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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사업]한국학 기초자료사업
영남학파의 사유세계와 역사인식 -영남학파 문집 상세 해제 및 주요저작 번역- (2단계)
서지사항
분야문학
유형문헌
시대조선
출전영남학파의 사유세계와 역사인식-영남학파문집 상세 해제 및 주요 저작
문서종류문집 해제

본문

序(1986) 後人 李鐘宣이 지은 서문이다. 省吾堂介立의 5세손으로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 弱冠을 전후하여 이미 그 성취가 높았으나 결국에는 軒冕을 뜬구름처럼 여기고 만년에는 朱書를 篤信하여 『朱子大全』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특히 孝友를 중시하여 그 뜻이 宗黨에까지 이르렀는데, 伯氏에게 올리는 祭文을 보면 그 간절한 마음을 잘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렇듯 그 자질과 인품은 능히 重用되기에 충분하였으나 기회를 얻지 못 하였으며, 수명 또한 길지 못하였으나 더욱 그 슬픔이 크다고도 하였다. 뒤에 9세손 榮漢 이 저자의 글이 전하지 못함을 개탄하다가 집안의 어른인 宰賢氏와 더불어 詩文을 정리하고 150여 편의 輓誄를 모아 2冊으로 만들고는 글을 請하여 같은 조상을 둔 후손의 한 사람으로서 그 책임을 다하고자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쓴다고 밝히고 있다. 끝으로 저자의 시문이 끊어지게 된 것이 한스럽기는 하지만 고기로 끓인 국은 모두 다 먹어보지 않더라도 한 번 맞보면 한 솥 가득한 국의 맛을 알 수 있듯이 일부 남아 전하고 있는 시문을 보면 저자의 성취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전하고 있다.

卷1

敬次伊山觀物堂韻, 三峰書院敬次鶴沙東巖兩老爺韻, 次卷中韻, 陳月寺敬次松沙公寂黙堂韻, 月寺新房次張梁山仰書絶句, 宋殿中士範期而不參, 義山春享時呼韻, 黃德夫晬日醉吟寓懷, 山泉呼韻, 月寺歸路訪朴大而(昌殿) 家不遇而阻水仍留次壁上韻, 翰林金士迪(漢喆)以史官歷到參會以詩求和, 附金士迪次韻, 翰林臨別又以前韻投之走次, 義山遇黃厚載語 及曺生(益新)見奪盆梅於善山官家自官送絶句云故輒次其韻三絶, 問花岐金院長病所引入內室見壁上立春韻走次三首, 夜警, 次宋佐郞國老韻, 次南汝聲韻獻賀䅈在中, 南汝長自關東歸戱贈, 到權正郞一甫(萬)家酬唱, 次一甫韻, 次谷宋泰亨家偶吟, 永川晝峴望東京山川(1709), 阿火驛途中, 牟梁驛, 自牟梁踰一峴望東京二 首, 過金將軍庾信墓, 詠奉德鍾, 瞻星臺, 月城, 芬皇寺, 