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집(剛齋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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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사업]한국학 기초자료사업
규장각 도서자료 연구사업(2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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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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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조선
문서종류문집 해설

본문

卷一

義尙窟, 次再從叔金山公韻, 次三從弟范汝, 金山從叔又賦來字示之仍有劈破之敎以務存養休强說之意仰復焉, 贒希-族姪欽大-聞來字韻賦示故又次之, 范汝更賦來字示之又次之, 令兒曺賦讀書仍與共之, 敬次華陽洞泣弓巖韻, 和洪綾州-容默-韻, 新秋, 與范汝夜話呼韻, 梅湖陪過齋先生共吟, 悼仲女, 獨坐, 次學而齋尊周詩韻, 萬東廟進德門重建時韻, 先墓立御製豐碑多士有詩謹次其韻以道感祝之意, 重九登高, 次金山從叔寄示韻, 栗寺歸路與諸益同吟, 新年, 贈李邇馨, 次金學士-邁淳-觀漲韻, 寄題故參判朴公-三吉-亭閣, 用隱矦韻送別張幼章-憲周, 次崔氏延㫌韻, 書大明處士吳公-孝錫-實蹟後, 甲申詠懷-二首, 次許汝章-二首, 與諸客會話偶吟, 文孝世子冊封時偶吟, 次金山從叔韻, 夏夜, 憶弟, 贈崔宗甪, 病中書示孫兒, 除夜吟, 邦慶韻, 春夜獨坐, 偶吟, 宋順汝輓, 朴禎一輓, 金秉淵輓, 閔士彥-達爀-輓, 卽事, 冬夜, 禹忠莊公-尙中-雙㫌閭韻
辭諮議疏-庚申正月 (10)
1800. 世子侍講院 諮議의 職을 사양하는 疏이다. 諮議의 직이 別諭로서 내려진 것이므로 物情이 놀라고 의혹을 가질 것이며, 또한 자신의 거칠고 서툰 자질로서는 세자를 輔導하는 방법을 극진히 할 수 없다며 체직을 청하는 내용이다.
辭召命疏-八月 (11)
1800. 소명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하는 疏이다. 조서가 大行大王(正祖)을 잃은 喪中의 괴로움 속에서 나온 것이어서 슬픔이 더욱 심하다고 소회를 밝힌 후, 교화가 새로워지고 온갖 법도가 다시 시작되는 때이므로 賢愚와 名實의 변별을 엄격히 함으로써 모든 일을 이치에 마땅히 하고 여러 품관 또한 제자리를 얻게 해야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다면서, 소명을 거두고 아울러 자신의 모든 직명을 삭제하여 주길 청하는 내용이다.
辭持平疏-辛酉正月 (12)
1801. 司憲府 持平의 職을 사양하는 疏이다. 자신은 자질이 용렬하고 비루하여 어려서는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자라서는 과거에 나아가지 못하였으며, 한 가지 기예와 작은 선행도 없이 궁벽한 시골에서 칩거하였을 뿐이므로, 사헌부 지평의 직을 담당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別諭後辭經筵官疏-二月 (14)
1801. 經筵官의 職을 사양하는 疏이다. 司憲府 持平의 체직을 허락하지만 經筵官의 체직을 허락할 수 없다는 별도의 유시를 받은 후에 작성하였다. 자신의 용렬함과 비루함을 이미 모두 밝혔는데도 체직을 허락지 않는 것은 자신에게 家學의 단서가 있을 것으로 여기기 때문인 듯하나, 자신이 소홀하고 용렬하여 닮은 바 없음은 일세가 모두 아는 바라며, 체직을 허락해 줄 것을 청하는 내용이다.
辭召命疏-五月 (15)
1801. 召命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하는 疏이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비루함을 누차 아뢰었음에도 다시 소명을 내린 것은 常例에서 벗어나는 일이며, 또한 병중에 있어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가쁘며 정신이 혼미한 등의 증상이 있어 史官의 직책에 나아갈 수 없다는 내용이다.
辭掌令疏-八月 (16)
1801. 司憲府 掌令의 職을 사양하는 疏이다. 과거의 융성한 시기에는 사람을 씀에 재주를 헤아려 임무를 맡기고 선비된 자는 스스로를 자세히 헤아려 감히 나아가지 않았는데, 자신은 비록 매우 부족한 사람이지만 스스로를 아는 것은 명백하다며, 職名을 삭제해줄 것을 청하는 내용이다.
乞召還偕來史官疏-八月 (17)
1801. 함께 올 史官을 소환해 줄 것을 청하는 疏이다. 禮로써 조정에 부르는 것은 임금의 현자에 대한 성대한 천거이고, 스스로의 分을 헤아려 나아가거나 물러나는 것은 신하의 임금 모시는 항상된 절도이니, 혹여라도 부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데도 부르거나 나아가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데도 나아간다면 위로는 예를 가벼이 여기는 실수이고 아래로는 본분을 잊는 죄임을 들어, 함께 올 사관을 소환하고 자신의 職名을 삭제해줄 것을 청하는 내용이다.
辭召命疏-癸亥二月 (18)
1803. 召命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하는 疏이다. 선비 중에는 道를 품고 自重하는 자와 分을 헤아려 自守하는 자가 있는데, 벼슬에 나가기를 꺼리는 점에서는 같지만 자중하는 자가 임금이 禮를 다하기를 기다리는 것과 달리 자수하는 자는 예가 융성할수록 감히 나아갈 수 없는 것이라고 구분한 후, 자중하는 자를 등용하는 것은 啓沃을 준비하는 것이므로 다스림을 도모하는 큰 길이 되며, 자수하는 자를 등용하지 않는 것은 廉恥를 권면하는 것이므로 속세를 교화하는 한 단서가 된다는 의견을 밝히고 있다. 이에 자신이 자수하는 것은 스스로를 헤아린 결과임에도 예의를 융성하게 하여 소명을 내린 것은 자중자에게 베풀어야 할 것을 모자란 사람에게 베푼 것이며, 이는 자신이 이름을 훔치고 임금을 속였기 때문이니 자신의 職名을 삭제하고 죄를 내려줄 것을 청하는 내용이다.
貞純大妃昇遐後進慰疏-乙丑正月 (19)
1805. 貞純大妃의 昇遐 후에 쓴 進慰의 疏이다. 純祖의 효성이 깊고 독실함을 칭찬하고, 聖體가 傷損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내용이다.
辭執義疏-丙寅正月 (20)
1806. 執義의 職을 사양하는 疏이다. 자신의 職名을 삭제하지 않은 채로 해가 이미 지났음에 걱정하며, 君臣의 관계를 父子관계에 빗대고 있다. 아비가 자식의 재주 없음을 알지 못하고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맡기고, 아들 또한 자신의 분을 헤아리지 않고 다만 어버이의 명령을 따라야한다는 것만을 안다면, 끝내 반드시 잘못되어 실패하고 죄과에 빠지게 될 것이니, 執義의 職에서 사직하기를 청한다는 내용이다.
辭召命疏-戊辰閏五月 (21)
1808. 經筵官에 임명한 召命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하는 疏이다. 임금께서 다스림을 도모하려는 뜻이 절실하고 또한 본말의 요점을 궁구하고자 하여, 자주 경연을 열어 聖訓을 토론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고 있는 상황에서, 講官을 선발함에 반드시 단정하고 바르며 정직하고 박학한 사람을 발탁하여야 啓沃 薰陶의 실효를 거둘 수 있다고 하며, 그런데 자신과 같이 비루하고 거친 자질을 지닌 사람이 외람되이 그러한 반열에 든다면 사람들이 모두 의문을 품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秉彝에 賢愚의 차이가 없듯 임금을 사랑하는 진실됨을 자신 또한 가지고 있으므로 聖學과 聖德에 대한 구구한 바람은 남에게 뒤지지 않으니 만일 자신에게 임금을 보좌하여 보탤 것이 만의 하나라도 있다면 머뭇거리고 위축되지 않겠지만, 다만 자신의 分에 담당할 수 없고 또한 병으로 인해 어쩔 수 없다고 하며, 經筵의 직함을 삭제해 줄 것을 청하는 내용이다.
辭召命疏-辛未三月 (22)
1811. 經筵官에 임명한 召命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하는 疏이다. 자신에게 학식이 있어 顧問의 반열에 들 수 있음에도 머뭇거리고 위축되어 임금의 은혜를 갚기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면 감히 마음이 편안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며, 자신의 職名을 삭제해줄 것을 청하는 내용이다.
進賀仍辭職疏-壬申六月 (23)
1812. 왕세자의 冊禮에 進賀한 후, 經筵官의 職을 사양하는 疏이다. 늦봄부터 오래된 천식 증세가 더해져서 누워 지내며 전혀 일을 살피지 못한지가 50여일이 되었다고 하며, 자신의 職名을 삭제해줄 것을 청하는 내용이다.
辭進善疏-同月 (25)
1812. 進善의 職을 사양하는 疏이다. 왕세자의 슬기로운 자질이 어린 나이에 일찍 이루어지고 지혜와 생각이 점차 깨쳐지고 있으니, 책봉을 받은 초기에 마땅히 輔導의 방법을 극진히 하여 반드시 순일하고 도덕을 익힌 선비를 얻어 함께 거처한 연후에야 가히 涵養薰陶의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인데 자신의 자질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며, 사직을 청하는 내용이다.
辭職兼辭內降官服次疏-八月 (26)
1812. 進善의 職을 사양하는 疏이다. 왕세자를 책봉하는 예가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을 축하하며, 이어 병을 조리하고 상경하라는 교시를 받았으나 자신의 병이 쉽게 나을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사직하기를 허락해 달라고 청하고 있다. 또 冊禮 일에 王大妃殿과 惠慶宮(1735∼1815)과 嘉順宮께서 世子侍講院과 世子翊衛司의 여러 신하들에게 官服을 내리실 때 자신 또한 사급의 반열에 들었으나 자신은 草萊에 엎드려 감히 명에 응하지 않았으니 곧 일개 村氓일 뿐이므로 받을 수 없다고 아뢰는 내용이다.
辭工曹參議疏-十二月 (28)
1812. 工曹參議의 職을 사양하는 疏이다. 爵은 德으로써 명하고 官은 能으로써 맡기는 것인데, 자신은 학문과 재주에서 모두 미치지 못하므로 職秩을 올려주는 예외적 은혜를 받을 수 없다며, 사직을 청하는 내용이다.
辭祭酒疏-癸酉六月 (29)
1813. 成均館祭酒의 職을 사양하는 疏이다. 太學은 敎化의 근본이고 祭酒는 선비를 가르치는 임무로서, 구차하게 주고 함부로 받을 수 없음이 다른 직책에 비해 더욱 그러하므로 반드시 학식이 밝고 덕망이 높은 자를 택하여야 하는데, 자신은 비루함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고 하며, 사직을 청하는 내용이다.
乞收還加資之命兼辭贊善疏-乙亥二月 (30)
1815. 자품을 더하여주라는 명을 거둘 것을 청하며 아울러 世子侍講院 贊善의 職을 사양하는 疏이다. 어진 이와 그렇지 않은 이를 변별하여 上下를 정하는 것은 政事의 기강을 정하는 급선무이고 천하고 어리석은 이를 멀리하여 左右를 정하는 것은 세자를 보양하는 핵심적 방법인데, 자신의 누추함과 용렬함으로는 나라와 조정의 기강을 해칠 뿐이라고 하며, 명을 거두어줄 것을 청하는 내용이다.
辭工曹參判疏-三月 (31)
1815. 工曹參判의 職을 사양하는 疏이다. 자신의 학문은 이룬 바가 없고 재주는 취할 바가 없으니 이미 분수를 헤아려 나아가기를 바라지 않으며 또한 해가 갈수록 병이 심해지고 있다고 하며, 사직을 청하는 내용이다.
進慰仍乞解職名疏-丙子正月 (32)
1816. 惠慶宮의 喪事에 대해 위로하고 이어서 贊善의 職을 사양하는 疏이다. 惠慶宮의 喪事 후 公除가 이미 지났고 해가 바뀌었음에도 聖上의 애통해하는 마음이 더욱 새로움을 위로한 후, 세자가 점점 자라남에 덕성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輔導의 때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하며 병으로 나아갈 수 없는 자신의 직명을 삭제해 줄 것을 청하는 내용이다.
辭大司憲疏-四月 (33)
1816. 司憲府 大司憲의 職을 사양하는 疏이다. 大司憲의 직책은 기강을 진작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것으로 그 책임이 막중하여, 자신과 같이 용렬한 사람이 맡을 수 없는 직책이며, 또한 하물며 자신은 태만한 죄로 인하여 마땅히 司憲府의 탄핵을 받아야 하는데 도리어 司憲府 장관의 직을 수여한다면 이것은 조정의 매우 그릇된 처사가 됨을 면할 수 없다고 하며, 사직을 청하는 내용이다.
辭職兼謝追榮恩典疏-九月 (34)
1816. 司憲府 大司憲의 職에서 사직할 것을 청하며, 겸하여 追榮한 恩典에 사례하는 疏이다. 大司憲의 직책은 그 임무가 막중하니 하루라도 헛되이 얽매일 수 없다며 사직을 청하고 있다. 아울러 증직하는 은전을 내려주시니, 일신의 영예로움이 극에 달하고 은혜가 3대에 미쳤다며 사례하는 내용이다.
大司憲及加資新命疏-丁丑四月 (35)
1817. 司憲府 大司憲의 職에서 사직할 것과 자품을 더하여 주라는 명령을 거둘 것을 청하는 疏이다. 사헌부에서 糾察하는 일과 세자시강원에서 輔翼하는 일은 모두 중임으로서 자신과 같이 용렬한 사람이 맡을 수 없다고 하며, 자품을 더하라는 명령을 거두고 아울러 본직과 겸직의 모든 직책을 삭제해 줄 것을 청하는 내용이다.
辭職兼辭周恤之命疏-十二月 (36)
1817. 承宣의 職에서 사직할 것을 청하고, 겸하여 恤典을 행하라는 명령을 거두어줄 것을 청하는 疏이다. 大司憲에서 承宣으로 이직하라는 批旨를 받았으나, 이는 덕이 높은 사람의 직책으로 자신이 감당할 수 없으며 또한 병이 깊어 나아갈 수 없다는 내용이다.
辭東宮嘉禮後賞典仍辭贊善疏-己卯十一月 (37)
1819. 東宮의 嘉禮 후에 내린 賞典이 외람되이 자신에게까지 미쳤으나 마땅치 않으니 恩頒을 거두어줄 것을 청하며, 아울러 贊善의 職을 사양하는 疏이다.
別諭後辭職疏-乙酉六月 (38)
1825. 司憲府 大司憲의 職을 사양하는 疏이다.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아침에 저녁을 기약할 수 없는 지경이 된 지 이미 여러 달인데 뜻밖에도 除旨가 다시 내려져 감당할 수 없으며, 오직 체직하라는 명만이 조금이나마 병석에서 마음을 편히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敦諭後辭職疏-丙戌二月 (39)
1826. 司憲府 大司憲의 職을 사양하는 疏이다. 나라를 위하는 임무는 言路를 열어두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며 세자를 輔導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으며 이는 곧 대사헌의 책임이니, 이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어서 명을 받들 수 없다는 내용이다.
因宰臣尹命烈相臣沈象奎疏箚待罪疏-十二月 (40)
1826. 宰臣 尹命烈(1762∼1832)과 相臣 沈象奎의 疏箚를 얻어 본 후, 소회를 밝히고 죄상을 다스릴 것을 청한 疏이다. 소차에 의하면 松都와 豊德이 合幷된 뒤 국정을 비판한 역적의 무리와 내통한 申綱에게 자신이 편지 한 통을 직접 받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자신은 병으로 蟄伏하고 있어서 그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데도 억울하게 誣衊을 입은 것이니, 먼저 자신의 職名을 삭제하고 罪狀을 다스려달라고 청하는 내용이다.
元孫誕降後進賀仍乞解兼帶諸職書-丁亥七月 (41)
1827. 元孫의 탄생을 진하하고, 이어 자신의 모든 직명을 삭제해 줄 것을 청한 疏이다. 또한 학문에 힘쓰고 덕을 진취하여 지식과 행실이 극한 곳에 이르러야만, 堯‧舜의 때와 같은 정치로 끌어올릴 수 있으며 그 요점은 朱子가 임금에게 고한 것이 상세하고도 극진하니, 그 奏箚 중에서 절실한 것을 뽑아 書筵에서 진강할 것을 건의하는 내용이다.
辭鹿皮頒賜書-八月 (43)
1827. 徽號를 올리는 경사를 맞이하여 기쁜 마음과 鹿皮 一令씩을 하사하여 준 것에 대해 사례하는 내용이다.
乞還收月送米肉之令書-己丑七月 (44)
1829. 쌀과 고기를 내리라고 한 명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하는 疏이다. 병이 날로 깊어 쇠약해져 가고 있어 죽을 날이 가까워 오고 있으나 아직 맡은 직책을 면하지 못하고 있어 사후에도 죄를 벗어날 길이 없는데, 매달 쌀과 고기를 보내주라고 한 恩命을 내려주시니 감당할 길이 없다는 내용이다.


