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암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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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사업]한국학 국영문 사전 편찬사업
한국외교사전(근대편)
서지사항
분야정치‧법제
유형제도
시대근대
집필자김영수

본문

1. 을미사변에 관한 의혹
1895년 10월 12일 명성황후가 살해된 것도 모자라 왕후폐위까지 공식 발표되자 그 여파는 오래갔다. 한국에서는 단발령과 맞물려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한국인은 을미사변을 임진왜란과 대등하게 인식할 정도였고, “삼강오륜의 도리”를 지키기 위해서 의병을 일으켰다.
일본신문에서도 국내외 여론 동향을 주시하면서 10월 8일 을미사변의 정황을 연일 신속히 보도하였다. 일본에서는 1882년 일본을 방문한 러시아황태자 니꼴라이 2세(НиколайⅡ)에 대한 쯔다(津田三藏)의 습격, 1895년 청일전쟁 협상 때문에 일본에 방문한 청국 북양대신(北洋大臣) 리훙장(李鴻章)에 대한 코야마(小山六之助)의 습격 등과 동일한 사건으로 을미사변이 인식되었다.
삼국간섭 전후 극동문제를 주목한 러시아 황제 니꼴라이 2세도 을미사변을 일본이 러시아에 도전한 사건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만큼 명성황후의 암살은 한국을 넘어서 일본과 러시아까지 영향을 미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지금까지도 을미사변의 진실규명 중 대원군의 혐의는 충분히 해명되지 못하였다. 그 배경에는 대원군 관련 다수의 보고서와 회고록이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당시 ‘8월사변보고서’를 확인하였던 법부고문 그레이트하우스(Clarence R. Greathouse, 具禮) 조차도 대원군의 역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레이트하우스는 1896년 4월 15일 히로시마재판소(廣島裁判所) 결정서와 함께 대원군에게 한통의 문서를 보냈다. 그레이트하우스는 “올해 1월 20일에 일본 히로시마재판소에서 결정서를 작성했는데, 그 결정서 내용 중 전하의 행동이 많이 언급되었다”며 “전하와 관련된 내용을 해명하실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대원군은 “아직도 이 문제가 세간에 걱정거리로 남아 있다 하니 참기 어려운 일이며 한스럽기 그지없다. 작년 8월 사변에 대해서는 여론이 제멋대로인데 나의 말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나는 잠잠히 있을 뿐이다”라고 답변하였다. 대원군은 해명보다는 침묵을 선택하였다.
을미사변의 진실은 그대로 묻히지 않았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은 경복궁에서 정동에 소재한 주한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아관파천이 성공되자 고종은 자신의 측근 인물을 내각관료로 기용했는데 그 중 가장 신뢰하는 이범진을 법부대신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고종은 법부대신 이범진에게 을미사변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를 지시하였다.
한국의 고등재판소는 13명의 한국인을 체포하고 기소하였다. 법부고문 그레이트하우스도 재판과정에 참여하여 모든 소송절차를 감독하였다. 15일 동안 진행된 재판에서 관련자 대부분이 조사되었고, 모든 재판과정은 공식적인 문서로 작성되었다. 그 과정 중 1896년 3월 16일 주한 외교관을 포함한 현장 조사단은 전 시위대 1연대장 현흥택의 안내를 받아 현장 검증을 실시하였다. 고등재판소는 ‘8월사변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미우라공사가 김홍집내각에 지시하여 명성황후의 폐위를 주도했고, 일본 병사와 자객(刺客)이 경복궁을 침입했다는 증거를 제시하였다.
고등재판소의 판결문을 근거로 고종은 일본정부에 공식적인 항의를 제기할 수 있었다. 고종은 주일 한국공사관을 통해서 일본정부에게 히로시마재판소 판결의 재심을 요청하였다. 1896년 7월 주일 한국공사 이하영은 을미사변의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었다며 히로시마재판의 재심(再審)을 요구하는 각서를 일본정부에 제출하였다. 이 문서에는 ‘8월사변보고서’를 바탕으로 제출되어 을미사변에 관한 한국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 반영되었다. 한국정부는 히로시마재판소의 판결문을 인용하면서 을미사변을 “자작(子爵) 미우라(三浦梧樓)의 주도하에 공사관서기관 스기무라(杉村濬) 및 오카모토(岡本柳之助)의 협의”하여 추진한 사건으로 규정하였다. 더구나 한국정부는 “피고(被告)들이 내전에 당도하여 단지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살상과 분란을 일으켰다”고 주장하였다. 이하영은 “작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사변에 관련된 자를 일본의 결심재판소(結審裁判所)에서 처단하는 것이 곧 (양국) 조약에서 규정한 권리이다”며 그 정당성을 강조하였다.
히로시마재판소의 재심을 요구한 고종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본에 망명한 관련자 소환을 일본정부에 요청하였다. 고종은 1897년 11월 “사변이 너무나 갑작스러운 것이어서 오랜 세월 동안에 있어 본 적이 없었다”며 그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잔인한 사건으로 규정하였다. 고종은 “원수를 갚지 못하고 장례 기간이 끝났다. 그래서 나의 슬픔은 끝이 없다”며 왕비의 죽음을 가슴에 새기면서 강한 복수심을 드러냈다. 이러한 사실은 여전히 을미사변에 대한 진실규명과 사후처리가 여전히 불충분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사건의 주요 참가자는 자신의 행동을 숨기기 위해서 노력했고, 사건의 주변 참가자는 자신의 행동을 과장하여 부풀렸고, 현장 목격자는 생명위협 및 이해관계 때문에 정확한 증언을 꺼렸다.