鷄林, 瓢巖, 暗谷村訪䥐藏寺不得感吟, 留暗谷, 出見東大山二首, 登東大山觀海吟, 望 利見臺, 望海記實, 下山後有未盡懷仍戱吟二 首, 獨坐無聊中仍想昨日登山周覽東都形勢聊 識大槩, 又留暗谷, 回路向慈仁衙擬欲周覽未 盡處而猝聞有豆虎之報未果故吟懷, 望五陵及 始祖殿, 望孝不孝橋, 鳳凰臺次謫仙韻, 凌晨發 程回至晝峴, 客裏有寒粟感冒之漸意謂偶然致 傷累日不歇故感吟, 送神, 大雪, 經痘後照水面 戱題五首, 除夜, 一村以痘患皆戒愼不備卒歲 之資故戱吟, 庚寅元日, 大雪終日, 新林寺途中吟, 靜中有詩, 見鄕書及親舊問札又見李校長 來訪, 夜雨, 伏次松沙公板上韻, 上元望月, 夜 雨曉雪, 登高望大野, 曉起謾詠二首, 新林路馬 上口占, 大興寺, 贈文大師, 謝懶英首座來訪, 贈淸輝僧, 伏次家嚴壁上韻, 伏次松沙公楹間 韻, 贈慧大師, 贈玄納彩文兩大師, 觀處納和尙 供養乞人五十餘輩, 慧師請詩軸寫贈東都雜詠 仍尾之一律, 自大興歸衙馬上口占, 伏次松沙 公壁上韻二首, 觀東閣梅, 次邊太守板上韻, 踏 靑, 雨後望龍山, 淸道試所獨坐詠懷, 懷鰲山舊 蹟, 張天應(緯恒)時任慈仁故復往續前遊與心 應諸君話舊有感仍題一首, 河進士(瑞龍)自彦 陽來衙中有詩步其韻二首, 又次河上舍, 戱贈張心應, 訪趙(陽來)不遇留簡付置主家奴子尾 題三絶句以爲日後相記之資(趙乃善卜者), 草 谷宋子安家與楚叟休應呼韻, 次屛谷十勝韻仰 呈權方叔(榘)老兄(幷叙), 次柳山陰(聖和)河 隈十六景韻, 金浦船遊後權一甫先成一軸聊以 和之用金振伯(聖鐸)先往約以送舟韻, 伴舍與 朴吉伯柳君實全允若孫萬夫約發鄕行出城 (1723, 冬), 自京還家又作南行至新寧阻閽.

卷2

壯巖書院次洪花圃韻以寓追感之懷, 鄕宴次城主韻, 義山呈山長金士俊(偮), 與羅楚叟(萬齡)張休應乘月往山泉口呼, 山泉夜吟, 司馬會 翌日官送四韻故次呈(1736), 附沈侯(廷紀)原 韻, 追次尹使君韻寄題裵景伯(星大)鷗沙草堂, 尹日章長子(倜)冠禮時有韻故追次, 濟民樓契 席敬用嘯皐先生韻, 朴進士(泰來)壽席見招吟 呈, 奉送金江界令公(정亻+政)牧濟州四首, 司 馬會諸君皆耽絃歌戱吟, 校齋拈出霽峰松巖集 韻仍次, 龍巖寺敬老會次蔡(膺萬)韻, 伏次王 考石村公韻, 李孟能進士長世兄弟相繼來訪未 遇而虛還留一少絶於案上故輒次寄呈, 成君徵 家偶吟, 李子基家壁上有明將王繼陽詩追次(漆谷人), 附王繼陽原韻, 次李子基敬止堂韻, 賀 李內乘(玗, 1732), 官喪吳夫人輓, 次蘆溪丁姊兄(志學)近體五首, 與休應宿校齋見墻角竹陰 次宋善卿呼律二十韻, 芙蓉臺四十八韻, 山泉 次丹溪張上舍三十韻, 次趙進士啓萬(是光)柱 江軒韻(幷內外八景), 送趙久叔(元恒)西行, 送宋典籍士範, 榮順司馬會合設於浮石寺, 聚 遠樓醉吟, 八音體款俗, 二十八宿體贈休應, 十 二辰體仍成演雅體自述, 胞胎養生體, 建除滿平體, 鼎山謹次瀼西公板上韻, 吟贈金君(元復), 次李汝集(義兼)龍頭新居韻四首, 次丹砂 投贈韻, 次舍弟汝實(泰培)郭田寓所韻(1732), 上元戱吟(1733), 立春呼韻, 謾吟用前韻, 倒前韻, 演雅體, 