卷二
辭大司憲兼辭米肉書-己丑七月 (1)
1829. 司憲府 大司憲의 職을 사양하며, 쌀과 고기를 내리라고 한 명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하는 疏이다. 병이 깊어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음에도 아직 겸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다시 대사헌의 직을 내려 감당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辭世孫師仍乞收米肉書-庚寅二月 (2)
1830. 世孫講書院師의 職을 사양하며, 쌀과 고기를 내리라고 한 명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하는 疏이다. 世孫講書院의 師는 그 책임이 막중하니 孝弟의 덕성을 갖추고 博聞과 道術을 갖춘 자 중에서 임명하여야 하며, 자신은 자격이 없다는 내용이다.
王世子喪後進慰疏-六月 (3)
1830. 孝明世子(1809∼1830)의 喪이 있은 후 올린 進慰의 疏이다.
孝明世子襄禮後進慰仍辭職名及米肉疏-八月 (4)
1830. 孝明世子의 襄禮를 지내고 난 후 進慰의 뜻을 아뢰고 이어서 자신의 모든 職名을 삭제할 것과 쌀과 고기를 내리라고 한 명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한 疏이다. 지금과 같이 國勢가 위태로울 때에는 世孫을 보양하는 것보다 위급한 일이 없으며 보양하는 道는 궁료를 신중히 뽑는 데에 있으나, 자신은 병들고 정신이 혼미하여 감당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未赴召命待罪疏-九月 (6)
1830. 召命에 따르지 못하여 待罪하는 疏이다. 王世孫(憲宗, 1827∼1849)의 冊禮가 순조롭게 끝난 것을 축하한 후, 부르심에 응하지 못한 죄를 벌하여줄 것을 청하는 내용이다.
辭王世孫冊禮後豹皮頒賜疏-十月 (7)
1830. 王世孫의 冊禮 후에 표범 가죽을 내리라고 한 有旨를 거두어 줄 것을 청하는 疏이다. 자신은 召命을 받고도 출사하지 않았으니 벌을 내려야 한다는 내용이다.
孝明世子常事後進慰疏-辛卯五月 (7)
1831. 孝明世子의 常事 후 進慰의 뜻을 아뢰는 疏이다. 文祜廟의 練事를 마치고 나니 백성들의 원통함이 새로운데 聖上의 부모로서의 심정은 다시 어떠하겠느냐며 위로하는 내용이다.
辭大司憲疏-十二月 (8)
1831. 司憲府 大司憲의 職에서 사직할 것을 청하는 疏이다.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으며 자질 또한 남에게 미치지 못하니 사직을 허락하여 달라는 내용이다.
辭王世孫開講後召命疏-壬辰閏九月 (10)
1832. 王世孫이 開講한 후에 내린 召命을 거두어 줄 청하는 疏이다. 병이 악화되어 風痺이 된 지 오래여서 세손을 薰陶하는 임무를 맡을 수 없다는 내용이다.
純宗大王昇遐後進慰疏-甲午十一月 (11)
1834. 純祖(1790∼1834)의 昇遐 후 올린 進慰의 疏이다.
因山後進慰兼勉進聖學疏-乙未五月 (12)
1835. 純祖의 因山禮를 마친 후 進慰의 뜻을 아뢰고, 聖學에 힘쓸 것을 면려하는 疏이다.
작게는 服食起居의 절도가 여기에 갖추어져 있으며, 크게는 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방법이 여기에 근본하고 있으니, 『小學』을 진강하는 것보다 절실한 것이 없다는 내용이다.
敦諭後待罪疏-乙未十一月 (13)
1835. 회답을 받고 待罪하는 疏이다. 병이 깊어 부르심에 응하지 못한 죄를 벌하고 자신의 모든 직명을 삭제할 것을 청하는 내용이다.
辭刑曹判書疏-丙申正月 (14)
1836. 刑曹判書의 職을 사양하는 疏이다. 자신의 庸陋한 자질로서는 맡을 수 없는 重任으로 본분 밖의 일이라는 내용이다.
純宗大王大祥後進慰疏-十一月 (16)
1836. 純祖의 大祥禮를 마친 후 進慰의 뜻을 아뢰는 疏이다.
擬請過齋金先生贈爵諡疏-庚午○代湖西儒生作 (16)
1810. 過齋 金正默(1739∼1799)에게 작위와 시호를 추증할 것을 청하는 疏이다. 호서지방의 유생들을 대신하여 작성하였다.
史官承膺祚傳諭後書啓-辛酉五月 (20)
1801. 史官 承膺祚가 와서 諭示를 전한 뒤에 올린 書啓이다. 부르심을 받고도 나아가지 못함에 대해 사죄하는 내용이다.
史官趙慶遠傳諭後書啓-八月 (21)
1801. 史官 趙慶遠이 와서 諭示를 전한 뒤에 올린 書啓이다. 司憲府 掌令의 職에 임명한다는 유시를 받았으나 병으로 나아갈 수 없으니, 엄벌을 기다린다는 내용이다.
史官崔雲翰傳諭後書啓-同月 (21)
1801. 史官 崔雲翰이 와서 諭示를 전한 뒤에 올린 書啓이다. 사관이 누차 찾아와 각별한 유시를 내려주심에 마땅히 억지로라도 조정에 임해야 하나, 병세가 그러하지 못하다는 내용이다.
史官崔雲翰傳諭後書啓-十二月 (22)
1801. 史官 崔雲翰이 와서 諭示를 전한 뒤에 올린 書啓이다.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병에서 일어날 수만 있다면 君臣의 의리를 마땅히 다하겠으나 그럴 수 없으니, 소명을 거두어달라는 내용이다.
史官崔雲翰傳諭後書啓-壬戌正月 (22)
1802. 史官 崔雲翰이 와서 諭示를 전한 뒤에 올린 書啓이다. 학식이 미천하고 병세는 깊어, 성은에 보답할 길이 없음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史官車信用傳諭後書啓-癸亥十二月 (23)
1803. 史官 車信用이 와서 諭示를 전한 뒤에 올린 書啓이다. 반복하여 소명을 내려주심에 몸둘 바 모르겠으나 추위가 찾아와 병이 깊어졌다고 아뢰는 내용이다.
史官白慶楷傳諭後書啓-甲子正月 (23)
1804. 史官 白慶楷가 와서 諭示를 전한 뒤에 올린 書啓이다. 仁政展에 화재가 났다는 소식에 놀라고 있던 중 뜻밖에 다시 하교를 내리시니, 愛君의 천성을 자신 또한 지니고 있어 마땅히 정성을 다해 돕고 싶어도 병으로 나아갈 수 없음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史官趙鍾永傳諭後書啓-乙丑六月 (24)
1805. 史官 趙鍾永가 와서 諭示를 전한 뒤에 올린 書啓이다. 매번 병으로 인해 소명을 받들지 못하고 있으니, 자신을 내쳐 죄를 면하게 해달라고 청하는 내용이다.
史官李游誠傳諭後書啓-戊辰六月 (25)
1808. 史官 李游誠이 와서 諭示를 전한 뒤에 올린 書啓이다. 자신은 우매하고 무지한 사람이어서 천거할 만한 자격이 없다고 아뢰는 내용이다.
史官趙奎昇傳諭後書啓-同月 (25)
1808. 史官 趙奎昇이 와서 諭示를 전한 뒤에 올린 書啓이다. 어진 사람을 천거하라는 하교를 다시 받았으나, 그럴만한 자격이 없음을 아뢰는 내용이다.
史官朴來謙傳諭後書啓-壬申十一月 (26)
1812. 史官 朴來謙이 와서 諭示를 전한 뒤에 올린 書啓이다. 陞秩의 명을 거두어달라는 내용이다.
史官金持泰傳諭後書啓-癸酉七月 (27)
1813. 史官 金持泰가 와서 諭示를 전한 뒤에 올린 書啓이다. 속히 올라오라는 유시를 받았으나, 자신의 비루한 견식으로 淸朝에 누가 될 수 없으며 병 또한 깊다고 아뢰는 내용이다.
史官全國憲傳諭後書啓-己卯三月 (27)
1819. 史官 全國憲이 와서 諭示를 전한 뒤에 올린 書啓이다. 부임하라는 조서를 받고도 하지 않은 채 헛되이 職名만 유지하고 있음을 벌하여 달라는 내용이다.
史官徐有贊傳諭後書啓-丙戌三月 (28)
1826. 史官 徐有贊이 와서 諭示를 전한 뒤에 올린 書啓이다. 홀로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해 부임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진정하는 내용이다.
史官李冀禎傳諭後書達-丁亥十月 (28)
1827. 史官 李冀禎이 와서 諭示를 전한 뒤에 올린 書啓이다. 병세가 점점 심해지고 있으니 司憲府의 제 직책에서 삭직하여 편히 죽음을 맞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이다.
史官金鉉復傳諭後書達-己丑十二月 (28)
1829. 史官 金鉉復가 와서 諭示를 전한 뒤에 올린 書啓이다. 쌀과 고기를 내리라는 명을 환수해 달라는 요청에 대해 죄가 아니라는 유시를 받고 황송함을 아뢰는 내용이다.
史官卓雲翰傳諭後書達-庚寅二月 (29)
1830. 史官 卓雲翰이 와서 諭示를 전한 뒤에 올린 書啓이다. 誤恩을 거두어달라는 상소에 대해 거두지 않겠다는 유시를 받고, 이미 과도한 祇受로 자신의 본분을 잊는 죄를 범하였으므로 다시 지수를 받을 수 없다고 아뢰는 내용이다.
史官崔致常傳諭後書啓-九月 (30)
1830. 史官 崔致常이 와서 諭示를 전한 뒤에 올린 書啓이다. 王世孫의 冊禮를 앞두고 내린 유시를 받고 감읍하였으며, 속히 병이 나아 나아가길 원한다는 내용이다.
史官金煕逌傳諭後書啓-壬辰九月 (30)
1832. 史官 金煕逌가 와서 諭示를 전한 뒤에 올린 書啓이다. 世孫의 자질이 남다르고 배움의 속도가 빨라 자신도 세손의 옆에서 학문을 돕고 싶으나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史官金致坤傳諭後書啓-乙未十一月 (31)
1835. 史官 金致坤이 와서 諭示를 전한 뒤에 올린 書啓이다. 升秩의 명을 받고 거듭 聖政에 누가 됨에 송구함을 아뢰는 내용이다.
經筵繼講冊子議-甲子十月 (31)
1804. 經筵에서 이어서 강할 책자에 관한 獻議이다. 자신은 無聞無知한 사람으로 답할 자격이 없다는 내용이다.
禮朔進退議-乙丑二月 (32)
1805. 貞純大妃의 喪禮에 관한 獻議이다. 예를 치룰 달을 앞당기고 물리고 하는 일은 변통시키는 것에 관계가 되고 또한 상례는 막중한 일이기 때문에 감히 쉽게 의논드릴 수 없다는 내용이다.
經筵繼講冊子議 (32)
經筵에서 이어서 강할 책자에 관한 獻議이다. 朱子의 『近思錄』의 순서에 따라 독서할 것을 아뢰는 내용이다.
春宮冠禮服色議-己卯三月 (32)
1819. 왕세자의 冠禮시 服色에 관한 獻議이다. 鴉靑색 直領을 입고 絛帶를 띠는 것을 先朝에서 행하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며 지금은 冊禮 후에 冠禮를 행하는 것이어서 선조에서 행한 講學시의 服色 또한 마땅하지 않으니, 변통의 일이기 때문에 감히 쉽게 의논드릴 수 없다는 내용이다.
因山前春宮開講當否議-辛巳五月 (32)
1821. 세자의 開講 시기에 관한 獻議이다. 因山禮를 마치기 전에 개강하자는 의견은 학문을 면려하려는 것이고 인산례 후에 개강하자는 의견은 孝弟를 우선시하는 것으로 經을 지키는 것과 權을 따르는 것의 차이가 있을 뿐이므로, 의리와 형세를 헤아려 재량하는 데에 달려있다는 내용이다.
山陵合祔時將事服議-同月 (33)
1821. 山陵 합장 때의 복식에 관한 獻議이다. 자신은 禮學에 대해 아는 바 없으니 선현들의 여러 의론을 모아 토론하여 결정할 것을 권하는 내용이다.
嘉順宮喪服制議-癸未二月 (33)
1823. 嘉順宮의 喪禮시의 服制에 관한 獻議이다. 가순궁의 상례는 王朝와 관련된 막중한 變禮이므로 미천한 자신이 감히 쉽게 의논드릴 수 없다는 내용이다.
先正臣李珥宗嗣議-癸未九月 (34)
1823. 李珥(1536∼1584)의 宗嗣에 관한 獻議이다. 이이의 종사에 관한 일을 李希祖가 非禮와 不正으로 몰아붙여 상소하였으나, 故 相臣 金壽興(1626∼1690)과 文正公 宋時烈(1607∼1689)이 서신을 왕복하며 상의하고 조정에 건의하여 특별히 명을 받음으로써 倫紀가 정해진 지 이미 백여 년이 지났으며, 그때의 公私 문서가 모두 남아있고 오늘날 조정의 공론이 사라지지 않았으니 성상께서 재량하는 데에 달려있다는 내용이다.
大報壇祝用初字當否議-庚寅三月 (34)
1830. 大報壇 春享의 祝文에 관한 獻議이다. 축문 가운데 上旬의 날짜에다 ‘初’자를 쓰는 것은 大統曆法이 아니라는 내용이다.
王世子喪服制議-庚寅五月 (35)
1830. 王世子 喪禮의 喪服에 관한 獻議이다. 자신은 禮學에 대해 아는 바 없으며, 선조가 邦禮와 관련하여 禍를 입은 적이 있어 어찌 답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겠다는 내용이다.
純宗大王昇遐後王世孫成服時冠禮當否議-甲午十一月 (35)
1834. 純祖의 昇遐로 王世孫이 成服한 채 冠禮를 행하는 것에 관한 獻議이다. 喪으로 인하여 관례를 행하는 것은 禮曹에서 아뢴 『疑禮問解』의 설을 따르는 것이 마땅한 것 같다는 내용이다.
純宗大王世室議-十二月 (36)
1834. 純祖의 世室에 관한 獻議이다.


