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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 겸 외무상,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박헌영 평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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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사업]한국학분야 토대연구지원사업
러시아문서보관소 소장 해방후 한국사회 관련 자료의 수집 번역 및 주해 (1945~1950)
서지사항
· 표제어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 겸 외무상,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박헌영 평정서
· 키워드박헌영, 조선공산당, 혁명활동
· 대표주제어박헌영
· 설명문박헌영 평정서
· 발신자레베데프
· 자료문의동국대학교팀(연구책임자:박명호 교수)

문서 해제


대표표제어: Характеристика на вице-премьера и министра иннстранных дел Корейской Народно-Демократической Республики, заместителя председателя ЦК Трудовой Партии Южной Кореи - Пак Хен Иен
산출물명: ЦАМО,ф.142,оп.540936,д.1,лл.5-8.
자료구분: 타이핑
저작권자: 러시아연방 국방성중앙문서보관소
원자료언어: Пак Хен Иен
면수: 4
발신일: 1948.12.25.


번역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 겸 외무상,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박헌영 평정서
1900년에 농민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조선 국적이다.
1945년 8월 15일까지는 지하혁명사업을 수행하였다. 1920년부터 조선공산당 당원이었고, 1929년부터는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소련공산당의 전신이다.
당원이었다. 1946년부터는 남조선로동당 당원이다.
조선에서 중등교육을 받았으며, 1929~1931년에 모스크바에서 레닌과정(Ленинский курс) 국제레닌학교를 의미한다.
을 마쳤다.
중국과 소련 등의 외국에서 거주한 바 있다.
1921~1924년, 1925~1928년, 1933~1939년에 각각 투옥되었다. 혁명활동으로 총 11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1919년 박헌영은 3.1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운동이 진압된 후 1920년 말에 상하이로 갔다.
고려공산당에 가입한 직후에 고려공산청년회 중앙국 비서에 선출되었다. 상하이에서 조선으로 들어오다가 국경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으며, 2년 동안 평양에서 투옥 상태로 있었다.
석방된 후 서울로 이전하여 당시로서는 반합법적이었던 노동운동과 청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5년에 조선공산당이 설립되면서 이와 함께 고려공산청년회가 조직되었고, 다른 공산주의 활동가들과 함께 박헌영도 체포되었다.
1927년 가을 공산주의자들을 대상으로 한 공개법정에서 박헌영은 일본의 제국주의정책과 조선 인민에 대한 압제에 반대하여 열정적으로 연설하였다.
감옥에서 일본인들에게 시달린 박헌영은 정신이상이 생겼고, 이러한 정신질환을 이유로 1928년 7월에 감옥에서 풀려났다.
같은 해에 그는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갔으며, 국제혁명전사원호회(МОПР)의 도움을 받아 치료를 받으러 세바스토폴(Севастополь)로 갔다.
1929년부터 1931년까지 모스크바의 레닌과정에서 학습하였다. 1929년 2월에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에 입당하였고, 1930년 말에는 코민테른 산하 조선 문제에 관한 트로이카 위원이 되었다.
1932년 1월에는 조선공산당의 재건준비사업을 위해 상하이로 파견되었다. 조선어 잡지인 『코뮤니스트(Коммунист)』 발간에 참여하였다.
박헌영은 1933년 7월에 다시 체포되었으며, 1939년까지 감옥에 있었다. 그는 감옥에서 나와 조선에서 공산주의운동을 믿음직하게 수행한 유일한 그룹의 지도자가 되었다. 1941년 이 그룹에 대한 검거가 시작되었지만, 박헌영은 조선 남부로 빠져나갈 수 있었고, 그곳에서 일본이 패망될 때까지 은신하였다.
1945년 8월 18일 서울에 와서, 그 당시 지하와 감옥에서 나온 자기 그룹의 구성원들을 소집하였다. 이 그룹 회의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정치노선을 결정하였고,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기회주의자, 종파주의자 및 극좌주의와 단호하게 투쟁하면서 『해방일보』를 창간하기로 결정하였다.
박헌영은 모든 혁명 조직과 그룹을 단일 정당으로 결집시키는데 성공하였다. 1945년 9월 11일에 박헌영을 필두로 한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선출되었다.
1946년 11월에 남조선로동당이 창건되면서 박헌영은 부위원장에 선출되었지만, 실제로는 그가 당의 지도자였다.
1946년 6월 7일 미군정이 박헌영 체포명령을 내린 뒤, 그는 남조선에서 지하사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혹독한 지하의 환경에서 그는 로동당을 단결시켰고, 미제국주의의 남조선에 대한 식민지적 예속에 반대하는 투쟁에 동원할 수 있었다.
제2차 남북조선 제정당 지도자 협의회가 종료된 후 박헌영은 남조선에서의 조선최고인민회의 선거 실시 지도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관한 사업을 잘 조직하여 수행하였다.
1948년 9월 9일 조선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기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 겸 외무상에 임명되었다.
박헌영은 이론적으로 잘 준비되었고, 조선에서 가장 준비가 잘된 마르크스주의자 가운데 한사람이며,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 분야에서 자기의 지적 수준을 높이는 데 지속적으로 임하고 있다. 전반적인 발전 수준이 높다. 조선의 내부정세를 잘 이해하고 있으며, 국제관계를 충분히 파악하고 있다. 성격은 온화하고, 생활은 검소하다.
의지가 강하고 정직하며 공산주의운동에 충실하다.
박헌영은 북조선과, 특히 남조선에서 광범위한 인민대중과 좌익지도자들, 그리고 심지어는 중도정당 지도자들 사이에서 큰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의 실질적이고 사상적인 지도자이다.
박헌영은 조선의 탁월한 정치활동가이다.
소련에 매우 우호적이다.

북조선 주재 소련민정국장 N. 레베데프(Н. Лебедев) [서명]

1948년 1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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