伊山呼韻演雅體, 城東呼韻, 幽洞 夜話用趙(宅陽)韻, 襄陽士友講學於能川書堂 聞風追躡講帳已掇金進士丈元仲郭責强次効嚬聊以博粲, 次用鵝湖韻, 又搆拙求和, 次金院 長元朝韻(1732), 倒韻仰呈金院長, 龍巖臺會 話(1733), 夜警, 見宗婦抱男孫喜贈閔德卿, 題 南汝長杜村草堂, 贈先春叔(昌翊)仍送南草, 次先春叔韻, 謹賀圓谷金公(斗山)重牢筵, 次汝 澄姪(元鏡)魚躍韻, 贈錫範叔(箕翊)松溪草堂, 守歲, 題棲碧亭, 送朴壻(弘儁)免新行, 除夜與 數三庚友呼韻, 次孫君(必興)新春韻, 又贈主人, 月夜醉贈楚叟朴實謙(文昱)張休應, 梁山與 主倅張戚叔夢予(后相)同賦, 東萊宴餉要我同 行故吟呈蓬萊十二絶, 贈別金上舍瑞鳳(來徵), 投詩東閣要酒, 附張主倅韻, 贈孫機張倅, 龍塘 居林華仲(褒)能詩者次其韻五首, 謾詠, 次梁 倅冬暖韻, 冬至吟, 次華仲韻四絶, 梵魚寺得魚 字韻, 贈大聖庵存覺大師, 巖壁見李東岳所刻 詩謹次, 見羅王浴室溫井, 贈蓬山妓海雲紅兼 呈宜春仙宰輧下, 觀宴餉感吟, 見秋陽劍舞益 娘艶歌戱吟, 喜見釜山夜宴, 梁山歸路次掘火 驛謾吟, 通度寺次軸中韻, 宜春次休應自新寧 寄來詩三首, 戱呈衙軒二首, 次華仲投贈韻二 首, 戱次宜春倅韻, 主倅使一妓慰送餞別故詩 以戱贈, 次主倅明字韻(七首), 密陽戱贈蓮心二絶, 仁山贈妓金蟾, 金蟾家壁上見休應詩卽次, 鶴城訪從叔下處不遇歎吟, 次權皆玉令(瑎) 題朴營將江亭韻, 大觀吟, 路上吟, 見梁倅南行 日記二絶卽次, 解嘲詩, 謾吟, 東萊舊蹟, 宿通 度寺, 過鄭公墓, 記倭館所見排律二十二韻, 關東歷路滿月浦所詠, 砥平道中吟, 次贈許壽玉(璹), 洪川道中馬忽致斃故憐而有吟, 謝洪川倅周惠路資, 蒼峰驛, 曉行, 到原川, 追記洪川事, 自關東行到竹嶺口占, 賀宋君(殷徵)壽席, 生朝次亭西公(光翊)韻, 張慈仁晬席呼韻, 次尙志韻贈別致宗師還山.

卷3

題箭溪草堂, 新巖, 訪趙伯謙(元益)不遇, 濟民樓呼韻, 倒韻, 次張(泰仁)慈堂壽席韻, 乙卯春試之行和呈亭西公寄贈韻, 伊山秋享後酬唱, 次亭西公避痘敦村韻,謹次朴琴隱四時吟(幷叙), 伏次城西公韻, 輓金院長(漢柱), 輓徐上舍丈希彦(聖耉), 輓丁仲兢(一愼), 輓黃百兼(宇鎰), 輓美村金令公(侃), 輓李進士丈(再昌), 輓柳進士丈(宗林), 輓全稷山而遠(近思), 輓任正郞(華世), 輓朴鉉叟, 輓南汝長(1733), 輓權進士(龍燮, 沁園春體), 又(代家兒作), 友琴金童子哀辭.
上樑文
誠山書堂移建上樑文(1732) 8
誠山書堂은 1649년(인조 27) 鶴沙 金應祖(1587~1667)가 창건하고 上樑文과 堂規를 撰하였으며, 그 후 여러 차례 重建과 移建이 있었는데, 오랜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서 이제 다시 이건하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저자의 上樑文 이외에도 進士 李台翊의 上樑文과 亭西 李光翊의 記文이 전하고 있다.