卷三
答洪伯膺-直弼 (1)
洪直弼(1776∼1852)에게 답한 편지이다. 평소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글을 짓지 않아 스승 金正默의 遺文이 많지 않음에도 아직 편차를 수습하지 못하고 있으며, 力量과 文辭에서 모두 자신이 미치지 못할 바가 많아 오래도록 초안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는 등 遺文을 정리하는 과정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내용이다.
答洪伯膺 (2)
洪直弼에게 답한 편지이다. 근래에 무슨 책을 읽으며 누구와 함께 강구하는지 등을 물으며, 함께 만나 배울 수 없음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答洪伯膺 (3)
洪直弼에게 답한 편지이다. 병이 깊어 책을 펼치지 못한 지 오래되었는데, 스승의 덕을 드러내지 못하고 죽게 될까 두렵다는 내용이다.
答洪伯膺 (4)
洪直弼에게 답한 편지이다. 庶子가 嫡母의 黨을 위하여 服을 입는 것과 題主가 되는 것 등 祭禮에 관해 토론하는 내용이다.
答安▣▣-在默 (4)
安在默에게 답한 편지이다. 知覺이 心에 속하는지 智에 속하는지에 관한 질문에 대해, 추위와 더위를 알고 배고픔과 배부름을 아는 것은 심의 작용이고 일의 마땅한 바를 아는 것은 理의 所以然을 깨닫는 것이니 지의 작용이라고 하면서, ‘지각’이라는 두 글자는 그것이 가리키는 바에 따라서 심에 속하기도 하고 지에 속하기도 한다고 답하고 있다. 그러나 中庸의 서문에서 人心道心을 논하여 말하기를 ‘心의 虛靈知覺은 하나일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도심의 지각은 지에 속하고 인심의 지각은 심에 속하지만 지각은 모두 허령을 主로 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答安▣▣ (5)
安在默에게 답한 편지이다. 사람과 동물의 마음이 같지 않음을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孟子 小註에서 眞西山이 ‘均有一心’이라고 한 것은 사람과 동물이 모두 하나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 사람과 동물의 마음이 같다고 한 것이 아니며, 그가 ‘能存不能存’이라고 한 것은 어두움과 밝음, 열림과 막힘의 같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또한 朱子는 盡心章 集註에서 ‘神明’이라는 두 글자로 마음을 해석하였으니, 마음은 스스로 광명하며 이는 혈육의 마음을 가리킨 것이 아니다. 마음의 광명은 반드시 性을 기다리는데, 사람과 동물의 마음에 통함과 막힘의 다름이 있기 때문에 성에도 치우침과 온전함이 있다.
答安▣▣ (6)
安在默에게 답한 편지이다. 재주있고 뜻있는 자를 만나기 어려움, 스승의 문장을 정리하는 것의 시급함, 서울과 시골로 떨어져 있는 안타까움 등을 적은 안부편지이다.
答安▣▣ (7)
安在默에게 답한 편지이다. 사람이 비록 지극히 악하더라도 未發의 때에는 진실로 선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 악은 氣禀의 탁함에서 비롯된다는 것, 탁함도 맑음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 性의 치우치거나 온전함은 氣에 따라 같지 않다는 것, 성에 치우침이 없다면 氣局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 등 理氣心性의 문제를 논하는 내용이다.
答從舅申公-晫 (8)
從舅인 申晫에게 답한 편지이다. 後子가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조상의 제사를 받들어 承重하는 문제 등 鄭氏 가문의 禮疑類輯 중의 몇 조목과 관련하여 禮에 대해 논하는 내용이다.
答從舅申公 (9)
申晫에게 답한 편지이다. 宋時烈(1607∼1689)이 민씨 집안의 變禮를 논한 것을 근거로 삼아, 代服과 承重의 구별이 옳지 않음을 논하는 내용이다.
答從舅申公 (9)
申晫에게 답한 편지이다. 신탁이 민씨 집안의 변례를 논한 송시열의 의론은 참고할 만하지 않다고 한 것에 대해, 송시열의 의견은 주자의 설에 근본하고 있다고 하며 代服과 承重을 나누어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答從舅申公 (10)
申晫에게 답한 편지이다. 아버지가 아직 受服하지 않았을 때 자식이 대신 服斬하는 것을 承重과 나누어 말할 수 없다는 입장을 거듭 밝히는 내용이다.
答申時叔-在應 (12)
申在應에게 답한 편지이다. 代服이 곧 承重이라는 의견을 밝히는 내용이다.
答洪成伯-奭周 (12)
洪奭周(1774∼1842)에게 답한 편지이다. 인재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 자신은 어둡고 용렬하여 사람을 알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일찍이 병으로 누워있어 선비들과 교제한 바 없으므로 인품은 물론이고 얼굴을 아는 사람조차 드물다고 답하고 있다. 또한 조정에서 쌀과 고기를 내려주는 은혜를 받고 감히 사양할 수 없으나 천한 신분으로 편치가 않다는 심정을 적고 있다.
答洪成伯 (13)
洪奭周에게 답한 편지이다. 성질이 거칠고 世務를 알지 못하며 병으로 궁벽한 곳에 칩거해있어 들은 바도 없으므로 자신의 어리석은 의견을 전하고자 하여도 그럴 수가 없다고 하면서, 그러나 정치의 요체는 ‘誠’이라는 한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진실되게 임한다면 적중하지는 않더라도 멀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밝히고 있다.
答洪成伯 (13)
洪奭周에게 답한 편지이다. 지난 번 편지에서 자신이 ‘誠’을 말한 것을 지나치지 않고 일삼고 있음에 그 겸허한 성덕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答洪成伯 (14)
洪奭周에게 답한 편지이다. 沉厚한 기상도 지나치면 반드시 강함에서 잃는 흠결이 있게 된다고 하며 면려할 것을 면려하고 고칠 것을 고쳐 중용으로 나아간다면 학문과 정치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권하는 내용이다.
答▣▣▣ (15)
某氏에게 답한 편지이다. 經筵官에 나아갈 수 없는 이유를 적고 있다. 선비의 出處는 마땅히 먼저 자신의 분수를 헤아리는 것이니, 자신을 헤아리지 않고 출사한다면 부끄러움을 면할 수가 없으며, 헤아려 스스로 불가함을 알면서도 나아간다면 義라고 할 수가 없고, 또한 이를 무릅쓰고 나아가고자 해도 병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는 내용이다.
答▣▣▣ (15)
某氏에게 답한 편지이다. 성상을 輔導하는 임무는 재주와 학식과 덕업을 갖춘 자가 아니면 결단코 그 책임을 맡을 수 없다며 자신이 경연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는 이유를 밝히는 내용이다. 또한 보내온 편지에서 ‘獨善忘世’라고 한 것은 밖에서 사람의 裏面을 알지 못해 범연히 말한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答▣▣▣ (16)
某氏에게 답한 편지이다. 마음과 기질에 관해 논하는 내용이다. 마음은 비록 氣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지만 氣와 비교하면 자연히 또한 영명하다는 것이 주자의 가르침이니, 곧바로 기질에로 귀속시켜 맑음과 탁함 순수함과 잡박함으로써 허령한 본체와 함께 논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答▣▣▣ (17)
某氏에게 답한 편지이다. 마음이 조급해지는 병통을 논한 것에 대해, 李珥의 『聖學輯要』를 인용하며 자신의 의견을 펼치고 있다. 『성학집요』의 浮念을 다스리는 법에 의하면, ‘提掇此心, 勿與俱往’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持敬을 의미하고 ‘不求速成, 不生懈意’라고 하였으니 곧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라는 것으로, 경을 유지한지 오래되면 함양이 무르익어 부념이 물러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보내온 편지에서 말한 未發은 생각이 없을 수 없으므로 已發에 속하며, 부념이 제거된 후 심체가 선 연후에야 미발의 경지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答尹明直-光演 (18)
尹光演에게 답한 편지이다. 이이 후손의 宗事에 관해 논하는 내용이다.
答尹明直 (19)
尹光演에게 답한 편지이다. 미발은 마음의 고요함이므로 본체가 아니고, 능히 움직이고 능히 고요할 수 있는 것이 본체라는 윤광연의 의견을 반박하는 내용이다. 마음은 한 몸의 주재로서, 마음에는 움직임과 고요함이 있는데 고요함은 본체가 확립된 것이고 움직임은 작용이 행하지는 것이며 주재한다는 것은 움직임과 고요함을 모두 주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答權景奎-五應-別紙 (20)
權五應에게 답한 편지이다. 이이 후손의 宗事에 관해 논하는 내용이다.
答李與之-點 (21)
李點에게 답한 편지이다. 스승 金正默(1739∼1799)의 全書를 刊印하는 일과 관련하여 의논하는 내용이다.
答李與之 (21)
李點에게 답한 편지이다. 스승 김정묵의 전서를 重刊하는 일과 전서의 제목을 정하는 일 등을 의논하는 내용이다.
答李與之 (22)
李點에게 답한 편지이다. 스승 김정묵의 전서를 刊役하는 것에 대해 다행스럽게 여긴다는 뜻을 밝히며, 그러나 拾遺에 부록을 달아 문자를 첨가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견해를 전하고 있다. 더구나 이미 李縡(1680∼1746)의 校正을 거친 것이므로 뒷사람들이 손댈 수 없다는 의견이다.
答李與之 (23)
李點에게 답한 편지이다. 이이 후손의 宗事에 관해 논하는 내용이다. 이미 당초에 바른 倫序를 명백히 했으며, 대신들의 지극한 상의를 통해 정해진 것이니 시비가 분명한 일이라는 의견을 밝히고 있다.
答李與之 (23)
李點에게 답한 편지이다. 이이 후손의 宗事에 관련해 이미 처분이 정해진 후에 다시 논란이 생겨 자신에게 詢問의 명이 내려졌으나, 일이 막중하고 공론이 이미 있으므로 자신의 진언 여부는 일을 처리하는 데 별 관련이 없을 것이라 하며 獻議하지 않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答張幼章-憲周 (24)
張憲周에게 답한 편지이다. 심신을 수렴하고자 하나 병이 깊고, 독서하고자 하나 두려움이 생기니, 시절이 비분하여 산천에 머물 수밖에 없음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答張幼章 (25)
張憲周에게 답한 편지이다. 長子와 長孫이 죽어 없을 경우의 喪禮에 관해 논하는 내용이다.
答南純之 (25)
南純之에게 답한 편지이다. 병을 아는 것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이라는 것이 주자 문하의 약방이라고 하며, 자신의 병통에 나아가 공부할 것을 권하는 내용이다.
答南純之 (25)
南純之에게 답한 편지이다. 率性의 道는 天에서 나와서 바꿀 수 없으며, 도의 實體는 나에게 갖추어져서 떠날 수 없다는 『中庸』 首章의 의미를 논하는 내용이다. 단 억지로 안배하지 말 것을 충고하고 있다.
答南純之 (26)
南純之에게 답한 편지이다. 『중용』의 尊德性과 道問學의 문제 등 질문 항목에 따라 답하는 내용이다.
答徐夏卿-忠輔 (27)
徐忠輔에게 답한 편지이다. 이이 후손의 宗事를 정한 것은 이미 선왕의 특명이 있었고 이미 백여 년이나 지난 일인데, 갑자기 李希祖의 상소로 인하여 예에서 벗어나는 일인 것처럼 논의되고 있음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答徐夏卿 (27)
徐忠輔에게 답한 안부편지이다.
答朴▣▣-履洙 (28)
朴履洙에게 답한 편지이다. 禫祭에 윤월을 계산하지 않는 것 등 祭禮에 관해 논하는 내용이다.
答宋▣▣-聖圭 (29)
宋聖圭에게 답한 편지이다. 비석을 세운 곳에 물이 스며들어 옮겨 세웠는데, 다른 편치 않은 점은 없는지 등을 묻는 내용이다.
答鄭▣▣-禹鉉 (29)
鄭禹鉉에게 답한 편지이다. 9월 동안 服을 입는 제도 등 喪禮에 관해 논하는 내용이다.
答徐德哉-耆輔 (30)
徐耆輔에게 답한 편지이다. 洋學이 다시 흥기하고 있음을 염려하는 내용이다.
答徐德哉 (31)
徐耆輔에게 답한 편지이다. 질문에 대해 항목별로 답하고 있는데, ① 心은 性과 情을 통섭한 것이며, 그 허령불매함을 위주로 하여 보아야 한다는 것 ② 나누어 말하면 五常이고 합하여 말하면 혼연히 마음에 갖추어져 있는 태극이니, 오상의 밖에 별도의 一原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③ 心은 性과 대대하여 말하면 氣이지만, 氣의 精爽이므로 血氣에 비하면 저절로 영명하다는 것 등을 말하고 있다.
與鄭參奉-燖-校理-燼 (32)
鄭燖과 鄭燼에게 보낸 안부편지이다.
答李季麟-趾秀 (33)
李趾秀에게 답한 편지이다. 『傳心錄』에 대하여 토론하는 내용이다.
答韓季鷹-公翰 (33)
韓公翰에게 답한 편지이다. 舊習을 제거하기 어려움은 모두 의지가 돈독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보내온 편지를 보니 의지가 돈독하여 날로 새로워지는 효험이 있을 것이라고 격려하는 내용이다.
答韓季鷹 (34)
韓公翰에게 답한 편지이다.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의 喪禮에 관해 논하는 내용이다.
答韓季鷹 (34)
韓公翰에게 답한 편지이다. 질문에 대해 항목별로 답하고 있는데, ① 『中庸』 首章의 註에서, 氣가 形을 이룰 때 理 ‘또한’ 부여된다고 하여 ‘또한’이라는 글자를 넣은 이유는 理와 氣 사이에 先後가 없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것, ② 人物이 태어남에 ‘인하여’ 각각 부여된 이치가 있다는 것에서, ‘인하여’의 의미는 ‘곧’과 같다는 것, ③ 『心經』 脩身章의 註 가운데 ‘舍去達去’라고 한 것에서, ‘舍’는 명을 버림을 말하고 ‘達’은 이치에 통달함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 등을 말하고 있다.
答曺景中-洛奎 (36)
曺洛奎에게 답한 편지이다. 東宮의 喪事를 맞아 애통한 마음을 적고 있다.
答曺景中 (37)
曺洛奎에게 답한 편지이다. 禫祭의 절차에 관해 논하는 내용이다.
答金公厚-㙉 (37)
金㙉에게 답한 편지이다. 禫祭에 신주에 절하는 參神을 행해도 좋다는 것을 權尙夏(1641∼1721)의 학설로 증명하는 등 祭禮에 관해 상의하는 내용이다.
答金公世-垈 (38)
金垈에게 답한 편지이다. 外叔을 弔喪하는 예에 관해 상의하는 내용이다.
答金公世 (38)
金垈에게 답한 편지이다. 弔禮의 형식과 절차 등에 관한 질문에 항목별로 답하고 있다.
答金公世 (39)
金垈에게 답한 편지이다. 告子가 性이 理임을 알지 못하고 氣로써 성을 논하자 맹자가 리의 같지 않음을 말하여 고자의 말문이 막힌 것이라는 것, 이에 朱子가 註에서 리의 같지 않음으로써 맹자의 뜻을 밝혔다는 것, 그러나 리의 같지 않음은 실제로는 기품의 치우침과 온전함의 다름이라는 것, 따라서 眞西山이 ‘기로써 말하면’, ‘리로써 말하면’이라고 하여 둘로 나누어 말한 것은 주자의 뜻과 배치되지 않는다는 것 등 『孟子』에 대해 토론하는 내용이다.
答李仲涵-源彙 (40)
李源彙에게 답한 편지이다. 敬의 방법은 하나가 아니지만 그 지극한 곳을 논한다면 主一이 아님이 없으니, 비록 사물이 한꺼번에 닥쳐오더라도 번쇄하게 대응하여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고 하나의 단락마다 자신의 分을 다할 수 있다면 마음이 그 깨어있음을 잃지 않으므로, 主一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등 敬工夫에 관해 논하는 내용이다.
答李仲涵 (41)
李源彙에게 답한 편지이다. 안자와 맹자의 기상이 같지 않은 것은 실로 기품의 다름에 연유하지만 맹자의 재주가 높음 또한 기품에 달린 것이라는 것, 주돈이와 장재의 誠과 정자의 敬이 비록 위주로 하는 바는 같지 않지만 성과 경 모두 치우쳐서 없앨 수 없다는 것 등을 논하고 있다.


