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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김두봉 평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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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사업]한국학분야 토대연구지원사업
러시아문서보관소 소장 해방후 한국사회 관련 자료의 수집 번역 및 주해 (1945~1950)
서지사항
· 표제어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김두봉 평정서
· 키워드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 대표주제어김두봉
· 설명문김두봉 평정서
· 발신자레베데프
· 자료문의동국대학교팀(연구책임자:박명호 교수)

문서 해제


대표표제어: Характеристика на председателя президиума верховного народного собрания Корейской Народно-Демократической Республики - Ким Ду Бон
산출물명: ЦАМО,ф.142,оп.540936,д.1,лл.52-54.
자료구분: 타이핑
저작권자: 러시아연방 국방성중앙문서보관소
원자료언어: Ким Ду Бон
면수: 3
발신일: 1948.12.25.


번역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김두봉 평정서
1889년에 출생하였다. 서울의 대학에서 수학하였으며, 1913년에 배재대학을 나왔다.
졸업은 하지 않았다. 1910년 서울에서 중학교 학생으로 있을 때 혁명운동에 최초로 참가하기 시작했으며, 반일투쟁활동을 하는 비밀 청년조직원으로 있었다. 일본이 조선을 점령한 후에는 탄압을 피해 북조선의 나남으로 피신했으며, 이후 서울로 돌아와서 1년 동안 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11년부터 1919년까지 문화단체 朝鮮光文會를 지칭한다.
회원으로 있었으며,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조선어와 조선역사를 가르쳤다.
1919년 3월 운동에 참가하였고, 이 때문에 탄압을 피해 상하이로 피신했으며, 그곳에서 ‘신대한신문’을 제작하였다. 1920년에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3년 이 그룹들은 코민테른에 의해 해산되었다(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그 이후 김두봉은 독립당(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다. 독립당 창건 후 1923년까지 그 지도자로 있었다. 당은 일본인들에 대한 테러행동을 조직하였다. 일본군 장군 테간(Теган)에 대한 테러가 있은 후 검거선풍이 불었으며, 김두봉은 난징으로 피신하였다.
1932년부터 1934년까지 대일통일전선동맹 총비서로 있었다.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을 창건하고 1937년까지 그 당원으로 있었다. 중국 중부지방에서 일본인들을 습격했던 것과 관련되어 난징으로 떠났으며, 그 곳에서 중국 군사학교 산하에 조선 지부를 조직하고 철학을 강의하였다. 1938년에는 졸업생들로 팔로군에 소속되어 있는 ‘의용대’ 3개 부대를 조직하였다. 충칭으로 이동하여 󰡔‘의용대’ 지도서(Руководство для ‘смелых’)󰡕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김두봉은 국민당원들의 탄압을 피해 팔로군으로 피신하였으며, ‘조선독립동맹’에 가입하였다. 중국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연안에서 조선인 군사정치학교를 개설하였다.
다수의 저작을 생산하였으며, 조선의 언어와 조선역사에 정통한 자이다.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이후 김두봉은 ‘조선독립동맹’의 지도집단과 함께 북조선으로 왔으며, 이 그룹을 기반으로 신민당을 창건했고, 그 당수가 되었다. 1946년 8월 신민당은 북조선공산당과 합당했으며, 로동당 제1차대회에서 김두봉은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47년 2월 인민회의 제1차 회의에서 북조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동시에 새롭게 설립한 북조선의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이 되었다. 당시 김두봉은 ‘조선임시헌법’ 준비 과정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가 작성한 보고서는 다음의 문건에서 확인가능하다. RG 242, National Archives Collection of Foreign Records Seized, Captured Korean Documents, Doc No. SA 2006, Box 15, Item #39, 󰡔朝鮮臨時憲法 準備에 關한 報告󰡕, 平壤特別市人民委員會 宣傳部, 1947. 12. 10.

조선어와 조선 문헌에 대한 인식 방면의 탁월한 업적 덕분에 1948년 북조선인민위원회 결정에 따라 김두봉에게 교수 및 철학박사 칭호가 수여되었다.
북조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직위에 있으면서 정치 및 국가 활동가로서 현저하게 성장하였다. 조선 인민 모두에게 학자와 혁명가로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커다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조선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아직 매우 정력적이며, 사업능력을 가지고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 분야에는 준비가 부족한 편이다. 좌익적 성향의 조선 정치활동가들, 중도파 및 심지어는 일부 우익 인사들과 많은 친분을 가지고 있는데, 일정한 조건하에서 이러한 친분관계는 정치노선의 이행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투쟁이 격렬하고 험난한 순간에는 우익 측으로 동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국의 식민주의적 정책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이에 맞서 투쟁하고 있다. 소련과 소련의 대조선 정책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북조선 주재 소련민정국장 N. 레베데프(Н. Лебедев) [서명]

1948년 1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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