南澗書堂移建上樑文 10
1654년(효종 5) 郡의 서쪽 望闕里에 서당을 세우고 泗溪書堂이라고 하였다. 사계서당이 건립되고 시간이 지난 뒤 형편상 불편한 점이 있어 1685년(숙종 11) 봄 宋時毅가 여러 선비들과 상의하여 廣升마을에 터를 잡아 이건하였다. 당시 서당의 크기가 협소하다고 판단하여 중간에 2칸을 늘렸으며, 시야를 트이게 하기 위해 동쪽에 있는 방 하나를 헐고 주사나 곳간도 모두 동시에 세웠다. 서당 아래에 南澗이라는 연못이 있었기 때문에 南澗 書堂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광승마을로 이건된 남간서당은 주변의 풍 광이 아름다웠지만 정작 터는 문제가 있었다. 물길이 아래로 지나가 모래가 점차 쌓였으며 이로 인해 이건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었다. 초기에 남간서당을 세우는 일을 주관하였던 이들의 후손인 金一柱 등이 주도하여 1731년 (영조 7) 북쪽으로 1리쯤 떨어진 樊峴으로 이건하였는데, 저자가지은「南澗書堂移建上樑文」은 이때에 지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18년 후인 1749년(영조 25) 약간 위쪽으로 다시 이건하였으나 남간서당의 이름은 고치지 않 았다. 물 기운 때문에 건물이 기우는 등 문제가 생기자 1779년(정조 3) 서당 훈장 權若龍이 마을 장로들과 협의하여 또 다시 이건하였다. 1839년(헌종 5)에는 서당을 새로 지었다. 하지만 신축한 지 40여 년이 흘러 건물이 허름해졌으며 또 북향이어서 매우 추웠기 때문에 마을의 장노들이 1880년(고종 17) 봄에 權重 範을 수임으로 삼아 移建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에 권중범이 金樂道‧金宗叔 등과 의논하여 서당에서 조금 떨어진 동쪽 산기슭에 터를 잡아 옛 서당을 헐고 새로 세웠다. 그 밖에도 1905년과 2004년에 중수하고 重修記를 남겼다. 영주시내 거주했던 儒林들 가운데 12門中이 공동출자하여 자녀들의 교육과 인재양성을 위한 학당으로 개설한 남간서당은 牛川 鄭玉 (1694~1760)이1731년(영조7)지은「南澗書 堂重修記」에 따르면, 文節公金淡(1416~1464) 등 영주의 대표적 士林의 儒風이 남아 있는 休川 東樊峴에 세워져서 많은 文學士를 배출 한 곳으로 김담의 유풍을 배우고 학덕을 계승하려는 태도가 자연히 배어 있다고 하였다.
渚谷講堂上樑文 12
渚谷은 예천군에 소재한 곳으로 ‘맛질’이라고도 한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公論이 정해져 祠廟를 완성하고 향당 父老들의 논의가 정해져서 白鹿洞 故事에 의거하여 건축을 진행하여 마침내 완성하니 야외의 황무지에 이 렇게 우뚝 선 건물이 많은 선비들이 수양하는 장소가 되어 오랫동안 이어지기를 바란다는 간절한 소망을 담아 전하였다.
自然亭重修上樑文 14
自然亭은 예천군 개포면 琴里에 소재하고 있다. 금리는 ‘池洞’과 ‘琴洞’, 2개의 자연촌락으로 이루어져 있고, 금동은 뒷산이 玉女가 거문고를 타는 모양이라 해서 이름 지어졌는데, 자연정이 위치한 곳은 ‘琴洞’이다. 이 건물 은 琴隱 朴希文(1586~1659)이 1647년(인조 25)에 건립하였는데, 현재의 건물은 1805년 (순조 5)에 중건한 것이다. ‘자연정’이란 이름 은 박희문 자작시 가운데 “물체는 각각 자연 의 이치에 있으니, 마음이 편안함은 자연에 돌아와서 얻음일세. ”라는 것에서 취한 것이다.
祭文
祭伯氏文 16
伯氏에게 올린 祭文이다. 형님이 세상이 떠난 것이 슬프고 내가 혼자 남은 것도 슬프다고 하면서 일찍 세상을 떠난 형님을 그리워하고 있다. 본래 7남매였으나 맏형과 맏누이는 저자가 태어나기도 전에 모두 세상을 떠났고, 5남매 가운데 2살이 더 많은 형님이 맏이 역할을 하고 그 다음이 나였는데, 이렇게 형님이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니 그 아픔이 더욱 크다고 하였다. 더욱이 1716년(숙종 42) 이래로 집안에 크고 작은 喪事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집안 모두가 침통한 상태라고 하면서 서로 의지해 가면서 집안을 함께 돌보던 형님이 세상을 떠난 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고 전하고 있다.