卷四
答金維誠-博淵 (1)
金博淵에게 답한 편지이다. ① 『大學』의 正心은 마음을 다스리는 지극한 공부이지만 공부함에 힘써야 할 곳으로 致知와 誠意보다 앞서지 않으니, 곧바로 心體 상에 나아가 바르게 하는 공부를 하려고 한다면 공부의 순서를 잃을 뿐만 아니라 입각처가 없게 된다는 것, ② 敬은 動靜을 꿰뚫고 始終을 이루는 것으로 操存이 곧 경공부인데, 심체 상에서 전혀 힘쓰지 않는다면 의혹이 없을 수 없다는 것 등, 마음공부에 대해 충고하는 내용이다.
答兪季衡-莘煥 (1)
兪莘煥에게 답한 편지이다. 마음과 입이 상응하지 않는 것은 客念이 모두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며, 이치와 일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실천에 미진한 바가 있기 때문이니 더욱 노력할 것을 권면하는 내용이다.
答朴▣▣-升鉉 (2)
朴升鉉에게 답한 편지이다. 祔祭를 지냄에 宗家가 멀고 宗孫이 어릴 경우 다른 사람이 대신 행하는 것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이다.
答▣▣▣ (2)
某氏에게 답한 편지이다. 後事를 세우는 것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이다.
答李善長-在元 (3)
李在元에게 답한 편지이다. 喪禮의 變禮에 관해 의논하는 내용이다.
答鄭殷賚-煥弼 (3)
鄭煥弼에게 답한 편지이다. 이미 吉祭를 행하였다면 禫月이 아직 다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의견을 피력하는 내용이다.
答李任道-遠重 (3)
李遠重에게 답한 편지이다. 학설을 드러내는 데 급급하지 말 것을 충고하는 내용이다.
答李任道 (4)
李遠重에게 답한 편지이다. 人性과 物性의 同異 문제는 학자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지만 선배들의 논쟁도 끝내 귀일하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먼저 切己處에서 공부할 것을 권하는 내용이다.
答李任道 (4)
李遠重에게 답한 편지이다. 일상생활에서 當然之則을 구하는 것이 학문하는 실질됨이라고 하면서, 공부 방법에 대해 조언하는 내용이다.
答趙秀而-(氵+奎) (5)
趙(氵+奎)에게 답한 편지이다. 학문에 진척이 없다는 걱정에 대해, 공부는 노력과 분수에 따라하는 것이니 너무 조급한 것이 오히려 병이 될 수 있다고 조언하는 내용이다.
答趙秀而 (5)
趙(氵+奎)에게 답한 편지이다. 마땅히 해야 할 바에 마음을 다하지 않고 우뚝하게 앉아 책을 읽을 뿐이라면 공부에 얻어지는 바가 없을 것이라고 조언하는 내용이다.
答趙秀而 (6)
趙(氵+奎)에게 답한 편지이다. 祔祭의 시기를 정하는 문제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이다.
答柳▣▣-命基 (6)
柳命基에게 답한 편지이다. 죽은 뒤의 職銜으로 인해 신주를 고쳐 쓰는 일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이다.
答柳▣▣ (7)
柳命基에게 답한 편지이다. 『中庸』과 『大學』은 『書經』과 『易經』의 설에 근본하고 있지만, 『論語』와 『孟子』는 한 가지 일을 기록한 것이 아니므로 그 근원을 구할 수 없다는 것 등 질문에 답하는 내용이다.
答族叔-煥謙 (7)
宋煥謙에게 답한 편지이다. 吉祭는 喪 후의 제사이므로 閏月에 행할 수 있으나, 禫祭가 윤월에 있다면 이는 正月이 아니므로 담제와 길제를 함께 행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 등 祭禮에 관해 토론하는 내용이다.
答具士郁-文鎬 (8)
具文鎬에게 답한 편지이다. 吉祭는 喪 후의 제사이므로 閏月에 행하여도 불가할 것이 없다는 의견을 밝히는 내용이다.
答柳▣▣-敬基 (9)
柳敬基에게 답한 편지이다. 나이어린 고아가 부모의 喪을 追後하는 문제 등에 관해 논하는 내용이다.
答柳▣▣ (9)
柳敬基에게 답한 편지이다. 출가한 여식이 부모에게 期服을 내려 입는 것 등 제례의 복식에 관해 논하는 내용이다.
答愼▣▣-必熺 (9)
愼必熺에게 답한 편지이다. 心性의 同異를 논한 많은 설을 섭렵하여 논쟁의 자료로 삼는 것의 말폐를 지적하는 내용이다.
答愼▣▣ (10)
愼必熺에게 답한 편지이다. 理가 있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에 대해 논하는 내용이다.
答趙宗欽 (10)
趙宗欽에게 답한 편지이다. 書院의 位版을 고치는 문제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이다.
答鄭汝弼-煥道 (11)
鄭煥道에게 답한 편지이다. 三虞와 卒哭이 겹칠 경우의 절차와 喪服의 체제 등에 관해 논하는 내용이다.
答朴基榮 (11)
朴基榮에게 답한 편지이다. 양자의 喪服 문제를 논하는 내용이다.
答金一衡-赫權 (11)
金赫權에게 답한 편지이다. 人性과 物性을 논함에 ‘理는 같고 氣는 다르다’는 것으로 인하여 강구할 것을 조언하는 내용이다.
答蔡▣▣-寬默 (12)
蔡寬默에게 답한 편지이다. 독서할 때 마음이 산란해지는 병통에 대해서 淸心의 노력을 가할 것을 면려하는 내용이다.
與族孫宗洙 (12)
族孫인 宋宗洙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이 후손의 宗事에 대한 다툼이 있는 것에 대해, 倫序가 이미 크게 정해진지 백여 년 후에 先賢의 正論을 어지럽히려는 變怪에 지나지 않으며 이는 애초에 떳떳하고 명백하게 정해진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與族孫宗洙 (13)
族孫인 宋宗洙에게 보낸 편지이다. 題主를 고쳐 쓰고 제사를 모시는 일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이다.
答宋聖安-欽文 (13)
宋欽文에게 답한 편지이다. 집안에 책을 읽는 데 뜻을 둔 이가 드문데 책을 읽으려 하고 힘을 기울이는 모습에 감탄하였다며 면려하는 내용이다.
答宋聖安 (14)
宋欽文에게 답한 편지이다. 이미 祝文을 쓴 이후에 單獻할 수 없다는 것 등 祭禮의 절차에 대해 논하는 내용이다.
答族孫翊洙 (14)
族孫인 宋翊洙에게 답한 편지이다. 五服을 成服하기 전에 忌祭를 행할 수 없다는 것 등 祭禮의 절차에 대해 논하는 내용이다.
答族孫翊洙 (14)
族孫인 宋翊洙에게 답한 편지이다. 학문에 진보가 있도록 노력하기를 면려하는 내용이다.
答鄭公實-在褧 (15)
鄭在褧에게 답한 편지이다. 齊衰 3년의 제도 등에 대해 논하는 내용이다 .
答金夢賚-錫弼 (15)
金錫弼에게 답하는 편지이다. 生辰祭에 관해 논하는 내용이다.
答朴宗說 (16)
朴宗說에게 답한 편지이다. 형이 죽은 후 아우가 계승하는 禮를 시행하는 것에 대해 논하는 내용이다.
答朴宗說 (16)
朴宗說에게 답한 편지이다. 天命이 부여된 처음으로써 논한다면 치우침과 온전함이 없지만, 사람과 동물이 품수받은 이후로써 본다면 치우침과 온점함이 있으니, 치우침과 온전함이 같지 않음은 氣가 국한되어서 理의 본연이 아니라고 하며, 氣局에 대해 논하는 내용이다.
答朴希德 (17)
朴希德에게 답한 편지이다. 이이의 후사에 대해 논하는 내용이다.
答鄭▣▣ (17)
鄭某에게 답한 편지이다. 禫祭가 祥月 중에 있을 경우의 祭禮에 관해 상의하는 내용이다.
答▣▣▣ (17)
某氏에게 답한 편지이다. 祭禮의 여러 조목에 관해 논하는 내용이다.
答鄭▣▣ (19)
鄭某에게 답한 편지이다. 奔喪과 小祥의 차서에 관한 變禮를 논하는 내용이다.
答▣▣▣ (19)
某氏에게 답한 편지이다. 庶孫이 承統者가 되는 것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이다.
答崔慶祺 (20)
崔慶祺에게 답한 내용이다. 金長生(1548∼1631)의 禮學을 논하는 내용이다.
答▣▣▣ (20)
某氏에게 답한 편지이다. 祭禮의 복식 등에 관해 논하는 내용이다.
答▣▣▣ (21)
某氏에게 답한 편지이다. 신주를 고쳐 쓰는 일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이다.
答南瑩 (21)
南瑩에게 답한 편지이다. 부모의 下棺 후 妻喪을 당하였을 경우의 變禮에 관해 상의하는 내용이다.
答宋景任-震圭 (22)
宋震圭에게 답한 편지이다. 자신 집안의 喪 중 祭祀에 관한 禮는 이이의 설을 따르고 있어서 김장생의 설과 약간 다름이 있으나 失禮가 아니라는 의견을 밝히는 내용이다.
答或人 (22)
或人에게 답한 편지이다. 아들이 죽어 喪을 주관할 남자가 없을 경우 아내가 주관할 수 있다는 것 등 變禮에 관해 논하는 내용이다.
答或人 (23)
或人에게 답한 편지이다. ‘利成’은 제사를 마친다는 뜻이라는 것 등 질문에 답하는 내용이다.
答朴馨材 (24)
朴馨材에게 답한 편지이다. 祔廟 시에 신주를 入廟하는 문제에 관해 상의하는 내용이다.
答黃有中 (24)
黃有中에게 답한 편지이다. 出後者의 喪服에 관해 상의하는 내용이다.
答閔琦顯 (24)
閔琦顯에게 답한 편지이다. 모친의 葬禮 전에 父喪을 당하였을 경우의 禮에 관해 상의하는 내용이다.
答高尙義 (25)
高尙義에게 답한 편지이다. 신주를 쓸 때 告辭하는 문제를 상의하는 내용이다.
答琴汝聖-舜孝 (25)
琴舜孝에게 답한 편지이다. 신주를 埋安하는 禮에 관해 상의하는 내용이다.
答崔璨夫-瀅 (25)
崔瀅에게 답한 편지이다. 喪 중의 服制에 관해 의논하는 내용이다.
答李▣▣-學修 (26)
李學修에게 답한 편지이다. 禫祭는 吉祭이므로 喪服을 입어서는 안 된다는 것 등 禮의 조목에 관해 토론하는 내용이다.
答尹▣▣-夏成 (26)
尹夏成에게 답한 편지이다. 후사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그 전에 죽었을 경우의 후사 문제를 상의하는 내용이다.
答金燾鉉 (27)
金燾鉉에게 답한 편지이다. 庶子가 적통을 이었을 경우 私親의 喪服에 관해 의논하는 내용이다.
答鄭▣▣-潞 (28)
鄭潞에게 답한 편지이다. 遷葬에 관해 상의하는 내용이다.
答姜▣▣-勉會 (29)
姜勉會에게 답한 편지이다. 閏月에 제사를 지내는 문제를 상의하는 내용이다.
答韓▣▣-永湜 (29)
韓永湜에게 답한 편지이다. 宗家의 后者가 되었을 경우 生祖母를 삼년상 지내는 문제에 관해 상의하는 내용이다.
答宋季贒-欽學 (29)
宋欽學에게 답한 편지이다. 父喪 중에 母喪을 당하였을 경우 등 다양한 경우의 禮에 관해 논하는 내용이다.
答咸大衡 (30)
咸大衡에게 답한 편지이다. 제례에 술 대신 차를 사용하는 것에 관해 상의하는 내용이다.
答或人 (30)
或人에게 답한 편지이다. 『朱子語類』 중 余正父가 물은 ‘立春祭先祖’의 先祖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다.
答具鳳周 (31)
具鳳周에게 답한 편지이다. 格物致知에 대해 논하는 내용이다.
答▣▣▣ (31)
某氏에게 답한 편지이다. 마음이 있은 연후에 눈과 귀가 보고 들을 수 있고 손과 발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이므로, 보고 들음을 눈과 귀의 마음이라 할 수 없고 움직임을 손과 발의 마음이라 할 수 없다는 것 등 질문에 대해 항목별로 답하는 내용이다.
答或人 (32)
或人에게 답한 편지이다. 誠과 敬의 의미에 대해 논하는 내용이다.
答鮮于杰 (32)
鮮于杰에게 답한 편지이다. 明德이 心인지 性인지를 논하는 등 『大學』에 관해 설명하는 내용이다.
答▣▣▣ (34)
某氏에게 답한 편지이다. 『近思錄』에 관한 질문에 항목별로 답하는 내용이다.
答新安祠儒生 (35)
新安祠의 儒生들에게 답한 편지이다. 朱子를 追尊 奉祀하는 문제를 상의하는 내용이다.
答宗晦祠儒生 (36)
宗晦祠의 儒生들에게 답한 편지이다. 宋國澤(1597∼1659)을 배향하는 문제를 상의하는 내용이다.
答草江書院儒生 (36)
草江書院의 儒生들에게 답한 편지이다. 사당을 건립하는 일에 급급하지 말 것을 조언하는 내용이다.
答鎭岑道會儒生 (37)
鎭岑道會의 儒生들에게 답한 편지이다. 사당을 세워 權尙夏(1641∼1721)를 배향하는 일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이다.
答報恩儒生 (38)
報恩鄕校의 儒生들에게 답한 편지이다. 『尤菴門人錄』을 간인하는 것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이다.
答湖南儒生 (38)
湖南의 儒生들에게 답한 편지이다. 宋煥箕 (1728∼1807)를 배향하는 일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이다.
答沃川鄕校儒生 (39)
沃川鄕校의 儒生들에게 답한 편지이다. 校宮의 일에 간섭하여 正道를 잃는 것에 대해 경계하는 내용이다.
答華陽書院儒生 (39)
華陽書院의 儒生들에게 답한 편지이다. 因山․卒哭 후에 享祀하는 문제를 상의하는 내용이다.
答和順儒生崔舜龍等 (40)
崔舜龍 등 和順의 儒生들에게 답한 편지이다. 신종황제의 神位를 軍中에 봉안하는 문제를 상의하는 내용이다.
答李東圭 (40)
李東圭에게 답한 편지이다. 부인의 묘에 단을 세우고 표석을 새기는 형식에 관하여 상의하는 내용이다.
答洪州儒生 (40)
洪州의 儒生들에게 답한 편지이다. 時祭를 지내는 날짜에 대해 상의하는 내용이다.
答子欽成 (41)
아들인 宋欽成에게 답한 아홉 통의 안부편지이다.
答孫騏洙 (44)
손자인 宋騏洙에게 답한 두 통의 안부편지이다.
答孫晩洙 (45)
손자인 宋晩洙에게 답한 두 통의 안부편지이다.