2. 을미사변에 관한 논쟁
기존 국내외 학계는 그동안 을미사변의 주모자 및 을미사변의 사실 규명에 관한 활발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즉 대원군의 개입 및 훈련대의 역할, 일본공사 미우라와 일본정부의 역할, 왕비 시해과정에 대한 사실 규명 등이 바로 그것이다. 대체로 모두 을미사변의 준비와 결과를 주목하였다.
기존 일본에서는 자국의 치부를 드러내는 사건이기 때문에 을미사변에 관한 연구를 오랫동안 기피하였다. 일본에서는 주로 사실 정황에 대해서 을미사변과 관련된 인물인 미우라(三浦梧樓), 스기무라(杉村濬), 기쿠치(菊池謙讓), 고바야카와(小早川秀雄) 등의 기록을 참고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사건 당일에 관한 행적을 매우 소략하게 기록하였다.
이러한 기록의 한계를 뛰어넘은 학자는 야마베(山邊健太郞)와 재일 한국인 사학자 박종근이었다. 두 사람은 각각 일본 헌정자료실(憲政資料室) 및 외교사료관(外交史料館)에 소장된 을미사변 관련 자료를 본격적으로 발굴하였다. 야마베(山邊健太郞)와 박종근은 일본공사 미우라가 사건을 주모하여 일본군인, 외교관, 영사관, 경찰, 대륙낭인 등을 동원했다는 사실을 최초로 실증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야마베와 박종근도 정작 을미사변 당일 사건의 추이를 상세하게 연구하지 못하였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을미사변을 왕비의 시해라는 비극적인 측면과 일본의 야만적인 행동을 주목해왔다. 그런데 1992년에 발간된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라는 책은 을미사변에 관한 기존 미우라 주도설을 뛰어넘어 일본측 배후에 관한 새로운 시야를 넓혀주었다. 특히 이민원은 『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파천』라는 저서를 통해서 을미사변의 전체적인 구도 및 사건 현장의 모습 등을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였다. 강창일은 『근대 일본의 조선침략과 대아시아주의』라는 저서를 통해서 을미사변에 참가한 일본인의 조직과 의식을 파헤쳤다. 그럼에도 한국학계는 열강의 외교문서를 총체적으로 이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을미사변에 대한 완벽한 사실복원을 진행하지 못한 한계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도 한국학계는 을미사변 당일 활발히 대응한 러시아공사관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없었다.
러시아에서는 김려호와 박벨라가 을미사변의 목격자 세레진-사바찐(Середин-Сабатин А.И.)의 증언과 보고서 등을 이용하여 을미사변 당일의 상황을 조명하였다. 두 사람은 을미사변 관련 러시아측 사료를 최초로 소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김려호와 박벨라는 세레진-사바찐(이하 사바찐)의 기록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사료비판에 근거한 본격적인 자료 분석을 진행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왜 사바찐이 건청궁 자객을 이끌었던 오카모토의 이름을 끝까지 숨기려고 했는가를 주목하지 못하였다.
그동안 기존연구를 통해서 현재까지 을미사변을 둘러싼 논쟁점은 다양하게 형성되었다.
첫째는 일본정부가 을미사변을 사전에 승인했다면 그 배후 인물과 조직에 관한 연구가 여전히 모호하다.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청일전쟁 이후 일본정부의 한국에 관한 외교정책을 규명하면서 미우라 공사 부임의 의미를 다시 검토해야한다.
둘째는 을미사변의 무대인 건청궁을 비롯한 공간 및 사건의 구성을 위한 시간에 관한 논란이 존재한다. 현재까지도 을미사변 관련 기초적인 사실이 부정확하다. 즉 건청궁 소재 건물의 위치, 왕과 왕비의 소재, 왕비의 암살과정, 일본군대와 일본자객의 행적, 훈련대와 시위대의 활동 등이다. 무엇보다도 기존 국내외 학계는 정작 을미사변 당일 어느 장소에서 무슨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에 대한 꼼꼼한 연구를 수행하지 못하였다.
그 배경에는 첫째 기존연구는 을미사변의 현장인 경복궁 내부 건청궁 부속 건물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건의 현장을 묘사하는데 많은 오류를 범하였다. 둘째 기존연구는 을미사변과 관련된 회고록, 증언, 보고서 등을 다양하게 이용했지만 을미사변을 가장 상세히 기록한 목격자 사바찐의 증언과 보고서를 본격적으로 분석하지 못하였다. 당시 사바찐은 을미사변 당일 현장에서 매 시간마다 사건의 추이를 확인하였다. 그래서 그 어떤 증언과 보고서 보다 사바찐의 기록은 사건에 대해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오랫동안 한국은 명성황후 암살 사건의 진상규명 뿐만 아니라 명성황후의 직접적인 암살자까지 규명하려고 노력하였다. 러시아와 일본은 사건이 발생한지 여러 해가 지나도록 다양한 사료에 기초해서 암살의 배후 논쟁을 진행하였다. 일본은 그토록 외쳤던 한국 독립 주장이 명성황후 암살로 추악하게 드러나자 그 진실을 끝까지 감추고 싶었다. 러시아는 명성황후 암살 사건을 계기로 일본 제국주의의 추악함을 드러냄으로서 극동지역에서 자국의 도덕적 우월성을 강조하려고 노력하였다. 구미 열강은 극동지역에서 상호 이익관계 때문에 점차 사건의 진실규명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을미사변, 그것은 제국주의 열강의 극동정책에서 약소국가에 살고 있는 명성황후가 아닌 한국인에게 어떤 비극적인 결말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예고한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