又(大祥時) 18
大祥 때에 伯氏에게 올린 祭文이다. 오늘 이 형님이 나를 두고 세상을 떠난 날이라고 전하면서 내가 아직까지 세상에 남아있는 것은 선산을 돌보고 집안을 잘 다스려 기반을 닦아야 하는 소임을 아직 다하지 못한 까닭이라고 하였다. 형님이 세상을 떠난 지금 宗孫은 이제 겨우 4살이고, 남동생은 지난 가을 喪妻를 하여 어린 자식들을 돌보느라 겨를이 없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자연의 변화는 끊임없이 돌고 돌아서 꽃들이 피고 지며 반복되지 않음이 없는데 어찌 사람은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느냐며 비통한 심정을 전하고 있다.

卷4
附錄
輓詞 1
李光庭‧李濰‧洪可相‧沈廷紀‧柳升鉉‧鄭重 器‧權榘‧鄭榦‧權萬‧柳聖和‧柳敬時‧韓景愈‧ 李英輔‧張緯恒‧金命錫‧趙時光‧李師蕃‧金偮 ‧金行秋‧金樟‧金汝鏜‧金麟錫‧李守仁‧柳祥 翼‧金爾甲‧權鳳瑞‧張后相‧柳後堂‧鄭玉‧李 載岳‧鄭碩範‧成世頊‧金井星‧柳夢瑞‧金宇柱 ‧張直方‧柳聖采‧金汝錂‧李槳‧李鎭萬‧姜元 一‧權復衡‧朴敬祉‧李重協‧李仁溥‧柳益華‧ 權薛‧李秀泰‧金景瀗‧權瀚‧朴昌朝‧張晩木+ 或‧權悏‧李集‧李義兼‧權薲‧洪尙寅‧金偕‧朴 時泰‧李時沆‧朴天球‧李鎭華‧朴泰來‧尹德基 ‧權命一‧趙元復‧蔡慶奎‧柳春榮‧黃壽益‧金 行萬‧權一理‧尹烇‧權鳳擧‧琴思愼‧安履性‧ 玉振諴‧金景泌‧徐萬維‧柳泳‧洪桷‧權鳳儀‧ 安璔‧李鎭周‧柳聖師‧許涵‧張緯衡‧金光國‧ 朴泰朝‧羅萬齡‧金起浩‧權顯經‧趙時璧‧權萬 斗‧權莞‧朴龍相‧金達龍‧金呂徵‧孫以雄‧金 亻+永‧申震龜‧權灝‧尹東夏‧金儋‧宋如璹‧柳 經天‧丁志學‧尹熽‧尹㷞‧趙元升‧金英燁‧蔡 慶承‧具是常‧南以奎‧朴東秀‧金瑞朝‧權大任 ‧柳晩華‧權鳳輝‧李秀春‧張錫鳳‧秦鼎和‧張 一相‧全壽山‧權苾‧安視履‧金龜錫‧黃應緝‧ 金式萬‧尹斗應‧柳聖觀‧秦季和‧金世銓‧權紋 ‧金成胤‧琴沃心‧趙元泰‧黃應綸‧尹빈(火+ 賓)‧黃扆‧宋如珏‧金鍾萬‧李景潝‧丁處重‧權 穫‧南聖雲‧羅學立‧南遠鳴‧南震鳴‧權大來‧ 朴慶來‧南宅義‧三從叔光翊‧從叔道翊‧三從 兄元培‧三從兄重培‧四從兄永培‧四從弟尙 培 등 157명이 지은 輓詞가 실려 있다.