卷五
水北亭詩集序 (1)
金興國(1557∼1623)의 『水北亭詩集』에 붙인 序文이다. 文藝를 숭상했을 뿐 아니라 直諫을 서슴지 않았고, 廢母의 의론이 일자 관직을 버리고 楊州로 돌아갔다고 하면서 충직함을 기리고 있다.
芝峯實記序 (2)
李邈光(1563∼1628)이 入朝한 顚末을 약술한 『芝峯實記』에 붙인 서문이다.
雪汀集序 (3)
조선 후기의 문신이 李原의 『雪汀集』에 붙인 서문이다. 經書를 좋아하여 文意를 정밀히 강구하였으므로 글에 근본이 있다는 선친의 평을 인용하고 있다.
晉州鄭氏族譜序 (4)
晉州 鄭氏의 族譜를 重刊함에 붙인 서문이다.
牧村遺稿序 (5)
金光億의 『牧村遺稿』에 붙인 서문이다. 治心과 修身의 방법에 대한 서술이 많은데, 스스로 경계하고 남을 면려한 것의 뜻이 깊고 말이 간곡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感發케 한다고 평하고 있다.
草洞八賢行錄序 (6)
폐모론에 반대했던 李惟謹과 張以吉․鄭詳․柳澍(1568∼1639)․崔希說(1596∼1667)․李彥詳․柳溵․崔四勿의 8인의 언행을 적은 『草洞八賢行錄』에 붙인 서문이다.
養浩堂實記序 (7)
麗末의 忠賢이었던 禹倬(1263∼1342)의 『養浩堂實記』에 붙인 서문이다.
竹川集重刊序 (8)
朴光前(1526∼1597)의 『竹川集』을 중간하며 붙인 서문이다.
全州崔氏族譜序 (9)
全州 崔氏의 族譜에 붙인 서문이다.
遯壑實蹟序 (10)
宋慶元(1419∼1510)의 행적을 기록한 『遯壑實蹟』에 붙인 서문이다. 송경원은 金時習(1435∼1493)과 南孝溫(1454∼1492)의 절친한 벗으로서, 음사로 말관을 지내다가 단종의 사사로 은거하였으니, 生六臣 외 生六臣으로 불릴 만하고 평하고 있다.
滄浪高公實蹟序 (11)
高敬履(1559∼1609)의 행적을 기록한 「實蹟」에 붙인 서문이다.
南平文氏族譜序 (12)
南平 文氏의 族譜에 붙인 서문이다.
西湖忠烈錄序 (13)
왜구가 晉州를 함락할 때 수성하다가 전사한 宋悌와 송제의 조카로서 여진족과의 싸움에서 순절한 宋德馹의 충절을 기록한 『西湖忠烈錄』에 붙인 서문이다.
守拙齋柳公-和-遺稿序 (15)
柳和의 『守拙齋遺稿』에 붙인 서문이다. 詩文의 聲調에 격조와 힘이 있다고 평하고 있다.
三塘集序 (15)
金瑛(1475∼1528)의 『三塘集』에 붙인 서문이다. 문장에 무게가 있으면서도 섬세하며, 특히 상소는 바른 견해와 적확한 표현으로 백관으로 하여금 우러르게 할 만하다고 평하고 있다.
孝子雲溪申公實蹟序 (16)
雲溪 申公의 후손이 申公의 효행을 담은 「實蹟」을 간인함에 붙인 서문이다.
谷山韓氏族譜序 (17)
谷山 韓氏의 족보에 붙인 서문이다.
伴梅堂詩集序 (18)
『伴梅堂詩集』에 붙인 서문이다. 伴梅堂은 沈壽寅이 강론하던 곳인데, 매화의 淸高함은 군자의 貞操를 닮았고 매화의 暗香은 幽人의 潛德을 닮아 그 뜻을 취한 것이라 한다.
河東鄭氏族譜序 (19)
河東 鄭氏의 족보에 붙인 서문이다.
翠巖遺稿序 (20)
蔡河徵의 『翠巖遺稿』에 붙인 서문이다. 상소에는 의리의 용맹함이 있고, 시문에는 격조가 있다고 평하고 있다.
西齋實記序 (21)
단종이 죽자 산 속에 들어가 숨어 지내다, 10년 뒤에 찾아냈으나 항상 술에 취해 대성통곡하였다는 宋侃의 『西齋實記』에 붙인 서문이다.
槐山三綱錄序 (22)
尹鑑烈이 槐山郡의 忠․孝․烈을 기록한 『槐山三綱錄』에 붙인 서문이다.
耕隱實記序 (23)
田祿生(1318∼1375)의 행실을 기록한 『耕隱實記』에 붙인 서문이다.
四佳黃公遺蹟序 (24)
黃居中의 『四佳遺蹟』에 붙인 서문이다.
徐素菴詩集序 (25)
鰲村에 기거할 때 함께 교유하던 徐素菴의 시집에 붙인 서문이다. 사람됨은 존경할 만하고 그의 시는 전할 만하다고 평하고 있다.
懶齋序 (26)
黃仁欽의 懶齋에 붙인 서문이다.
久菴事實序 (27)
韓百謙(1552∼1615)의 행적을 기록한 『久菴事實』에 붙인 서문이다. 행실이 돈독하고 학문이 심오하였다고 평하고 있다.
咸陽吳氏族譜序 (28)
咸陽 吳氏의 족보에 붙인 서문이다.
魯溪李公-荄-遺稿序 (29)
李荄의 詩․疏․書․雜著 등을 실은 『魯溪遺稿』에 붙인 서문이다.
晩默堂集序 (30)
李景茂의 詩․祭文․四六文及․科體 등을 실은 『晩默堂集』에 붙인 서문이다.
中和齋姜公事蹟序 (30)
中和齋 姜公의 효자로서의 면목을 알 수 있는 「事蹟」에 붙인 서문이다.
茂松庾氏族譜序 (32)
茂松 庾氏의 족보에 붙인 서문이다.
六後稧重修序 (33)
管城의 六後稧를 重修함에 붙인 서문이다.
喚醒菴遺稿序 (33)
陳克純의 『喚醒菴遺稿』에 붙인 서문이다. 「自省錄」에서 그의 進德의 실질을 볼 수 있는데, 말이 매우 간절하여 후진들에게 더욱 경계가 될 만하다고 평하고 있다.
坡州牧使金公年譜序 (34)
故 坡州牧使 金公의 「年譜」에 붙인 서문이다. 金長生이 조카이다.
義士贈大司憲李公-述原-實蹟序 (35)
李述原(1679∼1728)의 「實蹟」에 붙인 서문이다.
四禮正變序 (36)
金景游가 四禮의 발달과정을 저술한 『四禮正變』에 붙인 서문이다.
全州李氏族譜序 (37)
全州 李氏의 족보에 붙인 서문이다.
萬頃盧氏族譜序 (38)
萬頃 盧氏의 족보에 붙인 서문이다.
恩津世稿序 (39)
宋時烈의 당숙부인 長洲公 宋廷祚(1568∼1631)와 雲岳公, 四佳公 三世의 유고를 합본한 『恩津世稿』에 붙인 서문이다. 송정조의 시집에 송시열이 序하면서 ‘고기 한 점으로 솥 전체의 맛을 알 수 있으니 시가 사람만 못하다’고 한 것에서 공의 사람됨을 알 수 있으며, 雲岳公의 ‘送燕行’ 몇 수에서 인욕을 막아 심신을 엄숙하게 뜻을 볼 수 있고, 四佳公의 ‘窩說’은 경계하여 살피고 흥기시키는 바가 있다고 평하고 있다.
栗翁遺稿序 (40)
宋徵(1564∼1643)의 『栗翁遺稿』에 붙인 서문이다. 義의 마땅히 행해야 할 바에 대해서는 곧바로 나아가 빼앗기지 않았으므로 朴光一(1655∼1723)은 그를 ‘銀山의 鐵壁’이라 불렀다 한다.


