은 좋지 않는 곳이 없다. [亭好人亦好, 江山無不好]”라는 5언 2구 를 인용하여 三好樓라고 하였다.
三好樓記 1
希齋 金輝濬(1820~1898)이 1874년(고종 11)에 지은 기문이다. 三好樓는 密窩 權錫元 의 5대조 權用鎭이 洪天敍에게 받은 글씨인데 집안에 보관하다가 권석원이 薇山精舍를 복원하면서 추가로 새겨 게판하면서 김휘준 에게 기문을 부탁한 것이다. 영강정의 북쪽에 는 小白山 한 줄기가 내려와 봉우리를 만들 었고 동에는 雲谷이 있고 남에는 雕雲山 자 락의 陳月寺가 있으며 서에는 雕雲山에서 내려온 薇山이 있고, 앞에는 내성천이 마을을 안아 흐르다가 錦江에 합류한다.
三好樓揭板時記事 5
9세손 權錫元(1798~1871)이 三好樓를 揭板할 때 지은 記事이다. 5대조 端齋 權用鎭이 군수 洪天敍에게 三好樓라는 글씨를 받고 표방하지 않았으나 홍천서의 文雅風流는 지금도 칭송되므로 중수할 때 追刻한다고 하였다.
遺事
九世祖考直長府君家狀 5
9세손 權錫元이 지은 直長府君 權有善의 家狀이다. 권석원은 그 片言隻字를 수집하여 권유선의 행적을 재구성하였다. 권유선은 柳遇春의 딸을 취하여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權斗明, 權斗映, 사위는 張瑨, 金敏善이다. 權斗明은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將仕郞權䵞, 사위는金振東, 朴抵, 許伈이다. 묘 소는 영주시 평은면 梧市洞 向坤坐에 있다. 나머지 내용은 저자 소개에 자세하다.
影江亭移建記 9
忍庵 權相圭(1874~1961)가 1940년 移建한 영강정에 대하여 지은 기문이다. 1934년 대홍수에 영강정이 무너져 1935년에 뒷산으로 이건하고, 후손 權應相과 權東震이 1940년 봄에 기문을 부탁하였다. 즉 정자의 무너지는 것은 氣數의 변화이므로 피할 수 없으나 1545년(인종 1) 을사사화 때 벼슬을 버리고 절의 를 지킨 權有善과 그 선조 思復翁 權定의 忠 節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고 칭송하였다.
影江亭移建上樑文 10
外裔孫 張熙德이 影江亭을 移建하고 지은 상량문이다. 1798년(정조 22) 일어난 화재로 영강정은 무너졌고 1934년 수해로 영강정은 물에 떠내려갔다. 그래서 후손은 옛터에서 一 武 떨어진 곳에 새롭게 터를 잡고 영강정을 이건하고 張熙德에게 상량문을 부탁하였다. 내용은 앞에 나오는 金騏獻의 薇山精舍 상량 문과 비슷하며 권유선의 陰德과 節義를 칭송 하였다.
墓碣銘 12
龍田 金喆熙(1915~2008)가 지은 權有善 의 墓碣銘이다. 안동 권씨 시조는 고려태사공 權幸이고, 思復齋 權定(1353∼1411)은 6대조 가 된다. 조부는 權誠孫이고 부친은 權評이고 어머니는 金思儉의 딸이다. 14대손 權寧佑의 부탁을 받고 지었다. 卷尾 後識(1980) 1 希菴 權正善(1906~1992)이 1980년에 지은 후지이다. 권유선이 1545년(인종 1) 서울에서 영주 남쪽 용혈리로 은거하여 용담재와 영강 정 등 미산정사를 건축한 것도 500년이 되어 간다. 처음 남긴 글과 日記가 상자에 가득하 였으나 여러 번 전쟁과 화재를 만나 겨우 述懷詩2絶과「龍潭歌」48韻만남아있다. 그러 나 역대 여러 先賢의 題詠詩, 영강정기, 영강 정상량문을 살펴보면 공의 기풍을 상상할 수 있다. 후손 權泰佑와 嗣孫 權寧佑가 『龍潭 實紀』 간행에 心力을 다하고 발문을 부탁하 기에 응하였다고 한다.
後識(1980) 2
權泰佑가 1980년에 지은 후지이다. 『龍潭 實紀』에는 선조 권유선의 遺文과 역대 여러 先賢의 影江亭 題詠詩, 서발, 기문, 상량문, 전후문자를 소상하게 수록되어 있다. 특히 8대 손 慕竹齋 權文赫과 9대손 密窩 權錫元이 誠力을 다하여 유적과 유문을 중수하고 수집하 였지만 간행하지 못했는데, 1980년에 문중의 도움으로 숙원을 이루게 된 감회를 기록하였다.
跋(1979) 3
14대손 權寧佑가 1979년 7월에 지은 발문 이다. 선친과 조부가 14대조 權有善의 사적을 蒐集하고서 간행하지 못한 유업을 문중의 힘을 모아 간행하게 된 경위를 기록하였다. 선조의 작품은 述懷詩 2絶과「龍潭歌」48韻 등 3편만 현전하여 『용담집』이라 하지 못하고 『龍潭實紀』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金周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