祭文 42
三從叔 光翊이 지은 저자의 祭文이 실려 있다. 저자의 命이 여기에서 그치게 될 줄을 누가 짐작이나 했겠느냐고 하면서 하늘이 저자에게 지나치게 薄하게 대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평소 성실하게 생활했던 일이나 많은 사람들과 信義로 교류했던 일들을 회상하고, 어려웠던 시기를 함께 고생하며 지내왔던 추억을 되새기면서 슬픔을 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伯氏가 세상을 떠나자 누구보다도 비통해했던 모습을 떠올리면서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일찍 떠나버린 것에 대하여 애통해하는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墓碣銘(幷叙)43
權世淵이 지은 저자의 墓碣銘이다. 文學과 行義로 士林에 알려진 省吾堂 介立의 후손으로 高祖는 徽音이고 曾祖는 崇彦이며, 祖父는 遠意이고 부친은 命翊이다. 어머니는 安東金 氏 㴐의 딸이다. 생부는 台翊이고, 생모는 宣城金氏 宗渼의 딸이다. 1683년(숙종 9) 12월 18일 葛山里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타고 난 재주가 빼어나 말을 배우면서 이미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文辭가 뛰어나고 筆法 도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안으로 宗族 내에서나 밖으로 鄕黨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높이 평가하여 우러러보는 대상이 되었다. 19세가 되던 1701년(숙종 27)부터 여러 차례 鄕試에 응하여 합격하기도 하였으며, 1714년(숙종 40) 上庠에 올랐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선비들이 獵官運動으로 벼슬을 얻으려는 것을 보고는 곧 물러나왔다. 뒤에 향리에 葛陰精舍 를 지어 오직 학문에만 힘쓰며 후진을 교육하였으며, 門中에 족보가 없음을 민망히 여겨 종친들과 논의하여 족보를 편찬하여 간행하기도 하였다. 평소 어버이를 섬김에 정성을 다하였고 형제 사이에 友愛가 깊었으며, 친척 사이에는 和睦하여 서로 돕고 친구들과는 信義로서 사귀었다. 뿐만 아니라 言論이 공평하였으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면 도움을 주고 의문을 지닌 사람을 보면 명확하게 풀어주기도 하였다. 또한 자신을 수양함에 있어서는 최선을 다하였고 널리 經書와 역사서를 읽어 두루미치지 않는 바가 없었다. 이미 그 성취가 높았으나 결국에는 軒冕을 뜬구름처럼 여기고 만년에는 朱書를 篤信하여 『朱子大全』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공부를 하면서 사람을 가르침에 있어서는 늘 부지런히 행하여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였다. 이렇듯 그 資質과 人品은 뛰어났으나 아쉽게도 기회를 얻지 못하였으며, 수명 또한 길지 못하였다. 1736년(영조 12) 4월 19일 향년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原配豐山柳氏와의 사이에 仁鏡과 龜鏡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從後孫 宰賢이 지은 跋文이다. 從八代祖 葛陰 李恒培의 문집이라고 하면서 평소 저자의 遺文이 많이 散佚되어 안타까워하였는데, 冑孫榮漢이 시문을 수습하고 여러사람들의 輓詞를 모았으며, 權世淵이 碣銘을 지어 2冊으로 엮었다고 하였다. 조상을 기리고 받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니 이는 우리 집안에서 모두 권면하는 바이며, 서로 힘쓰는 바이라고 전하고 있다.
後識(1986)
後孫 宰春이 지은 後識이다. 從兄 宰虎氏가 수습하여 소장하고 있었으며, 族兄 宰賢氏가 혹 전해지지 못할까 염려하여 정리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일부 시문과 諸賢들의 輓詞만이 남아있어서 매우 안타까워하였다. 그러나 이미 수백 년이나 되는 오랜 세월이 흘러 모두 갖출 수가 없으니 더욱 한스럽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남아 전하고 있는 일부 시문을 살펴보더라도 저자의 학문적 소양과 문학적 성과를 어느 정도는 살펴볼 수 있으며, 李 光庭과 權榘 등의 만사를 보더라도 그 깊이를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봄에 族弟宰均과 冑孫榮漢이 계획하여 출판하게 되었다고 하였다.(송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