卷六
盤谷書社記 (1)
송시열 문하의 許璜瑩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盤谷書社에 붙인 記文이다.
淸塵堂重建記 (2)
1728년의 반란군을 토벌한 후 淸州에 세운 병영인 淸塵堂을 중건하면서 붙인 기문이다.
安東金氏㫌閭重建記 (3)
金休의 장남인 金益精(?∼1436)과 5대손인 金師俊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㫌閭를 중건하면서 붙인 기문이다.
沃川郡滄洲書院重修記 (4)
沃川郡의 滄洲書院이 세워진지 이백 년이 지나 重修하면서 붙인 기문이다.
燕歧縣鳳巖書院入德齋重建記 (5)
燕歧縣에 있는 鳳巖書院의 入德齋를 중건하면서 붙인 기문이다.
采薇亭重修記 (6)
生六臣을 배향하기 위해 세운 采薇亭을 중수하면서 붙인 기문이다. 백이․숙제의 고사를 따라 그 이름을 지었다 한다.
寶山精舍重修記 (7)
寶山精舍를 중수하면서 붙인 기문이다.
忠莊公禹-尙中-雙㫌閭記 (8)
李适(1587∼1624)의 난으로 인조가 피난하여 한강에 이르렀을 때, 강을 헤엄쳐 건너 南岸에 있던 배를 가져와, 선전관으로서 왕을 호종한 禹尙中을 기리기 위해 세운 㫌閭에 붙인 기문이다.
孝子羅公㫌閭記 (10)
羅漢明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㫌閭에 붙인 기문이다. 8대조인 羅應參, 7대조인 羅表에게도 㫌閭가 있으며, 5대조인 羅安世와 부친인 羅綜 등도 모두 효행으로 알려져 三世八孝로 불린다고 한다.
農學堂記 (11)
宋榮載가 華山의 芝谷에 세워놓고 밭갈고 글을 읽었다는 農學堂에 붙인 기문이다. 宋煥箕(1728∼1807)가 편액의 ‘農學’이라는 두 글자를 써주었다고 한다.
菊堂遺稿跋 (12)
朴興生(1374∼1446)의 『菊堂遺稿』에 붙인 跋文이다.
道統千字跋 (13)
李任道가 천자문이 소략한 것을 걱정하여 천자문에 이어서 익힐 千字를 정리한 『道統千字』에 붙인 발문이다.
書孺人淸風金氏行狀後 (13)
金鍾秀(1728∼1799)의 딸이며 徐耆輔의 모친인 孺人 金氏의 행장에 붙인 발문이다.
松齋集跋 (14)
羅世纘(1498∼1551)의 『松齋集』에 붙인 발문이다. 수양의 두터움과 기개가 보이는 듯하며, 李滉(1501∼1570)과 金麟厚(1510∼1560)가 그를 칭찬한 데에 이유가 있다고 평하고 있다.
復姓安東金氏族譜跋 (15)
復姓한 安東 金氏의 族譜에 붙인 발문이다.
書忠毅金公-文起-遺事後 (16)
金文起(1399∼1456)의 遺事에 붙인 발문이다. 그의 절개는 사육신과 다름이 없다고 평하고 있다.
思齊實記跋 (16)
安處順(1492∼1534)의 『思齊實記』에 붙인 발문이다. 趙光祖(1482∼1519)와 함께 교유하였는데, 무리를 위하는 마음은 크지만 성내는 바가 적어 己卯士禍 때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書少尹趙公事蹟後 (17)
趙淸老의 事蹟에 붙인 발문이다. 사육신과 절개를 함께 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은 사육신이 사육신일 수 있었던 것이 그때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죽었기 때문임을 알지 못한다고 한탄하고 있다.
四事堂李公家所藏尤菴簡牘帖跋 (18)
四事堂 李公이 함께 교유한 宋時烈로부터 받은 편지를 모은 簡牘帖에 붙인 발문이다.
書孺人全氏家狀後 (19)
孺人 尹光演의 家狀에 붙인 발문이다.
書全州崔氏先世誌狀後 (20)
全州 崔氏의 先世인 고려 말의 崔瀁(1351∼1424)에서부터 그의 증손인 崔湜과 최식의 아들인 崔應參까지의 誌狀에 붙인 발문이다. 최양은 鄭夢周의 누이의 아들로서 정몽주에게 배웠는데 조선에서 끝까지 신하를 칭하지 않을 만큼 절개가 높았다 한다.
斗南朴公所受師門簡牘跋 (21)
朴世經이 스승인 송시열로부터 받은 편지를 모은 簡牘帖에 붙인 발문이다.
書朴氏世蹟後 (22)
密陽 朴氏의 世蹟에 붙인 발문이다. 朴增榮(1464∼1493)과 그의 아들 朴薰(1484∼1540)이 가장 顯達하였다고 한다.
書宋氏家藏岳武穆精忠錄後 (23)
宋侃의 玄孫인 宋純禮의 『精忠錄』에 붙인 발문이다. 누차에 걸쳐 戰功을 세웠고 어려서부터 효행이 독실하여 親喪을 당하자 몇 리나 떨어진 묘소에서 추위나 더위나 비바람에도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곡을 하였다고 한다.
書雲谷朴公遺事後 (23)
朴曾孫의 遺事에 붙인 발문이다. 朴安信(1369∼1447)의 방계 후손이고 朴世熹(1491∼?)에게 사사하였으며, 趙光祖(1482∼1519)가 칭찬한 인물이라 한다.
書權護軍所受尤翁大字帖後 (24)
權後重이 송시열로부터 받은 ‘君子存心當如靑天白日’이라는 글의 字帖에 붙인 발문이다.
書語孟字義辨後 (25)
李任道가 지은 『語孟字義辨』에 붙인 발문이다. 일본인인 伊藤維禎이 지은 『語孟字義』이 臆說로서 대부분 잘못되어 있음을 辨證하였다 한다.
書磻溪․松巖二韓公實蹟後 (25)
韓應箕와 韓應南 형제의 행적을 기록한 『實蹟』에 붙인 발문이다.
尙志崔公遺事跋 (27)
崔霮의 遺事에 붙인 발문이다.
木瓜翁實蹟跋 (28)
朴種의 實蹟에 붙인 발문이다. 임진왜란 때 校任을 맡고 있었는데, 왜구가 쳐들어오자 聖廟의 位版이 적의 손에 더럽혀질 수 없다고 하며 校宮에 들어가 位版과 祭器를 땅에 묻어 안전하게 지켜냈다고 한다.
眉谷朴公遺事跋 (29)
朴溥源의 遺事에 붙인 발문이다. 朴承健(1609∼1667)의 증손으로 효행이 독실했다고 한다.
五倫事實帖跋 (30)
『五倫事實帖』에 붙인 발문이다. 타인의 손에 流落되어 존재를 알지 못하다가 容齋公의 10대손인 李壽煕가 발견하였으며, 송시열의 발문이 붙어있다고 한다.
書菊圃趙公行錄後 (31)
金履安(1722∼1791)의 문인이었던 菊圃公의 行錄에 그의 아들인 趙榮敎의 부탁으로 붙인 발문이다.
書玉村世稿後 (31)
李涵의 가계에 대한 世稿에 붙인 발문이다. 선조는 慶州의 世家로 尙州에 거했다고 한다.
書道谷趙公行錄後 (32)
趙益道의 行錄에 붙인 발문이다. 忠孝의 偉人이라고 한다.
靜一堂集跋 (34)
尹明直의 內子인 孺人 姜氏의 所著인 『靜一堂集』에 붙인 발문이다.
書學生梁公行狀後 (35)
儒生 梁翼天의 行狀에 붙인 발문이다.
書晉州姜氏世稿後 (36)
士人 姜泰錫 가계의 世稿에 붙인 발문이다. 東湖公은 勳績이 뛰어났고 逍遙堂은 志節이 고상하였으며, 新安公은 德業이 두터웠다고 한다.
活溪集跋 (36)
李大(由+己)의 詩文集인 『活溪集』에 붙인 발문이다. 性情의 바름에 대해 깊이 깨달은 바가 있다고 평하고 있다.
書忠壯公諸將軍家乘後 (37)
임진왜란 때 순국한 諸沫(?∼1592)의 家乘을 기록한 후 붙인 발문이다. 제말의 6대 손 諸景彧(?∼1812)은 홍경래의 난 때 힘써 싸우다 전사하였으니 忠義의 전함을 잃지 않았다고 평하고 있다.
書全生錫正所藏尤菴筆蹟後 (40)
宋穉圭와 오래도록 교유하였던 全汝方이 소장한 송시열의 筆蹟에 붙인 발문이다.
書副摠管邊公實蹟後 (40)
邊忠範의 實蹟을 기록한 후 붙인 발문이다. 斥和를 주장하였으며 烈士라 불릴 만하다고 평하고 있다. 그의 부친 忠壯公은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趙憲(1544∼1592)․高敬命(1533∼1592)과 함께 순국하였다고 한다.
百千齋說 (41)
韓公翰의 讀書室에 百千齋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쓴 글이다. 『中庸』의 ‘己百己千’에서 면려하고 경계하는 뜻을 취한 것이라고 한다.
循齋說 (41)
趙秀而의 마을에 있는 書齋에 循齋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쓴 글이다.
申相䄷名字說 (42)
申國老의 아들인 䄷의 이름에 붙인 글이다. 䄷은 120근을 의미하는 것으로 厚重의 뜻을 주로 하며 겸하여 積累의 뜻을 지니고 있으니, 申氏의 世德을 잇는 일의 重大함을 알아 노력을 積累할 것을 면려하고 있다.
栗圃精舍說 (43)
成忠兼으로부터 선조인 華隱公의 遺址에 있는 精舍에 ‘栗圃’라 편액하기 위한 글씨를 부탁받은 후 쓴 글이다.
讀書說 (44)
琴永叟가 예물을 가지고 배움을 청해온 것에 대해 사례로 쓴 글이다. ① 『大學』에 讀書法이 상세하게 갖추어져 있으니 다른 데서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 ② 독서란 그것으로써 修身하는 것인데, 학업을 닦는 자가 영리에 급급하여 기송에만 힘쓰고 성현이 입언한 뜻을 궁구하지 않는다면 책은 책이고 나는 나여서 心身에 얻는 바가 없게 된다는 것, ③ 程子가 말하기를 문자를 볼 때에는 먼저 그 文義를 깨달은 연후에 그 의미를 구하여야 한다고 했으니, 이것이 초학자가 마땅히 알아야 할 바라는 것, ④ 암송하며 묵묵히 생각하기를 반복하면서, 입에 붙지 않으면 입에 붙게 하고 전체를 꿰지 못하면 전체를 꿰게 하여, 이미 통틀어 꿸 수 있으면 곧 무르익게 된다는 것, ⑤ 朱子가 사람들에게 독서를 가르칠 때에는 바르게 音讀하되, 급박하지 않게 천천히 하여 글자마다 분명하게 하고, 많이 읽을 것을 탐내지 말라고 경계하였으니, 이것에 종사하면 얻는 바가 있게 된다는 것 등의 내용이다.
二墨贈琴家二童子說 (45)
琴永叟 집안의 두 아이들인 晳과 吉에 관한 이야기이다. 晳과 吉은 한 살 터울의 형제로 형이 동생의 영민함보다 못하여 함께 배우고 있으나 동생인 석이 앞서 있었다. 길을 살펴보니 나이가 많은데도 뒤처지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이에 영민한 것도 아낄 만하지만 부끄러움을 아는 것도 기뻐할 만한 것이니, 학업의 성취와 성취하지 못함은 부지런함과 그렇지 않음에 달려있으며 부끄러움을 알면 분발할 것이고 분발하면 반드시 부지런히 할 것이고 부지런히 하면 성취할 것이라고 하며, 면려하는 뜻으로 먹을 상으로 주었다고 한다.
勤謹二字說贈族孫翊洙兄弟 (45)
‘勤謹’이라는 글자로써 族孫인 翊洙 兄弟에게 독서를 면려하는 글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勤謹’이라는 두 글자를 따르면 좋은 일이 끝이 없지만 따르지 않는다면 좋지 않은 일이 끝없다고 하였으니, 끝없는 것의 기미는 단지 勤謹을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에 있을 뿐이라는 것, 그런데 따르고 따르지 않는 것은 마음에 달려 있으며 마음을 유지하여 방만하지 않게 하는 방법은 독서만한 것이 없다는 것, 독서하여 성현의 언행을 익히지 않는다면 勤謹의 마땅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 따라서 독서는 勤謹의 근본이라는 것 등의 내용이다.


卷七
沃川龍門影堂奉安性潭先生文 (1)
沃川의 龍門影堂에 송시열의 5대손인 宋煥箕(1728∼1807)를 奉安하며 올린 祝文이다.
知禮興禮祠奉安尤菴先生文 (1)
知禮의 興禮祠에 송시열(1607∼1689)을 제사지내며 올린 축문이다.
懷仁興仁祠尤菴影幀改摹奉安告文 (2)
懷仁 興仁祠에 있는 송시열의 影幀을 고쳐 그리고 봉안하며 올린 축문이다.
興仁祠奉安性潭先生文 (2)
興仁祠에 송환기를 봉안하며 올린 축문이다.
鎭岑栗里祠四賢春秋享祝文 (3)
鎭岑의 栗里祠에서 白蓮堂 閔公․申翊隆(?∼1657)․申曼(1620∼1669)․李蓬根(1668∼1730)의 春秋祭를 지내며 올린 축문이다.
栗里祠追享趙近水鄭竆村申晦谷三贒文 (3)
栗里祠에 趙錫馨(1598∼1656)․鄭纘輝(1652∼1723)․申愈를 追享하며 올린 축문이다.
延豐源泉祠告直齋李先生文 (5)
延豐의 源泉祠에 李箕洪(1641∼1708)을 追享하며 올린 축문이다.
源泉祠追享醉石鄭公文 (6)
源泉祠에 醉石 鄭公을 追享하며 올린 축문이다. 鄭澔(1648∼1736)의 후사를 이었으며 權尙夏(1641∼1721)의 문인으로, 父師로부터 송시열의 연원을 이었다고 한다.
尙州道川社春秋享祝文 (6)
尙州의 道川社에서 春秋祭를 지내며 黃七峯․申晩隱․黃愚谷에게 올린 축문이다.
永同金氏世德祠追享金十淸金鶴洲二公文 (7)
永同의 世德祠에 金世弼(1473∼1533)과 金弘郁(1602∼1654)을 추향하며 올린 축문이다.
尙州東華社祀成東郭成華隱文 (8)
尙州의 東華社에서 成東郭과 成華隱의 춘추제를 지내며 올린 축문이다.
安東竣德祠祀法川柳川二姜公文 (8)
安東의 竣德祠에서 姜始煥과 姜瀚을 제사지내며 올린 축문이다.
竢德祠抱翁鄭公春秋享祝文 (9)
竢德祠에서 鄭瀁(1600∼1668)의 춘추제를 지내며 올린 축문이다.
報恩屛山書院圃隱靜菴兩先生腏享時並告五先生文 (9)
報恩의 屛山書院에 鄭夢周(1337∼1392)와 趙光祖(1482∼1519)를 腏享할 때 올린 축문이다.
報恩金華祠奉安曺南冥․成大谷․成東洲三賢文 (10)
報恩의 金華祠에 曺植(1501∼1572)․成運(1497∼1579)․成悌元을 奉安하며 올린 축문이다.
公州歧湖書社厖村黃公春秋享祝文 (11)
公州의 歧湖書社에서 黃喜(1363∼1452)의 춘추제를 지내며 올린 축문이다.
公州萬壽洞延平李忠定公春秋享祝文 (11)
公州의 萬壽洞에서 李貴(1557∼1633)의 춘추제를 지내며 올린 축문이다.
木川崇明祠春秋享祝文 (11)
木川의 崇明祠에서 춘추제를 지내며 올린 축문이다.
金堤龜巖祠春秋享祝文 (12)
金堤의 龜巖祠에서 鄭弘溟(1592∼1650)과 黃居中의 춘추제를 지내며 올린 축문이다.
永同花巖書院追配兩賢春秋享祝文 (12)
永同의 花巖書院에 追配한 朴興生(1374∼1446)과 張義賢의 춘추제를 지내며 올린 축문이다.
全州湖山影堂奉安兩先生文 (12)
全州의 湖山影堂에 정몽주와 송시열을 봉안하며 올린 축문이다.
光陽鳳陽祠朴訒齋復享文 (13)
光陽의 鳳陽祠에서 출향하였던 朴祥(1474∼1530)을 복향하며 올린 축문이다.
告子婦申氏墓文 (14)
며느리 申氏의 묘소에 고하는 축문이다.
家廟焚黃告文 (14)
家廟에서 焚黃禮를 행하며 올린 축문이다.
祭過齋金先生文 (15), 祭再從叔性潭先生文 (16), 祭李伯仁-守中-文 (17), 祭庶三從弟麟圭文 (18), 祭金進士-正廉-文 (18), 祭宋敬承-翼圭-文 (19), 祭宋稽文-欽書-文 (20), 祭金系祖-在忠-文 (21), 祭族兄僉樞-得圭-文 (22), 祭宋聖襄-欽奭-文 (23), 祭琴汝聖-舜孝-文 (24), 祭金景心-秉淵-文 (25), 祭金內之-在精-文 (25), 祭庶從叔-煥履-文 (26), 祭亡弟學圭文 (27), 祭亡室金氏文 (28), 祭子婦申氏文 (29), 祭弟婦李氏文 (30)
세상에 뜻을 두었으나 竆厄을 당하여 大任을 맡지 못하였고 강직한 기품을 받았으나 나이는 도리어 인색하였던 스승 金正默(1739∼1799), 순수한 자질로 학문에 전일하였던 再從叔 宋煥箕(1728∼1807), 학업에 뜻을 두어 경전에 몰두하였고 특히 禮書에 힘을 쏟아 吉凶常變에도 여유롭게 대응하였던 友人 李守中, 따뜻하고 선량한 자질을 지녔던 庶三從弟 宋麟圭, 마음가짐이 忠厚하고 일처리에 縝密하였던 進士 金正廉, 一歲 뒤에 태어나 형제간이 붕우와 같아 두 마음에 표리가 없이 서로를 비추었던 族兄 宋翼圭, 孝友에 있어서 미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던 族姪 宋欽書, 청명한 자질로 효심이 돈독하였으나 젊은 나이에 병이 들어 요절한 金在忠, 仁恕의 자질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었던 族兄 宋得圭(1752-1827), 族姪인 宋欽奭, 돈독한 우정을 쌓았던 友人 琴舜孝, 독서하여도 체인하지 못하면 『四書』를 반복하여 복습하여 그 뜻을 궁구하였다는 金秉淵, 중후한 자질과 온화한 성정을 지녔으며 피붙이와 같은 우정을 나누었던 金在精, 송치규가 그를 가까이 두고 아침저녁으로 왕래하기 위해 鰲村으로 이사하였던 庶從叔 宋煥履, 마음 씀이 인자하고 두터웠던 아우 宋學圭(?∼1794), 부인 金氏, 며느리 申氏, 弟婦 李氏에 대한 祭文이다.
海州石潭聽溪堂石井銘 (31)
海州 高山九曲 중 石潭의 聽溪堂에 있는 石井에 붙인 銘이다.
石潭念修齋銘 (31)
李侯가 海州의 石潭에 있는 옛 건물을 고치고 방 한 간을 늘려 후인들을 가르치던 念修齋에 붙인 銘이다.
性菴銘-爲金斗一作 (32)
金斗一을 위하여 지은 銘이다. 人性의 선함은 凡聖에 다를 바가 없다는 내용이다.
讀書銘-爲韓公翰作 (32)
韓季鷹을 위하여 지은 銘이다. 공부의 진척은 부지런함과 게으름에 달려있을 뿐이니, ‘讀書’라는 두 글자로 스스로 경계할 것을 면려하는 내용이다.
苟夫巢橧銘 (32)
鄭耋이 杜門讀書하던 苟夫巢橧에 붙인 銘이다.

卷八
紹賢書院廟庭碑 (1)
紹賢書院의 廟庭碑이다. 海州의 高山九曲은 이이가 薖軸하던 곳으로 東方의 武夷라 불리는데, 第五曲인 石潭에 武夷大隱이라는 이름으로 精舍를 지어 문하의 제자들과 강론하고 토론하던 곳이라는 것 등의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學堂金公遺墟碑 (3)
高麗檢校 金休가 기거하던 곳의 遺墟碑이다. 全義縣 동쪽 雲住山 아래에 있는 學堂洞에 비석을 세워 그 遺墟를 표시하며 그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松崖朴公遺墟碑 (4)
朴汝龍(1541∼1611)이 기거하던 松崖의 遺墟碑이다. 石潭九曲 중 第四曲에 해당하며 이곳에 건물을 짓고 松崖로 自號하였다는 것 등을 기록하고 있다.
彰忠祠事蹟碑 (5)
彰忠祠의 事蹟碑이다. 嶺南에서 鄭希亮(?∼1728) 등이 난을 일으켜 居昌에 도달했을 때 역도들을 제압한 후 고을 사람들이 縣司 옆에 처음 彰忠祠를 세웠다는 것, 뒤에 동쪽의 開封里 龍涵山 아래로 옮겨 세우고 贈都憲 李述原(1679∼1728)과 贈承旨 愼溟翊(1676∼1728)를 배향했다는 것, 邑吏인 愼錫顯,克終,德顯,致勤,光世 역시 공을 세워 忠義에 귀천이 없음을 보였으니 마땅히 제향해야 한다는 것 등의 내용을 祠庭에 비석을 세워 기록하고 있다.
鳳陽祠事蹟碑 (7)
鳳陽祠의 事蹟碑이다. 湖南의 光陽에는 서원이 없었는데 知縣 鄭淑男이 사당을 세워 鄕賢인 崔山斗(1483∼1536)와 朴世煦(1493∼1550)를 제사지내기 시작했다는 것 등 봉양사의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月塘崔公遺墟碑 (8)
崔霮의 遺墟에 세운 遺墟碑이다. 全州 南門 밖 鉢山의 남쪽 玉流洞에 있으며, 최담은 崔德之(1384∼1455)의 아버지이다.
龜淵書院事蹟碑 (10)
龜淵書院의 事蹟碑이다. 安義縣 북쪽 猿鶴洞에 위치하고 있으며, 愼權․成彭年(1540∼1594)․愼守彝를 배향하고 있다는 것 등의 사적을 기록하고 있다.
逸翁崔公神道碑銘 (12)
崔希亮(1560∼1651)의 神道碑銘이다. 할아버지는 英陵參奉 崔瀛이고 아버지는 濟用監正 崔樂竆이며 어머니는 金攀의 딸이다. 임진왜란 때 李舜臣(1545∼1598)을 도와 공을 세운 일 등을 기록하고 있다.
愛勤堂趙公守墓遺墟碑 (15)
趙秀彬의 守墓遺墟碑이다. 아버지는 趙泰衍이고 어머니는 淸州 李氏이다. 자질이 남달라 7세에 소학을 배울 때에는 愛敬의 도리를 묻고 따라 행할 줄 알았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병환에 필요한 약초를 엄동설한 중에 채집하여 왔고, 상을 당했을 때는 이미 60이 넘은 나이에도 삼년동안 여막에 살며 곡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昌平縣令李公墓碣銘 (16), 湖城君李公墓碣銘 (19), 崔烈士墓碣銘 (22), 成均生員林公墓碣銘 (24), 孤山全公墓碣銘 (26), 副摠管贈兵曹判書申公墓碣銘 (27), 學生閔君墓碣銘 (31),
송시열과 우애가 두터웠던 李尙逸(1600∼1674)의 동생인 李尙達(1606∼1664), 德源君 曙의 曾孫인 李柱(?∼1594), 정유재란 때에 金德洽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수차례에 걸쳐 왜적을 격퇴하다 전사한 烈士 崔澳, 조광조가 죽은 이후에 杜門한 채 세상을 마쳐 세간에서 己卯完人이라 불린 成均生員 林檜(1454∼1532), 趙憲(1544∼1592)의 문하이며 孝友와 節義로서 조헌의 奬許를 받은 全渫(1563∼1609), 申崇謙(?∼927)의 후손으로서 무관이면서 유학에도 밝았던 副摠管 申命仁(1650∼1735), 兩試에 합격한 후 요절한 儒生 閔鍾天(1771∼1795)의 墓碣銘이다.
養新齋申公墓誌銘 (32), 成均生員孟公墓誌銘 (38), 學生琴君墓誌 (41), 澹窩申公墓誌銘 (42)
『大學』과 『中庸』에 가장 힘을 기울였고 김장생과 송시열을 가장 숭상하였다는 養新齋 申晫(1749∼1822), 「朱子封事」와 이이의 『聖學輯要』 등에 전력하였으며 西學이 번성하는 것을 깊이 염려하엿던 成均 生員 孟性淳(1760∼1827), 자질이 순후하고 심지가 바르며 文藝에 뛰어났던 儒生 琴錫老(1796∼1830), 강치규의 어머니인 平山 申氏의 從兄인 申㬨(1734∼1793)의 墓誌銘이다.

卷九
打愚李先生墓表 (1)
李翔(1620∼1690)의 墓表이다. 형조참의‧우윤‧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禮訟에서 許積(1610∼1680)을 탄핵하다 실세하기도 하였으며, 尹鑴(1617∼1680)를 볼 때는 똑바로 보지 않고 불길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학문에 있어서는 『대학』을 기본으로 하여 窮格을 先務로 여겼으나 知行은 마땅히 병진해야 하며 涵養이 窮理에 앞선다고 여겼다.
石谷先生宋公墓表 (5)
宋尙敏(1626∼1679)의 墓表이다. 趙大妃의 복제 문제로 송시열이 유배되자 그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다고 한다.
參奉贈參判鄭公墓表 (6)
鄭澈(1536년∼1593)의 후손인 鄭櫓의 墓表이다.
學生徐君墓表 (10)
儒生 徐德哉(1778∼1825)의 墓表이다. 아버지는 徐有秉이고, 어머니는 李惟年의 딸이다. 徐有秉의 동생 徐有守를 出后하였는데 后妣인 金鍾秀(1728∼1799)의 딸을 위해 孝를 다했다고 한다.
鍾巖鄭公墓表 (11)
鄭汝昌(1450∼1504)의 후손인 鄭德濟의 墓表이다. 아버지는 鄭鎭華이고 어머니는 晉山 姜氏이다.
樹谷柳公墓表 (14)
柳泰亨(1568∼1642)의 墓表이다. 아버지는 柳德新이고, 어머니는 吳夐齡의 딸이다. 김장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김장생이 그를 橫渠의 資禀을 지녔다고 평했다 한다.
學生宋公墓表 (16)
儒生 宋輝大(1732∼1798)의 묘표이다. 아버지는 宋周相이고 어머니는 李端蒙의 딸이다. 孝友篤行이라 칭하고 있다.
持平崔公墓表 (17)
崔道源(1373∼1441)의 묘표이다. 아버지는 崔卜麟, 어머니는 姜得封의 딸이다. 戶曹佐郞과 刑曹佐郞, 司憲府持平을 역임하였다.
通德郞金公墓表 (18)
金履逸(1708∼1760)의 묘표이다. 아버지는 金宜鍊이고 어머니는 郭希益의 딸이다. 3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繼母인 張氏에게 효성을 다했다고 한다.
李亮汝墓表 (21)
友人인 李亮汝(1779∼1819)의 묘표이다. 아버지는 李敬淑이고 어머니는 林德樑의 딸이다. 병이 깊어도 학문을 폐하지 않을 정도로 뜻이 돈독하였다고 한다.
成均進士金公墓表 (23)
成均 進士 金樂恒(1730∼1803)의 묘표이다. 아버지는 金履逸이고 어머니는 姜錫泰의 딸이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의복에 비단을 사용하지 않고 음식에도 고기를 적게 넣었으며, 自守가 돈독하였다고 한다.
默齋崔公墓表 (26)
崔活의 묘표이다. 아버지는 崔繼成으로 그 형이 弼成과 함께 㫌孝의 은전을 입었는데 그 일이 『三綱錄』에 실려 있으며, 孝友의 가문에서 태어나 행실이 돈독하고 학문이 심오하였다고 한다.
成均生員鄭公墓表 (27)
成均 生員 鄭晳耆(1743∼1819)의 묘표이다. 아버지는 鄭漢明이고 어머니는 慶州 金氏인데, 정한명의 再從兄인 鄭漢宗이 생부라 한다. 생부가 병이 났을 때 省試를 염두에 두지 않고 간호하였는데 생부가 문과에 오르면 차도가 있을 것이라 하자 생원시에 응하여 합격했다고 한다.
學生洪公墓表 (28)
洪以烈(1747∼1807)의 묘표이다. 아버지는 洪益楨이고 어머니는 朴胄天의 딸이다. 효행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通德郞朴公墓表 (30)
朴基宬(1752∼1788)의 묘표이다. 아버지는 吏曹參判을 지낸 朴光昊이며 어머니는 金裕昆의 딸이다. 淸貧한 생활을 하며 학문에 힘썼다고 한다.
四事堂李公墓表 (32)
李天培(1621∼1695)의 묘표이다. 아버지는 吏曹參判을 지낸 李爀이며 어머니는 鄭文龍의 딸이다. 송시열과 교유하며 여러 편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허여함이 돈독하였다고 한다. 舊表가 있으나 오래되어 읽을 수 없어 다시 지은 것이다.
副摠管許公墓表 (33)
許東岦(1601∼1662)의 묘표이다. 아버지는 軍資監正을 지내고 戶曹參判으로 증직된 許玵이며 어머니는 李喜益의 딸이다. 세간에서 關西五虎將의 한 사람으로 불린다고 한다.
處士房公墓表 (35)
處士 房濬璨(1747∼1808)의 묘표이다. 아버지는 房震玄이고 어머니는 金益章의 딸이다. 宋煥箕(1728∼1807)의 문하로서 자질이 순후하고 마음이 굳건하여 선생이 매우 아꼈다고 한다.
成均生員安公墓表 (37)
成均 生員 安琝(1682∼1742)의 묘표이다. 아버지는 安後綺이고 어머니는 李雲摶의 딸이다. 명문가의 자제로 문장과 행실이 아름다웠고 사후 백년이 지난 후에도 孝友로서 고을 사람들에게 칭송받고 있다고 한다.
掌樂院正贈都承旨崔公墓表 (39)
掌樂院正 贈都承旨 崔慶會(1529∼1601)의 묘표이다. 아버지는 領議政으로 증직된 崔天符이고 어머니는 林鐵恭의 딸이다. 임진왜란 때 호남의 節義로서 공을 세웠으며 세간에서 晉陽三壯士 중 한 사람으로 불린다고 한다.
贈承旨李公墓表 (41)
李希淵(1599∼1669)의 묘표이다. 李穡(1328∼1396)의 후손으로, 從叔인 李德洙(1577∼1645)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겸손하고 삼가는 태도로 매우 아낌을 받았다고 한다. 承旨로 증직되었다.
逝水軒金公墓表 (43)
金應斗(1492∼1552)의 묘표이다. 아버지는 金俊이고 어머니는 鄭衍의 딸이다. 忠淸都事․古阜郡守․密陽府使 등을 역임하였는데, 정사가 너그러웠고 민심을 거스르지 않도록 힘썼다고 한다.
三洲崔公墓表 (45)
崔希說(1596∼1667)의 묘표이다. 아버지는 崔樂竆이고 어머니는 金攀의 딸이다. 겉모습은 魁偉하였으나 성품은 온화하였다고 한다. 東西 分黨으로 벼슬을 버리고 草洞의 七賢과 함께 寶山 아래에 精舍를 짓고 학문을 강구하고 토론하였다고 한다.

卷十
西歸李公墓表 (1), 平壤庶尹趙公墓表 (3), 蒼坡鄭公墓表 (5), 忠烈鄭公墓表 (7), 斗南朴公墓表 (10), 學生朴君墓表 (12), 學生金公墓表 (14), 成均進士吳公墓表 (16), 懶齋具公墓表 (18), 默齋居士辛公墓表 (21), 參奉李公墓表(22), 學生沈公墓表(23), 晩翠軒孟公墓表 (25), 水鏡齋琴公墓表 (27), 贈掌樂正潘公墓表 (29), 不慍齋韓公墓表 (30), 學生金君墓表 (32), 贈承旨全公墓表 (34), 贈承旨李公墓表 (35), 華山鄭公墓表 (37), 五代祖同知府君墓表 (40), 蟠松安公墓表 (42)
李穡(1328∼1396)의 11대손인 李起浡(1602∼1662), 과거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自守함에 흔들림이 없었던 平壤庶尹 趙鎭明, 鄭逑(1543∼1620)의 7대손이며 鄭蓍의 아버지로 洪景來(1771∼1812)와 李希濟가 난을 일으키자 아들 정시에게 죽을 각오로 대항하도록 가르쳤으며 스스로도 적의 칼을 맞고도 꾸짖음을 멈추지 않았던 鄭魯(1751∼1811), 鄭魯의 아들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때 명이 다하기 전에는 적에게 항복할 수 없다며 그들의 대역무도함을 꾸짖다가 칼에 맞아 죽은 鄭蓍(1768∼1811), 송시열의 門下인 朴世經(1626∼1686), 평생 『中庸』을 즐겨 읽은 儒生 朴禎一, 효심이 두터웠던 儒生 金履相(1724∼1785), 義德窩에 거하며 德을 숭상하고 義를 즐겨 宋煥箕(1728∼1807) 등의 신임을 얻고 過齋 金正默(1739∼1799)과 깊이 교유한 成均 進士 吳宗漢(1739∼1810), 어질면서도 천수를 누린 具始元(1670∼1752), 淳厚한 품성을 지니고 孝友가 돈독하였던 辛薰(1700∼1784), 李穀(1298∼1351)의 후손인 參奉 李惟善(1547∼1619), 謹厚한 성품을 지닌 儒生 沈東喆(1713∼1756), 成均館典籍․禮曹佐郞․司諫院正言․獻納․司憲府掌令․執義․吏曹正郞을 역임한 孟欽圭(1735∼1811), 송시열의 문하인 琴鳳儀(1668∼1697), 문장과 경학에 뛰어난 潘潤時(1626∼1705),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스스로 죄인으로 자처하며 어머니께 효성을 다한 韓用浩(1615∼1699), 지극한 효행으로 이름난 儒生 金孟壽(1747∼1828), 淸貧으로 이름난 全命元(1629∼1713), 1589년 鄭汝立(1546∼1589)의 모반사건이 일어났을 때 잔당의 수사에 앞장섰던 李至道(1549∼1618), 송환기의 문하로서 文行으로 이름난 鄭奎漢, 송치규의 5대조인 宋基泰(1629∼1711), 이이가 石潭에 기거할 때 연장자이면서도 제자의 예를 갖추었던 安琠(1513∼ 1592)에 대한 墓表이다.


卷十一
從曾祖不諼堂府君墓表 (1), 愚谷黃公墓表 (2), 參奉李公墓表 (4), 晩悟金公墓表 (6), 贈吏曹參議具公墓表 (7), 通德郞朴公墓表 (11), 學生朴公墓表 (12), 學生李公墓表 (14), 學生鄭公墓表 (15), 贈參判宋公墓表 (17), 山堂崔公墓表 (19)
宋時烈(1607∼1689)의 曾孫인 從曾祖 宋一源(1664∼1713), 嶺南人으로서 당파를 초월하여 栗・牛 兩賢의 문묘종사를 적극 주장한 黃尙中(1619∼1680), 李珥(1536∼1584)의 맏형 李璿의 둘째 아들 參奉 李景恒(1565∼1629), 光海君 집권시기와 丙子胡亂을 겪으며 지조와 절개를 지킨 金汲(1591∼1643), 己卯名賢 가운데 한 사람인 具壽福의 5代孫 具鳳羽(1612∼1681), 栗谷先生의 垂訓을 실천하여 모범이 된 朴荿(1705∼1772), 지인 朴鎭恒의 曾祖인 儒生 朴泰元(1732∼1810), 孝友와 學藝가 뛰어난 儒生 李奎祖(1746∼1821), 강직하고 의로운 성품의 儒生 鄭志泰(1752∼1793), 지극한 孝行으로 이름난 宋麒瑞(1720∼1803), 金宏弼(1454∼1504)의 門人으로 학문과 재주가 뛰어난 崔忠成(1458∼1491) 등에 대한 墓表이다.
判尹贈左贊成密川君朴公諡狀 (20)
都承旨를 지낸 朴崇元(1532∼1593)의 諡狀이다. 본관은 密陽, 字는 尙初이다. 아버지는 郡守를 지낸 朴蘭이고, 어머니는 全州 李氏이다. 壬辰倭亂 때 殉國을 맹세하고 宣祖를 扈從하여 寶劍을 하사받은 일 등 일생의 행적을 적고 있다.
府使贈判書閔公諡狀 (23)
閔汝儉(1564∼1627)의 諡狀이다. 본관은 驪興, 字는 宗禮, 號는 雲村‧雲谷이다. 아버지는 郡守를 지낸 閔思容이고, 어머니는 光州 金氏이다. 光海君 때 承文院에 들어가 權臣인 李爾瞻(1560∼1623)과 대립하여 파직당하고 10년 동안 벼슬에서 물러난 일 등 일생의 행적을 적고 있다.
眞靜齋金公行狀 (27)
金德運(1687∼1767)의 行狀이다. 본관은 慶州, 字는 得甫, 號는 眞靜齋이다. 아버지는 宋時烈・宋浚吉(1606∼1672)의 門人인 金重錫이고, 어머니는 咸平 李氏이다. 金氏의 내력을 여러 史書에서 고증하여 세대별 名과 字, 관직이력 등을 기록한 『東崖諺樂府』를 저술한 일 등 일생의 행적을 적고 있다.
湖隱申公行狀 (33)
申光集(1738∼1809)의 行狀이다. 본관은 平山, 字는 士協, 號는 湖隱이다. 아버지는 生員 申曗, 어머니는 順興安氏이다. 『小學』과 『擊蒙要訣』에 입각하여 學問과 실천에 힘쓴 일 등 일생의 행적을 적고 있다.
竹梧堂金公行狀 (42)
金鍵(1505∼1576)의 行狀이다. 본관은 瑞興, 字는 公啓, 號는 竹梧堂이다. 아버지는 副司正을 지낸 金愉이고, 어머니는 淸州 韓氏이다. 일생의 學問과 德行을 적고 있다.

卷十二
同樞李公行狀 (1)
李命源(1745∼1832)의 行狀이다. 본관은 延安, 字는 元明이다. 아버지는 宗簿寺直長을 지낸 李煕輔이고, 어머니는 靑松 沈氏이다. 빈한한 환경 속에서 극진히 부모를 봉양한 일 등 일생의 행적을 적고 있다.
棄隱奇公行狀 (7)
奇義獻(1587∼1653)의 行狀이다. 본관은 幸州, 字는 士直, 號는 棄隱이다. 아버지는 副司果를 지낸 奇孝芬이고, 어머니는 咸平 李氏이다. 丁卯・丙子胡亂 때 의병을 규합하여 투쟁한 일 등 일생의 행적을 적고 있다.
鰲川金公行狀 (9)
金景壽(1543∼1621)의 行狀이다. 본관은 蔚山, 字는 伯亨, 號는 鰲川이다. 아버지는 都事를 지낸 金應井이고, 어머니는 玉川 趙氏이다. 壬辰倭亂 때 의병을 모집하여 항쟁한 일 등 일생의 행적을 적고 있다.
水使贈刑曹判書李公行狀 (13)
李止孝(1553∼1613)의 行狀이다. 본관은 咸平, 字는 仲純이다. 아버지는 大邱府使와 知製誥를 지낸 李惟謹이고, 어머니는 玄風 郭氏이다. 光海君의 悖政에 대해 항거하다가 獄死한 일 등 일생의 행적을 적고 있다.
介石軒李公行狀 (17)
李弘稷(1705∼1796)의 行狀이다. 본관은 咸平, 字는 季長, 號는 介石軒이다. 아버지는 進士 李俊林이고, 어머니는 茂松 庾氏이다. 宋時烈과 대립한 尹拯(1629∼1714)에 대해 人倫과 義理를 거슬렀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일 등 일생의 행적을 적고 있다.
成均進士鄭公行狀 (30)
松江 鄭澈의 5代孫인 鄭就河(1691∼1759)의 行狀이다. 본관은 迎日, 字는 會源, 號는 易齋이다. 아버지는 金昌翕(1653∼1722)과 막역한 사이였던 谷口 鄭濈이다. 韓元震(1682∼1751)이 東賢의 道統으로 李珥와 宋時烈만을 지목한 것을 비판하고 金長生(1548∼1631)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일 등 일생의 행적을 적고 있다.
疎軒李公行狀 (33)
李宗烈(1739∼1817)의 行狀이다. 본관은 全州, 字는 英叔, 號는 疎軒이다. 아버지는 迓慶堂 李楔이고, 어머니는 晉州 鄭氏이다. 李珥와 宋時烈이 朱熹(1130∼1200)의 적통이라는 관점에서 南人의 許穆(1595∼1682)과 小論의 尹拯을 비판한 일 등 일생의 행적을 적고 있다.
徐汲齋申君行狀 (38)
申在應(1773∼1815)의 行狀이다. 본관은 平山이고, 字는 時叔이다. 아버지는 生員 申光集이고, 어머니는 德水 李氏이다. 어려서부터 學問에 뜻을 두고 性理說과 禮說 등을 깊이 연구하였으나 불행히 단명하였다는 것 등을 적고 있다.
贈統制使諸公行狀 (45)
諸景彧(1760∼1812)의 行狀이다. 본관은 漆原, 字는 敬植이다. 아버지는 通德郞 諸祥富이고, 어머니는 平山 申氏이다. 洪景來(1771∼1812)의 亂이 일어나자 선봉에 서서 싸우다가 전사한 일 등 일생의 행적을 적고 있다.
繫日堂李君行狀 (49)
門人 李源彙(1779∼1814)의 行狀이다. 본적은 古阜, 字는 仲涵이다. 아버지는 李宗榮이고, 어머니는 韓山 李氏이다. 弱冠이 되기 전부터 鄕鄰과 族黨의 신임을 받은 것, 함께 華陽書院에 참배한 일, 일찍 죽어서 애석하다는 것 등을 적고 있다.
松坡羅公行狀 (51)
羅珏(1574∼1644)의 行狀이다. 본관은 錦城, 字는 連寶, 號는 松坡이다. 아버지는 忠順衛 羅詩男이고, 어머니는 利川 徐氏이다. 丙子胡亂 때 의병을 모집하여 항쟁한 일 등 일생의 행적을 적고 있다.

卷十三
潭谷宋公行狀 (1)
宋周相(1695∼1752)의 行狀이다. 본관은 恩津, 字는 文輔, 號는 潭谷이다. 아버지는 宋達源이고, 어머니는 文化 柳氏이다. 文章과 行誼로 士友들의 존숭을 받았다는 것 등을 적고 있다.
三湖崔公行狀 (5)
崔鳴海(1607∼1650)의 行狀이다. 본관은 海州, 字는 巨源, 號는 三湖이다. 아버지는 宣敎郞 崔光憲이고, 어머니는 羅州 羅氏이다. 丙子胡亂 때 의병을 일으킨 일 등 일생의 행적을 적고 있다.
菊塢金公行狀 (8)
金勉恒(1739∼1818)의 行狀이다. 본관은 善山, 字는 士安, 號는 菊塢이다. 아버지는 金履逸이고, 어머니는 晉州 姜氏이다. 朱子書를 즐겨 읽고 義理를 깊이 깨달았으나, 人物性同異論에 대해서는 先儒의 說에 함부로 부연하는 것이라 하여 배척하였다는 것 등을 적고 있다.
學生宋公行狀 (11)
宋輝普(1729∼1796)의 行狀이다. 본관은 恩津, 字는 景淳이다. 아버지는 宋周相이고, 어머니는 月城 李氏이다. 行誼가 士友들의 모범이 되었다는 것 등을 적고 있다.
僉樞宋公行狀 (14)
宋得圭(1752∼1827)의 行狀이다. 본관은 恩津, 字는 德叟이다. 아버지는 宋輝普이고, 어머니는 密陽 朴氏이다. 조부 宋周相, 부친 宋輝普와 함께 三世에 걸쳐 出仕하지 않았으나 學問과 行誼가 뛰어났다는 것 등을 적고 있다.
玉果縣監魏公行狀 (17)
玉果縣監을 지낸 魏伯珪(1727∼1798)의 行狀이다. 본관은 長興, 字는 子華, 號는 存齋이다. 아버지는 進士 魏文德이고, 어머니는 平海 吳氏이다. 어려서부터 學問을 좋아하여 天文・地理・律曆・卜筮・道佛・兵韜・筭數 등의 서적을 섭렵하였고, 특히 周易과 禮說에 정통하였다고 적고 있다.
學生張公行狀 (23)
張齊甲(1748∼1826)의 行狀이다. 본관은 興德이고, 字는 元初이다. 아버지는 張得善이고, 어머니는 金海 金氏이다. 9세에 부친을 여의고 빈한한 형편으로 인해 失學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고, 재물을 내어 고을의 子弟들이 科擧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한 일 등 일생의 행적을 적고 있다.
孺人趙氏行狀 (27)
孺人 趙氏(1766∼1788)의 行狀이다. 본관은 楊州이다. 아버지는 趙榮穡이고, 어머니는 全州 李氏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成國鎭에게 시집가서는 시부모를 극진히 공경하였으나, 애석하게도 남편이 죽자 다음날 따라죽었다고 적고 있다.
過齋金先生行狀-半藁 (29)
스승 金正默(1739∼1799)의 行狀이다. 본관은 光山, 字는 而運, 號는 過齋이다. 아버지는 迷菴 金偉材이고, 어머니는 坡平 尹氏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嚴正하고 기억력이 뛰어났다는 것, 朱子・李珥・金長生・宋時烈의 性理說과 禮說을 계승하였다는 것, 辛壬獄事의 義理를 규명하는 것이 지금 학자들의 소임이라고 주장한 일 등 일생의 言行과 관직이력을 적고 있다.

卷十四 附錄
賜祭文-憲宗己亥-知製敎李垿製進 (1)
1839. 知製敎 李垿가 憲宗(재위: 1834∼1849)의 명을 받들어 지은 宋穉圭의 祭文이다.
家狀 (2)
아들 宋欽成이 지은 아버지 宋穉圭(1759∼1838)의 家狀이다. 어려서부터 學業에 전심하여 큰 진보가 있어 宗黨의 촉망을 받은 일, 21세 때부터 스승 金正默에게 수업하며 강학과 토론에 힘쓴 일, 평생 朱熹・李珥・宋時烈의 학문을 계승하여 性理學 연구에 전념한 일 등 일생의 행적을 서술하고 있다.
墓誌銘-幷序 (19)
洪直弼(1776∼1852)이 지은 宋穉圭의 墓誌銘이다. 스승 金正默과의 인연, 수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고 나아가지 않은 일, 性理學 연구에 전심한 일 등 일생의 행적을 서술하고 있다.
遺事 (29)
宋穉圭에 대한 遺事이다. 宋如圭, 金在誠, 崔濟默, 손자 宋騏洙 등이 宋穉圭의 성품과 기상, 학문과 언행 등을 서술하고 있다.

卷十五 附錄
世系 (1)
宋穉圭의 世系이다. 恩津 宋氏의 시조 大原으로부터 20世 穉圭를 거쳐 23世 秉善에 이르기까지 宋穉圭의 직계 선조 및 후손의 계보를 정리하고 있다.
年譜 (5)
宋穉圭의 年譜이다. 1759년(영조35)에서 1838년(헌종4)까지 宋穉圭 생애의 주요 사건을 연도순으로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